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5.1.26) 말씀/ 이사야 49:5 나답게 사는 그리스도인 나는 여호와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오늘은 신년 첫달 세 번째 주입니다. 한 주가 지나면 설명절입니다. 여러분 지난 한 해를 돌아보니 어땠습니까? 잘 살았나요? 은혜로 살았나요? 지내놓고 보면 항상 느끼는 것이 세월이 참 빠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아쉬움이 남습니다. 기쁘고 슬픈 일들 마음 아픈 일들이야 언제나 있는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삶이 어땠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 삶이 보람이 있었는가 하는겁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엇인가 생존을 넘어 가치있고 의미있게 살고 싶은 선한 욕망이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를 했으면 좋은 성적을 얻고 , 열심히 일했으면 좋은 결과를 얻고, 베풀고 나누었으면 아름다운 열매가 맺혀지기를 바랍니다. 그냥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그렇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백년을 산다고 하는 거북이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초원을 달리는 동물의 왕 맹수 사자가 되고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냥 맹수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단지 돈을 많이 벌고 흥청만청쓰는 재벌이나 최고의스팩을 자랑하며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도 선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돈과 권력과 스펙으로 살아가는 자들일 뿐이기 때문이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입니까? 미국의 작가 에머슨은 인간의 성공대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나로인해 행복해지고, 내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아름다워졌다면 성공한 것이다. 단지 많은 것을 소유하고 화려한 스팩을 갖는 것은 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 살아가려면? 오늘 크게 두가지만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첫째는 나 답게 살아야 합니다. 나 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에레미아 1장 4-7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7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찌니라 하나님이 예레미아 선지자를 인격적으로 부르시면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알았고,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그는 왜 세상에 태어났는지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근원부터 아셨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그 길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부정합니다. 나는 아이이며 나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 나는 슬픕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소서. 하나님이 부르셨는데 그는 그 귀한 부르심을 부정하고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합니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모양이던 하나님의 부르신 대로 사는 것입니다. 못나도 좋습니다. 아이라도 좋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양대로 그 뜻을 좋아 사는 것입니다. 그게 잘 사는 것입니다. 예레미아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지명하여 부르셨는데 자신의 부족함을 바라봅니다. 다른 사람을 보고 자신은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남과 비교하며 살아갑니다. 남과 경쟁했습니다. 남보다 잘 살면 으시대고, 남보다 못하면 열등감에 빠졌습니다. 자기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타인의 삶을 흉내 내며 살았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훌륭한 점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다른 사람을 추월한다고 해도 나는 나입니다. 성공하고 돈을 벌고 권력과 명예를 얻었지만 무엇을 위해 써야할지 모릅니다. 예전에 한국 사람들은 아이들을 8-9명까지 낳았습니다. 우리도 8명인데 두명이 죽고 6명 살았습니다. 그런데 남아 사상이 있어서 딸보다 남아를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다보니 여자 아이가 나면 천덕꾸러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아들 낳으려고 했는데 계속 딸입니다. 속상하니까 이름을 끝순이라고 짓습니다. 또 딸을 낳습니다. 이번에 말순이라고 짓습니다...그러니 이름 자체부터 자기 삶이 없었습니다. 태어나서 누구 동생, 누구 엄마, 누구댁, 이름도 제대로 불리지 못하고 살다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은 남녀 차별이 없는 시대가 되었지만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로 자기 삶을 살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보인도 모르기 때문에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새벽부터 앞만보고 그냥 바삐 살아갑니다. 어느날 신림역 지하철을 지나가는데 특이한 대형 거울이 있었습니다. 그 거울 위에 이런 글이 쓰여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당신답게 살고 있나요?” 그리고 옆에 포토존이 있습니다. 거기에도 글이 있습니다. “지금 나는 나로 살고 있을까?” 모두가 거울을 보고 있는 자신에게 주는 질문입니다. 열심히 살긴 하는데 내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지만 많은 메모지가 거울에 붙어 있습니다. 그 거울 앞에 서면 사람들은 무언가 뼈를 때리는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 글을 보고 누가 이런 말을 답을 달았습니다. “살다보니 순간순간 거짓말하는 나, 남에게 지기싫어 허세부리는 나,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억울해 하는 나. 언봉이 1억이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은 나. 아내와 하루도 살기 싫지만 주변이 두려워 참고 사는 나.” 나는 나이지만 나답게 사는 나는 하나도 없습니다. ‘나 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남을 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한공기 인문학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중년이상의 나이를 좀 먹은 사람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만하면 잘 살았다.“ 왜그런가? 그래도 고생은 했지만 40여평 아파트를 장만했고, 연금도 받도, 현금 잔고도 나름 넉넉하고, 자식들도 괜찮은 대학 나와 안정된 직장에 다니고, 결혼들도 하고,..그러나 이만하면 잘 살은 것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전제하는 것은 남과 비교라는 것입니다. 잘살면 뭐합니까? 잘살아야 자기가 없는 남의 인생아닙니까? 이런 말을 쓰면 안된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주인으로서의 자기 삶을 영위하는데 실패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은 남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관철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결국 다른 사람 상관 없이 스스로의 삶을 만족하며 살고 있어야 그게 잘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스스로 잘 살 수 있을까요? 남들에게서 눈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인정하고 만족하는 나로 키워가는 것입니다. 비교도 나와, 경쟁도 나와 하는 것입니다. 동물학교 비유의 예화처럼 다람쥐는 다람쥐로, 독수리는 독수리로, 호랑이는 호랑이로, 오리는 오리대로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창조의 목적대로 사는 것입니다. 표범이 아무리 잘 달리고 나무를 잘 탄다고 해도 원숭이를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원숭이는 숲속에서 나무를 타며 살 때 왕입니다. 다른 넓은 들에서 표범과 경쟝하면 잡혀 먹힙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세상 만물을 창조하실 때 각자 최고의 존재로 독창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특히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과 비교해서가 아니라 저마다 하나님 앞에 절대적 가치의 존재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능력이 많던 적던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존재이지 모르고 다른 사람을 기준으로 비교하며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늘 수준미달의 아니면 교만하게 살아갑니다. 니체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온전히 자신으로 살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족한대로 자족하는 삶을 살려고하는데 그것은 그에게 무책임한 삶이라 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참된 소명은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일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이 자기 삶의 책임을 의미하고, 나를 책임지고 온전한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본래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목적입니다. 정선주씨가 지은 <학력 파괴자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실제로 대학 중퇴하고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 중에 스티브 잡스, 빌게이츠, 마크 저커버, 래리 엘리슨, 마이클 댈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들 학교를 뛰쳐나와 세계적 기업을 이룬 억만 장자들이 된 사람들입니다. 이 이야기 모두 어떤 틀에 낀 조직 속에 들어가서 남을 따라가다가는 제대로 창의적 자기 인생을 살 수 없기에 학교에서 뛰쳐나와서 독특한 자기 끼를 발산하여 대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다 그럴 수는 없겠지만 자기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 그 존재를 분명히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최고가치의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 49:5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남다르게 살며 성공신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자기를 찾는 질문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예술과 인간에대한 호기심이 강했고 과학기술분야뿐 아니라 세익스피어 플라톤 등고전을 닥치는대로 읽으며 내면에 물음에 대한 답을 찹으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대체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할까? 이런 사람들이 이상적 자신을 찾고 자기에 먼저 도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는 인류에 지대한 공헌을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과연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찾아서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의문이 듭니다. 아마 얼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나를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로 빚으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내가 하나님 앞에 나는 어떤 자인가 질문하고,더불어 인문고전을 읽으면서도 나는 어떤 인간이며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반드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70인생을 살아오면서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감사제목은 늦게나마 하나님 앞에서 나를 찾고 비로소 나답게 나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모든 것이 남과 비교였습니다. 왜 나는 같은 믿음을 가지고도 남보다 못할까? 왜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보다...사람들은 뭔가 자신이 드러나려면 전문 박사학위를 따려고 합니다. 그런데 고생고생 박사학위따서 사람들 앞에 스팩을 자랑하면 뭐합니까? 저는 나답게 분명한 가치관을 가치고 살아가는 사람이 진짜 박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나만의 삶, 나만의 글을 쓰고 나누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세상에 부러울 것도 없는 박사입니다. 내가 사는 여기 무안이 나에게는 꽃자리입니다. 성도수는 작지만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목포대학은 우리 교회 앞마당이고, 승달산은 교회 뒷동산, 신안 앞바다는 우리 바다 정원이 이고, 천사 대교를 지나면 1004개의 섬이 있습니다. 다 아버지 것이고, 내것입니다. 손님들이 오면 힐링 여행할 수 있는 곳이 수없이 많습니다. 돈 하나 지불하지 않아도 천혜의 자연의 혜택을 누리는 이만한 부자가 어디 있습니까? 교수가 되거나 연구실에 들어가 연구르 ㄹ하지 않는 이상 박사가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나답게 살면 여러분들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자, 남 부럽지 않은 박사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남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나답게 사는 것은 인생의 있어서 가장 잘 사는 모습이지만 거기에 그치면 50%입니다. 다음애는 남을 위해 살 수 있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그래야 100% 잘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을 때는 결코 이기적인 존재로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즉 하나님과계와 이웃과의 관계로 이타적인 존재로 나를 빚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잘 산다는 목표 기준이 자기가 아닌 이웃과의 관계로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의 행복은 50% 함께 행복해야 100%입니다. 그러려면 관계의 연결고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 타인과의 연결고리는 사랑입니다. 마태 22:36-40절에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최고의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 하셨습니다. “37...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 율법사는 스스로 어릴 때부터 잘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제로였습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 잘 살 수 없습니다. 혼자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관계의 비밀을 잘 알면 삶의 실타래가 줄줄이 풀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피어르신부님의 '단순한 기쁨'은 금세기 최고의 휴머니스트 자전적 책으로 인정받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이런 말을 합니다. "사르트르는 '타인'이 지옥이라고 썼다. 나는 그 반대라고 확신한다. '타인 없는 나'야말로 지옥이다" 서로 상반되는 말이지만 그 입장에서는 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왼수 놈, 그 죽일 놈, 그 놈 때문에 내 인생을 망쳤어. 지긋지긋해. 타인이 지옥이라는 말에 누구나 공감을 하게 됩니다. 지금도 그런 타인 때문에 피눈물을 흐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정치세계도 보십시오. 한 두 사람들 때문에 온 백성들이 잠 설치고 근심걱정 불안하게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타인이 없으면 왜 지옥이라는 것이지요? 이 말은 쉽게 이해하기 안됩니다. 그러나 피에르 신부의 입장에서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그렇구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타인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타인이란 내가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는 동등한 존재입니다. 타인을 정죄하면 나도 정죄를 받습니다. 타인을 사랑하면 내안에 사랑의 온도가 올라갑니다. 이상하게 사랑할수록 나는 행복하고 천국을 체험합니다. 타인을 사랑할 때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새 힘을 얻고 행복한 자가 됩니다. 최고의 계명인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만 있고 자기 사랑이 없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타인(하나님, 이웃)이 곧 나입니다. 타인은 곧 자기 사랑을 위한 불씨입니다. 타인이이 없다면 나도 없는 것입니다. 사랑할 사람이 없다면 내안에 사랑의 불이 꺼지고, 그 불이 꺼지면 나는 결국 컴컴한 지옥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언제나 사랑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나는 행복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깨닫게 되면 나의 삶의 복표는 당연히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럴 때 나도 너도 우리 모두 행복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왜 이 땅에 태어났습니까?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는 사랑을 받고 태어나 사랑을 받으며 커왔지만 이제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나눠주는 삶을 살아가시길 디도합니다. 타인의 죄로 인해서 고통을 받을 수 있고, 나 때문에 타인도 고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도 나 때문에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타인이 있어서 우리 안에 사랑이 솟아나 꿈틀거리고, 사랑의 역사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간다면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적극적으로 타인을 사랑으로 끌어안아야겠습니다. 타인이 지옥이라도 사랑으로 끌어안을 때 세상이 달라질뿐 아니라 그 사랑 안에서 우리도 참 자유함과 평안함과 천국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결론 잘 산다는 것 두가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결국 나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찾아 나답게 살아야 하고, 또 나만이 아니라 단 한 사람이라도 타인 한 사람을 사랑으로 끓어안고 사는 것입니다. 2025년 정치적 혼돈속에서 출발했지만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화평케해 주시고 오히려 전화위복 되어 모두가 행복하고 아름답게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새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한 해를 뒤돌아보아 우리 모두 스스로 잘 살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나답게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명절기간에도 서로 돌아보는 귀한 시간들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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