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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나주 영산포구에서 무안의 몽탄포구까지 영산강 34㎞를 따라가는 도로
이른바 ‘4대 강(江)’의 하나로 당당히 꼽히지만, 사실 영산강은 다른 강 길이의 4분의 1이 좀 넘는 정도의 ‘경량급’입니다. 그럼에도 영산강의 품은 넓고 묵직합니다. 크고 급하게 굽이치는 물길이나 강변의 습지풍경이 아름답긴 하지만 영산강이 보여주는 건 서정이 아니라 서사입니다. 강의 서사를 만드는 거기 깃들어 있는 사람과 자취입니다.
영산강변에는 당대의 명문장가 백호 임제가 있고, 중국으로 표류했던 금남 최부가 있습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입체적 인물입니다. 강을 따라서 책 한두 권쯤은 족히 쓸 수 있을 만큼의 내력을 가진 정자가 곳곳에 있습니다. 영산강 강변도로는 이런 서사와 인문에 기대어 놓은 길입니다. 실제로 길을 놓는 비용을 도로개발사업이 아니라 ‘영산강 고대 문화권 특정개발사업’ 예산으로 충당했더군요. 이번 주에 들려드리려는 건 그 길을 따라가는 인물, 혹은 인문 여행의 이야기입니다.
# 영산강변을 따라 인문 혹은 인물을 찾아가는 여정
영산강에 깃든 역사와 인물을 꺼내보기 전에 지명 얘기부터 시작하자. 지명에 담긴 뜻이 그 땅의 역사와 내력을 분명하게 드러내기도 하니 말이다. 영산강의 이름은 ‘영산포’에서 왔다. ‘영산(榮山)’이란 이름은, 본래 전남 신안의 흑산도 인근의 섬 이름이다. 흑산도 동쪽에 있는 작은 섬, 영산도다.
고려 말 이 섬에 살던 주민들이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렸다. 급기야 약탈을 막기 위해 섬을 아예 비우는, 조정의 이른바 ‘공도(空島) 정책’에 맞춰 섬사람들이 육지로 이주해 나주 근처 포구에 정착했다. 영산도 섬사람들이 정착한 포구라 해서 영산포란 이름이 붙었고, 영산포의 이름을 따서 영산강은 이름을 얻었다. 영산강은 이름부터가 자못 서사적이다.
이런 내력과 고리로 엮인 영산포 홍어의 유래 이야기. 육지에 정착했으나 흑산도에서 잡던 홍어 맛을 잊지 못한 영산도 사람들은 흑산도 해역에서 잡은 홍어를 가져다 먹었는데, 먼 뱃길에 홍어가 발효하면서 영산포의 명물인 ‘삭힌 홍어’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영산강을 끼고 홍어 전문식당이 즐비하게 늘어선 영산포는 퀴퀴한 홍어 냄새로 가득하다. 보리싹을 함께 넣어 끓인 ‘홍어애탕’이 지금 딱 제철을 맞은 별미다. 지방의 중소도시가 갈수록 여기나 저기나 다 비슷비슷해지고 있는데 나주 영산포만큼은 냄새로 쉽게 구분된다. 영산포라면 눈을 가리고도 여기가 어딘지 단번에 맞출 수 있다.
영산강 유역 일대에는 정자가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 유장한 물길을 바라보는 자리에 앞다퉈 누각과 정자(누정)를 지은 까닭이다. 영산강 유역에 남아 있는 누정은 모두 395개. 여기에다 지금은 사라진 528개까지 더하면 영산강변에는 모두 923개의 누정이 과거에 있었거나, 지금까지 있다. 전남 전역의 정자 수를 모두 합치면 1688개. 그렇다면 절반이 넘는 56%의 정자가 영산강변에 몰려 있다는 얘기다.
정자가 들어선 영산강 권역을 좀 더 세분화해 행정구역으로 나눠 보면 나주가 165개로 가장 많다. 그건 전남에서도 영산강 유역이, 그리고 영산강 유역에서도 나주가 그만큼 시간의 깊은 역사와 넓은 문화를 담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영산강변의 습지 풍경. 지난가을의 억새 사이로 진초록의 버드나무가 자라고, 건너편 강변 언덕의 소나무까지 어우러진다. 영산강 강변도로를 달리는 내내 창밖으로 이런 모습이 펼쳐진다. 문화일보
영산강변에는 또 수많은 나루터가 있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영산강이야말로 국제해상교통의 중심지였다. 중국, 그러니까 당시 당나라와의 교역로는 충청 지역에서 출발하는 ‘서해북로’와 나주에서 영산강의 물길을 타고 출발하는 ‘서해남로’가 있었다. 신라의 도읍지 경주에서 출발해 당나라로 가는 사신이나 당나라에서 유학하려는 스님들은 대부분 대구, 남원, 광주를 지나 나주에서 영산강을 따라 중국으로 향하는 ‘서해남로’를 택했다.
석관정 나루터
영산강 일대에 문화가 번성했던 건 이때부터 물길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사람과 돈이 모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방조제 건설로 바닷길이 닫히기 전인 1970년대까지만 해도 뱃길은 목포항에서 강물을 따라 73㎞나 거슬러 올라왔었고 강줄기를 따라 16개의 나루를 거느렸다. 지금은 자취도 없는 풍호나루의 기념비 뒤에 새겨놓은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이지만 말이다.
기록에 의하면 풍호나루가 통일신라 시대부터 당나라로 가는 중요한 시발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남에 모인 세곡이 조운선에 실려 한양으로 향하는 물산의 집산지 역할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명도 모일(會),나룻터(津)해서 회진이 아니었을까! 會津이란 지명이 삼국시대부터 쓰였음을 알 수 있다
# 새로 놓인 영산강 강변도로의 매력
나주의 영산포는 영산강 전체 구간 중간쯤의 위치다. 영산포 위쪽에는 영산강을 끼고 이어지는 강변도로가 진즉 있었다. 담양에서 광주를 거쳐 나주까지 영산강의 강둑 위로 강변도로가 이어졌다. 하지만 영산포 아래로 영산강 하류 구간에는 제대로 된 강변길이 없었다. 그 구간에 이참에 강변도로가 놓인 것이다.
영산강은 영산포에서 함평, 무안을 거쳐 목포에서 바다와 만나는데, 새로 놓인 강변길은 영산포에서 무안 몽탄까지 34㎞ 구간이다. 몽탄에서부터 삼호방조제가 있는 남악까지의 13.2㎞ 강변도로도 완공되고 나면, 영산강의 전 구간에 강변도로가 놓이게 된다.
기존 영산포 위쪽의 강변도로와 새로 놓인 영산포 아래쪽 강변도로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위쪽의 강변길은 왕복 4차선 도로 구간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강둑 위에 길을 놓아 길의 높이가 강보다 훨씬 높다. 넓고 높은 길에서 보는 강은 호젓함이나 정취와는 거리가 멀다. 상류의 강변길은, 당연하게도 ‘강’보다는 ‘길’에 방점이 찍혀 있다. 효용성이 있는 길이어서 차량 통행도 빈번하다.
반면 새로 놓인 영산포 아래 강변도로는 왕복 2차선 도로다. 길이 강과 가깝고, 강변의 습지도 잘 발달해 운치가 있다. 게다가 새 강변도로에는 차량이 거의 없다. 이 구간에서 영산강은 유독 급하게 휘어져 흐르는데, 도로도 굽은 강물과 똑같이 사행(蛇行)하면서 간다. 그러니 거리나 속도 면에서 모두 불리할 수밖에…. 차량 통행이 뜸한 건 아마도 그래서이리라.
사실 이 길은 교통 소통이나 거리 단축이 아니라, 도로 자체를 명소화하는 목적에서 놓은 것이다. 앞으로 이 길은 역사기행로나 마라톤 대회나 자전거 라이딩 등 관광·레저·스포츠의 인프라로 활용하게 된다.
일본인 지주가옥
영산강 강변도로를 달리기 전에 영산포를 먼저 보고 가자.
영산포에는 일제강점기의 근대유산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목포 개항으로 전라 지역의 쌀 수탈이 시작되자 일제는 나주평야의 길목인 영산포를 한반도 내륙 침탈의 전진지지로 삼았다. 그 무렵 영산포 한복판에 일본인 상가가 생기고 수많은 적산가옥이 지어졌다. 역사갤러리가 된 식산은행, 전통찻집이 된 일본인 지주가옥, 펜션과 레스토랑 겸 카페가 된 동양척식주식회사 문서고 등이 아직 남아 있는, 그때의 자취다.
# 곧은 정신의 선비가 남긴 연애시 한 수
영산강 강변길에 오르면 마치 바늘땀처럼 수시로 정자를 만나게 된다. 정자 하나하나를 다 얘기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니 허다한 영산강변 정자 중에서 안 보고 가면 아쉬울 것들만 뽑아본다. 기준은 두 가지. 주변의 경관과 운치 있게 잘 어울리는 정자, 혹은 깃든 인물에 눈길이 가는 정자를 가려 뽑았다.
400여 년 수령의 노거수를 거느리고 있는 나주의 정자 영모정. 명문가인 나주 임씨 종가의 소유인데 당대의 명문장가 백호 임제의 흔적으로 더 각별한 공간이 됐다. 문화일보
먼저 나주 회진의 영모정.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푸조나무를 비롯한 400여 년 수령의 노거수 11그루를 거느리고 영산강을 내려다보는 자리에 들어선 정자인데, 회진 일대에서 630여 년을 이어온 명문가인 나주 임씨 종가의 소유다.
정자는 500여 년 전에 광주시장쯤의 벼슬을 한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아들이 삼년상(喪)을 치르고 나서 지은 것. 하지만 죽은 아버지를 위해 정자를 지었지만, 정자는 그 아들의 아들인 당대의 명문장가 백호 임제의 흔적으로 더 각별한 공간이 됐다. 정자를 기리는 기념비는 하나인데, 임제의 기념비 하나와 시비 3개다. 정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번듯하게 지어놓은 백호임제문학관도 있다.
임제의 시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황진이의 무덤 앞에서 읊었다는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로 시작하는 시조. 중앙부처 과장급 정도 되는 관료였던 그가 부임지로 가는 길에 한낱 기생인 황진이 무덤 앞에서 제를 올리고 시를 썼다고 해서 파직을 당했지만 그는 괘념치 않았다.
그의 행적이며 글의 매력은 정형화된 선비의 틀을 뛰어넘는 파격과 분방에 있다.
그가 남긴 ‘물곡(勿哭·곡하지 말라)’이란 시를 보자. ‘사방팔방 오랑캐들도 모두 스스로 황제라 일컬으며 부르는데 / 유독 조선은 중국이 들어와서 주인 노릇을 하니 / 내가 살아서 무엇을 하며, 내가 죽어서 무엇을 하겠는가.’ 사대주의가 만연해 있던 시절에 이 무슨 배포일까.
세상에 일갈하는 듯한 묵직한 시문도 좋지만 유독 눈길이 갔던 건, 뜻밖에 3인칭 시점의 감성적인 연애시다. “열다섯 살 아리따운 아가씨 / 수줍어서 말 못하고 이별이러니 / 돌아와 겹문을 꼭꼭 닫고선 / 배꽃 사이 달을 보며 눈물 흘리네.” (무어별(無語別) 전문) 감각은 섬세하고 표현은 현대적이다. 백호임제문학관에서는 임제가 남긴 이런 다양한 시를 찬찬히 읽을 수 있다.
금강정에서 바라본 석관정
# 영산강의 정자, 오래된 노거수와 어우러지다
영산강 강변도로를 따라 더 내려가다 보면 죽산면 화동마을에 장춘정이 있다. ‘장춘(長春)’이라니, ‘긴 봄’이다. 고흥 류씨 가문에서 처음 세웠다는 이 정자도 450여 년을 헤아린다. 본래 영산강을 바라보는 정자였겠으나 지금은 영산강 강둑 너머에 있어 강을 볼 수 없는 자리다.
장춘정 / 열린사진공간
강이 보이지 않아도 정자와 은행나무, 푸조나무, 팽나무 노거수와 어우러지며 빚어내는 정취가 훌륭하다. 특히 마당 한쪽에서 가지를 스스로 묶은 것처럼 뒤틀면서 바닥을 기며 자라는 한 그루 향나무가 인상적이다.
출처 : 열린사진공간
장춘정을 지나 더 가면 영산강을 두고 서로 마주 보다시피 하는 2개의 정자가 있다. 이쪽에 있는 게 석관정이고, 강 건너편에 있는 게 금강정이다. 석관정 주변은 지역주민들에게 나들이 명소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정자의 풍류 때문이라기보다는 미루나무 늘어선 너른 강변 습지의 푸근한 정취와 여기서부터 몸을 불리는 영산강의 유장한 자태 때문이다.
석관정
사실 석관정은 좀 당혹스럽다. 기와를 얹었으되 정자의 바닥과 기둥 3분의 2쯤은 반질반질한 화강암이다. 몇 번의 중수를 거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됐다. 정자의 건축미에는 조금도 점수를 줄 생각이 없지만, 정자가 들어선 자리만큼은 더할 나위 없다.
슬쩍 몸을 뒤치며 돌아나가는 영산강의 모습을 보노라면 이 자리를 찾아낸 이의 안목에 감탄하게 된다. 정자 뒤쪽으로는 ‘이별바우(위)’로 가는 오솔길이 있다. 이별바우란 강이 넓어지는 기슭에 봉긋한 섬의 바위 지형을 말하는데, 거기서 배를 타고 떠나는 이들을 배웅했다고 해서 이별바우다.
이별바위
석관정 강 건너편에는 금강정이 있다. 금강정은 무성한 나무로 영산강 쪽 시야가 닫히고 말았다는 게 못내 아쉽다. 코앞에서 마주하고 있지만 석관정에서 금강정을 가려면 차로 30분쯤을 가야 한다. 정자를 오갈 수 있도록 여기다 줄배라도 한 척 매어둔다면 어떨까.
석관정을 지나면 영산강의 물길은 함평 땅을 딛고 무안의 몽탄으로 들어선다. 몽탄(夢灘). 뜻을 풀면 ‘꿈여울’이다. 무슨 낭만적인 사연이라도 있을까 했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여기서 꿈의 계시를 받고 강을 건너 견훤군을 격파했다는 서사적인 이야기가 있었다.
금강정
몽탄에는 식영정(息營亭)이 있다. 담양의 이름난 정자 식영정(息影亭)과 한자가 다르지만 이름은 같다. 명성이야 여기 식영정이 한참 떨어지지만, 정자 주위에 활개 치듯 자라난 아름드리 노거수며, 정자 아래 소박한 마을과 영산강 습지 산책로 등이 매력적이다.
몽탄면 이산리에 위치한 식영정은 고목과 어우러져 영산강변의 정자 가운데에서도 영산강과 들판을 바라보기에 가장 아름다운 풍치를 지닌 곳으로 유명하다.
■ 운치 좋고 결기 깃든 정자
나주에서 ‘최고의 정자’는 벽류정이다. 느티나무와 노송, 그리고 대숲이 어우러진 봉긋한 언덕 위에 들어선 정자는 먼발치에서 봐도 풍류가 느껴진다.
벽류정 / 노을의 세상나들이
더불어 들러볼 곳이 금사정이다.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로 개혁이 좌절되자 낙향한 사림 11명이 모임을 만들어 금사정을 짓고 그 징표로 마당에 동백나무를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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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정은 전라남도 나주시 왕곡면 송죽1리에 있는 정자로, 조선 중기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65(현종 6) 김만영(金萬英), 나기(羅棋), 김이상(金履相) 등에 의하여 재건되었고 1869년(고종 6) 중수하였으며, 현재 모습은 1973년 영산강 범람을 막기위해 제방을 만들면서 이곳에 세워졌다.정면 3칸·측면 2칸 규모로, 대청형 구조다. 동인우리문화답사회
# 표류에서 살아 돌아와 당쟁으로 죽은 선비
식영정에 닿기 전에 강변도로는 무안 몽탄의 ‘늘어지 마을’을 지난다. 마치 촛농이 흘러내린 것 같은 지형에 들어선 마을인데, 강이 U자로 크게 휘돌아 흐르며 만들어낸 한반도 모양의 지형을 감상하는 전망대가 강 건너편에 있다. 이 마을 앞에서 강의 유속이 느려진다고 ‘늘어지’란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무안 땅인 이쪽 마을에서는 ‘늘어지’로 쓰고, 전망대가 있는 강 건너 나주에서는 ‘느러지’라고 쓴다.
전남 나주 동강면에서 바라본 무안 몽탄의 늘어지 마을 일대의 모습. 영산강의 물길이 굽이치며 지형을 한반도 모양으로 만들었다. 강이 빚은 한반도 형상의 지형은 전국 곳곳에 있지만, 대부분이 댐 건설로 수위가 높아져서 만들어진 것. 손대지 않은 자연 하천이 한반도 지형을 만드는 건 드문 일이다. 문화일보
늘어지 마을의 지형과 경관은 강 건너편 나주 동강면의 ‘느러지 전망대’에 올라서 보는 게 훨씬 더 훌륭하지만, 이 마을을 꼭 들러야 하는 건 조선 성종 때의 인물 최부의 자취 때문이다. 늘어지 마을에는 최부의 묘가 있다.
최부는 뜻하지 않은 표류와 모험의 기록을 담은 책 ‘표해록’을 남긴 인물이다. 과거 급제 후 부역이나 병역을 기피한 자를 쫓는 ‘추세경차관’ 벼슬에 임명돼 제주로 부임한 그는, 부친상을 당해 배를 타고 육지로 나오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된다. 두 달 가까이 바다를 떠다니다가 중국 남부 저장(浙江)성 닝보(寧波)에 도착한 그는 해적에 붙들리고, 왜구로 오인되는 등의 갖은 고초를 겪었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내내 의연한 선비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풍랑이 물러가도록 제를 지내자는 뱃사람들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이나, 내내 상복을 갈아입지 않았다는 것에서 그의 투철한 유교정신을 느끼게 한다. 그는 결국 표류 6개월여 만에 한양으로 돌아왔다. 단 1명의 낙오자 없이, 제주에서 함께 떠났던 일행 43명을 모두 이끌고 말이다.
귀국한 뒤 그는 성종의 명으로 당나라 기행 견문을 썼는데, 그 책이 바로 세계 3대 중국기행문 중 하나로 평가되는 표해록이다. 표해록은 지금의 눈높이로도 그의 모험이 흥미진진하기 그지없다. 함께 표류한 인물들의 캐릭터까지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극한의 표류 과정과 위태로운 모험을 견디면서 살아남았던 그는 귀국 후 제법 높은 벼슬자리에까지 올랐다가 무오사화 때 유배를 가고, 갑자사화 때는 참형을 당하고 만다. 당시의 선비에게는 표류보다는, 자칫하면 당쟁에 휘말리게 되는 ‘벼슬’이 더 위험했던 셈이다.
흥미진진한 인물인 최부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건, 그의 숨결이 깃들었거나 그를 새겨둔 공간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공간이나 실체가 없으면 사람은 잊히고 만다. 여기 늘어지 마을에 있는 최부의 묘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몇 안 되는 공간 중 하나다.
묘는 마을 한복판에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최부가 죽어 묻힌 자리가 늘어지 마을이라면, 공교롭게도 그가 태어난 자리는 바로 영산강 건너편 ‘느러지 전망대’가 있는 동강면이다. 동강면 인동리에는 최부의 유허비가 세워진 생가터가 있다.
# 번데기 한 마리가 꺼낸 1500년 전의 얼굴
영산강에서 더 오래전의 과거로 가보자. 나주에는 고대국가 마한시대의 고분이 여럿 있다. 대표적인 곳이 반남 고분군과 복암리 고분군이다. 나주 반남면에 있다고 해서 반남 고분군이고, 나주 다시면 복암리에 있다고 해서 복암리 고분군이다.
두 곳 모두 영산강 권역에 있다. 나주시는 이 두 곳의 고분군과 고대성곽인 자미산성 등을 더해 영산강 고대문화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고대 무덤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더라도, 무슨 볼거리가 되겠냐 싶겠지만 뜻밖에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다.
이쯤에서 알고 가면 한결 더 흥미를 느끼게 될, 복암리 고분과 관련한 이야기 한 토막을 꺼내보자. 복암리의 한 고분에서 금동 신발이 발견됐는데, 그 안에 파리 번데기 껍질이 있었다. 삼국시대 고분에서 곤충이 확인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1500년 전의 파리 번데기가 썩지 않았던 건 우연과 우연이 빚어낸 사건이었다. 금동 신발이 부식되면서 나온 부산물이 파리 번데기 껍질을 코팅하듯 감싸면서 지금까지 보존된 것이었다.
파리 번데기는 1500년 전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됐다. 파리 번데기는 검정파리과에 속하는데, 파리 번데기 번식과정을 통해 죽은 계절이며 시신 안치의 과정을 복원해냈다. 그 결과 시신이 죽은 지 얼마 후에 매장됐는지, 여러 개 머리뼈 중 어떤 게 금동 신발의 주인이었는지도 찾아냈다.
40대 중후반에 키 150㎝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여성이었다. 금동 신발 주인의 머리뼈를 단서로 컴퓨터 프로그램 등을 이용해 골격과 근육을 접합하고 피부 두께까지 반영해 얼굴을 복원해냈다. 복암리 고분 3호분을 1:1 크기로 복원한 고분전시관에는 이런 식으로 복원한 마한시대의 남성과 여성, 그리고 아이의 입체 홀로그램 사진이 전시돼 있다. 우연과 우연이 겹쳐 보존된 파리 번데기 한 마리가 불러낸, 1500년 전 무덤 주인의 디지털 환생이다.
/ 글 문화일보 박경일 전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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