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지삼출이나 감골댁이 보부상에 대해 똑같이 거부감을 나타내는 데는 그럴 만한 연유가 있었다. 그때 갑오년에 수많은 농민들이 호남평야를 중심으로 해서 들고일어났고, 공주까지 쳐올라간 농민군들이 신식무기를 가진 일본군과 싸우다가 밀리기 시작하면서 농민군들은 어쩔 수 없이 산으로 섬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과 관군은 먼저 산으로 들어간 농민군들로부터 뒤쫓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의 길잡이 노릇을 해서 수없이 많은 농민군들을 죽이게 한 것이 바로 보부상들이었다.
등짐을 하고 산길을 따라 이쪽 지방과 저쪽 지방을 문지방 넘듯 넘나드는 보부상들은 산길을 샅샅이 아는데다가, 산속의 정보 또한 신속하게 잘 탐지했다. 그뿐만 아니라 산을 타는 발까지 포수 뺨치게 빨라서 그런 길잡이로는 더없이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19)
그런데 보부상들은 농민전쟁 때만 그런 행악질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 뒤로도 나라를 외세로부터 막고 근대화시키려는 대중운동단체인 독립협회에 맞서 그들은 어용폭력단체인 황국협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자체 폭력부대인 봉군을 만들어가지고 만민공동회를 습격하는 한편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폭행을 가했다. 그런 몇 년 뒤에는 또 일본에 합병통치를 해달라고 애원하는 이용구와 송병준을 우두머리로 모시고 일진회에 가담하기도 했다.
(107)
포구에 바닷물이 가득 실려 있을 때 군산 쪽에서 바라다보면 건너편의 낮춤한 산줄기는 바닷물에 그대로 비쳐드는 듯한 정취를 자아냈다. 섬들을 품고 서쪽으로 펼쳐진 바다, 아슴하게 멀고 긴 수평선, 그리고 그 산줄기는 서로 어우러져 그지없이 아담하고 고운 풍광을 이루고 있었다. 그 풍광은 어느 때나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겨 머물게 하는 힘을 지녔지만 특히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치장할 때는 따로 있었다. 물안개가 잠포록이 끼었을 때, 노을이 자욱하게 피어나는 이른 아침이면 그 풍광은 한없이 신비스러웠고, 노늘이 황금빛 현란함으로 타오를 때면 그 풍광은 더없이 황홀했으며, 빛이 사위어가는 달이 적막 속에 기울어져 가고 있을 즈음이면 그 풍광은 그지없이 환상적이었다. 그러나 비가 내리는 날은 비가 내리는 대로 애상적이었고, 눈이 내리는 날은 눈이 내리는 대로 허무적이었다.
그리고 산줄기는 끊긴 듯 이어진 듯하며 동쪽으로 어미줄기를 찾아 뻗어가고 있었는데, 그 오른쪽으로 들판이 널따랗게 펼쳐져 나갔다. 바다와 대칭을 이루고 있는 그 벌판 가운데로 기다란 몸짓을 지으며 유유하게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금강이었다. 몇백리인지 모르게 굽이굽이 흘러내린 금강이 제 몸을 바다에 풀어 맡기는 지점에서 오른쪽 포구에 장항이 자리잡았고 왼쪽 포구로 군산이 앉아 있었다.
(141)
하와이 이민은 노동력 충당을 위해 하와이 사탕수수농장협회에서 주한미국공사 알렌을 통해 교섭하게 한 것이었다. 고종은 1902년 11월에 수민원(綏民院)을 설치하게 하고, 12월 22일 인천항에서 121명을 떠나 보냈다. 그러나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뜻인 수민원은 처음부터 그 직무를 유기하고 있었다. 이민자 121명 중 반 이상이 미국 선교사 존스의 <대한사람이 인간의 천국인 미국에 이민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은혜>라는 설교에 회유된 영동교회 교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도 여러 선교사들이 각 개항장을 중신으로 사람들을 모집하러 다녔다.
(170)
그들이 기쁨에 넘치는 고문정치의 시작이란 제1차 한일협약이었다.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재빨리 군대를 한양에 진입시킨 다음 무력의 위협 아래 한일의정서를 조인하여 조선 안에 군사기지를 확보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그것이 2월의 일이었다. 그 뒤로 러시아군을 계속 궁지로 몰아넣으며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게 되자 그들은 그 기세를 조선정부로 확대시켰다. 재정고문과 외교고문을 초빙하라는 강요였다. 결국 정부는 그 강압에 굴복하여 협정서 체결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1904년 8월 22일이었다. 그 협정에 따라 재정고문에 일본인 메가다가, 외교고문에는 미국인 스티븐스가 앉게 되었다.
(225)
“재산을 더 모을라고 허지 마라. 땅으로 재산을 모으는 것은 결국 농부들의 살을 깎고 피를 빠는 일이다. 세상에 그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느냐. 재산을 탐하면 마음이 썩는다. 마음이 썩으면 죄짓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죄짓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 자가 어찌 바르게 살 수 있겠느냐. 내가 남기는 전답을 주색잡기 하지 않고 간수만 제대로 하면 네 권속 입고 먹는 것은 족하다. 재산을 탐하지 말고 바르게 살도록 마음을 가꾸기에 게을리 하지 마라. 그것이 바른 사람의 길이고, 옳은 양반의 길이다.”
그 탄식을 꾸짖기라도 하듯 쟁쟁히 들려오는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291)
그런데 마침내 을사보호조약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쓴 것이다.
비분에 찬 그 글을 먼저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의 가슴을 쳤고, 그런 사람들의 입을 통해 글을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동양 삼국의 평화를 솔선주선하기로 나선 이토가 천만 꿈밖에 어찌 오조약을 내놓았는가. 개가죽을 쓴 우리 대신들은 일신의 영달만 위해 황제폐하와 2천만 동포를 배반하고 4천년 강토를 외인에게 주었도다. 슬프도다! 우리 2천만 동포여, 살아야 할거나 죽어야 할거나.
(299)
임금을 호위하던 시종무관장 민영환이 할복자결을 했다. 전 의정부대신 조병세가 자결했다. 전 참판 이명재가 자결했다.
그 연이은 자결의 소문은 겨울바람을 타고 산지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배를 갈라 붉은 피 쏟으며 죽었다는 그 소문들은 그전의 어떤 소문들보다도 뜨겁고 거센 파도가 되어 사람이 사는 곳이면 퍼지지 않은 데가 없었다.
그런데, 그 소문들은 단순히 나라 잃은 비분으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민영환이 흘린 피는 방을 넘치고 마루를 흘러 토방으로 떨어져 내렸는데 그 자리에 푸르른 대나무가 솟아났다고 했고, 조병세가 목숨을 끊자 그가 기르던 난초들이 일제히 꽃을 피웠다고 하는가 하면, 이명재가 숨을 거두면서 뜰의 매화나무가 사흘 밤을 통곡했다는 것이었다.
그건 충절을 상징하는 매난국죽에 근거를 둔 이야기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