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공탄생은 정치적 분야로 나와는 무관하다” 항변
“박정희, 일본 군인정신과 한국적 도덕겸비한 호인”
[일요서울ㅣ이광수 기자]
육사 12인 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애국자이고 온몸을 바쳐 호국할 수 있는 일본 군인정신과 한국적 도덕윤리를 겸비한 호국 위인”이라고 극찬을 아끼질 않았다. ‘하나회 멤버’이기도 하며 5공 탄생에 주역을 맡은 박 전 총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과는 아직도 연락을 하고 지낸다”면서 두터운 신뢰감을 보냈다. 특히 박 전 총장은 최근 전 전 대통령 추징금 관련해서 “언론에서 몇 천억 추징금을 안냈다고 하는데 선거를 치루면서 다 썼다”며 “그리고 29만원 얘기도 조사 당시 통장에 그것밖에 없다는 말이지 전 대통령은 본인이 29만원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고 옹호했다.
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80)은 육사 12기로 생도 시절부터 박준병, 박세직과 함께 일명 ‘쓰리박’으로 명성을 높였다. 그 뒤 군단장, 육군참모총장까지 지냈으나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의해 전격 경질되었고 이후 보수성향의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94년 김영삼의 5공 청산 정책에 의해 피소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 상임회장으로 신앙심으로 살아가고 있다.
박 전 총장과 인터뷰는 서울대입구역 본인 사무실에서 6월25일 이뤄졌다. 전철역에서 멀지 않은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 사무실은 불볕더위에도 불구하고 선풍기가 달랑 한 대 뿐이었다. 군인정신으로 똘똘 뭉친 이들은 평균연령 70세를 훌쩍 넘겼지만 아직도 정정했다. 이 사무실 관계자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많은 나이가 아니다. 아직도 활동하고 있다”며 멋쩍은 웃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인터뷰가 시작되자 박 전 총장은 금새 진지해졌다. 그의 첫 마디는 보릿고개시절로 돌아갔다. 박 전 장군은 어사가 되기 위해 작은 형님과 함께 자취생활을 하며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는 못 먹고, 못 입던 시절을 회상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자취생활을 하면서 어렵게 공부를 하던 때 6.25전쟁이 발발됐다. 그때 본인은 시골로 피난을 갔고, 작은형님은 대구로 피난 갔지만 학도병으로 징집됐다. 큰 형님은 그 당시 중사로 군복무 중 이셨고, 그렇게 우리 형제는 생이별을 하게 됐다”라며 두 형님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렇게 행방불명이 된 두 형님을 찾기 위해 대구에 올라왔지만, 찾을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수십 년이지나 본인은 장군이 됐고, 우연찮게 찾은 법당에서 형의 위패를 발견하게 됐고, 형님을 국립묘지에 모셔놨다”라며 군에 입대하게 된 이유를 밝히며 눈시울을 적셨다. 박 전 총장의 화려하면서 굴곡진 군생활이 두 형님으로 시작된 셈이다. 다음은 박희도 전 총장과 인터뷰 전문이다.
- 박희도 장군께서 ‘군인’을 선택하신 배경은 무엇인지요.
▲ 6.25 발발시 두 형님께서 종군하여 실종돼 형님들의 뒤를 이어 국가를 지키기 위하여 선택하게 됐다.
- 박희도 장군께서 평가하시는 제 5공화국의 명암은...
▲ 제 5공화국은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대통령이 시해 당한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일구어 내신 경제부흥의 맥을 이어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한 정부다. 지금도 사업하는 분들은 그 때가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고 그 시절이 그립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
또한 야간 통행금지 해제가 아직 시기상조라는 반대도 무릅쓰고 완전히 풀어 버리고, 말썽 많던 학생 복장 자율화 등 국민의 기본권에 대한 많은 완화 정책이 있었다. 그리고 사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 등 인원을 대폭 증가해 민주국가에서 모든 분야에 참여의 기회를 높이고 선의의 경쟁을 통한 사회의 발전을 제도화 하였다. 폭넓은 인재의 등용 등은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치적이다.
단 5.18문제가 김영삼 정권에서 재심에 의하여 ‘5.18 사건의 진압 자체가 국가반란’으로 정의되어 지금까지도 그 재판 자체에 대한 시시비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나는 이 재판의 당사자의 한 사람으로서 향후 바른 역사의 심판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이 기회에 저를 5공의 주요 인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에 대하여 한 말씀 드리겠다. 저는 12.12사건 당시 제1공수 여단장으로 우연한 기회로 청와대 경비를 맡은 30단에 갔다가 정승화 참모총장이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는데 현장에 있어 조사가 불가피 하다는 설명에 참여 할 수가 있었고, 연행과정에서 의외로 반발이 심해져서 1여단이 육본과 국방부의 계엄군으로 출동해, 소재가 불투명하던 국방부장관도 찾게 되어 청와대로 모시고 가서 사건을 수습한 것이 전부다.
5공의 탄생은 정치적 분야로서 제가 관여 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며, 5.18역시 전혀 무관한 일이다. 5.18에 관한 검찰의 조사는 4년여의 조사 끝에 1992년 혐의없음이 결정되었고, 김영삼 정권에서도 1년 5개월 검찰 조사 결과 1994년 기소유예 처분이 되어 종결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김영삼 정부가 지금도 위헌의 시비가 되고 있는 ‘5.18 특별법’을 만들고 재수사를 하여 재판부는 ‘5공의 탄생을 12.12부터 5.18을 거쳐 대통령 선거까지의 전 과정을 국가반란을 위해 사전에 모의된 국가반란’이라고 국가반란 참여자로 분류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한 것은 12.12 사건은 5.18 사건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당시 전두환 합수부장이 박대통령 시해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합법적 행사로서 당시 참모총장이며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장군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돌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었다.
당시 법적으로 대통령에게 직접보고 할 수 있는 전두환 합수부장이 대통령에게 보고 후 연행한 사건이다. 다만 대통령이 국방부 장관의 의견을 듣고자 하였으나 국방부 장관은 결재 계선상의 직책이 아니므로 합수부장의 직접보고는 합당한 일이었다.
역사는 역시 아이러니한 부분이 많다. 당시 최규하 대통령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4시간 후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최규하 대통령이 알았다. 만약 4시간 전에 이 사실을 알았다면 정승화 장군은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지 않았고 12.12 사건도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었다.
- 12.12사건 관련 장군님은 반성할 점은 없다고 보는지...
▲이 질문은 매스콤에서 당시 정승화 총장 연행을 신군부가 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는 것을 전제로 또다시 신군부에 합류하는 선택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인 것 같다. 그렇다면 이것은 매우 잘못된 질문이다.
신군부라 하면 당시 지휘계선 이외에 별도의 지휘체계 집단이 있었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다.
그 당시 대한민국 군대 내에 신군부란 존재하지 않았다. 경복궁에 있던 장군 몇 명이 어떻게 대한민국 군대와 맞설 수 있겠으며 만약 신군부가 있었다면 총장 연행이 그렇게 복잡하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본인의 경우에도 이쪽 저쪽의 선택이 아니라 위급한 상황에서 육본과 국방부를 경비하라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군인으로서 마땅한 일이라 생각한다.
- 故 박정희 대통령은 어떻게 평가하는지...
▲ 당시 가까이 모실 기회가 없어서 특별히 드릴 말씀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최빈국에서 세계12위권으로 경제성장을 할 수 있는 기반 조성하신 업적은 대한민국이 자자손손 기억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근검절약, 부하사랑이 깊었을 뿐만이 아니라. 애국자이고 온몸을 바쳐 호국할 수 있는 일본 군인정신과 한국적 도덕윤리를 겸비한 호국 위인이다.
- 전두환 전 대통령과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는지...
▲ 1960년대 중반에 하나회에 가입하여 현재까지 전 전 대통령과 꾸준히 왕래를 하고 있다. 당시 전 전 대통령은 병사들에게 휴가를 잘 주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예를 들어 병사들이 경례를 하면 많은 병사들 가운데 한사람을 지목해 휴가를 보낸다. 병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휴가 아닌가. 그렇게 군내에 소문이 났다. ‘여단장이 나타나면 경례만 잘하면 휴가 간다’라고 원래 지휘관이 나타나면 병사들은 숨는다. 그러나 전 전 대통령이 나타나면 너나 할 것 없이 앞으로 쫓아가 인사를 했다.
- 가까이에서 본 전두환 전 대통령은 어떤 인물인가.
▲ 지휘관과 병사 간에 친밀관계는 리더로써 좋은 점이다. 전 전 대통령의 부대를 인수를 해보니, ‘충성.명예.단결’에 걸맞게 모든 부대가 단결이 잘 되어 있었다. 대통령이 됐을 때도 장악력이라든지 여러모로 모범이 되었지 않았나.
- 전두환 전 대통령이 추징금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 언론에서는 2200억원을 안냈다 그러는데, 자기가 가지고 있던 돈들이 총선을 한번 치루고 중간선거 3~4번을 치러 돈이 다 들어갔는데 있겠는가. 29만원밖에 없다는 것도 사실상 통장에 남아 있는 돈이 그것밖에 없는 것이지... 전 전 대통령이 직접 29만원 밖에 없다고 말한 적 없다
- 최근 전 전 대통령과 왕래는 하고 계신지...
▲ 가끔 초청을 받아 전 전 대통령과 왕래를 한다. 국립묘지를 방문한다든지 각종 모임에서 뵌다. 만나면 옛날 군 시절 이야기나 어릴 적 이야기를 한다. 그럴 때 보면 전 전 대통령이 효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당시 육사에 들어가려면 간부 후보생으로 시험을 보는데, 어머님이 군대 가는 것을 싫어해 입영 영장을 찢어 버렸다. 그 당시 전 전 대통령과 합격한 친구들은 군에 입대해 다 죽었다.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전 전 대통령도 간부 후보생이 돼 죽었을 것이다
그후 전 전 대통령은 육군 사관학교 시험에 합격했고, 어머니께 들킬까 두려워 입영통지서를 품에 안고 잤다. 그렇게 전 전 대통령이 대구에서 입영하는 날. 어머니가 고무신을 신고 쫓아 오셨다. 전 전 대통령이 그 날을 회상하며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심정을 자주 드러낸다.
- 박근혜 대통령께 기대하시는 게 있다면, 또는 개선해야할 사항이 있다면.
▲ 박 대통령의 국민대통합의 정치 절학에 절대적으로 지지한다. 다만 고려청자를 만들기 위하여 흙을 반죽 할 때도 이물질은 골라내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시스템이 국민대통합에 맞추어져 있는 것 같은데 대통령께서는 이물질을 걸러내는 일에 전념을 하여 반죽이 잘되어 좋은 청자를 탄생 시킬 수 있기를 건의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