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행복해지려고 종교를 찾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 행복은 포트와인 한 병으로 얻을 수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당신이 참으로 안락함을 느끼기 위해 종교를 원한다면
나는 결코 기독교를 권하지 않겠다.
-C. S. 루이스
몇 년 전 아내 패티와 일본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우리를 초청한 사람들이 한가한 오후 시간에 세계에서 가장 급성장한 교단을 방문하자고 제의했다. 그래서 일본인 목사 세 분과 우리 부부는 작은 도요타를 타고 도쿄 근처의 어느 언덕으로 향했다.
복잡한 거리를 통과하여 이리저리 빙빙 돈 후, 마침내 우리는 도로 양쪽에 나무가 가지런히 서 있는 아름다운 길로 들어섰다. 그 길 끝에는 PL 교단(Perfect Liberty Church) 본부 입구임을 표시하는 위풍당당한 검은 문들이 서 있었다. 같은 종파의 신도들만 입장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문틈으로 엿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안쪽에는 잘 가꾸어진 녹색 잔디가 멀리 골프장과 연결되어 끝없이 펼쳐져 있고,차도는 정문을 지나 예술적으로 잘 다듬어진 일본식 정원으로 둘러싸인 우아한 하얀 저택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탑 모양의 지붕만 아니었다면 제퍼슨 기념관이나 위싱턴 기념관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 안에는 3,000명의 신도들이 거주하는 ‘마을’이 있다고 했다. PL 교단은 인공 호수와 벚꽃 나무와 폭포로 단장된, 일본에서도 가장 완벽한 위락시설을 갖춘 단지라고 했다.
그 창립자들이 ‘낙원’이라고 불렀던 이 대규모 단지에 우리가 넋을 읽고 있는 동안,안내자가 PL 교단의 단순한 교리를 설명해 주었다. 인간 모두는 자신의 개체적 특성을 자유롭게 훈련함으로써 영원한 평화와 안녕으로 이끄는 도를 발견할 수 있는 신의 자녀들이다. ‘모든 삶은 예술’이므로 기도나 골프, 혹은 집단 섹스 속에서도 자신을 자유롭고 창조적으로 표출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아무 제약 없이 개성을 표현하는 일이며, 그 결과 완전한 희락과 성취감을 맛볼 수 있다. 이 종파에서는 이런 운동이 확산될 때 머지않아 모든 악이 사라지고 인류는 완벽한 자유와 조화 속에 살게 될 것이라는 유토피아적 환상도 약속하고 있다. 이러한 PL교단의 특성상 10년 만에 거의 100만 신도를 확보하면서 일본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종교가 된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또한 PL 교단은 가장 부유한 종파이다. 왜냐하면 이 교단에서는 바치는 행위를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신도들은 ‘보물가방’을 제단으로 가지고 온다.그들의 헌금통은 언제나 흘러 넘친다.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있는데 왜 인색하겠는가?
미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PL 교단에서 발간한 책자를 읽었다. 나는 가끔씩 패티를 꾹 찌르며 터무니없는 말이 나오는 부분을 보여 주었다.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야.”
한 부분을 가리키며 내가 말했다.
“생각해봐! 행복할 수만 있다면 하고 싶은 걸 다 해도 좋다는 소리라구. 그러면서도 그걸 교회라고 부른다니!”
몇 시간 후 LA에 있는 한 호텔에서 여장을 푼 우리는 TV를 켜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마침 우리의 관심을 끄는 프로가 있었다.
엄청나게 크고 화려한 세트 한 가운데 놓여 있는 지나치게 푹신해 보이는 소파에 어떤 남녀가 앉아 있었다. 거대한 스텐인드 글라스 창문을 불빛에 어른거리고 그 옆 쪽으로는 검은 벨벳 위에 예수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각 모서리에는 큰 종려나무가 서 있었고 흰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소형 그랜드 피아노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소파에 앉은 두 사람이었다.
남자의 새치 있는 곱슬머리는 강력 스프레이로 고정되어 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매력적인 그의 부인이 아니었다면 검은 눈동자와 콧수염은 그를 서부 개척 시대의 악당처럼 보이게 했을 것 같았다. 그의 부인은 주름진 퓨셔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높이 틀어 올린 전형적인 남부의 미인이었다. 그녀는 성경책을 들고 얌전하게 앉아서 이따금 남편을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거나 스튜디오의 청중을 돌아보며 그들의 동의를 유인하듯 고개를 끄떡였다. 우리가 시청하던 20분 동안 남편의 머리가 고정된 것처럼 그녀의 미소도 그대로 고정되어 있었다. 얼굴 표정을 바꾸면 화장이 망쳐질까 봐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를 흥분시킨 것은 그 우스꽝스러운 설정과 의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그 프로가 전하고자 했던 기독교 메시지였다. 진행자는 “당신은 완전한 평화와 희열, 행복과 번영을 소유할 수 있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고통 받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에 단지 간구하기만 하면 주신다고 했다.
구하라, 그러면 풍성히 받을 것이다. 그렇다. 풍성하고도 풍성하고도 풍성하게!
그것은 대단한 명연기였다. 그 남자의 몸집과 목소리의 변화는 고도로 계산된 것이었다. 그는 한순간 격렬한 웅변으로 시청자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는가 하면,눈물을 자아냈고, 이어서 위로하듯 달콤한 분위기로 이끌어 갔다. 옆에 앉은 부인은 시종 고개를 끄덕이면서 남자를 선망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물론 청중들은 진행자에게 완전히 조종당하고 있었다.
패티와 나는 일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심코 서로를 찔러댔다.
“정말 말도 안돼……생각해 보라구. 저러면서도 교회라고 부르다니…….”
갑자기 나는 하던 말을 멈추고 말았다. 패티와 나는 서로를 응시했다. 우리 두 사람은 그 순간, 방금 텔레비전에서 본 것과 일본의 PL 교단에 고나해 보고 들은 것이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PL 교단은 기독교회된 불교였을 뿐이다.
이것은 단지 특정 TV 프로그램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그 우스꽝스러운 불교 종파의 문틈으로 보았던 것은 우리 교회가 겪고 있는 정체성의 위기, 바로 그것이었다.
교회 정체성의 위기는 우리 문화 깊숙이 배어 있는 소비자 심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신도들이 거주지 교구에 자동적으로 소속되는 카톨릭 같은 교단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자유롭게 교회를 선택할 수 있으며 자신이 할 일도 자유롭게 결정한다.
사람들에게 교회에 기대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은 ‘친교’이다.
그 외의 대답으로는 ‘훌륭한 설교’, ‘음악 프로그램’, ‘자녀들을 위한 청소년 활동’, ‘편안한 마음’ 등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자기 취향에 맞는 교회를 찾아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
이것이 바로 이른버 ‘맥처치’(Mc Church) 심리이다.
오늘은 맥도날드에서 빅맥 버거를 먹고, 내일은 웬디스에서 샐러드를 즐긴다. 아니면 칙필에이(Chick-Fil-A)에서 맛있는 치킨 샌드위치를 먹을 수도 있다.
이처럼 교회는 소비자의 취향에 맞추는 소매점이 되었고, 신앙은 일개 상품으로 전락해 버렸다.
현대인들은 교회와 목사를 자주 바꾼다.
심지어는 거래 은행이나 단골 식료품 가게를 갈아치우듯이 교파까지 쉽게 바꾸어 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종교 소비자들의 욕구는 여론 조사에 잘 나타나 있다. <유에스에이 투데이>에서 시행한 조사에 의하면 전체 미국인 중 56퍼센트가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데, 그 중 45퍼센트는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26퍼센트는 ‘마음의 평화와 정신적인 안정’ 때문에 교회에 출석한다고 응답했다. 이 조사 결과 교리 문제는 그리 중요시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교회 출석자들은 종교에 “내적이면서 주관적인 성격의 보상을 기대하고” 있었다.
한 사회학자의 관찰에 따르면 이 조사 결과는 ‘자아도취적인 문화’(culure of narcissism)의 반영에 불과하다.
그러나 교회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것 같다.어떤 유수한 전도 잡지에서는 그 조사 결과를 보고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 중 71퍼센트가 자신들의 교회 참여에 긍정적이고 열성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 조사 결과를 격찬하기까지 했다.
소비자 심리를 지닌 교인들의 행태를 보여주는 또 다른 징표가 있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기독교 전문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책들이 자아 존중, 자아 실현, 자아 분석 등에 초점을 맞춘 ‘예민한 감정 문제’를 다룬 것들인 반면, 경건 서적이나 선교사의 전기는 한쪽 구석에서 먼지만 쌓여 간다고 한다. 자기 희생을 격려하는 서적들도 역시 마찬가지 처지이다.
이처럼 종교에 심리적인 보상을 원하는 태도는 흔히 접할 수 있다.
패티와 내가 수년에 걸쳐 전도한 두 친구도 바로 그런 경우이다. 어느 주일 우리 부부가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를 방문했을 때, 그들은 우리와 함께 교회 가는 것에 동의했다. 교회 가는 길에 그들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오늘은 목사님이 제 기분을 좀 풀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지금 기분이 너무 나쁘거든요. 오늘 아침 집 뒷문 앞에서 죽은 새를 보았더니 기분이 몹시 안 좋네요.”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또 한 친구는 유니티(Unity) 교회에 나간다고 했다.
“아니, 왜? 자넨 그리스도인인데, 유니티는 이단 아닌가?”
“이단이라고?” 그는 놀라는 듯했다.
“물론이지, 그 사람들은 부활도 부인하고 유일신도 부정한다구.”
내가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쨌든 우리 부부는 매주 만족하네. 교회에서 돌아올 때마다 기분이 훨씬 좋아져서 돌아오니까.”
이와 같이 ‘기분이 좋아지는’ 종교에 대한 요구가 증가함에 따라 세상의 연구자들조차 이것이 교회생활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주목하게 되었다.
1990년 어느 주간, <뉴스위크>의 커버스토리는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에서 일고 있는 극단적인 종교 부흥 운동에 관한 것이었다. 그 기사에 의하면 베이비붐 세대의 80퍼센트 이상이 “종교를 믿고 있으며 사후의 삶도 믿는다”고 답했다. 그러나 예전의 부흥 운동과 달리 지금 시대의 종교에 대한 목적은 (거듭난 정통파 신도들을 제외하고) 구원보다는 지원, 거룩함보다는 도움, 권위 있는 교회의 인도보다는 영적으로 동등한 사람들의 서클이다. 집단에서의 자기 확인이 교회 선택의 가장 우선적인 기준이 되고 있으며, 바로 이것이 가장 적게 요구하는 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수요가 가장 커지는 이유인 것이다.
사실상 많은 현대인들이 찾고 있는 것은 영적인 사교 클럽이다.
이것은 삶에 즐거움을 제공할지 모르지만, 사람들의 생활 태도나 믿음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정통적인 입장, 즉 개인의 선택에 따른 행동을 어떤 식으로든지 제한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할 때마다 ‘구태의연’하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마치 신앙의 내용들이 다수결이나 시장 조사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것처럼 말이다.
영적 소비자들은 교회가 추구하는 바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배달해 주는 상품에 관심이 있다.
따라서 45세 이하 세대 중, 자신들을 독립적인 영적 추구자라고 규정하는 60퍼센트는 신앙이 한 가지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그 결과 그들은 “입맛에 맞게 섞어 먹는 샐러드바 같은 영성을 지닌 세대”가 되었다.그래서 그들에게는 정통 신앙이든, 뉴에이지 운동이든 상관이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종교가 결국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같은 영적 소비자 심리는 교회에 무언의 압력이 된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장로교 여러 교파의 신도수가 격감하였다고 한다. 그 연구 책임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목회자들이 ‘주일 아침 교인들이 왜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교회에 나오는가’하는 질문을 반드시 스스로 던져 보기를 권합니다. 교회는 이제 다른 여가활동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케이블 TV, 닌텐도 전자게임, 테마 파크, 헬스 클럽 등과 경쟁하고 있다.
만약 사람들이 종교를 하나의 상품으로 간주하고 있다면 교회는 이에 맞서 경쟁력 있는 상품을 제공해야 한다고 스스로 합리화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결코 의식적인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통 교히 대신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고 기분 좋게 해 주는 특효약을 제공하자고 결정하는 교회 당회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들은 교인 수를 늘리기 위해 가능한 한 잘 먹혀 들어가는 메시지를 전달하라는 압박을 느낀다. 이와 같이 그 과정은 아주 서서히 진행된다. 이 부분에서 조금 합리화시키고, 저 부분에서 조금 눈감아 주는 식으로 말이다.
이제 소개할 어느 교회의 영적인 모험은 그러한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었으며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오랜 전통이 잇는 침례교회를 담당하고 있는 담임목사는 교인들의 평균 연령이 계속 높아진다는 것(교회 성장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것은 아주 위험한 징조다)을 알고 나서, 교회 주변의 부유층 가정을 대상으로 시장 조사를 실시했다. 그 조사에서 발견한 첫 번째 사실은 교회에 참석할 가능성이 있는 대부분의 잠재적 시장층이 ‘침례교’라는 이름 때문에 교회 참석을 꺼린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교파라는 딱지를 달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알기 원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무엇이도움이 되는지 압니다.”
그 목사가 <뉴스위크> 기사에서 털어놓은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확실한 해결책은 무엇인가? 교회 이름을 고치는 것이다.
조사에서 발견된 두 번째 문제, 즉 교통 편의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그 교회는 고속도로 가까이에 교회를 신축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을 망설이게 하는 요소는 일절 없애 버렸다. 600만 달러가 소요된 이 신축 건물은 대들보로 천장을 받치도록 설계하였고 바비큐 파티를 위해서 거대한 석재 벽난로까지 갖추었다.
십자간, 종교적 상징물을 일절 없애 버렸기 때문에 마치 관광 목장처럼 보였다.
이런 조치들은 단지 접근을 용이하게 하고 친근감을 주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며, 결국에는 전통적으로 통용되는 신학 용어들도 없애 버리기로 결정했다.
“오늘날의 신도들은 속죄나 회개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면 속박이라고 생각한다”고 그 목회자는 설명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지옥불과 저주”에 관련된 설교를 없앴다고 하면서 직접 제작한 성경을 자랑스럽게 보여 주었는데, 그것은 맥처치 세대에 꼭 알맞는 것이었다. 그 책에는 필요한 성경구절들이 모두 큰 활자로 인쇄되어 있었고, 30분씩 30회에 걸쳐서 읽도록 편집되어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과 세대들의 신비를 단 15시간 만에 다 소화할 수 있다니!
이런 교회의 교인들이 교회에 열성적인 것은 당연하다. “우리 교회는 교리보다는 사람을 더 귀중히 여깁니다. 모두들 생명과 사랑과 자유를 존중하지요.” 한 교인이 열정적으로 말했다. 또 다른 여자 교인은, “우리 교회는 사람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친지들이 우리 교회를 방문해 보고 무척 부러워했답니다.” 하고 자랑했다. 왜 아니겠는가? 부러워할 수밖에 없다.
미국 전역의 교회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숨기고 맥처치 소비자들에게 손짓하고 있다. 심지어 보수 진영의 아성인 덴버 시의 순복음교회(Full Gospe Chapel)조차도 행복한 교회(Happy Church로 개명해 버렸다. “그래야 교인들이 모이니까요.”그 교회 목회자의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 교회는 바로 얼마 전 780만 달러짜기 쇼핑 단지를 인수했으니 말이다.
성공한 자 앞에서 무어라고 반박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종교 소비주의에 영합하는 행위가 교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만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그 같은 행태는 성경의 메시기를 희석시킨다.
일부 성직자들은 설교에서 죄라는 말을 간단히 제거해 버렸다. 영적인 분별력은 정신요법으로 대치되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순조롭게 살아가는 것을 돕고, 언제나 풍성하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결코 당신에게 “안돼”라고 말하면 안되는 존재이며, 당신에게 유감을 표시해서도 안되는 존재인 것이다.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도 이런 현상을 우려한다. 그는 성직자들 사이에 “죄나 속죄와 같은 성경 언어를 희석시킨 나머지, 예수를 자신의 행복과 자아 완성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고 강하게 비난한다.
둘째,
시장 논리에 영합하는 행위는 성경 여기저기를 생략하는 것이 그치지 않고 교회의 본질 자체를 변질되게 만든다.
교회는 이제 예배 공동체에서 생활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장소로 변해 버렸다.
벨라의 연구에서 보고된 대로 교회 친교의 의미는“나는 그들(다른 교인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저 아름답고 특별한 사람들이 스스로 얼마나 훌륭한 존재인지 경험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로 변질되었다.
이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뜨거운 욕탕 속에 서로 마주앉아 물을 끼얹어 주면서 상호 지지를 확인하는 일에 불과한 것이다.
J. I. 패커가 ‘욕탕의 종교’(hot tub religion, hot tub; 휴식이나 치료를 위해 여러 명이 몸을 담그는 온수 욕조-편집자 주)라고 지칭한 바 있는 이런 교회는 사람들을 좀더 편안하게 느끼도록 해주는 것이면 무엇이냐 다 받아들이려 한다.
이렇기 때문에 한때 미 상원의원과의 밀회 사건에 연루된 바 있으며, <플레이보이> 지에서 누드 모델을 했던 전 미스 버지니아 타이 콜린즈는 최근에 등록한 장로교회에서 아무런 부끄럼없이 열성적으로 활동 할 수 있었다. 그녀는 교회 봉사활동이 자신에게 “무척 성취감을 준다” 고 말한다. 콜린즈는 교회 출석이 누드 모델 활동에 영향을 주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 교회에는 <플레이보이>지에 나왔던 사람들이 많은걸요.”하고 대답했다.
셋째,
시장 논리에 영합하는 행위는 복음을 왜곡한다.
교회가 고통과 슬픔에 빠진 자들, 곤궁에 처한 자들을 심령을 스스로 발견하고 치료하기 위해 자기 내부로 침잠히도록 이끄는 자아실현적 정신요법은 전혀 다른 것이다 나중에는 논의하겠지만, 자아실현(self-realization)과 하나님 실현(God-realization)은 서로 상반된 것이다.
복음은 우리의 소망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아를 잃어버리는 데 있다고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속이는 것이 우리 속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죄로 인해 상처투성이가 되어 버린 우리 삶의 싶은 곳을 정직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내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회개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가 우리를 깨끗이 씻을 수 잇도록 자신을 죽이게 되는 것이다.
자아에 순응하는 일, 즉 자신의 뜻과 욕구를 따르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결코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하버드 대학의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기독교 평신도인 로버트 콜즈는 말한다. “자아에 순응하거나 이에 적응하려는 행위는 신에 대한 불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가장 평범하고 조잡한 것을 묵인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거나 자기 가치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치료요법적 복음은 아주 위험한 것이다.
이같은 복음은 심리 치료에 그치지 않고 건강과 부의 종교로, 구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신다는 식의 이단으로 가는 첩경이다. 이런 형태의 신앙은 텔레비전 복음전도자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보수적인 교회에까지 퍼져 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로버트 틸튼 같은 목사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헌금을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치료요법과 물질적인 보상의 약속을 통해서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일 수는 있다.
그렇지만 마약을 무료로 나누어 주는 것으로도 동일한 기능을 할 수 있다. 어느 것이 더 해로운지는 토론해 볼 일이다.
넷째,
소비자주의에 영합하는 것은 교회의 권위를 박탈하는 행위이다.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복음은 현대의 가장 위험한 운동에 그 기회를 제공해 준다. 현대인에게 결여되어 있는 윤리 문제는 눈감아 주면서 내적 평화만을 제공하고자 하는 시도는 뉴에이지 운동과 위험할 정도로 흡사할 뿐만 아니라 그 운동을 그럴듯하게 믿게 해준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미국인들의 80퍼센트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데도,그 중 절반이 초감각적 인지력을 믿고 있고, 3분의 1 이상이 정신적 텔레파시를 믿고 있으며, 4분의 1은 환생을 믿고 있고, 5분의 1은 죽은 자들과 접촉을 가진 적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1,500만 이상의 미국인들은 ‘거듭남을 주장하는 기독교’는 너무 시대에 뒤떨어졌고,개신교와 유대교는 지나치게 세련되지 못했으며, 카톨릭은 너무 교황 중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로 모이는 대신, 깊은 산속이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수양원, 또는 점치는 사람들의 신비한 치유 능력이 나타나는 곳으로 모이는 것이다.
교회는 시장의 압력에 끌려감으로써 진리를 천명해야 할 권위를 박탈당했으며 교인들을 책망할 힘마저 잃어버렸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는 더 이상 제자도 없고 훈계도 없다. 현대 미국인들에게는 낮설고 고루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교회의 역할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다.
교회가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놀랄 일이 아니다. 교회는 장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교회에 나간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이유이다. 우리는 교회를 잘못된 기준에 따라 평가함으로써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수년에 걸쳐 나는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여 왔다. “목사님의 교회는 잘됩니까?”라는 질문에, 극히 드문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목회자들이 수량적인 의미로 응답했다. “등록교인 수가 20퍼센트 증가……지난 해에 세례 받은 자가 100명…… 새 성전 건축…… 주일 3회 예배드림…….”
이처럼 교회의 성공 기준을 숫자와 동일시할 정도로 세속적인 문화 가치가 교회를 사로잡아 버렸다.
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하지 않고 있다면, 무언가가 잘못된 것이다.아마 목회자나 당회가 시장 분석을 충분히 하지 못했거나, 적절한 프로그램에 투자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 성장은 오늘날 종교계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모으는 일이 되어 버렸다. 만약에 ‘고객이 왕’이라면 고객의 요구에 응하는 다른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고객인 교인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이것은 곧 올바른 시장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어느 교회 성장 운동(CGM) 지도자의 말에 의하면 목회자의 능력은 복음에 대한 충성도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교인 수와 헌금액’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올바른 전략만 세우면 성장에는 문제가 없다. 문제가 있다면 오직 올바른 성장 공식을 어떻게 세우느냐이다. 이 같은 목적을 위해 많은 전문 기관들이 상업적인 시장 분석가나 정치 캠페인 전략가들이 제공하는 것과 동일한 서비스를 교회에 제공하고 있다. 이 서비스 중에는 여론 조사, 시장 조사, 설교내용 분석, 교회 이미지 전략, 홍보 전략, 상품 이름 붙이기 등이 있다.
교회 성장 사업은 대형 사업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는 대형 기업들을 앞 다투어 모방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 성장에 관한 책자들에는 흔히 생산품, 서비스, 투자 등의 용어가 등장한다. 얼마만큼의 시간과 자금을 어떤 특정 계획에 투자하면 Y라는 결과를 산출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성공적인 기업 원리가 교회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낳으리라고 생각한 한 대형 교회는 IBM 제록스, 디즈니월드 같은 기업에 연구팀을 파견하기도 했다.
물론 교회의 성장 자체가 그릇된 것은 아니다. 또한 시장 전략 자체가 본질적으로 그릇된 것도 아니다.
예컨대 몇몇 교회에서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더 적극적인 전도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윌로우크릭 교회도 그런 교회 중 하나이다. 윌로우크릭 교회는 미국에서 가장 급성장하고 있는 교회 중 하나로서, 시카고 근교를 대상 지역으로 삼고 있다. 이후에도 거론하겠지만 윌로우크릭 교회는 지적인 전도 테크닉의 가치를 잘 입증해 주고 있다. 가령 교회 인근 지역에 대한 여론 조사를 실시하여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낸 다음, 그에 적합한 매력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사람들의 발길을 예배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문제는 성경의 진리와 단순한 테크닉과의 차이를 혼돈할 때, 선교나 말씀이 타협당할 때 발생한다. 윌로우크릭과 같은 많은 교회들은 이 양자간의 균형을 올바로 유지하였다. 멋진 음악과 짧은 연극, 화려한 연주 배후에는 항상 정통신앙에 근거한 견고한 메시지가 자리잡고 있어서 교인들의 영적생활을 심화시켜 준다.
실제로 교회 성장은 하나님의 축복의 표시일 수도 있다. 성령 강림 후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도 분명히 그랬다.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회개했고, 첫날에 3,000명이나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주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셔서 하루에 5,000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것은 CGM의 가장 뛰어난 전락가들조차 부러워할 만한 교회 성장이었다. 그러나 그 수를 더하신 것은 주님이시지, 성장 전략 전문가들이 아니었다.
바로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교회가 재미있는 연극이나 현대적 감각의 음악을 이용한다거나, 교인들을 위한 운동 시설을 갖춘다거나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철저히 정통적인 신앙에 입각한 교회가 거룩하게 살 것을 담대히 외치면서도 지속적으로 성장한다면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누구나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식의 설교로써 교회 성장을 이룬다면 그것은 인간이 만든 성장에 지나지 않는다.
리처드 뉴하우스는 “성장을 위한 성장, 인간이 만든 성장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죽이는 것이 될 수 있다. 인위적인 성장은 영적으로 죽은 목회의 마지막 피난처이다”라고 말한다.
교회의 원로와 제직들은 양적 성장이 아닌 영적 성장을 위해서 목회자들에게 압력을 넣어야 할 것이다.
또한 교회 성장이 성공의 척도가 아닌 것처럼 교회 성장이 잘 안된다는 것이 실패의 표징은 아니다.
남부 캘리포니아에 있는 어느 작은 침례교회의 젊은 목사 브라이언 씨의 경우를 보자. 나는 연사로 초청받았던 모임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모임이 끝난 후 그가 나를 공항까지 전송하였는데, 자동차가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동안 나는 모든 목회자에게 하는 질문을 그에게도 던졌다.
“목사님 교회는 잘됩니까?”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실은 교인 중 일부를 잘라냈습니다.”
그는 내가 실망했으리라는 듯이 내 얼굴을 힐끗 보았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교인 중 절반을 잘라냈지요.”
“왜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처음에는 교인 수가 220명이었는데 아무런 영적 변화가 없었습니다. 제 말은 우리 교회가 영적으로 죽어 있었다는 거지요. 제가 무슨 설교를 해도 전혀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집사님들과 저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당신의 백성들만 이곳으로 보내주십시오. 우리는 회개하며 진정으로 자신을 온전히 주님게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을 원합니다. 그런 사람들만의 모임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심지어 교인들이 줄지어 들어올 때에도 우리는 교회 문 앞에 서서 마음속으로 이런 기도를 드렸지요.”
브라이언 목사는 말하는 도중에도 혹시 내가 자신의 정신 상태를 의심할까 두려운 듯 여러 차례 나를 쳐다보았다. 오늘 같은 교회 성장의 시대에 캘리포니아 주의 그 어떤 교회에서 이처럼 오히려 교인 수가 줄어들기를 기도하겠는가?
“그 후로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지요.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에 응답하신 겁니다. 교인들이 하나 둘씩 빠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교인 수가 220명에서 100명으로 감소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부터 우리 교회에서는 참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지요. 재정적으로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르렀지만 남은 신도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진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가게 되었고 이제는 다시 조금씩 교인 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는 씩 웃으며 덧붙였다. “앞으로도 우리 교회는 계속 부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브라이언 목사의 말이 맞을 것이다. 교회가 부흥하기 직전에 교인들의 출석률이 떨어지는 예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성령이 심판하실 때에는 고통과 번민이 있게 마련이고, 이때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한다. 반면에 마음이 굳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남으로써 교회 안은 밀고 가라지를 구별해 낸다. 이를 통해 교회는 순수해지고 거룩해져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들의 모임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룩함과 성경적인 참 믿음이야말로 진실된 교회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이루어진 몸인 교회는 교묘한 시장 전략이나 화려한 시설과는 무관하다.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그들 안에 임재하시는 성령과 전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신앙공동체로서의 특성인 것이다.
이 점은 동유럽에서 명백하게 목격되었다.
그곳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굳건히 신앙을 지켜 나갔다.
그들은 교회 성장이나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AK-47 총구 앞에서 한가로이 그런 걱정을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