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퉁그스족>
동쪽은 사할린으로부터 서쪽으로는 예니세이강에 걸치고, 또 북쪽은 야쿠티아자치공화국의 극한(極寒) 툰드라 지대로부터 남쪽으로는 중국 동북(만주) 지방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분포하여 만주-퉁구스어계(語系)의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
일반적으로 만주어파(滿洲語派)의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을 제외하고 퉁구스어파의 각 방언을 사용하는 민족을 퉁구스라고 한다. 많은 그룹이 있는데, 그 중의 시베리아 분파(북방)에는 에벤크 ·라무트 ·네기달 ·솔론이 속하며, 아무르(남방)파에는 나나이(골드) ·올차 ·오로크 ·오로치 ·우데헤 등이 포함된다. 에벤크는 위에 예거한 거의 모든 지역에 걸쳐 조금씩 분포하여 약 4만에 이른다. 싱안링[興安嶺]과 그 부근에 사는 오로촌은 이 그룹의 일부이다. 인종학적으로는 몽골인종에 속하며, 신장은 크지 않고, 두형(頭形)은 단두(短頭) 내지 중두(中頭), 코는 작고 낮으며 광대뼈가 솟아 있다. 눈과 모발은 검거나 암색(暗色)이고 두발은 직모(直毛)이며, 수염과 체모는 적다. 피부는 누런빛을 띠고 있으나 비교적 흰 편이다. 영아의 엉덩이에는 몽골반점이 나타나는 율이 높다. 분포지역의 자연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생활양식의 차이가 있다.
북방의 툰드라에 사는 사람들은 토나카이[馴鹿]를 기르고, 그 고기와 젖을 식용하고 있으며, 가죽은 옷감으로 쓰고 있다. 또한 이 짐승을 탈것으로 이용하거나 썰매를 끌게 하기도 한다. 이런 생활양식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타이가(침엽수림) 지대에 들어가 수렵을 하지만 농경생활은 하지 않는다. 그것은 토나카이의 사료인 이끼류(類)를 찾아서 이동하기 때문이며, 주거에도 원뿔 모양의 간단한 텐트를 이용한다. 야쿠티아와 부랴티야에 인접한 에벤크의 일부는 이미 말 사육으로 업종을 바꾸고 농경을 경영하면서 정주생활(定住生活)로 이행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또한 오호츠크해(海) 연안의 에벤이나 아무르강 ·쑹화강[松花江] 유역의 나나이처럼 어획(漁獲)을 주된 생활수단으로 하면서 개를 가축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회구성의 단위는 부계적 씨족이고, 결혼은 혈연적 외혼제(外婚制)를 따르고 있다.
<물길>
금(金) ·청(淸)나라를 세운 몽골로이드에 속한 남방 퉁구스족(族).
7세기 후반 신라의 삼국통일은 대동강 이남의 고구려 영토를 합치는 데 그쳤으므로 그 이북의 넓은 고구려의 옛 영토는 당(唐)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 지역은 과거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하나, 주민 대부분은 말갈족과 고구려의 유민(遺民)이었다. 말갈은 BC 4세기 무렵 숙신(肅愼)으로, AD 3세기경에는 읍루(獵婁)로, 6세기경에는 물길로 불리다가 7세기에 이르러 말갈로 불렸다. 이들은 뒤에 다시 여진(女眞)이라 호칭하였으며, 이들이 바로 금 ·청왕조를 건설한 종족이다. 이들은 일찍부터 쑹화강[松花江] 연안에 널리 퍼져 살면서 목축과 농업에 종사하였다.
<말갈족>
6∼7세기경 중국 수 ·당 시대에 만주 북동부에서 한반도 북부에 거주한 퉁구스계 민족.
주(周)나라 때에는 숙신(肅愼), 한(漢)나라 때에는 읍루(獵婁)라 불렀다. 본래 쑹화강[松花江] 유역의 물길(勿吉)이 지배하였으나 6세기 중엽 물길의 세력이 약화되자 각 부족들이 자립하였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말갈이라 부른다. 이들 부족 중 대표적인 것은 예맥(濊貊) 계통으로 농업을 주로 하던 속말(粟末), 백산(白山)과 순수 퉁구스계로 수렵에 의존하던 백돌(伯왹) ·불녈(拂涅) ·호실(號室) ·흑수(黑水) ·안차골(安車骨) 등 7개 부족이었다.
그 중에 속말과 백산부족은 고구려에 복속하였다가 고구려가 멸망하자 영주(營州:遼寧省朝陽)로 이주하였고, 후에 발해가 성립되자 대부분의 말갈족이 발해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흑수부족만은 쑹화강과 헤이룽강[黑龍江] 하류 지역에 근거를 두고 발해에 대항하였고 발해 멸망 이후 흑수말갈은 거란에 복속되어 여진(女眞)이라 불렀으며, 그후 생여진(生女眞)과 숙여진(熟女眞)으로 나뉘었다가 생여진은 금(金)나라를 건국시킨 주체가 되었다.
<거란족>
퉁구스족과 몽골족의 혼혈로 형성된 유목민족.
5세기 이래 요하(遼河) 상류인 시라무렌(Siramuren) 유역에서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거주하였는데, 당나라 말기에 통일의 기운이 일어나면서 916년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여러 부족을 통합한 다음 황제를 칭하고 거란을 건국하였다. 이에 물자가 풍부한 중원(中原)으로 진출하기 위해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화북의 연운(燕雲) 16주(州)를 획득, 947년 국호를 요(遼)로 개칭한 다음 계속 남진정책을 실시했으나 960년 송이 건국됨으로써 대치하는 상태가 되었다. 대제국을 형성한 거란은 북쪽의 초원지대와 남쪽의 농경지대로 구분되었기 때문에 이원적 호한분치제도(胡漢分治制度)를 형성하였다.
<여진족>
동부 만주(滿洲)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
여직(女直)이라고도 한다. 이 민족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달라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肅愼), 한(漢)나라 때는 읍루(獵婁), 남북조시대에는 물길(勿吉), 수(隋) ·당(唐)나라 때는 말갈(靺鞨)로 불리었다. 10세기 초 송나라 때 처음으로 여진이라 하여 명나라에서도 그대로 따랐으나, 청나라 때는 만주족이라고 불렀다. 여진족이
한국과 관계를 가진 것은 발해(渤海)가 멸망한 뒤 이들이 그 고토(故土)에 준거한 고려 초기부터이다. 여진족 중에서도 고려와 관계를 가진 것은 고려의 북서부에 있던 압록강 유역 양안(兩岸)의 서여진[西蕃]과 동북의 함경도 지방 일대에 걸쳐 거주한 동여진[東蕃]인데, 고려가 이들 두 곳의 여진과 직접적으로 교섭한 것은 왕건의 북방개척에서 비롯되었다. 고려 초기에 여진은 고려를 상국으로 섬겼고, 고려는 이를 회유하여 무역을 허락하고 귀화인(歸化人)에게는 가옥과 토지를 주어 살게 하였다. 당시 여진인은 활 ·말 ·화살 ·모피 등 전쟁 도구를 조공(朝貢)하고, 의료 ·식량 ·농기구 ·그릇 등 생활필수품을 주로 수입해 갔다.
이와 같은 고려의 회유정책에 의하여 여진과의 관계는 평온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숙종(肅宗) 때 하얼빈[哈爾濱] 지방에서 일어난 완옌부[完顔部] 추장 영가(盈歌)가 여진족을 통합, 북간도(北間島) 지방을 장악한 뒤 두만강까지 진출하였다. 1104년(숙종 9) 영가의 뒤를 이은 조카 우야소[烏雅束]는 더 남하하여 고려에 복속한 여진부락을 경략하였다. 이때 고려에 복속한 여진인으로 완옌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은 무리가 있어 우야소는 이들을 추격, 함경도 정평(定平)의 장성(長城) 부근까지 진출하여 고려군과 충돌하였다. 고려에서는 문하시랑평장사 임간(林幹)을 보내어 우야소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추밀원사 윤관(尹瓘)을 보내 겨우 화맹(和盟)을 맺었다. 이와 같이 두 차례에 걸친 패전으로 정평 ·장성 외의 여진부락은 완옌부의 치하에 들어갔다. 윤관은 숙종에게 패전의 원인을 보고하면서 기병(騎兵)의 양성, 군량(軍糧)의 비축 등을 건의하였으며, 이에 따라 신기군(神騎軍:騎兵) ·신보군(神步軍:보병) ·항마군(降魔軍:승려부대)으로 이루어진 별무반(別武班)을 편성, 특별부대로 훈련시켰다.
1107년(예종 2) 고려는 윤관을 도원수(都元帥)로,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하여 군사 17만을 동원, 함흥평야 일대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북청(北靑)까지 진출하여 함주(咸州)를 중심으로 9성(九城)을 쌓았다. 또한 남방의 민호(民戶)를 옮겨 9성에 이주시켰으며, 특히 길주성(吉州城) 안에 호국인왕사(護國仁王寺)와 진국보제사(鎭國普濟寺)를 창건하고 개경으로 개선하였다. 그러나 9성을 쌓은 뒤 이의 방어 자체도 어려웠고 또 여진족이 9성을 돌려달라고 애원하여 9성을 쌓은 지 만 1년 만에 여진족에게 돌려 주었다. 그 뒤 아구다[阿骨打]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1115년 국호를 금(金)이라 칭하고, 1117년 고려에 형제관계를 요구하여 왔고, 1125년 요(遼)를 멸망시킨 뒤에는 고려에 사대(事大)의 예를 강요할 뿐만 아니라 송나라와의 교류에도 간섭하였다. 당시 집권자 이자겸(李資謙)과 경주파 문신(文臣)은 금나라와 타협함으로써 이후 고려의 북방개척정책은 일시 좌절되었다. 1234년 금나라가 몽고에 멸망하자 여진족은 만주지방에서 부족단위로 할거하였고, 원(元) ·명(明) 교체 이후에는 압록강 ·두만강 연안에서 빈번히 소란을 피웠다.
고려를 이은 조선 초기의 대여진정책은 회유와 무력의 양면정책을 썼다. 회유정책으로는 귀순을 장려하여 관직 ·토지 ·주택을 주어 귀순자를 우대하였다. 1406년(태종 6)에는 함경도 경성(鏡城)과 경원(鏡源)에 무역소를 설치하고 조공무역(朝貢貿易) 및 국경무역을 허락하였으며, 한양에는 이들의 사신(使臣)을 접대하는 북평관(北平館)까지 설치하였다. 당시 여진은 말 ·모피 등의 토산물을 바치고, 식량 ·의복재료 ·농기구 ·종이 등을 교환해 갔다. 한편, 무력정책으로는 국경지방에 진보(鎭堡)를 설치하여 전략촌으로 바꾸어 방비를 강화하였고, 복속하지 않는 여진족의 본거지를 토벌하였다.
태조는 경원에 성보(城堡)와 주(州) ·군(郡)과 역참(驛站)을 두었다. 1403년(태종 3)에는 강계부(江界府), 1414년에는 여연군(閭延郡)을 두어 여진의 준동에 대처하였다. 세종은 4군(郡) ·6진(鎭)을 개척하여 압록강에서 두만강에 이르는 연안선을 확보하고 여기에 삼남(三南) 사람을 이주시켰다. 세조 때는 남이(南怡) ·어유소(魚有沼) 등이 압록강변의 여진을 토벌[丁亥西征]하였고, 신숙주(申叔舟)는 회령(會寧) 부근의 여진을 축출하고 모련위(毛憐衛) 여진족의 근거지를 토벌[庚辰北征]한 뒤 하삼도(下三道) 백성 l만을 이주시켰다.
1479년(성종 10)에는 서북 방면의 건주위(建州衛) 여진족이 침입하여 도원수 윤필상(尹弼商)이 이를 격퇴하였고, 1491년에는 동북 방면의 여진추장 우디거[兀狄哈] 부족이 회령의 조산보(造山堡)에 침입하여 도원수 허종(許琮)이 이를 물리치는 등 여진족은 조선의 북변에서 크고 작은 소란을 피웠다. 그 뒤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국력이 차차 쇠약해지자 이 틈을 타 여진족은 세력을 확장해 나가다가, 1616년(광해군 8) 여진의 추장 누루하치[奴兒哈赤]가 선양[瀋陽]에 후금(後金)을 세우고 1627년(인조 5)에는 정묘호란, 1636년에는 병자호란으로써 조선을 정복, 그 뒤 조선은 청나라에 조공하게 되었다.
<만주족>
중국 북동지방 만주지역에 거주하는 퉁구스계의 민족.
퉁구스족 중에서도 청조(淸朝)를 세우고 그 지배층이 된 남방(南方) 퉁구스족에 속한다. 역사상 나타나 있는 숙신(肅愼) ·읍루(獵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女眞) 등은 만주족의 전신(前身) 또는 같은 계통의 종족이다. 형질(形質)은 몽골로이드계로서 키는 비교적 작고 단두형(短頭型)이 특징이다. 만주라는 명칭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문수의 음(音)이 전화한 만주(曼珠→滿住)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명대(明代)의 여진인의 수장(首長) 중에는 문수(文殊:滿住)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적지 않았다.
만주족의 사회는 1920년대, 30년대까지 모쿤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부계적 씨족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모쿤은 어느 한 남자를 시조로 하는 5대에서 9대 정도까지의 부계친(父系親)과 그들의 아내로 구성되며, 그 성원은 비교적 근접하여 생활하고, 씨족장(氏族長)에 의하여 통솔되어 가벼운 범죄나 민사사건은 내부에서 처리되었다. 또, 이 조직은 샤머니즘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발해>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 동부·연해주·한반도 북부에 있던 나라(698∼926년).
발해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舊唐書)》 발해말갈전과 《신당서(新唐書)》 발해전에 전하는데, 모두 발해를 말갈의 나라라고 기록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발해를 신라와 이웃한 나라로 여겼을 뿐 한국사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이 발해사를 우리 역사라고 주장한 이래 그것을 한국사에 포함시키는 것을 당연시하였다.
최근에는 통일신라와 발해가 병존한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668년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2만 8000여 가호를 중국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大祚榮:뒤의 고왕)도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과 함께 요서지방의 영주(營州:조양)로 옮겼다.
당시 영주는 당이 북동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운영한 전략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696년 5월 마침내 거란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僚)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틈을 타서 대조영은 고구려유민·말갈인과 함께 영주를 빠져나와 만주 동부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대조영은 추격해오는 당군을 천문령(天門嶺)싸움에서 크게 무찌른 뒤에 만주 동부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698년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동모산(東牟山:육정산) 기슭에 진국(震國:振國)을 세웠다.
현재 남아 있는 오동산성(敖東山城)과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이 바로 그 유적지이다. 당은 발해의 건국이 기정사실이 되고, 게다가 요서지역에 대한 돌궐(突厥)·거란·해(奚) 등의 압력으로 요하유역과 만주일대에 대한 지배가 사실상 어려워지자, 705년 사신을 보내 발해의 건국을 인정하였다. 더구나 713년에는 대조영에게 발해군공(渤海郡公)이라는 관작을 수여하였는데, 이로부터 나라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다. 발해의 시조인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서는 본래 고구려의 별종(別種)이었다는 《구당서》의 기록과, 속말말갈인(粟末靺鞨人)이었다는 《신당서》의 기록이 병존한다. 종래 이 때문에 이를 둘러싼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한편, 한국측의 기록인 《신라고기(新羅古記)》 《제왕운기(帝王韻記)》에서는 대조영을 고구려 장수라고 표기하였다. 대조영의 출생과 성장과정에 관한 더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대조영이 죽은 뒤 대무예(大武藝)가 2대 무왕(武王)에 즉위하였다. 그는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정하고, 영토확장에 힘을 기울여 북동방면의 여러 종족을 정복하였다. 발해의 세력이 강해지자, 흑수말갈(黑水靺鞨)이 발해와의 화친관계를 깨고 당나라에 보호를 요청하였다. 이에 반발한 무왕은 동생 대문예(大門藝)에게 군대를 이끌고 흑수말갈을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대문예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당에 망명하였다. 이 때문에 당과 발해는 대문예의 송환문제를 둘러싼 외교분쟁을 수차례 일으켰다. 이러한 와중에 732년 가을 거란이 사신을 보내와 함께 당나라를 칠 것을 제안하자, 그해 9월 발해는 장군 장문휴(張文休)를 보내어 등주(登州:산동성 봉래)를 급습하였다.
당은 유주(幽州:북경)에 대문예를 보내어 발해를 공격하는 한편, 신라를 끌어들여 남동쪽에서 발해를 공격하게 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737년 무왕이 죽고 대흠무(大欽茂)가 3대 문왕(文王)에 즉위하여 대흥(大興)·보력(寶曆)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1∼2대 왕을 거치면서 국가기반이 확립되자, 문왕은 내부의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는 먼저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3성(정당성·중대성·선조성) 6부(충·인·의·예·지·신부) 제도를 실시하는 한편, 지방에도 경부(京府)·주(州)·현(縣)으로 구성된 3단계의 통치체계를 갖추었다.
또 문왕은 750년대 전반경에 수도를 동모산에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로 옮겼다. 그의 말년에 수도를 일시적으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흑룡강성 휘춘현 팔련성)로 천도한 적도 있으나, 성왕(成王)대에 다시 이곳으로 옮겨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상경은 당나라 수도인 장안성(長安城)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그것을 모방하여 정비한 도시였다. 대외적으로는 동북방면의 말갈부락을 복속시키고 그곳에 부(府)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정비를 통하여 국력이 향상되자, 762년 당은 문왕에게 한 등급 높은 관작인 발해국공(渤海國公)을 수여하였다.
793년 문왕이 죽은 이후 성왕(成王)·강왕(康王)·정왕(定王)·희왕(僖王)·간왕(簡王)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별다른 치적은 없다. 간왕에 이어 그의 종부(從父)이며 대조영 동생인 대야발(大野勃)의 4세손 대인수(大仁秀)가 선왕(宣王)에 즉위하였다. 선왕은 흑수말갈을 비롯한 대부분의 말갈세력을 복속시키고, 또 요동지방에 대한 당의 지배가 약해진 틈을 타서 요하유역까지 진출하여 그곳에 목저주(木底州)·현토주(玄娠州)를 설치하였다. 이후 요동 진출을 본격화하여 10세기 초에 거란이 이곳으로 진출하기까지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 유지하였다.
선왕의 대외정복을 바탕으로 발해는 최대의 판도를 형성하였으며, 이에 맞추어 5경(京) 16부(府) 62주(州)의 지방제도가 완비되었다. 이 결과로 발해는 당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선왕이 재위 10년 만인 830년에 죽은 뒤 약 100년간에 걸친 발해 역사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발해가 쇠퇴할 무렵인 916년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거란족을 통일하고 황제가 되었다. 그는 중원지방으로 진출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배후세력인 발해를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침내 925년 12월 말에 야율아보기는 군대를 이끌고 발해를 공격하여 보름만인 그 이듬해 1월 15일에 멸망시켰다. 이때 발해는 귀족 간의 권력투쟁이 극심하였기 때문에 거란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었다. 이로써 15대 왕 230년간 지속된 발해의 역사는 끝이 났다.
거란은 발해고지(渤海故地)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거란 황제의 맏아들로 하여금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도 발해 유민은 곳곳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며, 그것은 약 200년 동안 계속되었다. 한편, 발해유민 가운데 수만 명은 고려로 투항하여 한국사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지배층의 주류를 이루었고, 대부분의 피지배층은 말갈족으로 구성된 나라였다. 현재 전하는 발해 귀족의 성씨 가운데 왕성(王姓)인 대씨(大氏) 다음으로 고구려계인 고씨(高氏)가 많았던 것에서 고구려유민이 지배층의 주류임을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전하는 발해국서(渤海國書:일본에 보낸 발해의 외교문서)에서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공식적으로 주장하였고, 일본도 이를 인정하였다.
또 문왕은 스스로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칭하였을 뿐만 아니라, 과거 고구려 왕실이 주장한 ‘천손(天孫)’을 일컫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발해는 고구려 옛 지역에서 그 유민이 중심이 되어 세운 국가임이 분명하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 발해의 유민은 발해인과 여진인(女眞人)으로 각각 분리되었는데, 이 사실은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상호융합을 이루지 못하였음을 반영한다. 이와 같은 발해의 취약한 결집력은 발해가 거란에게 쉽게 멸망된 이유 중 하나이다.
참고사항) 발해 부분의 걸걸중상과 대조영이 부자지간으로 나오나, 걸걸중상이 곧 대조영이라는 의견도 있고 학자마다 차이가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음.
첫댓글 신라 삼국통일후 정규군인 구서당 의 하나는 발해인이엿고 고려 의 개국명장 유금필장군의 7000기병을 말갈병이엿다지요 조선을 세운 이성계도 여진 이나 고려 혼합 사병의 힘으로 출세한 장수
이런 역사적 사실을 보면 고려나 조선의 건국에 여진의 세력이 큰 역을햇지요 그걸 유학자들이 무시하고 은폐햇지요
구서당중에 말해인은 없고 말갈인이 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