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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군 함대 | 적군 함대 | 결과 |
도오고의 동양해전 1905. 5. 27-28 | 전함 4 순양선 27 구축함, 보조함 다수 | 전함 11 순양선 8 장갑함, 경순양함 다수 |
일본 승리, 25척 격침, 포획 |
넬슨의 트라팔가해전 1805. 10. 21 | 27 (영국) | 33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 영국 승리 23척 격침, 포획 |
이순신의 명량해전 1597. 9. 16 |
13 (조선) |
330 (일본) | 조선 승리 31척 격침, 90여 척 손상 |
이순신, 넬슨, 도오고 제독의 해전 비교
이순신 제독은 종종 넬슨 제독이나 도오고 제독과 비교되어지곤 한다. 모두 해전에서의 대승리로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고 나라의 운명을 바꾼 영웅들이다. 그러나 각 제독의 주요 해전인 트라팔가 해전과 동해해전은 명량해전과는 비교될 수 없다. 트라팔가 해전은 전통적으로 바다에서 강한 영국과 해전의 경험이 부족한 프랑스 사이에서 27(영국):33(프랑스와 스페인)의 비슷한 전력으로 싸운 대결이었다. 한편 도오고 제독의 동해해전도 일본이 여러 면에서 유리했다. 러시아 발틱함대는 지구를 반 바퀴 이상 도는 7개월 이상의 대항해로 지칠 대로 지쳐있었으며 북극태생의 선원들이 열대지방을 항해하는 과정에서 환자가 속출했다. 이렇게 사기가 떨어져 있던 러시아군을 연일 강훈련을 받으며 사기충전해 있던 일본수군이 그들의 본토 근처에서 승리한 것은 그리 놀랄만한 것이 아니다. 각 해전 상황을 표로 만들어 보았다.
이순신의 해전은 실로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이순신의 위대함은 숫자로 나타난 전적에만 있지 않으며 그가 생명을 바쳐 싸워 이겨낸 임진왜란은 정치권력의 야욕을 실현시키기 위한 제국주의적 영토팽창이 아니었으며 외세의 침략에 맞서 민족과 조국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다는데 있다.
이순신은 1545년 4월 28일 (음력 3월 8일) 명문 가문의 저택이 모여 있는 서울 건천동에서 이정과 초계 변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할아버지 백록(百祿)이 중종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큰 고난을 겪었고 아버지 정이 벼슬을 외면하고 살았기 때문에 집안 살림은 넉넉하지 못했다.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지자 그의 가족은 외가인 아산고을 백암리 (현재 현충사가 있는 뱀밭마을)로 이사하여 아산은 이순신의 고향처럼 되었다.
이순신은 이웃 동네에 살던 전 군수 방진(方震)의 딸과 21세에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다. 여느 양반가의 자제들과 마찬가지로 두 형과 함께 일찍부터 유학을 공부하던 이순신은 22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무술을 익히기 시작했다.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천시하는 당시 조선사회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스스로 뜻한 바에 따라 무인의 길을 택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무인으로서의 기개와 기지뿐만 아니라 학문적 재능 또한 뛰어났음을 그가 남긴 일기나 장초, 한시 등의 문장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28세 되던 해 무과 시험에 응시한 이순신은 말을 타고 기예를 부리는 순서에서 말을 달리다 떨어져 낙방하고 말았다. 그러나 말에서 떨어진 후 조용히 한 발로 일어나 마당가에 있는 버들가지로 상처를 싸매고 나옴으로써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포기 하지 않고 4년 후에 다시 도전하여 32세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여러 지방을 돌며 무관으로서 주어진 직분에 충실했지만 권력에 줄을 대거나 상관에 아부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품 때문에 승진도 느리고 공을 인정받기도 어려웠다. 오히려 부정을 요구해 오는 상관과의 마찰로 파면을 당하기도 하고, 자신의 허물을 이순신에게 덮어씌운 군관의 무고로 백의종군을 당한다. 그러나 어릴 적 친구이자 이순신의 펼쳐지지 못한 능력을 늘 안타깝게 여기던 유성룡의 강력한 추천으로 임진왜란 발발 몇 달 전에 관례적인 승진 단계를 뛰어넘어 파격적으로 전라좌수사로 부임하게 된다.
동래성 전투
언제 어느 자리에서든 자신의 임무와 역할에 충실했던 이순신은 부임과 동시에 수군을 정비하고 병영의 업무와 체계를 바로 세웠다. 특별한 전란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으나 병기의 점검과 군사의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함선의 건조에도 힘써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나 극적으로 임란 발발 이틀 전에 거북선을 완성했다. 그 후 마지막 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 흔들리지 않는 애국심과, 뛰어난 전략전술, 그리고 생사를 초월한 정신력으로 23번의 해전을 모두 승리로 이끌면서 조국과 백성을 지켜냈다.
수군제독으로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었던 그이지만 그 자신의 운명은 처절하리만치 갖은 시련과 고난의 연속이었으며 그러하기에 그의 삶은 더욱 숭고하게 빛난다. 왕이 도움을 주기는커녕 죽이려고까지 했던 기막힌 상황 속에서 한 번도 충(忠)을 굽히지 않았다. 그를 모함하는 원균과 조정의 세력에 대해 원망한 일이 없었으며, 자신이 정성을 다해 키운 수군이 원균의 대패로 하루아침에 사라지던 순간에도 원망과 격분으로 일을 그르치지 않았다.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향한 한결 같은 마음으로 연전연승의 신화를 만들어 내었고 임란을 종결짓는 마지막 해전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충과 무의 정신을 완벽히 실현해 낸 이 장군에게 사후에 충무공(忠武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임진왜란 시대적 배경
당시 조선은 정치와 경제면에서 큰 혼란과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계속된 당쟁으로 인해 정치기강은 해이해지고 전제와 세제의 문란 등 여러 폐단이 나타나고 있었다. 중앙에서의 당쟁은 지방으로까지 번져 국내 정치는 불안정했고 부당한 관리임명에 따른 시정의 문란으로 조정을 향한 백성들의 민심은 떠나 있었다. 이와 같은 조정의 무능과 부패로 군사적 방비 또한 매우 허술한 상태였다.
한편 일본은 전국시대의 혼란기를 지난 1590년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이 이루어졌다. 풍신수길은 일본의 통일사업을 추진하면서 중앙의 권력 강화를 위해 봉건적 지배집단인 다이묘(大名)들의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리하여 자국내 세력간의 불화와 소모적 충돌을 대외적 방향으로 전환, 응축시키기 위해 명나라를 정벌하려는 해외원정사업을 계획하고 “명에 쳐들어갈 길을 빌리겠다.”(假道立明)는 명목으로 조선을 침략하게 된다. 이에 앞서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조선통신사들은 일본의 조선 침략 가능성에 대해 엇갈린 견해를 내놓았고 당쟁으로 인해 국론이 분열되어 있어 적절한 대비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1592년 4월 13일 일본은 조선 침공에 동원된 총병력 28만 중16만의 병력을 출동시켜 조선을 침략한다. 200여 년 동안 외침 없이 평화로움에 젖어 있던,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던 조선군은 치밀한 준비기간을 거쳐 조총이라는 신식무기로 무장한 수많은 병사를 앞세워 돌진하는 일본군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조선 관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왜군에게 번번이 패했으며 왜군은 별 어려움 없이 북진을 계속하였다. 4월 30일 새벽 선조와 세자 광해군은 평양으로 피난 가고, 일본은 부산에 상륙한지 18일 만인 5월 2일 수도 서울(한양)을 함락하였다. 계속되는 일본의 북진과 아군의 연이은 패배로 조정은 평양사수를 포기하고 다시 의주로 향하고 백성들은 조정의 무능과 무책임에 분개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군의 부산 상륙 후 채 두 달도 못 되어 전 국토가 일본군에 유린되는 위기에 놓였다.
이순신 장군 시대적 배경
당시 조선은 정치와 경제면에서 큰 혼란과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계속된 당쟁으로 인해 정치기강은 해이해지고 전제와 세제의 문란 등 여러 폐단이 나타나고 있었다. 중앙에서의 당쟁은 지방으로까지 번져 국내 정치는 불안정했고 부당한 관리임명에 따른 시정의 문란으로 조정을 향한 백성들의 민심은 떠나 있었다. 이와 같은 조정의 무능과 부패로 군사적 방비 또한 매우 허술한 상태였다.
한편 일본은 전국시대의 혼란기를 지난 1590년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이 이루어졌다. 풍신수길은 일본의 통일사업을 추진하면서 중앙의 권력 강화를 위해 봉건적 지배집단인 다이묘(大名)들의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리하여 자국내 세력간의 불화와 소모적 충돌을 대외적 방향으로 전환, 응축시키기 위해 명나라를 정벌하려는 해외원정사업을 계획하고 “명에 쳐들어갈 길을 빌리겠다.”(假道立明)는 명목으로 조선을 침략하게 된다. 이에 앞서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조선통신사들은 일본의 조선 침략 가능성에 대해 엇갈린 견해를 내놓았고 당쟁으로 인해 국론이 분열되어 있어 적절한 대비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1592년 4월 13일 일본은 조선 침공에 동원된 총병력 28만 중16만의 병력을 출동시켜 조선을 침략한다. 200여 년 동안 외침 없이 평화로움에 젖어 있던,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던 조선군은 치밀한 준비기간을 거쳐 조총이라는 신식무기로 무장한 수많은 병사를 앞세워 돌진하는 일본군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조선 관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왜군에게 번번이 패했으며 왜군은 별 어려움 없이 북진을 계속하였다. 4월 30일 새벽 선조와 세자 광해군은 평양으로 피난 가고, 일본은 부산에 상륙한지 18일 만인 5월 2일 수도 서울(한양)을 함락하였다. 계속되는 일본의 북진과 아군의 연이은 패배로 조정은 평양사수를 포기하고 다시 의주로 향하고 백성들은 조정의 무능과 무책임에 분개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군의 부산 상륙 후 채 두 달도 못 되어 전 국토가 일본군에 유린되는 위기에 놓였다.
이순신의 활약과 주요해전
그러나 조선에는 바다를 지키는 이순신이 있었다. 일본수군은 남해와 서해를 돌아 육군에게 물자를 조달하면서 수로로 북진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미 함경도와 평안도까지 북상한 왜군은 육로만을 통해서 물자와 병력을 조달하기에는 많은 시간과 인력이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육지에서 아군은 유럽에서 수입한 소총을 가진 일본군에 속수무책으로 패하고 있었으나 이순신은 해전에서 거듭 승리함으로써 아군의 사기를 북돋우고 일본군의 수륙을 통한 물자조달과 지원군의 경로를 차단시킴으로써 일본군의 북진에 차질을 빚게 한다.
한산대첩(閑山大捷)
1. 학익진 한산대첩
1592년 5월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왜수군을 격파한 이순신은 본영에 돌아와 함선과 병력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은 수군의 패전을 만회하기 위한 기회를 벼르고 있었다. 풍신수길이 가장 아끼는 장수 중 한명이었던 협안파치(와키사카 야스하루)는 일본의 최정예 부대와 70여 척의 병선을 거느리고 웅천 방면에 출동하였고 풍신수길의 특명을 받은 구귀가륭(구키 요시타카)의 제 2진도 40여척을 거느리고 본국으로부터 왔으며, 제 3진의 가등가명(가토 요시아키)도 많은 병선을 이끌고 합세했다.
이들의 동향을 탐지한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더불어 병선 50여척을 이끌고 본영인 여수를 출발, 남해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세하여 왜군이 정박한 견내량에 이르렀다. 이순신은 견내량이 수로(水路) 폭이 좁고 암초가 많아 공격하기 곤란하다고 판단하여 전략상 유리한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한산도는 거제도와 고성사이에 막혀있어 적선이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수도 없고 궁지에 몰려 섬에 상륙한다 해도 굶어 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왜선을 끌어내기 위하여 그는 주력함대를 한산도 쪽으로 이동하게 하고 판옥선 5,6 척을 적진으로 투입시켰다. 왜 수군은 이를 보고 일제히 돛을 달고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판옥선을 주력부대가 있는 한산도 쪽으로 후퇴하는 척하며 슬슬 퇴각하도록 명령했다. 예상했던 대로 왜군은 기세가 올라 총을 쏘며 퇴각하는 판옥선을 추격했다. 이순신은 후퇴하는 척하며 왜선과의 접전을 조절할 수 있도록 주의 깊게 각 전선의 속력을 조절했으며, 왜선들은 사기 충전하여 앞뒤를 가리지 않고 따라왔다. 양 함대의 전선들이 한산도에 이르렀을 때, 이순신은 북을 치며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거북선과 학익진의 해전술, 지리적 활용, 일사불란한 함대운용으로 거의 완벽한 승리를 가져온 임진왜란 최고의 해전 한산도대첩
“모든 전선은 함수를 돌려라!”
“모든 전선은 학익진으로 벌려라! 선봉선을 먼저 공격하라!”
모든 전선들은 일제히 뱃머리를 적선으로 돌리고 학익진을 폈다. 학익진의 그물 안에 갇힌 왜선들은 빠져나갈 곳이 없었고 조선수군은 먼저 대장선에 화력을 집중했다. 각종 총통을 발사하며 총공격을 가하여 아군의 전선 피해 없이 적선 73척 중 47척을 격침하고 12척을 나포하였다. 왜장 와키사카는 겨우 목숨을 부지한다. 그리고 함께 출전한 10000 명의 수군 중 9000명을 잃었다. 조선수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James Murdoch과 Isoh Yamagata가 공저한 <일본사>에는 한산대첩은 "한국의 Salamis"라 할 수 있고 "풍신수길의 침략이 이 한산대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p. 337)고 기록하고 있다. 계속된 해전에서의 패배와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일본 최정예 부대를 출동시킨 한산도에서의 패배에 충격을 받은 풍신수길은 이후 조선수군과 싸우지 말라는 해전금지명령을 내린다. 또한 한산해전은 임진왜란 3대 대첩(진주대첩, 행주대첩, 한산대첩)의 하나이며 살라미스(Salamis) 해전, 칼레(Calais)해전, 트라팔가(Trafalgar)해전 등과 더불어 세계적인 해전으로 꼽힌다. 영국의 해전사 전문가이자 해군중장이었던 G.A. Ballard(1862-1948)는 그의 저서에서 이 해전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이것(한산도대첩)이 위대한 조선 제독의 최고의 공적이었다. 6주라는 짧은 시간 동안 해전 역사상 뛰어넘을 수 없는 연승을 달성하였다. 적의 전선을 부수고 소통경로를 차단하며 호위군들을 쓸어버리고 막강한 일본군대를 위협하며 그의(히데요시) 야망에 찬 계획을 수포로 돌려놓았다. 넬슨이나 블레이크, 잔 발트도 잔인하게 억눌린 한 작은 나라의 이 알려지지 않은 위인보다 더 잘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의 모국 밖에서는 그가 기억 되고 있지 않음이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어떤 공정한 판단도 그가 인류의 타고난 지도자로 간주될 권리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 G. A. Ballad, InfluenceofSeaonthePoliticalHistoyofJapan, p.57
명랑해전(鳴梁海戰)
한산도대첩으로 왜적 수군은 거의 전멸하였으며 일본의 수륙병진계획은 좌절되었다. 한산도대첩은 그때까지 육지에서 계속된 패전으로 사기가 저하되어 있던 조선군에게 승리의 용기를 주고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조선 수군이 갖게 됨으로써 불리하던 전국(戰局)을 전환시켰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2. 해전사의 기적 명량해전
1596년 12월, 4년간의 소강상태와 더불어 명과 일본의 강호가 결렬되자 풍신수길은 조선에 재침할 것을 결심한다. 한편 이순신은 원균의 모함과 이중첩자 요시라의 간계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 인사조치에 불만을 품은 원균은 종종 상급자인 이순신의 지휘권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결정을 내리곤 했다. 또한 이순신의 인격을 폄하시키기 위해 해전의 정세와 전과에 대한 거짓 장계를 조정에 올리기도 한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의심하고 불신하게 되었다.
조선전역해전도(朝鮮戰役海戰圖)-칠천량 해전도
일본인들은 그들의 침략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이순신을 제거해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순신의 함대가 바다 위를 떠다니는 한 일본 함대의 안전을 보장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을 계책을 마련한다. 왜병장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의 책사 요시라가 김응서 장군의 진영에 파견되어 조선을 위해 첩자활동을 하는 것처럼 꾸민다.
요시라는 꽤 오랜 시간 첩자활동을 하며 조선에 도움을 주는 듯한 정보를 흘린다. 그러던 어느 날 김응서에게 왜장 가또가 대함대를 이끌고 어느 때에 나타날 것이라는 정보를 주며 이순신을 내보낼 것을 주장한다. 김응수는 그의 의견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선조에게 이순신의 출병을 요청한다. 그 요청은 받아들여져 이순신에게 출동명령이 떨어지지만 이순신은 이를 거절한다. 요시라가 말한 지역은 암초가 많아 매우 위험한 곳이었다. 그 곳에서 왜군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김장군이 선조에게 이순신의 출전거절을 알리자 선조는 이순신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크게 분노한다. 마침내 이순신은 체포되고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받는다. 임금은 이순신을 사형에 처하고 싶었으나 그의 공적을 참작하여 사형에 반대하는 일부 대신들의 간청으로 이순신은 겨우 살아남았다. 목숨을 부지한 이순신은 백의종군을 명받는다. 그리고 이순신은 불평과 불만 없이 이 치욕을 조용히 받아들인다.
이순신 압송(押送)
이순신을 대신하여 삼도수군통제사에는 원균이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의 업무 수행은 이순신에 미치지 못했고 병사와 전함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 또한 무모한 전략과 전술을 펼쳐 스스로 패전을 자초하였다. 결국 7월 16일 칠천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은 전멸하고 말았다. 7년간의 임진왜란 가운데 조선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이었다. 이 날의 피해로 조선은 삼도수군 134척 배를 거의 전부 잃고 원균 역시 육지로 도망하다 매복한 왜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경사좌수사 배설만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남해 쪽으로 후퇴하는데 성공했다. 조정에서는 패전보고를 듣고 크게 놀라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해 수군을 수습하게 하였다.
교서를 받은 이순신은 전라도 지방을 순회하며 임지로 향했다. 모함으로 당한 백의종군이라는 치욕과 모친의 죽음으로 정신적으로 힘겨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달 이상 걸린 복귀여정을 그는 치밀한 작전기간으로 사용한다. 안전한 길을 버리고 적과 충돌할 위험을 무릅쓰며, 무려 300여 킬로의 전라도 내륙지방을 순회하면서 부임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피난민의 도움으로 전선을 옮겨오고 흩어진 병사를 모았으며 무기와 군량을 확보하였다. 또한 각 고을 현감과 자리를 함께 하면서 이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무너진 행정력을 복원할 수 있었다. 자신의 결정에 민족의 생사와 국가의 안위가 달려있다는 인식과 사명감이 확고했던 것이다.
본영에 도착했을 때 남아있는 것은 12척의 배뿐이었다. 여기에 나중에 백성들이 가져온 한 척이 더해져 13척이 되었다. 이 절망적인 상황 때문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바다를 포기하고 상륙하여 육전에 합류하라고 종용한다. 수군 철폐령이었다. 이에 대해 이순신은 수군 존속의 가치와 효용론을 강력히 주장하며 다음의 장계를 올린다.
임진년 이래 오륙년이 지나는 사이에 왜적이 감히 전라도와 충청도를 바로 점령하지 못한 것은 오직 우리 수군이 바닷목을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에게는 아직 전선 열두척이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하여 항거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만일 수군을 철폐한다면 적들이 만 번 다행으로 여길 뿐 아니라 호서를 거쳐 한강까지 쳐 올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가장 걱정하는 바입니다. 전선의 수가 비록 적기는 하나 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이충무공전서, 권9
이순신의 장계가 조정에서 받아들여져 수군철폐령은 거두어졌다. 이순신은 열악한 여건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그야말로 최선을 다한 것이다. 적은 수로 많은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좁은 통로로 적을 축차적으로 유입시키는 방법 밖에 없었다. 남해안 전체를 두루 살펴보니 그 조건을 갖춘 장소가 두 곳 있었다. 견내량 해협과 명량해협 이었다. 그러나 견내량은 이미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천혜의 길목 명량해협을 결전의 장소로 선택하고 진을 옮겨간다.
명량은 남해에서 서해로 올라가 한강을 거슬러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으로, 넓은 바다를 흐르던 물길이 좁은 해협으로 몰리면서 물살이 거세진다. 물살이 가장 빠른 시간대의 유속은 10노트로한반도해안을통틀어물살이가장센곳이다. 좁고 빠른 명량 수로 밑에 쇠줄(수중철색)을 설치하고 막게장치로서 왜적선을 걸리게 하여 강한 유속에 의해 적선끼리 서로 충돌하고 전복되도록 계획을 세웠다. 당시 조선의 전선(판옥선)은 밑바닥이 낮고 평평한 U 자형의 평저선이었으나, 일본의 전선(안택선)은 밑바닥이 깊고 뾰족한 V자형의 첨저선이었다. 따라서 수중장애물은 일본 배를 막을 수 있는 효과적인 장치였다.
9월 15일, 결전을 앞두고 이순신은 모든 장렬들을 소집하여 결사항전을 맹세하였다.
병법에 말하기를 반드시 죽을 각오를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다. 必死則生 必生則死(필사즉생 필생즉사) 또 한사람이 길목을 잘 지키면 천 사람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모두 지금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여러분들이 한사람이라도 군령을 어기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이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난중일기 정유년 9월 15일
9월 16일 이른 아침, 이순신 장군은 망군으로부터 수많은 왜선이 들어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순신은 적의 이동을 보고 받은 즉시 출동 명령을 내리고 스스로 최선두에서 왜선을 격멸하기 위하여 명량해협으로 향하였다. 조선 수군 13척과 일본수군 330척의 대결이었다.
그는 전선 13척으로 일자진의 대형을 이루어 적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일자진은 말 그대로 적의 전방에 아군 전선을 한 줄의 횡렬로 펼친 것이다. 13척으로는 일자진 이외에, 다양하고도 기습적이며 유동적인 싸움의 대열을 구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순신 함대는 다만 외줄기 일자진으로 삼백 척이 넘는 적의 진로 앞에 펼쳐졌다. 이 일자진은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한, 죽기로 작정을 한 전투 대형이었다.
이순신의 함대는 130 척의 적선에 둘러 싸였다.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 낙심한 장수들은 슬슬 뒤로 물러났다. 이순신의 전선만이 앞으로 돌진하여 지자(地字), 현자(玄字)각종 총통을 쏘며 공격했다. 그러나 몇 겹의 적선에 둘러싸이자 이순신의 배에 탄 수군들도 서로 돌아다보며 안색이 질려있었다. 이순신은 조용히 타이르며 말했다.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치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을 동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 적을 쏘라.”
위급한 상황에 처한 이순신은 여러 장수의 배를 돌아보았으나 모두 먼 바다에 물러가 있었다.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려 해도, 적들이 더 달려들 것이라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그래서 중군령하기 (中軍令下旗)를 세우고 예하 장수를 부르는 초요기(招搖旗)를 세워 장수들을 부르고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하고 꾸짖는다. 이에 분발하여 안위의 배와 김응함의 배가 전선 속으로 뛰어들어 사력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개미떼처럼 몰려드는 왜군과 상대하여 어지러이 싸우는 가운데 그만 지쳐 힘을 다하게 되었다.
이 때, 반전의 기회가 찾아온다. 조선에 투항해서 통역관으로 이순신의 기함에 타고 있던 왜인 준사라는 자가 물 위에 떠다니는 붉은 비단 옷을 입은 누군가를 발견했다. 적장 마다시였다. 이순신은 부하에게 명령하여 마다시의 목을 베어 돛 대 맨 꼭대기에 걸었다. 대장의 죽음! 왜수군 전체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물길이 바뀌었다. 하루에 네 번 바뀌는 명량의 물길이 적군에 유리한 역류에서 아군에 유리한 순류로 바뀌었다. 서로의 진형(陣形)과 대오(隊伍)가 붕괴되고 있었다. 조선 수군들은 이순신의 명령에 의하여 일제히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돌진했다. 상황은 급전하여 일본 전선은 서로 도망가기 바빴다. 이순신 수군은 물길의 전환을 이용하여 명량의 사지(死地)로 왜선들을 몰아넣었다. 막게가 감기고 철색이 당겨졌다. 당황하여 쫓겨가던 왜선들은 배의 앞 모서리와 키가 쇠줄에 걸려서 거센 물결과 함께 전복되고 서로 충돌하면서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조선수군은 현자총통과 불화살을 쏘면서 맹렬하게 총공격을 가하여 일본 함선 330척 중 명량해협으로 진입한 130여 척 가운데 31척은 완전 격침시키고 90여척을 치명적으로 파손시킨다. 그러나 조선군은 한 척 배의 손실도 없었다. 이순신은 일기에 이 날의 해전을 천행(天幸)이라고 적고 있다. 이 전투가 해전사상의 기적이라는 ‘명량해전’이다.
3. 생명을 바친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
1597년(정유년)에 재침한 왜군은 같은 해 9월 명량해전에서 대패한데 이어 의병의 봉기와 명군의 합세로 육전(陸戰)에서도 고전하던 중 다음 해 8월 풍신수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철수작전을 서둘렀다. 이때 이순신은 명나라의 수사제독 진린과 합세하여 적의 퇴로를 막기로 하였다.
그런데 철수부대를 실은 왜선의 해로를 열어줄 것을 조건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에게서 뇌물을 받은 진린은 이순신에게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지 말자고 권고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고니시는 시마쓰 요시히로와 연락하여 남해, 부산 등지에 있는 그들의 수군을 집결시켜 조선과 명 연합수군을 협격하면서 퇴각하려 하였다. 그러자 이순신은 휘하 장병에게 진격 명령을 내려 노량 앞바다로 쳐들어가 적선 50여 척을 격파했다. 적들은 날이 새기 시작할 무렵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관음포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곳은 밖에서 보면 탁 트인 바다처럼 보이지만 돌아서기만 하면 바다가 막혀 달아날 길이 없는 곳이다. 왜적선들은 다시 돌아서서 대항하는 수밖에 없었다. 위기에 몰린 일본 수군은 필사적으로 이순신의 배를 향해 달려들었고 이순신은 위급한 상황에 처했다. 이를 본 진린은 포위망을 뚫고 들어와 이순신을 구출했다. 그런데 얼마 후 다시 진린의 배가 적선에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적의 장수 세 명이 총각선에 앉아 전투를 지휘, 독려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총과 화살로 그 쪽을 집중 공격하여 그 중의 한 명을 사살했다. 이것을 본 적들은 자기 장수들을 구하기 위해 진린의 배에서 포위망을 풀고 그 쪽으로 몰려갔기 때문에 진린은 위급함을 면했다. 조선과 명의 수군은 다시 힘을 모아 왜선을 공격했고 왜선 200여 척이 격침되었다. 이순신은 계속 군사들을 독려하며 전진하던 중 왜군이 쏜 총탄에 왼쪽 가슴이 관통되었다. 이순신은 급히 자신을 방패로 가리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지금 싸움이 한창이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戰方急 愼勿言我死(전방급 신물언아사)” 라는 말을 남겼다. 전사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왜군의 격퇴를 염려한 애국의 유언이었다. 맏아들 회와 조카 완(莞)은 이를 지켜보았고 쏟아지는 눈물을 참으며 이순신을 대신하여 기치를 흔들고 북을 치면서 독전했다.
장병들은 끝까지 싸워 마지막으로 퇴각하는 왜적선 500여척 중 온전하게 돌아갈 수 있었던 배는 50여 척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7년간이나 끌던 조선과 일본 간의 전쟁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