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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흐마니노프(Rachmaninov) / 피아노 협주곡 제3번 라단조 Op.30
1909년, 라흐마니노프는 처음으로 미국을 연주여행했는데, 그 당시의 프로그램에 신작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이 포함되어 있었다. 완전히 성숙한 멜로디 스타일, 풍부하면서도 변화무쌍한 오케스트라의 사용법, 그리고 큰 스케일의 구조에 대한 상당한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은 가운데, 초연은 발터 담로쉬의 지위로 11월 28일 뉴욕의 뉴 시어터에서 있었다. 1910년 1월엔 카네기 홀에서 구스타프 말러가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과 이 작품을 협연했다.
제3번 협주곡은 모든 면에서 제2번 협주곡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자기 스타일을 확립한 라흐마니노프가 충분한 여력을 가지고 꼼꼼히 완성한 곡인만큼 매우 스마트한 느낌을 주고 있다. 개개의 선율도 아름다워서 전체에 흐르는 달콤한 분위기, 웅대한 스케일과 피아니스틱한 기교, 러시아적 어두운 정서가 앞의 작품들에 비해 더 확대되고 깊이 있게 표현되었다. 피아니스트에겐 난곡 중 난곡으로 알려진 이 작품에서 선율미는 내적으로 투영되어 제2번만큼 뚜렷이 드러나지는 않고 있다.
이 작품의 제1악장이 영화 "샤인(Shine)"에서 OST로 실제 연주됨으로써 이 영화를 더욱 감동적으로 만들었고 그 덕분에 더 유명해진 작품이기도 하다.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을 1907년 드레스덴에서 쓰기 시작했고 그 뒤, 그 자신이 무척 행복해 했던 1909년 모스크바 근교의 자신의 영지(라흐마니노프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인 이바노브카 그리고 미국 연주여행을 하면서 작곡을 계속 진행했다. 그만큼 오랫동안 공을 많이 들인 작품이다. 1908년, 독일에서 러시아로 돌아온 라흐마니노프는 다음 해에 미국으로 연주 여행을 떠나 보스턴 교향악단을 지휘했고, 여러 곳에서 피아니스트로서 연주하면서 그 기간 동안에 이 작품을 완성했다. 그래서 이 곡은 작곡자 자신이 '특히 미국을 위해서 작곡되었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였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 특히 연주가 까다롭기로도 유명하다.
이 곡을 들은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은 장대한 길이와 테크닉적인 어려움에 대해 조크를 던지면서 '코끼리 협주곡(Elephant Concerto)‘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은 그의 고국 러시아의 깊은 우수와 멜랑콜리, 특히 라흐마니노프가 사랑했던 이바노브카 숲속의 자연풍경을 느껴볼 수 있는 곡이라는 평가도 있다.
이 작품은 미국 피아니스트이자 친구인 조셉 호프만(Joseph Hoffmann)에게 헌정되었다.
제1악장 : Allegro ma non troppo
아름답고 향수를 느끼게 하는 1악장 첫 주제는 너무도 명백하게 러시아적이어서 실제로 민요같이 느껴진다. "만약 이 주제를 작곡하는 데 있어 어떤 계획이 있었다면, 나는 오직 소리만을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가수가 멜로디를 노래하듯 피아노로 멜로디를 노래하고 싶었다"고 작곡자 자신이 설명했다는 부분이다.
현과 바순으로 속삭이듯 2 마디의 전주에 인도되어, 곧 피아노가 제1주제를 옥타브로 연주한다. 이것은 차차 발전하여 평탄하게 계속 연주된다. 이윽고 주제는 관현악에 옮겨져, 피아노는 아르페지오로부터 꾸며지는 음형으로 발전한다. 제1주제를 확보한 후, 클라리넷이나 호른에 새로운 동기가 나타나나, 이것은 뒤에 피아노의 거대한 화음으로 성장하고, 다시금 제2주제의 소재가 되기도 하는 요소이다. 다음에 피아노 독주만의 카덴자가 삽입되어서, 또 다시 제1주제가 관현악으로 다루어져서 서서히 가라앉고, 다시 화음이 관현악에 나타나서, 일단락 짓는다. 피아노가 이 악상을 되풀이 하고, 얼마동안은 양자의 경합으로 나아간다.
제2주제는 1주제 후반의 멜로디가 성장한 것으로, 피아노의 오른손이 왼손의 펼침화음 위로 부드럽게 연주된다. 이 부분은 서정적인 전개를 보인 다음 고요해지고, 그대로 전개부에 계속된다. 전개부에서는 제 1주제가 여러가지 형태의 조성 속에서 변화를 붙여 다루어지고, 그 결과 피아노의 장식적인 음형 속에서 해소되어버려 피우 비보(piu vivo)로 새로운 요소가 사용된다. 다음에 이 주제의 발전한 형태의 셋잇단음으로 리드믹한 알레그로의 악상이 계속되고, 강대한 음향을 구사하여 호화로운 전개가 펼쳐진다. 그리고 또다시 온화한 음악으로 되돌아 온 다음, 알레그로 몰토의 카덴짜가 들어온다.
카덴짜는 물론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이지만, 두 종류가 있고, 어느 것이나 제2주제에 의하고 있으나, 하나는 극히 비르투오조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약간 평범한 것이다. 이 뒤의 재현부는 전례처럼 거의 재현답지 않고, 제2주제도 없기 때문에 오히려 카덴짜 뒤의 코다같은 느낌을 준다.
제2악장 : Adagio A장조 4/4박자.
간주곡(intermezzo)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변주곡 형식에 의한 3부 형식, 현에 암시된 악상이 하나의 주제가 되어 오보에로 노래된다. 이것이 하강음형으로 끝나면 3잇단음으로 구성된 랩소딕한 악상으로 피아노가 가담하여 D-flat장조로 바뀌어 주제를 로멘틱하게 다룬다. 이윽고 아라베스크 음형을 거쳐 짧은 카덴차가 있고, 다시 주제를 변주하는 악상이 피아노로 진행된다.
다음에 중간부에 해당하는 부분이 되어 피우 비보로 피아노의 왼손에 반음계적 글리산도 음형이 전개하고, 오른손에 힘찬 화음의 움직임이 나타나 클라리넷과 바순이 제1악장의 제1주제에서 파생한 유연성 있는 선율을 연주하고, 현이 피치카토를 새긴다. 이후 아다지오가 되어 반음계적인 음형을 배치하여 피아노가 칸타빌레의 선율을 연주하면서 중간부를 끝낸다.
최초의 템포를 조금 빠르게 한 형태로 주제가 화음적으로 중후하게 다루어져 피아노에 나타나서, 점차 발전하여 관현악과 피아노에 의한 웅대한 악상이 펼쳐진 후, 피아노에 아라베스크 음형이 이어지며 다음에 A장조로 돌아와 작은 음표의 움직임에서 3/8박자가 되어 관현악에 사랑스런 악상이 나타난다. 이윽고 3/4박자가 되어 Piano가 억센 악상을 연주하고 이것을 받아서 관현악이 최초의 주제를 연주하여 그것이 점차 가라앉은 대목에서 피아노가 카덴차풍의 코다를 현란하게 연주하여 힘찬 반종지로 맺는다.
제3악장 : Alla breve - Lento
제2악장과는 대조적으로 먼저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화음 연속의 연주에 뒤이어 피아노가 3잇단음표에 의해 시작한다. 제2 테마는 피아노가 연주하며 얼마 후 빠른 리듬이 가라앉게 된다. 피아노의 경과구는 다음에 등장하는 코다의 힘차고 빠른 템포를 준비하는 듯이 연주된다. 이같이 하여 웅장하고 화려한 이 악구는 끝난다.
제시부의 제1주제는 행진곡 풍의 관현악 리듬에 따라 피아노로서 기세좋게 연주된다. 주제는 발전과정에서 다른 요소를 등장시키나, 이것이 쌓여지듯 되풀이된 후, 또다시 첫머리의 주제에 의해 제1주제의 확보가 행해진다. 이어서 피우 모소가 되어 피아노에 나타나는 싱코페이션을 가진 주제로 등징하고, 그것이 가라앉은 후, 피아노가 G장조의 서정적인 제 2주제를 마음껏 노래해간다. 이러한 수법은 제2 협주곡 끝악장의 경우와 닮을 꼴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이 주제가 수식되어 되풀이 된 후, 알레그로 몰토의 패시지가 되어 완만해지면서 제시부는 끝맺는다.
전개부는 내림E장조. 스케르잔도 4/4박자로 시작하여 관현악은 1주제의 변화된 악상을 연주하고, 피아노는 화려하게 꾸미며 나아간다. 이것이 최고조에 이르러서 피아노에 제1악장의 제2주제를 단축한 형태의 가락이 사용된다. 다시금 피우 비보로 활발해지며, 오로지 피아노만의 전개가 계속되고, 메노 모소 3/2 박자가 되어 이전의 가락이 확대되어 부드럽게 노래된다. 이것은 피아노로 다루어지기도 하고, 관현악에도 나온 후, 패시지 풍의 악상이 나오고, 그 다음에 몰토가 되어 본디의 모습을 찾아 피아노에 몰토 에스프레시보로 연주된다. 그 뒤에 극히 비르투오조적인 카덴짜가 삽입되어 전개부는 끝난다.
재현부는 형식대로의 제시부와 요소가 그 차례로 재현하나, 제 2주제는 F장조로 다루어진다. 비바체의 패시지와 그 다음의 짧은 카덴짜가 있는 후, 코다에 들어가는데, 코다는 D장조, 6/4박자, 비바치시모의 대규모적인 것이다. 몰토 마르카토로 피아노가 호쾌한 악상을 전개하여, 알레그란도로부터 마지막은 셋잇단음으로 계속 돌진하여 프레스토가 되어 마무리짓는 듯한 센 연주로 곡을 맺는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 1903-1989)
호로비츠의 음악가로서의 장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이었다. 부유했던 그의 집안은 혁명으로 인해 완전히 몰락하게 되고 호로비츠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급히 피아니스트로 데뷔하게 된다. 키에프를 중심으로 작은 리사이틀을 가지던 호로비츠는 1922년 카르코프에서 연주를 가졌고 이것이 큰 성공을 거두어 계속해서 15번의 리사이틀을 열게 되었다. 그의 리사이틀은 모스크바와 키에프로 이어지면서 명성을 얻게 되고 1924년에서 25년에 걸쳐 11개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23번의 리사이틀을 여는 등 70여회의 콘서트를 가지면서 초인적인 기량을 과시한다.
1925년엔 러시아를 떠나 독일로 갔다. 첫 해엔 무명의 피아니스트로 세월을 보내다가 1926년 어느 여류 피아니스트 대신 연주회에 출연하여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연주하여 하룻밤에 이름을 떨치는 계기를 잡았다. 그 결과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연주회를 가지게 되었고 가는 곳마다 대단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1927년, 당시 최고의 흥행사였던 아더 짓슨에게 발탁되어 미국에 데뷔하게 된다. 당시 미국의 청중들에게 호로비츠라는 존재는 단순히 음악적인 차원을 떠나 매우 신선하고 충격적인 존재일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라는 먼 땅에서 건너온 핸섬한 청년 호로비츠, 압도적인 기교, 폭발하는 듯이 강렬한 터치, 애매함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이 명쾌한 연주, 평론가와 청중들은 새롭게 등장한 호로비츠에게 완전히 매료되기 시작했으며 다음 해인 1928년 토머스 비첨과 함께 한 뉴욕 데뷔연주는 그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굳히는 계기가 된다. 이 연주회는 동시에 비첨의 뉴욕 데뷔이기도 했으며 프로그램은 차이코프스키의 1번 협주곡이었다. 1932년엔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뉴욕 필과 협연하게되는 행운을 만나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이듬해에 토스카니니의 딸 완다와 결혼했다.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중 1936년에 건강에 손상을 입어 일체의 연주활동을 중지하는 비운을 당한다. 이 당시 토스카니니의 영향으로 인해 그의 음악이 내면으로 깊어지는 변화를 이룩하게 됐고, 1939년 파리에서 재기하게 된다. 이 재기 공연을 통해서 그는 거장적 풍모를 보여 주었고, 그 후에도 그의 음악은 계속 성장하였다. 1940년, 미국에 정주하기로 결심했으며, 1944년에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1950년대에 와서 호로비츠의 예술활동은 정점에 올라서게 됐고 1953년엔 미국 데뷔 25주년을 축하하는 모임이 있었다. 이 무렵 호로비츠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 거장의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이 다시 나빠져서 이후 12년간 연주계를 떠나 있을 수밖에 없었다. 1963년, 레코딩 활동을 다시 시작했고, 1965년 4월, 12년간의 공백 끝에 카네기홀에서 가진 복귀연주는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사람들은 반 클라이번이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우승했을 때 보여주었던 것과 비슷하게 호로비츠에게 열광했으며 연주 당일 카네기홀은 호로비츠의 모습을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 날의 실황은 레코드로 제작되어 ('The Historical come back' CBS)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했고,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전설'이 되었다.
1978년 1월, 미국 데뷔 50주년 기념으로 카네기홀에서 올만디가 지휘하는 뉴욕 필과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3번을 협연했고 2월엔 카터 대통령의 초대로 백악관에서 연주했다. 1979년,1980년에도 미국 순회 연주를 가졌다.
1986년 호로비츠는 꿈에도 그리던 모스크바 연주를 가지게 된다. 'Horowitz in Moscow'라는 제목으로 DG에서 음반과 영상물로 출판되어 있는데, 단순히 뛰어난 연주라는 것 이상의 감동을 전해주는 귀중한 기록이다. 이 연주가 진행되는 도중에는 당시 세계를 양분했던 두 초강대국간의 갈등도, 대립되는 이념으로 서로를 왜곡하고 있던 시민들의 시각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호로비츠가 미국에서 가진 마지막 연주도 바로 이 해 가을에 링컨센터에서 이루어졌다. 다음 해에 호로비츠는 런던과 빈, 암스테르담, 함부르크를 순회하면서 그의 공식적인 마지막 순회연주회를 가졌다.
1989년 11월 5일 호로비츠는 병석에서가 아니라 스튜디오에서, 자신의 녹음을 편집하던 중 갑작스런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건강상태는 나이에 비해 극히 양호한 편이었다고 한다. 평소 부인인 완다에게 남긴 유언에 따라 호로비츠는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있는 토스카니니의 가족묘에 묻히게 되었다.
호로비츠의 피아노 소리는 보통 피아니스트의 톤과는 전혀 달라서 마치 종을 울리는 것 같은 것이 특징이다. 그만큼 그의 톤은 투명하다. 그의 다이내미즘은 폭이 넓을 뿐 아니라 매우 색채적인것도 큰 특징이다. 그의 연주 특성을 좀더 세분하면,
1. 초기 - 명인기적 기교와 정열의 결합. 감각적 세련미가 돋보였다.
2. 중기 - 토스카니니와의 협연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신고전주의적 경향이 나타 났다.
형식감이 뛰어났다.
3. 후기 - 휴머니즘이 반영된 서정성. 피아노를 성악적으로 처리하는 경향이 짙다.
특히 흐르는 듯한 레가토를 사용하여 표현의 음영을 강조하고 있다.
호로비츠는 1986년에 들어와서 61년만의 고국 연주회를 비롯하여 50년만의 독일·영국 연주 등을 치르면서 <호로비츠증후군> 현상을 일으켜 그가 얼마나 위대한 연주가인가를 실증하였다.
첫댓글 글올리고 영상 확인하니 제대로 플레이 되지도 않고 건너 뛰기도 사용안되고해서 성질이나서 DVD에서 영상을 아예 새로 뽑아 avi 파일 다시 만들어 올렸음... 엠군 젠장 사람 힘들게 만들고 있네... 확 그냥 구글 계정 만들어 버릴까보다...
그야말로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지요.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인정한 거장중의 거장입니다. 이곡을 제대로 연할 수 있는 분은 , 라흐마니노프와 호로비츠 이 두 분이 전부일거라 생각되네요. 제 사견이지만요^^ 일단 손이 커야 될 것 같습니다.
피아노의 거장 호로비츠의 명연주 DVD 즐감 하고 갑니다. 해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