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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구냐?
욥기 38:1-11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와 함께 하시길 빈다.
창조절 제8주일이다. 요즘 청첩장이 쌓인다. 그만큼 가을이 좋은 계절이란 의미일 것이다. 계절의 변화 속에서 몸과 마음을 평화롭게 잘 관리하길 바란다.
어제는 두 군데 결혼식에 참석하였다. 내가 평소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사람이니만큼 남이 하는 말에 관심을 갖고 기울인다. 신부의 아버지가 말씀하는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그 또래의 여느 아버지처럼 마음이 늙지 않았다. ‘딸의 행복이 아버지의 행복’이라고. 신부도 울리고, 신랑도 울렸다. 요술쟁이처럼 금새 또 웃게 만들었다. 식후에 새 부부를 만나서 잘 우는 사람은 천성이 착하다고 했더니 좋아하더라.
천성은 얼마나 중요한가? 예수 잘 믿는 사람은 천성이 남 다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하나님은 악한 사람도 회개하면 그런 천성으로 바꾸어 주신다. 그래서 점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간다.
본래 인간은 친 자연적이다. 이를 학문적인 용어로 생태적이라고 말한다. 1971년에 ‘생태신학’을 발표한 선구자적인 인물인 존 캅 교수가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미국의 감리교대학인 클레아몬트대학교의 90대 노교수이다.
캅 교수는 40대부터 지구의 생태계위기를 경고하고, 기후변화를 염려한 신학자이다. ‘반환경주의자이자 기후변화를 부인하는 도날드 트럼프가 버락 오바마보다 나을 것’이란 인터뷰가 역설적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화려한 수사를 가졌지만, 배가 가라앉기를 멈추도록 방향을 바꾸는 데 필요한 행동은 제안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명백히 생태문명에 반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자, 수많은 사람이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선 바로 자신이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화려한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이라는 것이다. 자연을 알고, 나를 알고, 부부가 서로를 이해하고 산다는 것은 참 중요한 일이다. 본래 착한 천성을 지키려면, 또 새롭게 되려면 구체적인 도전과 행동이 필요하다.
1)
오늘 본문은 창조절에 알맞은 메시지다. 사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주제로 한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인간의 삶과 역사에 관여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한다. 지금 우리는 처음 창조와 두 번째 창조 사이에 존재한다.
욥기도 예외가 아니다. 루터는 욥기를 “성경의 어떤 책보다 장엄하고 아름답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특히 본문인 욥기 38장이 그렇다.
욥기는 동방의 의인 욥의 항변을 담고 있다. 욥은 ‘인내의 귀감’이나 ‘경건의 모범’으로 인식되었지만, 그것은 고난 이전의 이야기고, 불행을 겪으면서 사정이 달라진다. 갑작스레 만난 최악의 상황이니 당연히 그럴만하다.
욥은 갑자기 엄청난 고통을 겪고, 또 철저히 몰락하였다. 이해할 수 없는 참변을 겪는다. 재산과 소유를 잃을 때까지는 묵묵히 인내하지만, 제 몸이 죽음에 직면하는 위기에 처하자 하나님을 향해 탄식하며 질문을 던진다. 마치 프로메테우스처럼 하나님께 도전하는 듯하다.
욥은 하나님을 향해 소송을 제안하였다. 자신의 물음에 대해 하나님이 대답하시기를 요청하였다.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욥 31:6).
마침내 욥기 38장은 욥이 원하던 대로 하나님이 대답을 시작하신다. 흥미로운 것은 38장부터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1)로 바뀐다. 그동안 하나님, 전능자로 불린 이름이 구체적인 이름 여호와로 바뀐 것은 국면의 대전환을 뜻한다.
여호와란 이름은 무슨 뜻인가?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처음 소명을 받았다. 그는 두려웠다. 위대한 선지자 모세는 5차례나 주저하면서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에게 ‘너를 보내신 이가 누구냐’고 의심한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냐고 물었다. 하나님은 그의 말에 이렇게 대답해 주셨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스스로 있는 자’가 바로 여호와이다.
2)
욥기 38장만에 드디어 여호와가 말씀하신다. 욥은 그동안 하나님이 침묵하셔서 불평하였다. 당장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자신의 옳음, 그름을 판단 받고 싶어 하였다. 마침내 여호와가 직접 말씀하심으로 욥기는 이제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하나님이 욥에게 말씀하신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1-2).
하나님이 “너는 누구냐?”라고 물으실 때, 욥은 항변은 커녕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질문, 곧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2)는 욥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너는 누구냐? 너는 나를 아느냐?’ 라고 묻고 있다.
욥은 기다리던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게 되었으나 감히 그 말씀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욥은 자신의 왜소함을 깨닫는다. ‘네가 알았느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았느냐?’고 질문하실 때에 욥은 하나님과 맞서 대답도, 질문도, 변론도, 논쟁도 하지 못하였다.
대답은 욥의 몫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욥에게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천성적이고 생태적인 질문을 하셨기 때문이다. 바로 창조와 피조세계에 관한 질서의 문제였다. 38장은 ‘땅의 기초와 설계, 바다의 경계와 다스림, 아침의 빛, 깊은 물밑, 광명과 흑암, 날씨와 기상, 별들과 궤도, 구름과 번개’(1-38) 등을 차례로 말한다. 모두 인간이 감히 따질 수없는 하나님의 권능과 관련된 일이었다.
무지한 피조물에 불과한 욥은 단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은 얼마나 작고 작은가? 욥이 주장하려는 자신의 의로움은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
지난 봄에 세상을 뜬 세계적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유고집 ‘어려운 질문에 대한 간략한 답변’(Brief Answer to the Big Question)이 출간되었다. 평소 무신론적 입장을 견지해 온 호킹 박사는 이 책에서도 “이 거대한 우주를 질서 있게 관리하고 관장할만한 그런 존재는 없다”고 하였다.
이것 또한 역설이다. 인간의 얕은 경험과 좁은 안목으로는 그런 존재를 상상하기 어렵다. 욥기 38장은 바로 ‘거대한 우주를 질서 있게 관리하고 관장할만한 그런 존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욥은 여호와의 질문만으로도 한없이 작은, 지극히 부족한 인간의 존재를 느낀다.
욥기 38편에서 언급하는 자연현상은 하늘, 바다, 땅 위에서 또 밤과 낮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어느 것 하나 제 힘으로 주관할 능력이 없다. 변화에 대한 예측도 쉽지 않다. 오히려 늘 압도된다. 최근에도 세계 곳곳에서 그런 자연현상을 대할 때 마다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의식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려는 것은 그런 연약함에 대해서가 아니다. 인간이 얼마나 미미하고 보잘 것 없는 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한계로 가득한 인간이지만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사랑하시고, 은혜 베푸신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연약한 인간에게 영광스러운 지위를 허락하셔서 창조주께 가까이 다가서게 하신다는 것이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 8:4).
성경은 창조의 세계를 결코 두려움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창세기 1장에 “보시니 좋았더라”가 모두 일곱 차례 반복하고 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물질세계가 아닌 기쁨이었다. 그래서 천성적이고 생태적인 것은 무조건 ‘Good!’이다.
신자와 무신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가 하나님을 깨닫고, 이해하고,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은 나를 포함해 하나하나 사랑하시는 분이다.
욥은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고백하게 된다. 하나님의 질문 “너는 누구냐?”가 곧 욥의 고백을 불러왔다.
3)
성경의 고백과 지혜는 근세와 현대 자연과학의 성과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에 대한 과학적 발견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그것을 따지고 변증하려는 태도는 성경을 오독하게 한다.
그런 과학적 발견이 놀라울수록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조물주에 대한 경외감이 무한히 커진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은 저 광활하고 아름다운 우주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 인간 각자에게도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기울이시는 분이다. 내가 하나님을 나의 주권자로 고백할 때, 내가 초라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초라해지기는커녕 내 존재는 더욱 소중해 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우주 속에서 지극히 작은 태양계에 속하였고, 또 막막한 태양계의 지극히 작은 일부분에 속한다. 그 작은 일부분인 지구에서 나는 50억 명 인구 중 한 사람일 뿐이다. 티끌 중에서도 티끌이다. 그와 비교하여 내 몸은 33조 개의 세포로 구성되었다. 내 몸은 세포의 크기로 따지면 광활한 우주와 같다.
인간은 내 몸 밖의 우주와 내 몸을 구성하는 소우주로 구성되었다. 이것이 조화를 이루며 생명을 유지한다.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 이것이 우연으로만 가능할까? 진화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믿을 수 없으니 무신론이라고 하지만, 그냥 경외심일 뿐이다. 성경은 말한다. 지금 나 자신이란 존재가 하나님의 기적이다.
지금 뭔가 남보다 똑똑하다고, 가졌다고, 높다고 자만하지 말라. 뭔가 좀 없다고, 별 볼 일 없다고 기죽을 이유 없다. 망원경으로 본 나는 티끌 중의 티끌도 못된다. 현미경으로 본 나는 엄청난 은하계 중의 은하계이다.
하나님은 ‘나는 누구다’, 또는 ‘우주는 어떻다’를 말씀하지 않는다. 욥기는 ‘너는 누구냐?’라고 묻는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3).
욥기 38장에서 셰익스피어의 시어보다 아름답다는 창조의 세계에 대한 표현을 귀담아 들어 보라.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8-11).
파도의 한계를 정하신 하나님은 지금 나를 향해 물으신다. “너는 누구냐?” 한낱 피조물인 내게 물으신다. “너는 제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가?” 욥처럼 한낱 죄인인 나는 내 의로움을 주장하고 고집할 수 있는가?
세상이 만만해 보일 때면 우주 망원경으로 나를 보라. 내가 더욱 겸손해질 것이다. 세상이 벅차게 느껴질 때 현미경으로 나를 보라.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내 마음도 지으신 분이다. 하늘에 깃든 하나님의 영광은 내 마음에도 함께 하신다.
YWCA 연맹에서 각 지회 별로 전국 농산물을 모아 바자회를 열었다. 그런데 조치원 Y에서 온 사람들이 그만 참기름병 하나를 깨뜨렸다. 시작부터 그걸 치우느라고 법석을 부렸다. 그런데 그 고소한 냄새가 진동하자 사람들이 기웃거리더니 나머지 참기름을 다 사갔다고 한다. 첫 완판이었다. 병 하나 깨졌는데 전화위복이 되었다. 역설이다.
때로 내 삶의 위기는 새옹지마와 같은 역설을 가져온다. 그러니 삶의 고통에 대해 원망만 할 것이 아니다. 당장 위기를 관리하면서 더 멀리 은총의 기회를 찾아야 한다. 위기와 위험 속에서 다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깨닫게 된 욥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나란 존재를 고백해 보라.
나는 그렇게 복된 존재로 설계되었다. 평생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도록 부름 받았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늘 내 삶을 주관하셔서 인생의 희노애락 모든 순간순간 은총의 힘으로 살게 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