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스토리] 한신 편-제3회: 四面楚歌로 전쟁의 신이 되다
(사진설명: 한신의 석상)
한신이 손을 펴기 시작하자 천 년의 고사가 만들어졌다. 겉으로는 잔도를 복구하는 척하며 몰래 진창을 건너 손쉽게 관중을 탈취한다는 의미의 ‘명수잔도(明修棧道), 암도진창(暗渡陳倉), 경취관중(輕取關中)’이 바로 그러하다. 촉(蜀)으로 통하는 길은 곳곳에 기암절벽이 막아 서서 옛 사람들은 절벽에 말뚝을 박고 그 뒤에 널을 깔아 통로를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이런 통로를 잔도라 불렀다. 유방은 촉의 땅에 들어서면서 장량의 계책대로 잔도를 불살랐다. 이로써 자신이 촉의 땅을 나와 천하를 다툴 의지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 항우를 미혹시킨 것이다.
그 뒤에 한신은 번쾌(樊噲)와 주발(周勃)을 파견해 허세를 부리며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잔도를 복구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몰래 유방과 함께 대군을 거느리고 지름길로 진창(陳倉)을 기습했다. 신병(神兵)이 하늘에서 내린 듯 유방의 군대가 갑자기 관중에 나타나자 진나라의 세 왕은 미처 손 쓸 사이도 없이 패해 옹왕(雍王) 장한(章邯)은 자살하고 적왕(翟王) 동예(董翳)와 새왕(塞王) 사마흔(司馬欣)은 생포되었다.
나무통을 이용해 강을 건너 안읍을 기습하여 위나라의 땅을 취한다는 의미의 ‘목앵도군(木罃渡軍), 투습안읍(偸襲安邑), 수확위지(收穫魏地)’는 한신의 두 번째 걸작이다. 앵은 목이 좁고 배가 불룩한 항아리를 말하고 아가리를 봉한 항아리의 바닥이 위로 올라오게 밧줄로 묶어서 뗏목의 하단에 장착한 것을 목앵이라 한다. 목앵을 장착한 이런 배는 일반 뗏목보다 두 배가 넘는 군사를 실을 수 있다.
한나라 군대가 황하(黃河)강을 건너 위(魏)를 공격하자 위나라 군사는 황하 임진관(臨晉關) 나루터를 봉쇄했다. 군사를 거느리고 나루터에 이른 한신은 지세를 살펴보고 상류의 하양(夏陽)에서 도강작전을 벌이기로 했다. 그 쪽에 위나라 군사가 적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강해야 하는 군사는 많고 배는 적었다. 한신은 사람들을 시켜 나무를 베어 뗏목을 만들게 하고 항아리를 모아다가 목앵을 만들었다.
한편 한신은 관영(灌嬰)에게 명해 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백 척의 나무배에 올라 임진관 나루터에 대기하게 했다. 위나라 군사는 한나라 군대가 도강을 강행하는 줄 알고 급히 대군을 임진관에 집결시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 사이에 한신과 조참(曺參)은 대군을 거느리고 밤도와 목앵을 하양으로 수송해갔다.
사흘이 지났지만 임진관 맞은 켠에 대기한 한나라 진영에서는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위나라 군사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한신이 벌써 안읍을 점령하고 평양(平陽)을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위 왕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맞은 켠의 군대가 아무런 동정도 없는데 한신이 어디로 강을 건넜단 말이냐?”
위 왕이 급히 방향을 돌려 한나라 군사의 공격을 막으려 하는데 안읍 공격에 성공한 한나라 군대가 하늘을 찌르는 기세로 공격해와 위나라 군대는 전혀 상대가 아니었다. 이 때 임진관 나루터의 관영도 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황하강을 건너 나루터를 점령한 후 평양(平陽)을 공격했다.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위 왕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손을 들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한신의 세 번째 작품은 더욱 두고 두고 회자된다. 바로 배수진을 치고 깃발을 교체해 조의 땅을 취한다는 의미의 ‘배수일전(背水一戰), 발기역치(拔旗易幟), 수확조지(收穫趙地)’이다.
한신이 위의 땅을 수복하고 대(代)나라 군사를 파하자 유방은 기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했다. 유방은 한신의 공이 너무 커서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에게 주었던 정예군사의 지휘권을 회수했다. 하지만 이 때 조(趙) 왕 헐(歇)이 반란을 일으켜 또 한신을 보내 조나라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으나 유방은 한신에게 훈련도 받지 않은 신입병사와 적국에서 항복한 군사를 내주었다.
한신과 장이(張耳)가 군사를 거느리고 조나라로 가려면 반드시 정형관(井陉關)을 지나야 했다. 이에 조 왕 헐과 성안군(成安君) 진여(陳餘)는 20만 대군을 파견해 정형관을 통제했다. 조나라 장군인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左車)가 성안군에게 말했다.
“정형관은 폭이 좁아서 마차 두 대가 나란히 서지 못하고 기마병이 열을 지을 수 없습니다. 멀리서 오는 한나라 군대의 군량을 실은 마차는 필히 제일 뒤에 따라 올 것입니다. 제가 3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오솔길로 질러가서 군량 보급마차를 막을 터니 성안군은 여기 깊은 골짜기에 높은 보루를 쌓고 수비만 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전진도, 후퇴도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퇴각로만 차단하면 군량 보급이 끊어져 열흘 안에 한신과 장이의 목을 벨 수 있을 것입니다.”
성안군 진여가 대꾸했다.
“한신이 수만 명에 달하는 한나라 군사를 거느렸지만 사실 몇 천명에 불과합니다. 약한 군력에 천 리를 행군했기에 군사들은 필히 피곤한 상태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약한 군사도 공격하지 않고 수비만 한다면 후에 강적을 만날 때는 어떻게 대응하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나약한 것을 보면 제후들이 너도나도 우리를 얕볼 것입니다.”
한신은 밀정으로부터 조나라 군대의 상황을 알고 속으로 이좌거의 고명함에 감탄하고 진여의 어리석음을 웃었다. 그는 진여의 집요함으로 인해 이좌거는 재능이 있어도 발휘할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알고 대담하게 전진해 정형관과 30리 거리에 군영을 세웠다.
그리고 한신은 2천명의 경기병을 선발해 한나라 군의 붉은 색 깃발을 주면서 명령했다.
“야밤에 출발해 조나라 군영 근처에 매복해 있다가 조나라 군사가 전부 출동해 군영을 비우면 즉시 조나라 군의 깃발을 뽑아버리고 우리의 깃발을 바꿔 꽂으라.”
이어 한신은 1만 명의 군사를 선발부대로 삼아 군영을 나와 뒤에 강물을 두고 조나라 군대를 마주하고 진을 쳤다. 그 광경을 본 조나라 군은 한나라 군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날이 밝자 한신은 일부 군사를 거느리고 조나라 군대의 보루를 향해 나아갔다. 과연 조나라 군대는 한나라 군사와 싸우려고 전부 출동해서 군영이 텅 비었다. 한나라 군대는 패한 척 퇴각했고 조나라 군대는 그 뒤를 바싹 따라 붙어 점점 더 군영과 멀어졌다. 그러자 조나라 군대의 군영 근처에 매복해 있던 한나라 군사가 쏜살같이 조나라 군영으로 달려 들어가 조나라 군기를 뽑아버리고 한나라 군기를 걸었다.
이와 동시에 퇴각하던 한나라 군대는 강가에 이르자 더는 퇴로가 없어 배수진을 치고 목숨을 내걸고 싸웠다. 하지만 적군은 수가 많고 아군은 적어 두 나라 군대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서로 밀고 당기는 상태가 이어지자 조나라 군사는 잠시 퇴각해서 군영에 돌아가 좀 쉬고 다시 싸우려고 했다. 그런데 머리를 돌려 보니 조나라 군영에서 한나라의 붉은 군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조나라 군사는 군영이 한나라 군사의 기습을 받아 조 왕이 생포된 것이라고 여겨 허둥지둥했다. 그 참에 한나라 군사가 양쪽에서 공격을 들이대 조나라 군사는 크게 패하고 진여는 사살되었으며 조 왕과 이좌거는 생포되었다.
조의 땅을 수복한 후 여러 장군이 한신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병서에는 싸움을 할 때 뒤에 산을 두고 물을 마주해야 한다고 씌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장군은 그 반대로 하셨는데도 이겼습니다. 이는 무슨 이치입니까? ”
한신이 대답했다.
“병법에는 사지에 빠져야 살아 남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이런 병사들은 배수진을 치면 도망갈 길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죽기를 각오하고 용감하게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한신의 대답을 들은 여러 장군은 더욱 한신에게 감탄했다.
날이 밝았으나 한신과 장이는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이 때 갑자기 유방의 사자가 도착해 한신과 장이의 막사로 들이 닥치더니 장군의 인신(印信)과 병부(兵符)를 빼앗았다. 그리고 여러 장군을 모아놓고 다시 군사를 배치했다. 한신과 장이는 유방이 사자로 분장하고 왔다 갔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들 두 사람의 병권을 빼앗은 유방은 장이에게는 조나라 땅을 지키게 하고 한신은 상국(相國)으로 임명한 후 항복한 조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제(齊) 나라를 치러 가게 했다.
임치(臨淄)를 점령한 한신은 제 왕 전광(田廣)을 추격하여 고밀(高密)에 이르렀다. 이 때 항우가 용차(龍且) 장군을 파견해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제나라를 지원하러 왔다. 한신이 지휘하는 한나라 군사와 용차가 지휘하는 제와 초의 연합군이 유수(濰水)강을 사이 두고 대결했다. 두 군대는 모두 신중하게 임해 누구도 먼저 강을 건너 공격을 행하지 않았다.
이튿날 날씨도 유난히 좋았고 유수강은 강바닥이 환히 보일 정도로 맑았다. 이 때 한신이 갑자기 도하명령을 내려 한나라 군사는 강을 건너 공격해왔다. 제와 초의 연합군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만반의 준비를 하며 기다렸다. 하지만 한나라 군사가 금방 강의 중심에 이르자 한신은 갑자기 전진을 중지하고 아군의 진지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것을 본 용차가 제 왕에게 말했다.
“보십시오. 겁쟁이 한신이 중도에서 뒷걸음치고 있습니다. 빨리 추격해야 합니다!”
“한나라 군대가 싸우기도 전에 퇴각하고 그 행렬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데 무슨 꿍꿍이가 있지 않겠소?”
제 왕의 말에 용차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
“남의 가랑이 밑을 지나는 저 겁쟁이를 왜 그렇게 두려워하십니까! 물이 무릎에도 미치지 않으니 지금이 바로 강물을 건너 추격할 때입니다.”
용차의 명령이 떨어지자 제나라와 초나라 연합군은 벌떼처럼 강물에 뛰어들어 한나라 군대를 추격했다. 제나라와 초나라 연합군이 강물의 중심에 이르자 유수 상류의 산악지대에서 갑자기 홍수가 터져 하늘에서 은하수가 쏟아지는 기세로 큰 물이 밀려왔다. 갑작스러운 홍수에 연합군은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뒤죽박죽이 되었으며 싸우기도 전에 많은 군사가 죽었다. 이 때 한 나라 군대가 공격해와 홍수에서 살아 남은 군사 중 태반과 용차 장군이 죽고 제 왕 전광(田廣)은 생포되었다.
원래 한나라 군대가 강물에 들어서서 공격하는 것처럼 보인 것은 한신의 유인계였고 홍수 역시 한신의 걸작이었다. 한신은 야밤에 군사를 보내서 상류에 모래 주머니로 댐을 쌓아 물길을 막고 적군이 강물의 중앙에 이르렀을 때 댐을 허물어 손쉽게 제나라와 초나라 연합군을 격파했던 것이다.
또 큰 공을 세운 한신은 먼 임치에 있었고 이 때 유방은 고릉(固陵)에 발이 묶여 있었다. 그 바람에 유방은 울며 겨자 먹기로 한신을 제 왕으로 책봉하고 구조하러 오라고 명령했다.
한신은 고릉에 이르자마자 여러 갈래의 군사를 지휘해 먼저 십면매복(十面埋伏)의 계책으로 삼 면에서 항우를 포위해 그를 독 안에 든 쥐로 만들고 이어 초나라 군사들이 고향을 그리며 싸움을 싫어하도록 하기 위해 사면초가(四面楚歌)의 계책을 써서 초나라 군사들의 의지와 사기를 동요시켰다. 그리고 한신은 곧 공격을 들이대서 10만에 달하는 초나라 군사를 전멸함으로써 항우는 8백의 측근만 거느리고 포위를 뚫고 나갔으나 결국 오강(烏江)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항우가 죽자 유방은 이 세상 최대의 위협은 백전백승의 한신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두 번째로 또 한신의 인신(印信)과 병부를 빼앗고 초 왕으로 고쳐 봉했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