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하늘에 극락(極樂)이 있으면 땅에는 항주와 소주가 있다고 했던가.
예로부터 풍류의 고장으로 이름높은 항주의 번화가 장홍로(長紅路)는 돈으로
극락을 맛보려는 사람들의 발길로 언제나 북적였다.
장홍로에 즐비한 주루 중에서도 오륙 년 전 새로이 문을 연 금연루(錦宴樓)는
풍류객들간에 손꼽히는 주루였다.
물산이 풍부하고 상업이 발달한 교통의 요지답게 철철이 조달되는 다양한 각
지의 특산물을 재료로 쓰기는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였으나, 황실의 주방에서
은퇴한 궁인에게 사사(師事)했다는 숙수의 손을 거친 요리는 무엇이든 입맛을
당겼고, 시골 부호의 자제로 과거에 낙방을 거듭하다 장삿길로 나섰다는 주
인의 안목이 제법 높은 탓인지 벽에 걸린 서화 한 점까지 천박하지 않았다.
후원에 딸린 별채에서 술을 치고 가무를 파는 기녀들 또한 저마다 흔치않은
미모를 뽐내는 미희(美姬)들이었으니, 주문만 하면 즉시 대령하는 중원 각지
의 명주(名酒)를 곁들여 세월 보내기 딱 좋은 곳이었다.
물론, 먹고사는 일로 근심하지 않아도 되는 일부 팔자 좋은 사내들에게 한정
된 일이긴 했지만…….
오늘도 금연루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정성 들여 꾸민 화려한 후원을 건너 아련히 들려오는 풍악소리 사이로 장단을
맞추듯 간간이 끼여드는 기녀들의 간들어지는 교소(嬌笑)는 넓은 객청에 앉
아 술잔을 기울이는 사내들의 술맛을 돋구는 돈 안 드는 안주거리임과 동시에
보다 넉넉하지 못한 주머니를 원망하게 하는 자극이 되었다.
이층 중앙에 자리한 원탁에 둘러앉은 한 무리의 사내들 역시 아쉬운 눈길을
후원으로 던지며 술잔을 기울이기에 바빴다.
성격과 나이는 물론 지닌바 재주도 제 각각인 여섯 명의 사내들은 세권표국의
표사라는 것 외에 한가지 공통점이 더 있었다.
신입이라 소속이 정해지지 않은 사군명이 표행을 함께 했던 표사들이라는 점
이었다. 대개 같은 조에 속한 자들끼리 어울리는데 반해 지금 이들의 소속이
제각각인 이유였다.
"제기랄! 내가 상을 탔으면 오늘 자네들 모두 극락 구경을 시키는 건데……."
길쭉한 턱에 몇 가닥 되지 않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한 사내가 입맛을 다시자
옆자리에 있던 매부리코가 바로 퉁명스럽게 되받았다.
"극락은 고사하고 오늘 술값이나 책임지게."
"내가 왜? 오늘은 고 선배가 산다고 했는데!"
동의를 구하듯 바라보는 주걱턱의 눈길에 고승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닐세. 군명이가 자네들에게 술 한잔 사라고 맡긴 돈이 있으니 마음껏
마셔도 좋으이."
사군명이 상으로 받은 적지 않은 은자 중 일부를 고승후에게 맡기며 대신 대
접하라는 부탁을 했던 것이다. 표사로서 첫 발을 내딛은 자신이 배울 바가 있
는 선배들이라는 이유로.
고승후의 말에 사내들의 표정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밝아졌다.
뜬금없이 한 잔 사겠다는 말에 뒤따라 나서긴 했으나 구두쇠 고승후의 면모를
익히 알고 있는지라 한 가닥 불안감도 없지 않았던 터였다. 행여 입맛만 다
시고 마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없지 않아 탁자에 놓인 술을 한 잔이라도
더 들이키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고승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걱턱의 사내, 왕충삼(王忠三)의 얼굴이 밝
아지더니 목청껏 점소이를 불렀다.
"대체 주문도 받지 않고 무얼 하는 게냐! 여기 금존청(金尊淸) 세 근하고 건
소명하(乾燒明蝦) 동파육(東坡肉) 그리고, 당초리어(糖醋鯉魚) 한 접시씩 내
오게!"
"예, 예! 곧 대령하겠습니다!"
호기로운 외침에 점소이는 반색을 했고, 고승후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에도 목숨걸고 번 돈을 술과 바꾸고 계집의 치마폭에 쏟아 붓는 동료들의
대책 없는 객기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그로서는 사군명의 호의를 호강할 기
회로 여기는 왕충삼이 못마땅한 것이다.
"왜? 아예 후원으로 가서 기녀들을 끼고 마시지 그러나."
왕충삼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투덜댔다.
"너무 그러지 맙시다. 아, 군명이가 선배들에게 한턱 쓰겠다는 데 성의를 봐
서라도 이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거 아니오. 대체 몇 년을 일해야 황금 이십
냥을 만져보는 게야……."
황금 이십 냥이면 항주성 인근에 일가족이 먹고 살만한 소출이 나오는 농토가
딸린 집을 사고도 남는 거금이었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토를 다는 왕충삼의 말이 아니더라도 사군명의 횡재와
머지 않아 표두가 될 것이 분명한 그의 처지를 부러워하는 마음은 너나없이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 중 대다수는 나름대로 고달프고 사연 많은 인생
을 살아온 자들이 아니던가.
하나 남의 횡재를 부러워하는 마음이야 인지상정이었고 그들 모두 젊은 나이
에 앞길이 열린 사군명을 자랑스러워하고 아끼는 마음은 다르지 않았다.
그런 동료들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고승후가 빈 술잔들을 채울 때 그들에게
다가서는 사람이 있었다.
"허어, 어느 분께서 그런 복을 받으신 겁니까? 황모(黃某)가 축하주라도 한
잔 올려야겠습니다. 허허허!"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리며 다가선 인물은 금연루의 주인 황대진이었다.
긴장 속에 천하를 떠도는 직업의 특성 탓인지 씀씀이가 남다른 세권표국의 표
두와 표사들을 단골로 잡기 위해 늘 친절하게 대하는 황대진은 화려한 화복에
어울리는 밝은 표정으로 일행에게 인사를 건넸다.
"누구긴 누구요? 표사가 된 지 두 달도 안되어 영사신편을 꺾은 백기표사 얘
기지."
"백기표사라니요……."
황대진이 관심을 보이자 왕충삼 옆에 있던 팽상문(彭尙紋)이 신이 나서 설명
을 했다.
"우리 표국에 마구간지기를 하던 사군명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국주님의 명으로 표사가 됐단 말이지."
"호오, 국주께서 직접 명령을 내리셨다고요!"
황대진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그럼! 그게 두 달이 좀 넘었던가……."
"오늘이 딱 두 달하고도 이틀째 되는 날일세."
"하여튼, 그 친구가 말이오……."
팽상문이 막히면 왕충삼이 거들고, 왕충삼이 틀리게 말하면 팽상문이 고치고
…….
채 일각이 지나지 않아 황대진은 세권표국에 풍운을 일으킨 주인공에 대해 모
르는 것이 없게 되었다.
속없는 호사가처럼 호기심에 가득한 눈을 빛내며 부러움과 안타까움이 담긴
표사들의 애기에 귀를 기울이던 황대진은 사군명이라는 이름을 머릿속에 새겼
다.
세권표국이 무림 방파는 아니라 해도 항주를 비롯한 절강성 일대에서 위세를
떨치는 창해문(滄海門)을 아래로 보는 실력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평소에도 세권표국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대상 중 하나였지만 최근 기산에
다녀온 후로는 항주 일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결코 무심할 수 없는 그였
다.
세권표국에서 전례 없는 비무대회가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관심을 갖고있던
터에 새롭게 등장한 사군명이라는 이름을 예사로 넘기기에는 그의 임무가 너
무도 막중했다.
항주에 거하거나 드나드는 모든 무림인, 무적세가와 봉래도의 인물은 말할 것
도 없고 하다못해 녹슨 식칼이라도 차고 다니는 자는 빠짐없이 점검하여 동향
을 파악하라는 전주의 엄명이 있지 않았던가.
하물며 일류고수가 아니면 꿈도 못 꾸는 세권표국의 표두 중에서도 손꼽히는
무공을 지닌 영사신편 노장우의 묵린편을 토막낸 인물이라면 반드시 주목해야
마땅했다.
"그런 기린아에게 술 한잔 올릴 기회가 있으면 좋으련만 이 황모가 인복이 없
는 모양입니다."
황대진이 순진한 표정으로 아쉬움을 드러내자 왕충삼이 가슴을 내밀고 나섰다
잘만 하면 공짜 술을 마실 수 있는 기회를 놓칠 그가 아니었다.
"검법은 날카로우나 공력이 약해서 그만 쓰러지고 말았으니 아쉬워도 어쩌겠
소, 내 다음에 꼭 함께 오리다!"
하나 술 냄새를 맡은 것은 왕충삼뿐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군명이라면 내가 제일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로 황대인과 인사시킬 터이니 걱정 마시오!"
팽상문도 질세라 장담했다.
"무슨 소리야? 먼저 표행때 내가 경계를 설 차례인데도 자기가 대신하겠다며
쉬라고 한 게 군명이야. 누가 뭐래도 우리 백기표사는 나를 따른다고."
"이 사람이 뭘 모르는구먼!"
"모르다니 뭘 몰라……."
누가 사군명과 제일 가까운 사람인가를 다투는 사이 금존청 두 근을 올리고
돌아선 황대진은 매일 쓰는 보고서의 한 부분을 차지할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
리했다.
상부에서 기다리는 정보는 아니었지만 그나마 보고할 건수가 생긴 것은 다행
이었다.
< 사군명(史君明).
이십삼세. 세권표국의 표사. 별칭 백기표사.
고아 출신으로 표국의 하인으로 지내다 갑자기 부상한 인물. 표사들간에 성망
이 높음.
아마도 석백송의 배려가 있는 것으로 추정됨.
영사신편 노장우를 꺾었으며 검법에는 상당한 조예가 있으나 내공은 약한 것
으로 추정됨.
출신이나 그간의 행적으로 보아 무적세가나 봉래도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은
없음. >
무적세가의 부상으로 무림의 태산북두라는 위치를 빼앗긴지 백년이 되었고 그
로 인해 무적세가와 그리 원만한 관계가 아닌 소림이 석백송의 사문이라는 사
실과 수하들을 장악하는 석백송의 능력을 감안하면 세권표국의 인물들이 무적
세가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나 총단의 관심이 집중된 지금 명령대로 온갖 정보를 취합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고 또한, 목숨을 부지하는 길이었다.
다섯 개에 달하는 성문을 지키고 있는 수하들이 두시진 마다 올리는 보고를
듣기 위해 후원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황대진의 여유로운 뒷모습을 바라보는
표사들의 눈에는 극락의 한끝을 잡고 사는 그를 부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긴, 늘 미소를 머금고 다니는 부유한 상인 황대진이 흑마방의 이목인 마안
기무전에 소속된 인물이라는 것을 누가 상상이라도 할 것이며, 이즈음 아무런
성과도 없이 하루하루 흐르는 시간이 불안해 가뭄을 만난 논바닥처럼 바싹
타 들어가는 그의 속을 뉘라서 알 것인가.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독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즐~~~감!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즐독하였습니다.
즐독 입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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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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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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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하고 갑니다.~
즐독하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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