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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ewell Ewing! We'll Miss You!!!
패트릭 유잉을 회고하며...
(영광과 좌절, 애증으로 가득찬 15년간의 세월)
1985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뉴욕 닉스에 지명된 패트릭 유잉
팀 동료 마크 잭슨(현 토론토 랩터스)와 함께 연습 중인 패트릭 유잉
유잉은 카림 압둘자바에게 새로운 NBA의 빅맨의 탄생을 보여주었다.
1995년 플레이오프 동부지구 결승 7차전 유잉의 마지막 슛. 유잉은 이 슛을 실패했고, 페이서스가 시리즈를 승리했다.
아래 기사는 New York Daily News의 기사를 번역한 것입니다
뉴욕 닉스가 1985년 NBA 드래프트에서 1번픽으로 패트릭 유잉을 선택했을 때, 뉴욕시는 갑자기 그를 7피트의 구원자로 여기며 열렬히 환영하였다. "패트릭! 패트릭!"하는 연호가 메디슨 스퀘어 가든을 가득 메웠고, 한 때 조지타운 대학의 선수로서 뉴욕에서 욕설을 들어야 했던 유잉은 그사실을 알아차렸다.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고 유잉은 1985년 6월18일, 그날 말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난 뉴욕에 오면 보통 야유를 들었다."
15년뒤, 유잉은 시애틀 수퍼소닉스로 떠났고, 환호소리는 훨씬 전에 사라졌다. 지난 2년간은 야유소리가 다시 돌아왔고, 면도날 처럼 날카로운 언론의 헤드라인들은 그를 사정없이 찧어버렸다. 지난 시즌 가든의 관중들은 그가 공을 잡을 때마다 과할정도로 욕설을 퍼부으며 그를 대했다.
그의 장중한 선수경력은 지키지 못한 챔피언십에 대한 공언("시카고에서 봅시다", 그는 1997년 동부지구 준결승 시리즈에서 마이애미와의 7차전 패전 전에 이렇게 말했다)과 실패한 마지막 슛(1995년 동부지구 결승시리즈 7차전에서 인디애나를 상대로)으로 기억되며 마치 그가 제한된 재능으로 프랜차이즈를 종종 이끌어 왔다는 듯이 생각되었다. 유잉은 멀고도 험한 여정 끝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가 처음 뉴욕에 조지타운의 1학년 선수로서 왔을 때 만큼이나 욕을 먹으며 이제는 시애틀로 떠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가 조지타운의 선수였던 시절(1981-1985)동안 뉴욕에서 가장 선호하는 공격대상이었다. 그는 호야스가 세인트 존스 팀과 뉴욕 토박이인 크리스 멀린을 상대로 장대한 대결을 펼쳤다는 사실 만큼이나 그의 과묵하고 위협적인 외모로 인해서 뉴욕시민들로부터 경멸을 당해야만 했다.
대학시절, 유잉은 전국적으로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표적이 되었고,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 팬들은 "유잉은 글씨도 못읽는다"는 포스터를 붙이기도 했다. 코트 위에서 그는 자주 멀린과 티격태격했고, 그들이 4학년일 때는 멀린의 턱을 팔꿈치로 가격하기도 했다. 이런 사실들로 그는 더욱 세인트 존스의 열성팬들에게 사랑 받기는 힘들었다.
뉴욕 시민들은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대학 선수에게 주는 존 우든 상을 멀린이 유잉을 꺾고 수상했을 때, 환호를 보냈지만, 그런 분위기는 닉스가 그해 드래프트에서 1번 픽을 얻음으로써 급반전 되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오직 유잉 뿐. 조지타운을 3번이나 NCAA결승으로 이끈 사나이, 1984년 챔피언싶을 따낸 사나이, 패트릭 유잉.
닉스팀은 1973년 이래로 챔피언십의 냄새도 못맡아봤고, 1984-85시즌을 24승58패로 애틀랜틱 디비젼 꼴찌로 마감했었다. 유잉은 구원자였다.
"패트릭 유잉은 모든 고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감독이었던 허비 브라운든 당시 말했다. "그리고 내가 의미하는 것은 단지 경기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닌 챔피언십을 따내는 것이다."
유잉은 엄청난 것들을 예언했다. "난 경기를 뛴 선수들 중 최고인 선수 중 한명이고 싶다. 그리고 그건 내가 이겼을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유잉은 시작부터 승리했다. 그의 거친 스타일은 곧바로 가든의 팬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뉴욕에서의 첫 해에 시범경기 4경기 동안 항의와 주먹다짐으로 출장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홈 개막전에서 2분간의 기립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유잉은 1985년 '올해의 신인'상에 지명되었고, 향후 14년 동안 각종 기록을 쌓아가며 'NBA 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50인'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는 출장경기 수, 득점, 리바운드, 스틸, 블록슛을 포함한 10개 부문에서 닉스의 팀내 통산 1위로서 팀을 떠났다. 다른 어떤 도시에서라도, 이것은 찬양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뉴욕커들은 챔피언십을 좋아하고, 그들의 스포츠 스타가 화려하고 개방적이길 원한다. 유잉은 어느 것도 주지 못했다.
"그는 챔피언십을 따는 것만 빼고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왔다"고 그의 전 팀동료인 찰스 스미스는 어제 말했다. "그 모든 것을 그의 어깨에 짐지워서는 안된다."
"정말 힘든 도시이다. 다른 곳에서라면 그는 지나치리만큼 찬사받고 있을 것이다."
고담시와 골리앗 사이의 허니문은, 덴버에게 처절한 홈에서의 패배를 당해 팬들이 그의 실제 사이즈만한 포스터를 코트위로 던지게 하며, 그의 2번째 시즌에 끝나버리게 되었다. 유잉은 그만의 독특한 컬러가 되어버리는 무관심으로 대응했다. "난 야유에 익숙하다"고 유잉은 말했다. "여기서는 내가 대학시절 부터 언제나 저래왔다. 야유 따위는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그런 무관심은 1991년 닉스가 경쟁력을 갖춘 팀으로 거듭나려 하지 않는다고 느낀 유잉이 그가 뉴욕에서의 선수생활을 끝내길 원할지도 모른다고 말함으로써 철저한 경멸로 바뀌었다. 유잉은 실제로 자유계약선수가 되기 위해서 중재위원회를 요구했지만, 기각되었다. 닉스의 스타 센터는 트레이드를 요구했지만, 구단장인 데이브 첵켓과 선수관리를 맡은 부사장 어니 그룬펠드가 그에게 그와 팀은 같은 목적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확신시켰다.
"이때가 패트릭이 진정으로 상황이 옳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고 확신하기 시작한 때이다"라고 유잉의 에이전트, 데이빗 포크는 말했다. "패트릭이 사랑받길 원했나? 누가 안그런가? 그러나 문제는 당신이 얼마나 희생할 각오가 되어있고, 그래서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는 것 아닌가?" 유잉에게 있어서 대답은 충분치 않았고, 팬들에게 인정받길 유잉이 거부하자 불스는 닉스를 더욱 격앙시키며 90년대 중반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는 극도로 내성적이고, 사람들은 그들이 응원하는 사람들의 개인적인 면들을 알고싶어 한다"고 스미스는 말했다. "그는 그런 프라이버시를 그 자신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가 그런 부분들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 팬들이 그를 오해하게 된 것이다."
1993년 유잉은 더욱 퉁명스러워졌다. "모두가 제대로 평가받고 싶어한다. 하지만 난 거기에 신경쓰지 않는다. 나의 팀동료들과 가족과 친구들이 나를 인정해준다. 그것이 내게 중요한 것이다."
유잉의 과묵함은 팬들이 더욱 흥미진진해 하는 그의 개인생활에서 드러난 사실들에 대해서 자세한 상황을 알려주지 않았다. 1998년 그와 7년간 부인이었던 리타가 유잉의 닉스의 치어걸과의 염문으로 갈라섰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다. 유잉은 그 사건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그 사건은 입이 무거운 사나이가 무덤까지 갖고 갈 또하나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챔피언십이라면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꿔놓을 수도 있었다. 1994년 챔피언 반지는 그가 맛보기 직전까지 다가왔었다. 그러나 닉스는 3-2이던 화이널이 7차전에서 하킴 올라주원의 라킷츠가 유잉의 타이틀을 채어가 버리며 끝장나 버리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때 이래로, 유잉은 그가 이룩했던 것들 보다 그가 플레이오프에서 해내지 못했던 일들로 더욱 기억될 운명이 될 것처럼 보였다. 1997년, 동부지구 준결승 시리즈 5차전에서 그는 불미스러웠던 찰리 워드와 P.J. 브라운의 난투극 도중 벤치를 떠나 코트로 들어섰다. 유잉은 6차전 출장정지를 당했고, 마이애미가 시리즈를 3-3 동점으로 만들었다. 그는 7차전 전날 기자들에게 "시카고에서들 봅시다"라고 말했다. 닉스는 다음날 떨어졌다.
닉스의 팬들은 또한 페이서스를 상대로한 1995년 동부지구 결승 7차전에서 실패한 그의 핑거롤을 기억한다. 그러나 5차전에서 그가 결승 점프슛으로 시리즈를 연장시켰고, 6차전에서 대단한 활약을 한 사실은 기억하지 못한다.
지난 3시즌 동안, 유잉은 부상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는 1997년 12월 그의 오른 손목을 다쳤고, 플레이오프때까지 복귀하지 못했다. 1998-99시즌, 왼쪽 아킬레스건 파열로 그는 정규시즌 12경기를 출장하지 못했다. 동부지구 결승 2차전에서 그의 아킬레스건이 끊어지자, 그는 후에 공개적으로 팀닥터인 노만 스캇 박사의 진단에 의문을 제기했다.
유잉이 설사 부상을 무릎쓰고 고통 속에서 경기를 했다손 치더라도, 그는 논란거리가 되었다. 닉스가 2000 동부지구 결승에서 유잉이 그의 오른발 부상으로 뛰지 못한 가운데 3, 4차전을 승리하자, 뉴욕의 언론들에서 그의 존재가 닉스에 도움이 되는가 해가 되는가에 대해서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나는 뉴욕에서 경기하는 것을 즐겨왔다"고 지난 12월 유잉은 말했다. "난 이 팀에 나의 모든 것을 바쳐왔다. 난 가슴 속에 모든 경기의 순간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경기를 하면서 따라다닌 다른 모든 것들엔 진절머리가 난다."
이제 그는 떠났다. 그리고 오직 세월만이 1985년 그날 그에게 쏟아졌던 환호가 다시 돌아올 것인가를 알려줄 것이다. "그가 가든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치루게 될 경기에서, 팬들은 예전과는 달리 그를 맞아줄 것이다"라고 스미스는 말했다. "그는 그만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