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 영화는 일본 영화의 패션이다. 할리우드에 갱스터 장르가 있고 한국에 조폭 영화가 있듯이 일본에는 야쿠자 영화가 있다. 사무라이 영화는 야쿠자 영화와 다르다. 사무라이는 과거로의 시간적 회귀가 있어야만 등장하기 때문이다.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것도 야쿠자의 특성과는 사뭇 다르다. 게이샤가 일본 음지 문화의 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면 사무라이는 가장 일본적인 사상적 핵심을 노출시킨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처럼 화려한 액션을 동반하며 정신의 높은 곳까지 치닫는 영화도 있지만 일본 내에서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사무라이 영화는 대중적인 패션에 치우치고 있다. 그러나 야마다 요지의 [황혼의 사무라이]는 다르다.
가난한 하위무사 세이베를 등장시킨 후지사와 슈헤이의 시대소설 중에서 3개의 단편을 엮어 구성한 [황혼의 사무라이]는, 주군에 대한 의리와 명예를 생명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사무라이 정신의 과장된 노출이 아니라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소시민으로서의 사무라이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아내는 폐병으로 죽고 치매에 걸린 노모를 모시며 두 딸과 함께 살아가는 이구치 세이베(사나다 히로유키 분)는 성의 곡식 창고에서 일하지만 일과가 끝나면 술 한 잔 걸치자는 동료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곧바로 집으로 귀가해서 빨래하고 장작 패고 부업으로 새장까지 만들어야 한다. 겨우 50석을 받는 미천한 지위지만 그나마 아내와 노모의 병치레로 빚을 져서 30석 밖에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이베는 자신의 궁색한 삶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황혼의 사무라이]는 그렇다고 미천한 사무라이의 남루한 삶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세이베는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살상을 싫어하고 곡식을 일구며 농부로 살아가는 삶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힘들고 초라한 삶이지만 세이베는 가족을 사랑하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다. 일상적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무라이 캐릭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세이베는 소박한 땀과 긍지가 배어 있는 일본 사무라이의 새로운 전형을 창조하고 있다.
막부 말기의 혼란한 정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황혼의 사무라이]는 사랑 이야기의 또 다른 변형처럼 보인다. 영화의 도입부는 세이베의 미천하고 남루한 삶을 묘사하는 데 바쳐져 있다. 세이베의 친구 여동생인 도모에가 등장하면서 멜로적 성격을 띄기 시작한다. 남편의 폭행을 견디다 못해 이혼하고 오빠의 집으로 도망친 도모에(미야자와 리에 분)는 어린 시절부터 가까운 사이였던 세이베의 집을 방문해서 세이베의 어린 두 딸과 놀아주고 빨래와 청소도 하며 집안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러나 400석 규모의 도모에 집안과 50석에 불과한 세이베의 집은 차이가 있다. 도모에와의 재혼을 권하는 친구의 간접적 청혼을 세이베는 거절한다. 처음에는 사랑만으로 버틸 수 있겠지만 결국 도모에가 남루한 삶에 절망하고 불행해질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세이베의 이런 지적은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이타적인 삶을 지향하는 세이베의 인생관을 보여주고 있다.
뛰어난 검객인 도모에의 전 남편과의 결투씬이 등장하면서 뛰어난 사무라이로서의 세이베의 숨겨진 모습이 드러난다. 진검을 들고 거칠게 달려드는 도모에의 전 남편을 세이베는 목검으로 간단하게 제압하고 이 소문은 성 안에 널리 퍼진다. 천황이 죽고 후계자가 결정되는 과정에서 파가 엊갈리면서 세이베는 성주로부터 마을 내의 반대파 핵심 사무라이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살상을 싫어하는 세이베는 끝까지 고사하지만 명령을 어기면 추방하겠다는 말에 최고의 검객 요고를 처치하기 위해 그를 찾아간다.
세이베는 최후의 결전을 치르기 전 도모에를 집으로 부른다. 기모노 정장을 입고 머리를 매만지고 다시는 돌아올지도 모를 결전을 위해 집을 떠나면서 도모에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황혼의 사무라이]에 묘사된 세이베와 도모에의 멜로씬은 손을 잡는 게 전부다. 그 흔한 키스씬도 없다. 하지만 우리들로 하여금 그 어떤 영화에 묘사된 남녀의 격정적 애정표현을 훨씬 상회하는 농도 짙은 감정의 파고를 경험하게 만든다. 누드집 [산타페]를 찍고 스모 선수와의 결혼과 이혼 등으로 90년대 일본 문화를 떠들썩하게 했던 미야자와 리에는 어느덧 30대 후반이 되어 성숙한 내면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움직임은 작지만 안으로 숨어 있는 격렬한 감정이 뜨겁게 우리들에게 전달되는 것은 물론 두 배우의 뛰어난 연기 때문이지만 감정곡선의 리듬의 고삐를 조절해가며 넘치지 않고 모자라지 않게 흐름을 장악하고 있는 야마다 요지 감독의 연출은 더할 나위없이 좋다.
영화의 결말 부분에 배치되어 있는 세이베와 요고의 대결씬도 여타의 사무라이 영화와는 사뭇 다르다. 흔한 액션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삶의 회한이 모두 들어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