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념일
어젯밤부터 비가 내린다.
아침부터 아내는 분주하다.
매일 출근하는 목욕탕에 다녀와서 예전에는 잘 하지도 않던 화장을 하느라고 바빠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오늘 외식하기로 하지 않았느냐며 눈을 흘긴다.
그렇구나!
사위가 언제 줬는지 모르는 상품권을 쓰지 않고 있으니 주말에 집에 들른 딸이 엄마 아빠 결혼식 기념일이 다가오는데 가서 식사라도 하라며 파크하얏트호텔 다이닝룸을 예약해두었다는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
그래 오늘이 나의 42주년 결혼기념일이다.
문득 떠오르는 느낌은 참 오래도 살았다. 이다.
살면서 결혼기념일은 알뜰하게 챙겨 의미 있는 그 날에 맞는 선물을 아내에게 해오다가 퇴직과 함께 챙기는 것을 관두었다.
우리 집 보석함 속에서 잠자고 있는 진주목걸이나 산호 반지 등도 몇 주년의 명칭에 걸맞으면 용돈을 모아서 아내에게 내가 선물한 것이다.
그래서 신났을 것이다.
오랜만에 어쨌든 결혼기념일을 핑계로 호텔음식점에 가서 오붓하게 점심을 먹을 생각이니 당연히 흥분되겠지.
그런데 부산에 살아도 그곳이 어디쯤 있는지 몰라서 인터넷으로 위치를 검색 후 해운대 쪽에 있음을 알았다.
우리 집에서는 30분 정도 운전을 하고 가야 하는 곳이다.
일찍 집을 나서면서 아내의 얼굴을 보니 상기되어있다.
여자들은 특별한 자리나 행사에 관심이 많은가 보다며 싱긋 웃었더니 “당신은 즐겁지 않아?” 하며 반문한다.
물론 나도 즐겁다.
그냥 집에만 계속 있는데 아내하고 차를 타고 오랜만에 외식하러 가니 약간은 긴장되고 설레는 그런 느낌이 있다.
아이파크 건물 32층이 다이닝룸이다.
지하에서 차를 주차하고 로비까지, 로비에서 다시 30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32층 가는 엘리베이터를 갈아타고 도착한 곳이 그곳이다.
왜 이렇게 복잡한 방식으로 설계를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호텔과 주거지 그리고 음식점 등 다양한 형태의 요건들을 만족하기 위한 고육지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호텔이용자나 음식점 이용자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하니 조금의 불편쯤은 감내해야 할 일이라고 웃어넘겼다.
생각보다 음식점은 크고 넓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안내하는 여성분이 와서 예약 관계를 확인하고 창가 전망이 좋은 곳으로 안내하면서 메뉴판을 내민다.
랍스타와 그릴에 구운 소고기 안심과 소갈비 구이를 주문하고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사진을 한 컷 찍고 조촐한 만찬을 즐긴다.
나온 음식 사진도 찍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각자에게 주어진 음식에 대한 맛을 얘기하며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는 없냐며 물었더니 따로 주문하셔야 한다기에 다른 곳에 가자며 일어서니 접대하는 녀석이 30층 커피 가게가 이곳보다 커피 맛이 좋다며 추천한다.
아내의 음식 취향은 기본 음식을 먹고 난 후 빵을 곁들인 커피 한 잔을 무척 좋아해서 30층 커피숍으로 갔더니 그곳에는 빵은 없다고 해서 결국은 일 층 로비에 있는 커피숍으로 옮겨야 했다.
작은 커피숍이라 사람은 많지 않은데 자리는 별로 빈 곳이 없다.
남은 자리는 딱 두 곳인데 구석 자리뿐이다.
아내가 주문하는 동안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기둥을 등지고 앉은 젊은 커플을 발견하고 멋진 자리가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체념했다.
팔뚝에 온갖 문신을 한 남자와 하얀 투피스로 정장한 젊은 여자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우리가 상상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보통은 마주보고 앉는데 나란히 앉았다는 사실이 뭔가를 의미함을 오랜 경험으로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잠시 후 아내가 주문을 끝내고 와 앉자마자 저기 뭐 하는 짓이냐며 불편한 심기를 나에게 드러낸다.
뜨거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으니 마주 보이는 곳에 앉은 아내가 민망한가 보다.
하지만 난 돌아보지 않았다.
만약 돌아보면 내 성질에 그냥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넘어가지 못해 한마디 했을 테고 버르장머리 없는 젊은 녀석이 가만 안있었을테니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젊은이들은 애정행각을 아무 곳에서 스스럼없이 한다.
가벼운 키스쯤은 우리도 이해할 수 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가감한 행동은 우리 또래에게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어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아내에게 속삭였다.
“창밖을 보세요. 비가 오니 운치가 있네요.”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채고 아예 눈빛이 마주치지 않게끔 비 내리는 창밖 풍경에 바라보며 우린 대화하고 있다.
아내가 내려놓은 영수증을 보면서 옛날 생각이 난다.
젊은 시절 회사에서 업무차 서울 출장을 간 적이 있는데 상대방이 잡은 약속 장소가 서울 하얏트호텔 커피숍이었는데 그때의 커피값이 4500원이었다.
그냥 동네 커피숍에서의 커피값은 300원 할 때여서 깜짝 놀란 적이 있는데 이곳 커피값은 7000원이니 동네 조금 비싼 집과 별 차이가 없음에 놀랐다.
커피값의 평준화라고 해야 하나 하면서 의미 없는 웃음을 웃었지만, 자릿세가 붙은 값이라고 쳐도 분위기가 비슷하니 그 값도 엇비슷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내는 신이 나는 모양이다.
결혼기념일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는데 사위 덕택에 맛있는 요리도 먹고 편안하게 커피숍에 앉아 빵과 커피까지 먹으니 무척 행복한 표정이니 말이다.
바보스러운 질문을 해 본다.
“여보 좋아요?”
“당연하지 결혼기념일 잊고 산지가 얼만데 안 좋겠어요,” 하며 눈꼬리를 올려본다.
그렇다.
굳이 기억하려 않아도 남편인 내가 알아서 항상 선물도 준비하고 특별한 날임을 알려주었는데 그 기억이 사라진 지 7년 만에 특별한 자리에서 식사와 차를 마시니 좋은 것은 맞는 말이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고 그날을 기억하기 위해 사람들은 명칭을 붙여 즐겼는지 모른다.
젊었을 땐 굳이 기억하려 않아도 그날이 되면 자연스럽게 느낌이 존재했다.
왜냐면 아내에게 줄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늘 기억해야 하는 특별한 날이었으니까.
퇴직하면서 용돈도 줄어들고 이날을 기억하고 준비해야 할 여유도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아내가 아쉬워하거나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적도 없으니 자연히 잊고 살아가고 있다.
선남선녀가 부부의 길을 약속한 그 날은 누구에게나 기억되는 날일 거다.
하지만 살다 보면 그런 아름다운 기억들도 희미하게 잊히고 평범하게 느껴져서 느낌이 사라지는 것, 그것은 스스로는 알지 못하지만 늙어가고 있음을 방증하는 일이다.
하지만 꼭 기억하고 결혼기념일이 있다.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지만 50주년 금혼식은 기억하고 싶다.
이것은 욕심인지 모른다.
설령 욕심이라고 해도 가능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겨우 8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욕심을 내어보는 것이다.
사실 난 이렇게 오래 살 줄 몰랐다.
어릴 적에는 46살쯤 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고 그 나이가 넘어서 60살은 살지도 모르겠다는 불확신속에 살았지만 세월이 내가 세면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맘대로 흘러가다 보니 이렇게 몽땅 흘러왔다는 얘기다.
그러니 욕심내어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 싶다.
42년도 보냈는데 8년쯤은 쉽게 보낼 수 있다는 배짱은 어디서 생겨났는지 몰라도 자신감이 그냥 솟아나니 스스로 생각해도 장하다는 느낌이다.
이 어려운 기대를 하는 것은 그만큼 내 삶이 행복하고 안온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삶이 힘들고 아프면 이딴 결혼기념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부부 두 사람이 불편하지 않은 건강과 마음을 가졌으니 또 다른 달콤한 이 날을 기대해본다는 얘기다.
아름다운 선물을 준비할 것이다.
오랜 시간이 남았지만 내가 쓸 수 있는 능력이 쪼그라들었으니 기간이 더 필요함을 알기 때문에 늙은 아내의 얼굴에 웃음이 그냥 넘쳐 흐를 수 있도록 의미 있는 선물을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난 그런 삶을 좋아한다.
내가 행함으로써 행복하듯 나의 선물에 행복한 웃음을 날리는 늙은 할멈의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결혼기념일 참 좋은 날이다.
가슴 설렜고 뜨거웠던 기억이 존재해서 좋고 작은 이름으로 우리 곁에 매년 변함없이 찾아와 내가 살아 있음을 기억하게 해주는 좋은 날이기 때문이다.
우린 손을 꼭 잡았다.
내년에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또 가져보자는 약속을 하면서.
호텔로비를 나서는 순간 하늘은 빗방울을 뿌리고 우리네의 가슴속에는 작은 행복이 망울망울 들어와 집을 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