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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유토론 원문보기 글쓴이: 김 stepan
서창녕(서울대학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제1장 서론
제1절 문제제기, 제2절 연구대상 및 내용구성
제1절 문제제기
지난 20-30년간에 걸쳐 한국은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급속한 산업화와 정치적
민주주의를 경험하였다. 한국은 박정희 정권에 의해 추진되기 시작한
근대화운동의 결과로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었고 국민총생산량이 크게
늘어났으며 국민들의 교육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졌다. 한국의 근대화와 더불어
사회의 계급구성도 달라졌다. 농업의 몰락으로 농민의 숫자가 줄어든 반면
수출지향적 공업화의 결과로 산업노동자의 숫자가 늘어났다. 농업과 공업의
비율이 역전되고 자본주의적 관계가 발전함과 더불어 이념적으로도 전통적인
농업사회의 도덕이나 윤리규범이 쇠퇴하고 서구적인 자유주의와 합리주의 사조가
널리 유포되었다.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근대화 추세와 비교해 볼 때 한국정치의 민주화 수준은
상대적으로 뒤떨어져 있다. 사회경제적 발전이 정치적 민주화를 가져온다는
립셋(Seymour M. Lipset)의 가설과는 달리, 한국은 급속한 사회경제적 발전을
이룩하였지만 그것에 비례하여 정치적 민주화를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박정희 정권은 경제건설을 추진한다는 명목으로 정치적 민주화를 유보하거나
후퇴시키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한국정치가 민주화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한국정치의 민주화는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급속히 추진되기 시작하였으며, 1993년 군사정권이
막을 내리고 문민정권이 들어섬으로써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받아들여짐으로써 법적, 제도적 측면에서 한국정치의
민주화가 크게 진전되었고, 문민정권이 출범하여 정권의 권위주의적 속성이
약화되고 선거, 정당, 의회의 자율적 기능이 활성화됨으로써 정치과정적
측면에서도 민주주의가 크게 진전되었다. 최근 한국정치의 민주화 추세는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현상이 아니라 장기적이고 광범위한 경향이라는 점에서
1960년 4.19 직후의 상황과 차이점이 있다. 한국정치의 민주화는 사회경제적
발전의 단순한 반영물도 아니고 권력자의 시혜물도 아니다. 한국정치의 민주화는
민주를 염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적극적인 노력과 희생의 대가이다.
최근 정치학 연구에서는 선거, 정당, 의회와 같은 정치과정에 관한 연구가
새롭게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 있다. 지난날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정치과정에 관한 연구는 1980년대 후반 이후 한국정치의 민주화가
진행되고 선거, 정당, 의회의 기능이 활성화됨에 따라 새롭게 정치학의 중심적인
연구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정치에 관한 근래의 연구는 투표행태와
선거결과에 관한 분석, 선거운동의 구체적 과정과 실태에 관한 분석, 선거문화와
유권자의 정치의식에 관한 분석, 정당과 의회의 정책기능에 관한 분석 등 다양한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들은 실증적인 조사분석과 각종
통계자료들을 바탕으로 상당히 과학적이고 설득력 있는 결론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정치의 연구에서 많은 연구자들이 직면하는 문제는 미국이나 유럽과 달리
한국에서는 정치과정에서 정책적 요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별로 크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의 정치과정에서는 정책적 요인보다는 비정책적 요인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이념적 동질성이나
정책의 합리성에 따라 정당이 조직되고 선거에서 유권자의 지지가 표현되지만,
한국에서는 이념이나 정책보다도 혈연, 지연, 학연에 기반을 둔 인맥과 사조직,
지역주의 등의 비정책적 요인이 중요한 정치행위를 결정하는 데 더 큰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후보는 자신의
출신지인 부산에서 72.6%, 경남에서 71.5%, 경북에서 63.6%의 지지를 얻고,
김대중 후보는 광주에서 95.1%, 전남에서 91.1%, 전북에서 88.0%의 지지를 얻는
등 지역주의적 투표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반면, 두 후보의 정책적 차별성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또한 제13대 민정당 국회의원 중 박준규, 김윤환, 박철언
등 무려 15명이 노태우 대통령의 출신 고등학교인 경북고등학교
동창생들이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정당활동에서도 정책이나 이념의
동질성보다도 혈연, 지연, 학연과 같은 연줄을 기반으로 하여 인맥과 파벌이
형성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정치에서 인맥과 지역주의는 매우 독특한 정치행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한국정치 분야에서 이 문제에 관한 연구는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최근 국회의원과 선거구민간의 비정책적 연계과정이나
한국정치의 지역균열 현상에 관한 연구논문들이 몇 편 발표되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아직까지 이 분야에 관한 연구는 부족한 편이다. 특히 1980년대의
정치인맥에 관한 연구는 기자들이 작성한 몇 편의 저널리즘적인 글들을 제외하면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이 논문은 1980년대 한국정치의
인맥을 연구주제로 삼고자 한다.
제2절 연구대상 및 내용구성
이 논문에서는 후견인-수혜자 관계라는 분석틀을 적용하여 제5공화국의 하나회
인맥에 관해 살펴 보고자 한다. 후견인-수혜자 관계(patron-client
relationship)는 권력, 재력, 명망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물질적,
정신적 혜택을 베풀고 그 대가로 자발적인 충성과 지지를 얻어 내는 관계이다.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주요
정치인맥은 후견인-수혜자 관계에 기반하여 형성되고 발전하였다. 이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제5공화국의 하나회 인맥이다. 이 논문은 후견인-수혜자 관계의
분석틀에 입각하여, 제5공화국의 정치인맥이 본질에 있어서 하나회 중심의
군부인맥이었으며, 하나회 인맥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내적 요인이 하나회
회원들끼리 서로 밀고 당겨 주는 호혜적 관계에 있었음을 주장하려 한다.
이 논문에서는 제5공화국의 하나회 인맥이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는가를 시간적 순서에 따라 구체적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따라서 이 논문은 시간적으로 1960년대 초 하나회 인맥이
형성되기 시작한 때로부터 1980년대 전반기 제5공화국이 수립되어 하나회 인맥이
사회 각계로 진출해 나간 때까지의 시기를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이 논문은
집권여당의 정치인맥을 주된 연구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야당의 정치인맥이나
비정치적 분야의 인맥은 이 논문의 직접적인 연구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 논문에 실린 각종 도표와 자료들은 주요 일간신문과 [신동아], [월간조선],
[월간중앙] 등의 잡지에 실린 취재 및 인터뷰(interview) 기사들을 참고하여
재작성되었다. 각종 통계연감과 국회 조사 보고서 등도 객관적 사실을 확인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덧붙여 제14대 국회의원 총선을 맞아 황수익 교수의
지도 밑에 진행되었던 정치과정분석 강의와 그 때 제출되었던 각종 보고서들이
이 논문을 작성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논문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1장 서론에 이어 제2장에서는 전반적인 분석의 틀을 제시한다. 먼저 이
논문에서 사용된 주요 용어들에 관한 엄밀한 개념정의를 시도한다. 다음으로
정치인맥을 학문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이론적 틀로서 '후견인-수혜자 관계'라는
분석틀을 제시하고 실제 정치현실에 대한 설명력을 가질 수 있도록 모형화를
시도한다.
제3장에서는 하나회 인맥의 형성과정에 관해 살펴 본다. 하나회의 뿌리인
오성회가 생겨난 때로부터 1961년 육사생도들의 5.16 지지 시위, 1963년 하나회
결성, 1973년 윤필용 사건 등 주요 사건들을 살펴 본다. 이를 통해 하나회가
아래로는 정규육사출신 장교들의 엘리트 의식과 선배 장교들에 대한 불만에
기초하고, 위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와 후원에 의존함으로써 강한 결속력을
지닌 비밀사조직으로 성장할 수 있었음을 주장한다.
제4장에서는 제5공화국의 정치인맥에 관해 살펴 본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후 12.12사건을 통해 군의 주도권을 잡은 신군부 세력이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국보위 설치, 민정당 창당 등을 통해 구정치세력들을
제거하고 하나회 중심의 새로운 정치인맥을 형성하는 과정을 살펴 본다. 이를
통해 5공인맥은 본질에 있어서 군 내 비밀사조직인 하나회의 연장선상에서
형성된 군부인맥이었음을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제5장에서는 인맥정치의 장단점을 지적하고 이 연구의 성과와 한계를
밝힌다.
제2절 하나회 인맥의 각계 진출
(1) 하나회 인맥의 군부 장악
(2) 하나회 인맥의 사회 진출
(3) 전 두환 중심의 동심원
(1) 하나회 인맥의 군부 장악
1980년대에 들어와 하나회 인맥은 군부와 사회 각계각층으로 진출했다. 하나회
인맥은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하나는 육군참모총장,
보안사령관, 수도방위사령관 등 군부의 상층과 요직을 하나회 인맥으로 채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을 대상으로 하나회의 후신인
'만나회'와 '알자회' 등을 조직하고 후원하는 것이었다.
하나회 인맥의 이른바 '자리 물리기' 관행은 제5공화국에 들어와 최고조에
달했다. <표 4-6>과 같이 역대 육군참모총장의 경우, 1983년 하나회 출신 중
처음으로 정호용이 이 자리를 맡은 이후 박희도(朴熙道), 이종구(李鍾九),
이진삼(李鎭三), 김진영(金振永) 등 하나회 출신 장교들끼리 자리 물리기를
되풀이하였다.
<예 4-6> 역대 육군참모총장
대 성 명 재 임 기 간 육 사 하나회
25 정호용 83년 12월-85년 12월 11기 ○
26 박희도 85년 12월-88년 6월 12기 ○
27 이종구 88년 6월-90년 6월 14기 ○
28 이진삼 90년 6월-91년 11월 15기 ○
29 김진영 91년 11월-93년 3월 17기 ○
이들의 자리 물리기 관행은 보안사령관, 수도방위사령관 등 핵심요직의 경우에는
더욱 심하게 나타났다. <예 4-7>과 같이 1980년 이후 역대 보안사령관 9명 중
전원이 하나회 출신이었다. 윤석양 사건을 계기로 보안사가 기무사로 이름을
바꾼 이후에도 기무사령관 자리에는 하나회 출신인 서완수(徐完秀)가
임명되었다. <예 4-8>과 같이 역대 수도방위사령관의 경우에도 예외없이 100%
하나회 출신 장군들이 임명되었다. 1979년 12.12사건 때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연행, 해임하고 노태우가 그 자리를 맡았으며, 80년부터
81년까지는 육사 12기의 박세직(朴世直)이 맡았다. 81년부터 수도방위사령부로
이름을 고친 후에도 최세창(崔世昌), 이종구(李鍾九), 고명승(高明昇),
권병식(權丙植), 김진영(金振永), 구창회(具昌會), 김진선(金鎭渲),
안병호(安秉浩) 등 8명의 수방사령관 전원이 하나회 출신이었다.
<예 4-7> 역대 보안사령관
대 성 명 재 임 기 간 육사 하나회
전두환 79년 2월-80년 8월 11기 ○
노태우 80년 8월-81년 7월 11기 ○
박준병 81년 7월-84년 7월 12기 ○
안필준 84년 7월-85년 6월 12기 ○
이종구 85년 6월-86년 7월 14기 ○
고명승 86년 7월-87년 12월 15기 ○
최평욱 87년 12월-88년 12월 16기 ○
기무
조남풍 88년 12월-90년 10월 18기 ○
구창회 90년 10월-91년 12월 18기 ○
서완수 91년 12월-93년 3월 19기 ○
<예 4-8> 역대 수도방위사령관
대 성 명 재 임 기 간 육사 하나회
수경 노태우 79년 월-80년 8월 11기 ○
수경 박세직 80년 8월-81년 8월 12기 ○
1 최세창 81년 8월-83년 6월 13기 ○
2 이종구 83년 6월-85년 5월 14기 ○
3 고명승 85년 5월-86년 7월 15기 ○
4 권병식 86년 7월-87년 12월 15기 ○
5 김진영 87년 12월-89년 4월 17기 ○
6 구창회 89년 4월-90년 10월 18기 ○
7 김진선 90년 10월-91년 12월 19기 ○
8 안병호 91년 12월-93년 4월 20기 ○
하나회 인맥은 군부 내에서 '만나회'와 '알자회'를 조직함으로써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만나회는 육사 21기에서 33기까지 각 기수별로 12명씩 선발하여
비밀리에 조직된 사조직이며, 알자회는 육사 34기부터 43기까지 동일한 방식으로
조직된 사조직이다. 이 두 조직은 구성방식에서 각 기수별로 10-12명씩
선발한다는 점, 운영방식에서 철저한 비밀유지를 강조한다는 점, 그리고
자기들끼리 각종 보직을 주고받는 등 자리 물리기 관행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하나회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강창성은 이 두 조직이 하나회의
후신으로서, 이름만 달리 한 조직이라고 보았다.
<예 4-9>는 육사 20기에서 36기까지, <예 4-10>은 육사 21기에서 26기까지
하나회(엄밀히 말해 만나회) 회원의 명단이다.
<예 4-9> 육사 20-36기 하나회 회원 명단
20기 김중배, 김길부, 김무웅, 안광열, 허정일, 장호경, 이현부
21기 이중석, 최승우, 표순배, 이명인, 전영진, 강창남, 신윤희
22기 최기홍, 유효일, 유회국, 신양호, 오형근, 박범무, 권기대
23기 손수태, 정정택, 박영일, 김영철, 서중일, 김현수, 오준의
24기 권중원, 민형국, 홍한수, 윤영정, 강영욱, 유보선, 채문기
안광찬, 강진하, 이상세, 이상선, 임인창, 박석조, 장세영, 권경석,
25기
진병국, 강창의
26기 이상희, 김익성, 임문택, 허용문, 오현구, 이기영, 안대환, 최홍규
27기 서삼섭, 제정관, 김부영, 김준섭, 한광문, 김용석, 신용순, 이해호
김진황, 안병용, 임종국, 김명길, 김선홍, 박홍열, 이채인, 이영우,
28기
권영욱
박항규, 이명구, 최득묵, 홍원기, 한동원, 강대구, 조성호, 나병태,
29기
정두진
30기 김정근, 김용기, 하형규, 조윤기, 이현중, 방정환, 권행근, 김덕곤
31기 윤희만, 이진우, 최종대, 임치규, 김용수, 한성동, 이환준
안학승, 차철이, 신경철, 최진학, 이기원, 한기엽, 이명희, 김선도,
32기
이남호, 김동화, 허 육
김경규, 김일수, 박영목, 김형원, 황인뢰, 김동화, 이중언, 민병달,
33기
박경용, 정명도, 임형민
34기 이해평, 김정국, 김홍식, 노정수, 권오성, 김형배, 이윤규, 박주현
35기 송영철, 신동혁, 정길현, 유현국, 박재두, 전중세, 이상민, 남인우
36기 김종업, 김용빈, 김종민, 김현집, 장창목, 최계명, 오 명
(백승도 대령 주장, 1993년 4월 14일)
<예 4-10> 육사 21-26기 하나회 회원 명단
육사 성 명 직 책 계 급 출신지
최승우 육본 인사참모부 소장
충남
표순배 3군사관학교장 소장
충북
강창남 대통령 경호실 (중령)
서울
21기 홍순룡 아랍에미리트 대사 (대령)
서울
이충석 합참 작전부장 소장
전북
여명현 2군 참모장 소장
강원
전영진 국방부 인사국장 소장
유효일 25사단장 소장
서울
박범무 정보본부 해외정보부 차장 준장
충북
최기홍 56사단장 소장
경북
22기 유회국 21사단장 소장
서울
신양호 국방부 지휘통제실장 소장
서울
권기대 부대 관리관 (준장)
강원
오형근 작전참모부 차장 소장
손수태 30사단장 소장 경북
정정택 수도기계화사단장 소장 경북
23기 길영철 사단장 소장 충남
박영일 사단장 소장 서울
오주의 사단장 소장 경북
민병국 육군 본부사령 준장
홍한수 육본 작전참모부 처장 준장 충북
권중원 국방부장관 보좌관 준장 경북
24기 윤영정 1군 작전처장 준장 경북
강영욱 육본 작전참모부 처장 준장 전북
유보선 한미연합사 작전처장 준장 전북
채문기 육군 범죄수사단장 준장
황진하
국방부 정책기획실 차장 준장
안광찬
합참 준장
진병국
3공수특전여단장 준장
이상선
군수본부 근무 준장
강창회
25기 국회의원 중령 충남
이상세
육본 PX복지단장 준장
장세영
기무사 준장
권경석
9공수여단장 준장
박석조
기갑여단장 준장
유수재
임문택 준장
군 사령부 참모
이상학 준장
육군참모총장 비서실장
26기 김익성 준장
육본
이기영 대령
국방부 시설국
최홍규 대령
(괄호 속의 계급은 예편자, 나머지는 1992년 기준 계급)
전두환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군 내 사조직이 이익집단으로 변질되고 장교들
사이에 위화감을 조성할 우려가 있다는 비판을 의식하여, 1981년 경호실장을
통해 하나회를 해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하나회는 해체되지 않았다.
6공화국 때도 노태우 대통령은 세 번이나 하나회를 해체하도록 지시했으나,
완전히 해체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해 왔다.
하나회 인맥은 한편으로 군 상층부와 요직을 장악하고 다른 한편으로 만나회,
알자회 등을 조직하는 방식으로 1980년대 한국 군부를 장악하였다.
(2) 하나회 인맥의 사회 진출
제5공화국에 들어와 하나회 출신 인사들은 사회 각계로 진출했다. 육사 11기에서
20기까지 경력이 밝혀진 88명의 하나회 회원들을 중복을 허용하여 분야별로
나누어 보면, 군부가 35명으로 가장 많고, 국회 및 정당 23명, 행정부 20명,
정부투자기관 19명, 청와대 12명, 기업체 11명, 사회단체 및 연구소 7명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징적인 것은 이들이 경제기획원, 재무부, 한국은행 등
경제분야와 사법고시를 합격해야 하는 법조계에는 한 명도 진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반면 이들은 군, 청와대, 정보기관 등 정권의 근간(根幹)을 이루는 곳에
집중적으로 포진해 있으며, 국회와 민정당에도 많이 진출했다.
<예 4-11> 하나회 인맥의 사회 진출 현황
전두환(대통령), 노태우(대통령), 장세동(경호실장, 안기부장),
안현태(경호실장), 정동호(경호실장), 이현우(경호실장), 성환
청와대 옥(경호실차장, 감사원사무총장), 안교덕(민정수석비서관), 정
순덕(정무제1수석비서관), 허화평(정무수석비서관), 허삼수(사
정수석비서관), 이학봉(민정수석비서관)
노태우(내무장관, 체육부장관), 정호용(내무장관, 국방장관),
안필준(보사부장관), 장기오(총무처장관), 정동철(노동부차관),
최세창(국방장관), 이우재(체신부장관), 이춘구(내무장관), 이
행정부
종구(국방장관), 이진삼(체육청소년부장관), 장홍렬(조달청장),
이대희(병무청장), 최평욱(철도청장, 산림청장), 박세직(체육부
장관, 안기부장, 서울시장), 안무혁(국세청장, 안기부장)
외무 노정기(주미공사, 주필리핀대사), 최웅(주폴란드대사), 나중배
대사 (주사우디대사), 박태진(주요르단대사), 김상구(주호주대사)
전두환(총재), 노태우(대표위원, 총재), 권익현(사무총장, 대표
위원), 오한구(내무위원장), 배명국(건설위원장, 상공위원장),
이춘구(사무총장, 대통령선거대책본부장), 김상구(국회교체위
원장), 정순덕(사무총장, 재무위원장), 안무혁(국회의원), 윤태
국회
균(국회의원), 정호용(국회의원), 김복동(국회의원), 박세직(국
정당
회의원), 배명국(국회의원), 이춘구(국회의원), 정동호(국회의
원), 신재기(국회의원), 허삼수(국회의원), 박준병(국회의원),
안교덕(국회의원), 이우재(국회의원), 이학봉(국회의원), 고명
승(지구당 위원장)
전두환(보안사령관), 노태우(보안사령관, 수경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육참총장), 김복동(육사교장), 박희도(특전사령
군관, 육참총장), 박준병(보안사령관), 박세직(수경사령관), 안필
준(보안사령관), 장기오(공수여단장), 황인수(육사교장), 최웅
(합참본부장), 최문규(육사교장), 최세창(합참의장), 정진태(한
미연합사부사령관), 이종구(수방사령관, 보안사령관, 육참총
장), 이진삼(육참총장), 고명승(보안사령관), 나중배(한미연합
사부사령관), 권병식(수방사령관), 민병돈(특전사령관, 육사교
장), 최평욱(보안사령관), 송응섭(합참제1차장), 신말업(참모
차장), 정만길(국방대학원장), 김진영(수방사령관, 한미연합사
군
부사령관, 육참총장), 이문석(특전사령관, 1군사령관), 조남풍
(보안사령관, 교육사령관), 구창회(3군사령관, 수방사령관, 보
안사령관), 성환옥(육본헌병감), 김정헌(육사교장), 김재창(합
참작전실장), 서완수(기무사령관), 김진선(수방사령관), 안병
호(수방사령관), 김무웅(한미연합사)
최성택(석유개발공사사장), 김상구(석유개발공사이사), 최문
규(석유개발공사이사장), 안교덕(농업개발공사사장), 김복동
(광업진흥공사사장), 최세창(광업진흥공사사장), 정만길(광업
정부 진흥공사사장), 안필준(석탄공사사장), 장기오(근로복지공사
투자 이사장), 정동철(한국산업안전공단이사장), 정동호(한국도로
기관 공사사장), 권병식(한국도로공사사장), 조명기(지하철공사감
사), 권영휘(창원기계공단이사장), 박정기(한국중공업사장, 한
국전력사장), 정도영(성업공사사장), 신우식(관광공사감사),
강자화(군인공제회관리이사), 허청일(기계공업진흥회회장)
손영길(동주산업회장), 안교덕(정우개발사장), 권익현(삼성정
밀전무), 정동철(호텔신라사장), 신재기(한국강업사장), 우경
기업체 윤(덕평골프장사장), 박종남(새서울종합용역대표), 박정기(한
덕생명보험회장, 정우개발사장), 장기하(진로사장), 이한종(정
우개발사장), 노석호(삼성항공부사장, 삼성중공업부사장)
김복동(국제문화연구소회장), 정동철(한국문화진흥사장), 배
사회단체
명국(지역개발연구소이사장), 안무혁(한국발전연구원이사),
연구소
정도영(자유총연맹사무국장), 허화평(현대사회연구소장)
학계 이철희(숭실대교수)
하나회 출신 인사들은 전두환 대통령을 최고정점으로 하는 중층적인
후견인-수혜자 관계를 형성하고 서로 밀고 당겨 주면서 자리 물리기 방식으로
사회 각 분야의 상층부와 핵심부를 차지하였다. 대통령 경호실장의 경우
장세동(張世東), 안현태(安賢泰), 정동호(鄭東鎬), 이현우(李賢雨) 등 4명이,
안기부장의 경우 3대 장세동, 4대 안무혁, 6대 박세직 등 3명이, 대표적인
정부투자기관인 광업진흥공사 사장의 경우에는 5대 김복동, 7대 최세창, 8대
정만길(丁萬吉) 등 하나회 출신 인사들이 자리 물리기 관행을 되풀이하였다.
(3) 전두환 중심의 동심원
전두환 중심의 하나회 세력이 커지자 정규육사 출신들뿐만 아니라 전문관료,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 교수 등 각계각층 인사들이 권력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림 4-4>와 같이 이들은 중심에 위치한 전두환과의 정치적 거리가
가까운 순서에 따라 "전두환-하나회-정규육사출신-전문관료.민간인"의 순서로
복합적인 동심원 구조를 형성하였다.
동심원의 중심에는 전두환이 위치해 있다. 그는 1979년 보안사령관,
합동수사본부장을 역임하고 12.12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1980년
5월 31일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거쳐, 9월 1일 잠실체육관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하나회의 회장이고,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의
리더(leader)이며, 제5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여러 개의 동심원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중심의 역할을 하고 있다.
첫번째 동심원에는 하나회 회원인 노태우, 정호용 등이 위치해 있다. 노태우와
정호용은 육사 11기 하나회 창립 멤버들로서 1980년 5월에 설치된 국보위에서
상임위원을 역임한 공통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노태우는 81년 대장으로
예편하여 정무 제2장관과 초대 체육부 장관, 내무장관을 역임하고 민정당
대표위원을 거쳐 제13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정호용은 83년 육군참모총장을
지내고 85년 대장으로 예편하여 내무장관, 국방장관을 역임했으며 현재 민자당
국회의원으로 있다. 이밖에 하나회 회원으로서, 1979-80년 당시 보안사에서
근무하며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가까이에서 보필한 정도영(鄭棹永) 보안처장,
허삼수 인사처장, 허화평 비서실장, 이학봉 대공처장 등이 첫번째 동심원에
속한다.
두번째 동심원에는 정규육사 출신인 권정달, 이종찬 등이 위치해 있다. 이들은
하나회 회원은 아니지만 보안사와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하면서 전두환과
인간적으로 가깝게 지낸 공통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권정달은 육사 15기로서,
1979년 보안사 정보처장으로 있으면서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1980년 준장으로 예편하여 국보위 내무분과위원을 거쳐 이종찬과 함께 민정당
창당작업을 주도하였으며, 제11-12대 국회의원과 민정당 사무총장을 지냈다.
이종찬은 육사 16기로서 1979-80년 당시 중앙정보부 해외정보국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4월 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임하게 되면서
육사 출신이라는 점이 높이 평가되어 전두환을 가까이에서 접하게 되었다. 그는
6월 1일자로 단행된 중앙정보부 간부요원 300명 숙정작업에 주도적으로 나서서
과거의 동료들로부터 사표를 받아 냄으로써 전두환의 신임을 얻었으며, 이후
민정당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세번째 동심원에는 전문관료 출신인 박철언, 금진호, 문희갑 등이 위치해 있다.
박철언은 경북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부산지검 검사,
서울지검 검사 등 직업검사로 활동하던 법조계 인물로서, 친척인 노태우의
추천으로 국보위 법사위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금진호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미 캘리포니아 주립대 행정대학원을 수료하였으며, 총무처, 상공부,
동력자원부 등에서 근무하던 전문관료로서, 마찬가지로 친척인 노태우의
추천으로 국보위 상공자원분과 위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문희갑은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하고 미 테네시 주립대학원을 수료하였으며, 경제기획원,
국방부 등에서 예산편성을 담당하던 전문관료로서, 국보위 운영위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이들은 군 출신은 아니지만 군부 핵심인물의 추천을 받아 국보위에
참여했으며, 학벌이 좋고 오랜 경험을 쌓은 전문관료로서 실무책임을 담당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표 4-12> 제5공화국 창출에 참여한 언론인
성 명 당 시 직 책 이 후 주 요 경 력
김용태 조선일보 편집국장 국회의원, 민정당 대변인
최병렬 조선일보 편집부국장 국회의원, 민정당 국책연구소 부소장
이웅희 동아일보 편집국장 대통령 비서실 수석비서관, 문공부 장관
박경석 동아일보 정치부장 민정당 대변인, 중앙집행위원, 국회의원
이진희 서울신문 주필 입법회의 의원, 문공부 장관
조남희 중앙일보 정치부장 국회의원, 민정당 원내부총무
심명보 한국일보 편집부국장 국회의원, 민정당 대변인, 총재 비서실장
신군부의 정권 창출 과정에는 정치인, 행정관료, 언론인, 종교인, 교수 등
각계각층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이들 중에는 박철언, 금진호, 문희갑 등과 같이
새롭게 정계에 입문하여 이후 요직으로 진출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장덕진 등과
같이 구(舊)정계 인사 중 5공화국 초기에 참여했다가 이후 정부기구 축소개편 때
관직에서 물러난 사람들도 있었다. 5공화국 초기에는 <표 4-12>와 같이 특히
언론인들이 정권 창출 과정에 많이 참여하였다. 김용태, 최병렬, 이웅희,
박경석, 이진희, 조남희, 심명보 등 다수의 언론인들이 신군부 세력을
지지하였고, 그 대가로 국회의원, 장관 등 요직에 등용되었다.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 세력은 정치인, 행정관료, 언론인 등 민간부문의 협조와 지지를 이끌어
냄으로써 유신정권 붕괴 이후 생겨난 권력의 공백기를 메우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수립할 수 있었다.
제5공화국의 정치인맥은 본질에 있어서 '하나회 중심의 군부인맥'이다. 물론
5공화국 인맥에는 박철언, 금진호, 문희갑 등 전문관료와 민간정치인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권력의 중심부로 갈수록 권정달, 이종찬 등 정규육사
출신 인사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으며, 최상층에는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하나회 출신 인사들이 위치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5공화국의 정치인맥은
전두환과 하나회를 중심으로 하고 그 주위에 정규육사 출신과 민간정치인들이
배열된 동심원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회 인맥은 1979-80년
신군부의 등장과 제5공화국의 창출에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1980년대
한국정치를 좌지우지하였다.
제5장 결론
제1절 인맥정치에 관한 평가, 제2절 이 연구의 성과와 한계
제1절 인맥정치에 관한 평가
제5공화국의 정치인맥은 본질에 있어서 하나회 중심의 군부인맥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경우에도
국가권력의 핵심부를 장악한 세력은 재벌이 아니라 군부였다.
하나회는 1963년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 11기 졸업생들에 의해 결성된
비밀사조직으로서 박정희 대통령의 후원을 받으며 성장해 온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엄격한 심사를 거쳐 비밀리에 가입된 이들은 이른바 '자리 물리기'
방식으로 육군본부, 수경사, 보안사 등 군 내 요직을 두루 장악함으로써
비정규육사 출신 선배 장교들의 힘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세력으로 떠올랐다.
하나회는 1979-80년 신군부 세력이 정치무대에 등장하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12.12쿠데타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장교들의 3분의 2가 하나회
회원이었으며,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부대는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하나회 회원들끼리 자리 물리기를 해 오던 대표적 부대인 공수특전단이었다.
이들은 구시대 정치세력을 제거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마련하는 작업에서도
중심적 역할을 했다. 보안사의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등은 국보위 인선작업과
민정당 창당과정에 깊숙히 관여하였다. 하나회 인맥의 위세는 제5공화국의
출범과 더불어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들은 제5공화국 정권하에서 서로 밀고 당겨
주는 후견인-수혜자 관계를 형성하고, 청와대, 행정부, 국회 및 정당, 군,
정부투자기관, 기업체, 연구단체 등 사회 각계로 진출하여 상층부와 요직을
차지하였다. 그 결과 군부세력을 중심으로 민간세력이 결합하여
"전두환-하나회-정규육사출신-전문관료.민간인"의 구조를 가진 거대한 동심원
구조가 형성되었다.
일반적으로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는 원인으로는 군 내부적 요인과 사회정치적
요인을 지적할 수 있는데, 한국의 경우 군 내부적 요인이 더 강했다. 1979-80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회 인맥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된 배경에는 당시의
불투명한 사회정치적 상황도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군부 내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과 비정규육사 출신 선배 장교들간의 세력다툼이라는 군 내부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다.
군사쿠데타는 개인적 쿠데타, 파당적 쿠데타, 제도적 쿠데타의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개인적 쿠데타는 상대적으로 민간부문의 정치제도화 수준이 낮은
국가에서 몇몇 군 장교들의 개인적 야심에 의해 발생하는 쿠데타로서, 1966년
나이지리아 쿠데타의 사례처럼 아프리카 지역에서 자주 발생했다. 파당적
쿠데타는 군 내부에 엄격한 규율과 위계질서가 확립된 국가에서 군부 내
파벌집단간의 세력다툼에 의해 발생하는 쿠데타로서, 박정희의 5.16쿠데타와
전두환의 12.12쿠데타가 여기에 해당한다. 제도적 쿠데타는 잘 조직되고 우수한
교육을 받은 제도화된 군부집단이 민간부문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일으킨 쿠데타로서, 브라질, 아르헨티나, 페루 등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에서 많이 발생했다.
12.12사건은 하나회가 중심이 된 전형적인 파당적 쿠데타에 해당한다. 이 사건은
군부 내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이 비정규육사 출신 선배 장교들과 세력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무력을 동원하여 상급 장교들을 제거한 하극상 사건이다. 이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군부 내에 하나회와 같이 엄격한 규율을 갖춘
비밀사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회 인맥은 큰형님인 전두환을 중심으로 형님-아우 관계로 맺어진 가부장제에
비유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박정희는 하나회를 낳고 길러 준 어버이에,
윤필용과 같이 하나회를 후원한 선배 장교들은 삼촌에 비유될 수 있다. 다른
비밀사조직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사이의 관계에서는 행정적 지시나 명령보다도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의리가 강조되었다. 하나회는 지도력과 위계제 그리고 규율
있는 구성원들을 가지고 정치적 목적을 추구한 정치적 머신에 비유될 수 있다.
이들은 공공의 이익보다도 자기 그룹의 사적인 이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각종 진급과 보직에서 하나회 회원들끼리 자리 물리기를
되풀이한 것이다. 하나회는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로 구성된 일종의 군부 파벌에
비유될 수 있다. 이들은 정규 4년제 교육을 받은 엘리트라는 동질감과 선배
장교들 때문에 진급이 늦어지고 있다는 공통된 불만을 바탕으로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을 단합시키고 비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에 대항해 배타적 집단이익을
추구하였다. 그 결과 12.12사건 직전에 군부는 정승화를 대표로 하는 상층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중하층으로 양분되었다. 하나회 인맥은 후견인-수혜자
관계에 의해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하나회는 육사 11기 선배들을 최상층으로
하고 각 기수별로 10-12명의 후배들이 망라된 후견인-수혜자 피라미드에 비유될
수 있다. 이 피라미드의 정점에 위치한 전두환은 자신을 추종하는 회원들에게
진급과 보직상의 특혜를 베풀고 그 대가로 자신과 조직에 대한 절대적 지지와
충성을 이끌어 내었다. 이들이 정권을 잡은 1980년대에는 하나회를 중심으로
각계각층의 민간정치세력들이 망라된 거대한 동심원 구조가 형성되었다.
인맥정치는 정치지도자와 그를 중심으로 한 인맥에 의해 주요한 정치적 결정이
내려지고 정치행위가 이루어지는 정치행태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제5공화국의
정치행태는 '하나회 중심의 군부인맥'에 의한 인맥정치였다.
인맥정치는 정치인들간의 유대관계를 공고한 것으로 만들어 줌으로써 안정된
정치공동체의 형성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서로 비슷한
이념과 정책을 가진 사람들끼리 인맥을 형성하고 정치활동을 주도해 나감으로써
국정운영의 혼란을 최소화하고 일사불란한 통치행위를 펴 나갈 수 있다. 권력의
공백기에 정치인맥은 단합된 힘을 바탕으로 혼란된 정치상황을 헤치고 정국을
주도해 나감으로써 새로운 정치질서의 창출에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맥정치는 민주적 절차와 제도를 경시하고 집단이기주의와 부정부패를
낳는 온상이 될 수 있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의사의 결정이 사적인
자리에서 몇몇 사람들에 의해 은밀히 내려짐으로써 조직 내부의 민주적 절차가
파괴되고 공식적 조직체계가 약화될 수 있다. 또한 자기 인맥에 속하지 않은
다른 집단이나 조직들에 대해 배타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집단이기주의에
빠지기 쉽고 집단간 갈등과 대결을 불러오기 쉽다. 정치적 머신, 파벌 등과
마찬가지로 정치인맥은 부정부패를 낳는 구조적 요인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제5공화국의 하나회 인맥은 한국정치의 민주화와 정치발전에 역행하는
많은 부작용을 일으켰다. 우선 군 내부에서 하나회 회원들끼리 보직을 주고받는
불공정한 인사관행을 되풀이함으로써 군의 사기를 저하시킨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또한 12.12사건과 같이 군의 정상적인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무력을 동원하여 하급자가 상급자를 체포하는 좋지 못한 전례를
남겼다. 하나회 인맥은 제5공화국의 창출과 운영 과정에서 군 출신 인사들을
중용하고 민간정치세력들을 억압함으로써 군부독재라는 비판을 받았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2,000여명의 민간인들이 희생되었으며,
국보위에 의해 주도된 개혁작업과 사회정화활동에 의해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등 3김 세력이 정치무대에서 사라지고 약 8,600여명의 공직자가 물러났다.
이들은 제5공화국 정권하에서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일해재단,
새세대심장재단, 새마을성금, 평화의 댐 건설 등 이들은 갖가지 명목으로 거액의
기부금을 마련하고 개인적으로 유용하였다. 전기환, 전경환, 이규동, 장영자 등
전두환 친인척들의 비리행위도 극심했다.
정치분야에서 인맥이 없을 수 없다. 동서고금의 모든 정치체제에서 인맥이
형성되지 않았던 때를 찾아 보기는 매우 어렵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정치지도자를 중심으로 인맥이 형성되는 경우를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정치와
인맥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인맥정치는 자기 인맥에 속한 사람들끼리는
잘 뭉치고 강한 힘을 발휘함으로써 안정된 정치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반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배타적 자세를
취하는 등 민주적 절차와 제도를 경시하고 집단이기주의와 부정부패를 낳는
구조적 요인이 될 수 있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제2절 이 연구의 성과와 한계
이 논문은 후견인-수혜자 관계의 분석틀을 적용하여 제5공화국의 하나회 인맥을
연구한 글이다. 이 논문에서는 제5공화국의 정치인맥이 본질에 있어서 하나회
중심의 군부인맥이었음을 주장하고, 그 근거로서 하나회의 형성과 발전과정에
관한 구체적 자료들을 발굴하여 제시하였다. 또한 하나회 인맥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내적 요인을 회원들끼리 서로 밀고 당겨 주는 호혜적 관계에서 찾고,
이를 후견인-수혜자 관계의 분석틀에서 설명할 수 있음을 보였다.
이 논문은 정치학이 한국의 정치현실을 분석대상으로 삼아야 하며, 추상적인
정치이론을 구체적인 정치현실에 접목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기반하여
작성되었다. 지금까지 한국의 정치학계는 미국식 정치이론을 무분별하게
수용하거나 혹은 그것에 대한 대응으로 제3세계와 사회주의 국가의 정치이론을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여 왔다. 한국식 정치이론이 독자적으로 마련되지 못한
상황에서 외국의 좋은 경험과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한국정치학의 발전을
위해서 매우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정치이론이라 하더라도 한국의
정치현실을 실사구시적 관점에서 과학적으로 분석해 내지 못한다면 그 이론의
가치는 크지 않을 것이다.
이 논문은 흩어져 있던 하나회 관련 자료들을 최대한 수집하여 일정한 체계에
맞춰 재배열함으로써 자료발굴과 재해석의 측면에서 나름대로 의의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를 통해 후견인-수혜자 관계에 관한 일반적 정치이론을 발전시키는
데에도 작으나마 이바지하였다. 후견인-수혜자 관계의 분석틀을 적용하여
동남아시아의 정치변동을 연구한 스코트(James C. Scott)의 논문과 마찬가지로,
이 글도 위의 분석틀을 적용하여 한국의 하나회 인맥을 연구한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은 하나회와 관련된 자료들을 인터뷰와 같은 직접적 방법을 통해 구하지
못하고 주로 잡지와 신문에 실린 간접 자료들을 이용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또한 연구자의 능력 부족으로 후견인-수혜자 관계에 관한 더 많은 학자들의
연구성과들을 검토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이 논문은 하나회의
형성과정과 제5공화국 정권하에서 하나회의 위상을 이해하기 위한 체계적인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하나회 인맥과 '티케이'(T. K.) 인맥을
비교하여 양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 보는 것과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하나회
중심의 군부인맥이 쇠퇴해 가는 과정을 살펴 보는 것 등이 앞으로 남은
연구과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