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한 마디로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종합건강검진'이다. 미국정치학회 회장을 역임한 여성 정치학자인 저자(하버드대 교수)는 역사제도론이라는 내시경으로 미국 민주주의를 지탱해온 시민공동체를 샅샅이 들여다본다. 200년이라는 기간에 걸친 시민공동체의 역사를 탐색한 후 이 의사가 내린 소견은 쇠퇴(diminishment)다.
그동안 민주주의 문제는 주로 행정부와 의회, 언론과 시민운동의 역학관계를 중심으로 다뤄졌기 때문에 시민공동체의 역사를 통해 민주주의의 건강성 문제를 진단하는 작업은 아직 우리 학계에서는 낯선, 혹은 최첨단 학문인지 모른다. 게다가 자생적 민주주의에 가까운 미국의 경우를 민주주의 수입국인 한국과 직접 비교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민주주의 선진국이 겪고 있는 진통을 미리 확인하는 것은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위험을 예방하는 조치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충분히 진지하게 검토할 가치가 있다.
책은 저자가 미국 메인주 노스 러벌 작은 강변에 있는 아담한 공동묘지를 찾는 데서 시작한다. 그곳에는 선량한 농민이자 산림감독원이자 실패공(spoolmaker)으로 살았던 윌리엄 워런 더진(1839~1929)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한 미국인이 잠들어 있다. 저자는 더진의 묘비를 읽어내려 간다.
에이브러햄 링컨과 함께 종군했던 사람으로서 링컨 대통령의 유골을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로 이송한 의장병이라는 글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런 정도라면 누구라도 묘비에 새겨 넣고 싶었을 이력이다. 그러나 저자가 눈여겨본 글귀는 그다음부터다.
사망일 아래에 먼저 남북전쟁 재향군인회(GAR) 지휘관이라고 새겨져 있다. 상사로 전역한 더진은 남북전쟁이 끝난 후 결성된 북군 퇴역군인들의 모임에서 지역 지부장으로 선출됐었다. 그 아래에는 'P.of H.'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농민공제조합의 약자로, 더진은 노스 러벌의 농업공제조합원이었다. 그리고 저자는 묘비 윗부분에 가늘고 긴 세 잎의 리본이 장방형으로 얽혀 늘어져 있는 것에 주목한다. 더진은 당시 미국의 주요한 우애결사체인 오드 펠로스 독립결사(Independent Order of Odd Fellows)의 회원이었다.
저자는 "내가 미국정치학회나 미국역사사회과학회 회원 경력을 묘비에 새겨 넣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라며 왜 더진이 그런 이력을 묘비에 새겨 넣게 되었는지를 추적한 것이 이 책의 전반부다.
미국은 결사체의 공화국이었고, 그것을 자랑스러워했으며, 그런 다양한 결사체가 미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왔다는 것이 저자의 관점이다. 토크빌이 주저인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보았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정치적 결사는 다수의 사람을 동시에 자신의 경계 밖으로 끌어낸다. 본래의 연령이나 지능, 재산에 따른 거리감이 적지 않더라도… 그들이 한 번 만나게 되면 다시 재회할 수 있는 방법은 늘 존재한다. …정치적 결사는 수업료 없는 위대한 학교인 동시에 국민 모두가 결사의 일반이론을 학습하는 장이라고 간주해야 한다."
저자가 볼 때 미국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담보해주던 이 결사(結社)가 바뀌어버렸다. 계급을 초월해 시민들이 정기적으로 참여하던 자발적 멤버십 연합체는 급속하게 쇠퇴한 반면, 엘리트와 전문가가 주도하는 시민조직이 대거 등장한 것이다. 참여는 사라지고, 경영만 남았다. 책의 부제도 그래서 '미국 시민생활에서 나타난 참여(membership)에서 경영(management)으로의 변화'이다.
당연히 왜(why)라는 질문을 두고 격렬한 논쟁이 예상된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공민권운동, 페미니즘운동, 소수민족의 권리와 공익목표를 주장하는 다양한 운동은 전문가들이 운영하는 결사와 단체를 증가시킨 반면 계급을 뛰어넘는 회원들을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인 결사체를 퇴조시켜 미국의 시민사회를 본의 아니게 재편하는 요인이 되었다.
'본의 아니게'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격렬했던 시민운동이 오히려 시민 없는 시민단체와 시민운동을 탄생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과정은 전혀 다르지만 시민 없는 시민운동, 명망가만 남은 시민운동, 정치적 진출을 꿈꾸는 엘리트 전문가들이 이끄는 시민운동이라는 결과는 한국 사회도 다를 바 없다.
책의 마지막 장의 제목은 '쇠퇴한 미국 민주주의 되살리기'다. 하지만 아쉽게도 명확한 대안은 없다. 그저 토크빌이 보았던 그 활력 넘치는 민주주의의 실천을 가능하게 해 주었던 옛 미국인의 능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자고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