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사랑과 자유/갈 5:1-13
출 처| 임현수목사
1941년 1월 6일 미국 의회에서 행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의회 연설은 인간의 기본 자유에 대한 선포로 유명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향유하고 살아야 할 4가지 기본적인 자유를 마음속에 그리며 이렇게 비젼을 제시 하였습니다. 1.모든 사람은 언론의 자유를 행사 할 수 있어야 한다. 2.모든 사람은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3.모든 사람은 빈곤으로부터 자유 하여야 할 권리가 있다. 4.모든 사람은 공포로부터 자유로와야 한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또 하나의 중요한 자유를 선포 하고 있습니다.
죄와 죄책으로부터의 자유 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의 주제 입니다. 죄를 짓는 자 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면서 성경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 하고 있습니다. 죄로부터의 자유야 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자유들이 외적인 자유라고 한다면 죄로부터의 자유는 내면적인 자유를 말하는 것 입니다. 이 자유는 진리를 알 때 누릴 수 있는 자유이며 예수님을 알 때 누릴 수 있는 자유이고,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자유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법과 규율을 초월한 자유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부어 주시는 사랑으로만 가능한 은혜의 자유입니다.
자유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의 근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이시며 그분은 그분을 닮은 자유로운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의 선물로 인간이 죄 짓고 타락할 것을 아시고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지으신 분입니다. 만일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닮은 숭고한 존재일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자유는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근본적 가치인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인간이 죄를 범하고 결과적으로 죄의 노예가 되어 그의 자유가 왜곡되고 더럽혀졌을 때 우리를 다시 자유롭게 하시고자 그는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희생의 제물이 되게 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고 자유롭게 하신 분이십니다. 갈라디아 본문이 말씀이 이 사실을 우리에게 천명합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자유는 아무리 높이 평가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한마디로 말해 투쟁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 투쟁은 대부분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혁명이나, 불란서의 대혁명, 미국의 독립전쟁이나 노예해방을 위한 남북전쟁등이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3.1. 만세운동과 독립군들의 활동 (연해주,상해,하와이)은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우리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어느 역사학자는 『세계사의 의의와 가치는 자유와 해방을 위한 투쟁에 있다』고 했습니다. 페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스탈린의 딸도 철의 장막인 소련 공산체제에서 망명해 나왔습니다. 최근에 북한에서 월남한 분이 『자유는 확실히 생명보다 귀중하다. 자유의 진가는 자유를 떠나 봄으로서만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참자유가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시는 가운데『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 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유를 육체의 방종의 기회로 타락 시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 입니다. 이것은 은혜와 사랑의 바른 의미를 모르기 때문 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자유라면 그것은 섬김으로 나타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빠진 자유라면 그것은 방종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의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세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왜 종노릇 해야 할까요? 우리는 누구의 종노릇을 해야 할까요? 그리고 어떻게 종노릇 할 수 있을까요?
1.우리는 왜 사랑으로 종노릇 해야 할까요?
그것은 종노릇을 해 보야 진정한 자유와 사랑의 의미를 알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자유와 사랑에 대한 지적인 인식이나 개념만 가지고는 그 의미를 알 수 없기 때문 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헤겔적인 개념적 철학은 생철학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나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입니다. 자기도 살지 않는 누각을 짓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철학자는 자기의 집을 짓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철학자는 자기의 집을 짓고 자기는 그 속에서 살지 않습니다.”
이 말을 하면서 키에르케골은 이런 풍자적인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니그렌이라는 철학자가 <에로스와 아가페>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전폭적이고도 완전하며, 성경적인 동시에 일반적인 개념까지 포괄하여 쓴 책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더 이상 빼놓을 것이 없을 만큼 완벽한 책 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은 그 책을 사서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설교 했습니다. 이 책을 보고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바보라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키에르 케고르는 이 사실을 풍자하기 위하여 이런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어느 유명한 목사님에게 젊은 지성인이 찾아 왔습니다. 그는 중대한 회의가 생겨서 찾아 왔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뭐냐고 묻자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회의가 생겼으니 좀 잘 가르켜 달라고 했습니다.
이때 목사님은 겸손하게 이런 권면을 합니다. ”사랑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이 없고 니그렌이 쓴 책을 사보면 어떤 멍텅구리라도 사랑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내 설명을 듣기 보다는 서점에 가서 그 유명한 책을 사서 읽는 것이 좋을 것 입니다.”
그랬더니 그 지성인이 대답하기를 “목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바로 그 책의 저자 입니다.” 라고 대답했다는 풍자적인 얘기를 했습니다.
목사님들이 사랑의 설교를 백날 하여도 지적 인식이나 개념만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참 자유와 사랑이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유란 사랑으로 종노릇 할 때만 깨달아 알 수 있는 것 입니다.
사랑으로 종노릇 하지 않고서는 자유의 위기를 극복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탄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내게 주어진 자유를 가지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것 입니다. 이 목표가 분명하지 못하면 그 자유는 다시 위험해 질 수가 있는 것 입니다.
1945년에 우리나라에는 그렇게도 기다리던 해방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의 기회를 바르게 쓰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시기하고 분쟁을 일삼다가 우리 민족은 다시 6.25라고 하는 전쟁에 휘말리며 공산치하에 나라가 나뉘우는 민족 분단의 아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섬기지 못했기 때문 입니다.
1917년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였던 짜로 황제의 무서운 독재와 사치의 삶에서부터 러시아 국민들이 놓여나서 처음으로 자유를 얻었습니다.자유를 얻은 것은 좋은 일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어떻게 살것인가? 라는 대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란과 진공상태에서 태어난 것이 더 무서운 스탈린 독재였습니다. 그들도 서로서로를 섬기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위기를 맞은 것 입니다.
북한의 독재 정치 하에서 고통을 당하던 북한 주민들이 그 땅을 이탈하여 자유대한의 품에 안깁니다. 그러나 남한에 와서 갑자기 주어진 자유를 사용할 줄 모르는 북한 사람들 가운데 그 자유를 사용할 줄 몰라서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자유의 위기 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중국의 위기 이기도 하고 러시아의 위기 이기도 합니다.
자유에 사랑을 더하면 사랑으로 섬길 수 있지만 자유에서 사랑을 빼면 죄의 종으로 방종하게 될 수 밖에 없는 것 입니다. 그래서 이혼 자살 알코올중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이유 그것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게 하기 위함 입니다. 그래야 자유가 주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되는 것 임을 믿고 사랑으로 섬기는 종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2.우리는 누구의 종노릇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제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이며 사단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물론 주님이 종이 되라고 강요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게 자유를 주신 주님이 너무 고마워서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드리게 된 것 입니다. 그래서 억지로 된 종이 아니고, 부자유한 종이 아니라 자원한 종, 자유의 종이 된 것 입니다. 사랑의 종이 된 것 입니다.
M.R.Dehaan은 이것을 이렇게 비유합니다. 한 부자집 주인이 한 여인을 하녀로 고용하였습니다. 그녀의 주인에 대한 섬김은 법(혹은 계약)에 의한 의무적 섬김으로 시작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주인과 여인사이엔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들은 부부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 여인의 이 남자에 대한 섬김의 방식은 어떻게 변화될까요? 이 남자가 여인에게 하루에 봉사시간을 정하겠습니까?(오전9시-오후5시) 그리고 그 봉사에 대한 봉사료를 지불하겠습니까? 아니 이 여인이 봉사료 지불을 요구하겠습니까? 봉사료를 지불 안했다고 파업을 하겠습니까? 이 남자가 이 여인에게 일일이 하루종일의 일과표를 정해 주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 여인은 더 이상 법(계약)아래 있지 않습니다. 월급을 받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전9시-오후5시가 아닌 저녁에도 한밤에도 이 남자를 향한 봉사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마구 해댑니다. 그리고도 이 여인은 전처럼 이 남자에게 오버타임에 대한 급료지불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답은 하나입니다. 그녀는 법아래서 고용된 종으로서가 아닌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법이 요구하는 그 이상의 일을 성취해 냅니다. 사랑이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만이 인간관계를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하신 말씀-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하십니다.
이전보다 더욱 더 사랑하리 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노예와 같은 자가 됩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종이 됩니다. 발을 씻어 줘도 자존심이 상하지 않습니다. 밥해 주고 빨래해 줘도 즐겁습니다. 사랑하기 때문 입니다.
어느 날 주님은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셨습니다.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은 안식을 위해서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 나왔고 주의 십자가 앞에 우리의 죄의 짐을 내려 놓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영접하여 죄사함을 받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자유를 얻은 것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주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십니다.자유와 함께 멍에가 주어졌습니다.그런데 주님은 나의 멍에는 쉽고 가볍기 때문 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기서 쉽다는 말은 본래 <친절하고 온유하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멍에는 친절한 멍에요, 온유한 멍에 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섬기고, 남편이 아내를 섬기는 것은 무거운 멍에가 아닙니다. 사랑의 동기에서 섬기는 것 이라면 그 멍에는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은 수직적인 관계의 적용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수평관계의 측면 입니다. <너희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는 것 입니다. 성경이 거듭 강조하는 것은 <서로 서로> 입니다.인간 관계를 바로 맺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도 사랑하는 것은 뜻 합니다.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들도 섬기겠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피차에 섬길 수가 있다면, 피차에 복종 할 수가 있다면, 피차에 종 노릇 할 수가 있다면 우리들의 인간 관계는 얼마나 더 풍성해지고,얼마나 더 만족스러워지고, 얼마나 더 아름다워 질까요?
엡5:21절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에 복종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내만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궁극적으로는 아내가 복종해야 하지만 성경은 피차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도 피차에 복종해야 합니다.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했습니다.(벧전5:5)
오늘날 인간관계가 파괴되는 이유는 바로 <서로서로 주인 노릇 하려고> 하기 때문 입니다. 서로서로 다스리고 서로서로 잡아 먹으려고 하기 때문에 망하는 것 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였습니다.
본문 15절과 26절을 보십시오.
갈 5: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갈 5: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오늘날 사람들이 망하는 비극의 원인도 이것 입니다.서로서로 이용하고 /서로서로 착취하고 /서로서로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 경쟁사회의 비극 입니다.
이것이 인간 본래의 죄악된 본성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고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피흘리는 적자생존 양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서로서로 사랑하라는 권면에서부터 시작해서 성도들이 서로서로에게 행해야 하는 행동에 관해서 48번을 언급하고 있습니다.사랑도 그냥 사랑이 아니라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라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사랑 할 것을 권면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 한 것 입니다.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좆아 행하는 사람들은 성령으로 살 수가 있는 것 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의 인간관계의 열매는 두 가지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죄악된 본성의 지배를 받을 때 입니다.
갈 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
이것도 서로서로의 관계 속에서 되어지는 행위 입니다. 그런데 열매가 좋지 못합니다. 음행, 원수 맺는 것,분쟁,시기,당 짓는 것,이단 이런 것들 입니다. 이 모든 것이 철저한 인간의 이기심의 열매들 입니다. 타락한 인간 관계의 열매들 입니다.
그리고 두번 째는 성령의 지배를 받아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할 때의 결과입니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사랑으로 종노릇하면 사랑의 열매가 맺힙니다. 기쁨의 열매가 맺힙니다. 화평의 열매가 맺힙니다. 인내의 열매,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 입니다.
이런 열매들이 바로 이기적 동기가 아니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인간관계의 결과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서로 물고 먹지 않으며 서로 분내고 시기 하지 않을 것 입니다.
그러므로 두번째 요지의 결론은 이것 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의 자유는 그리스도인에게 마음대로 죄를 지을 수 있는 권리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인의 죄악된 본성을 제거시켜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안에서의 자유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 면제시켜 주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은 그리스도인은 더 큰 책임을 부여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특권과 권리를 누리게 됩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행해야 하는 거룩한 사명을 부여 받게 된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종이 되어야 하는 것 입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참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 입니다.
누구에게 종노릇 해야 한다고요? 주님과 그리고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그들을 진정으로 섬기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3.어떻게 종노릇 할 수 있을까요?
답은 성령과 사랑으로 입니다. 성령이 사랑의 원동력입니다. 13절을 다시 봅니다.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여기 보시면 오직 사랑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사랑한다면 섬길 수 있고, 사랑한다면 종 노릇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랑을 어떻게 유지 할 수가 있느냐 하는 것 입니다. 사랑이 자라야 하고 사랑을 잘 유지해야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것 입니다. 5:16절 이하가 그 대답 입니다.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왜 서로 종노릇 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왜 서로를 섬기지 못할까요?
<육체의 욕심 때문 입니다> <이기심 때문 입니다> <개인적인 욕망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이것 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육체의 욕심과 이기심을 극복하고 피차에 서로 종노릇 할 수 있을까요? <너희는 성령을 좆아 행하라> 이것이 성경의 대답 입니다.
18절을 보세요.
갈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여기서도 강조되고 있는 것이 성령의 사역 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사랑의 능력을 중가 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증가 될 때 우리는 섬길 수가 있는 것 입니다.
힘으로도 안되고 능으로도 안 되는 것 입니다. 오직 나의 신으로 된다고 하셨습니다. 돌 같은 마음으로
는 안됩니다.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받아야 합니다. 새 영을 받아야 합니다. 겉으로는 안됩니다. 속이 변해야 합니다. 형식으로는 안됩니다.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반드시 살펴 보아야 할 것은 우리교회 안에서의 인간관계가, 가정교회 안에서의 인간관계가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 입니다.
죄성으로 인한 열매가 맺혀지고 있는가? 아니면 성령의 열매가 더 많이 맺혀지고 있는가? 하는 것 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었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육체의 욕심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순간 죄사함 받은 것은 사실 이지만 죄지을 가능성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새 사람 된 것도 사실 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옛사람,옛성품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옛 성품은 그대로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죄성과 옛사람과 옛성품을 극복하고 다스리면서 정말 사랑하며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겠는가 하는 것 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육체의 소욕보다도 더 강한 내적인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저는 항상 느끼는 항공역학의 법칙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이륙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항상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행기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보잉 747같은 점보 비행기는 500명의 사람들을 태울 수 있고, 그리고 수 많은 짐을 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행기 자체의 몸체 무게만 해도 400톤이 넘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400톤이면 400,000kg 입니다. 이것은 몸무게가 100kg 나가는 사람 4,000명의 무게 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비행기 한 대가 뜰 때 적어도 100kg 나가는 사람 5,000명이 동시에 공중을 날라 간다는 것 입니다.
어떻게 이런 신기한 일이 가능 할까요?
그것은 중력의 힘보다 더 큰 어떤 거대한 힘 때문에 비행기는 하늘을 향해서 날 수가 있는 것 입니다. 이것이 항공역학의 힘인 것 입니다.
문제는 파일로트가 이 비행기는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믿고 그리고 엔진을 가동시키는 스윗치만 틀며는 이 거대한 물체는 중력의 법칙을 극복하고 순식간에 저 높은 구름위를 비상하면서 날아 갈 수가 있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런 경우에 대비해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 이라면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부은 바 되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사랑의 영을 주셨다>는 것 입니다.
딤후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핑계이고, 변명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능력을 excise 하지 않는 것 입니다.
이것이 불가능 하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 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부터는 스윗치만 틀면 되는 것 입니다. 순종하는 순간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육체의 소욕을 넘어 설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섬길 수 있는 놀라운 삶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이런 삶을 살기 시작하면 성령의 열매가 삶 속에 맺히게 되는 것 입니다.
갈5:22,23 서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기쁨과 행복이 있는 그리스도인,화평과 하나됨과 연합이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교우들 사이에서 인내하는 모습,서로에게 친절한 행동 밝은 눈빛,양선한 행위,서로 온유하며 서로에게 민감한 덕행,서로 신뢰하며 때로는 말과 행동에서 절제하는 생활
여러분, 종이라는 단어는 가장 비참한 단어 입니다. 특별히 성경이 쓰여지던 그 당시에 가장 비참하게 쓰여지던 그 단어, 그러나,그 단어를 성경은 가장 영광스러운 단어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누가 친히 종이 되셨습니까?
빌2:6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 친히 종이 되셨다면 우리도 종이 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무디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 할 때 그가 인생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종을 거느리고 살았느냐?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종 노릇 했느냐 이다>
기도:
주님 저도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주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대접받고 인정 받는데만 관심을 갖지 말게 하시고, 사랑하며, 섬기며 살게 하소서.
서로 불쌍히 여기라 하셨사오니 불쌍히 여기며 섬기게 하소서.
종종 불평하고, 무시하고, 고발하고, 비판하며, 교만하게 행한 죄를 회개하게 하시고 어떻게 하든지 이제부터는 사랑으로 종노릇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 예수님이 주신 자유를 가지고 육체의 기회를 삼지말고.. 사랑으로 종노릇하므로 거룩한 사랑을 지키게 하시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