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 타계
←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음악교육자, 음악운동가였던 아이작 스턴
바이올리니스트 거장 아이작 스턴이 2001년 9월 22일 뉴욕의 웨일 코넬 의 료센터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81세. 카네기홀 책임자 샌디 웨일은 스턴이 수년간 심장병을 앓아왔으며 최근 6주간 병원을 자주 찾았다고 말했다. 웨일은 "스턴은 음악가 이상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 에서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당대 최고의 음악가로 평가받아온 스턴은 핀커스 주커만(바이올린), 요요마(첼로) 등 후배 양성에도 힘써왔다.
1m67cm의 작은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정적인 바이올린 연주는 바흐, 베토벤, 브람스을 비롯해 20세기 작곡가들의 곡을 넘나들었다. 스턴은 가장 많은 음반을 낸 연주가 중 한명으로 소니 레코드사를 통해 100종이 넘는 음반을 냈으며 음악가들에게 꿈의 공연장인 카네기홀에서 지난 90년대까지 무려 175번이 넘는 연주회를 가졌다. 그후 스턴은 재정난으로 음악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를 맞았던 카네기홀을 구해낸 것으로 유명하며 카네기홀측은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대연주장을 "아이작 스턴 오라토리엄"으로 명명했다.
1920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스턴은 생후 10개월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자랐다. 6살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스턴은 2년뒤 친구의 바이올린 연주에 감동을 받고 이때부터 바이올린 연주의 길을 걷게된다. 스턴은 13살때 독주회, 16살때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과 첫 협연을 가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스턴은 7년뒤인 43년 뉴욕 카네기홀에 데뷔했으며 당시 음악 평론가 버질 톰슨은 뉴욕 헤럴드 트리뷴에 "전세계 바이올리니스트 대가 중 한 명"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스턴은 2차세계대전 당시 전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주회를 가졌으며 스탈린 사망 때는 모스크바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그러나 홀로코스트에 반대해 독일에서 공연을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큐멘터리 "모택동에서부터 모차르트까지:중국의 아이작 스턴(From Mao to M ozart:Isaac Stern in China)"은 81년 아케데미영화상(다큐부문)을 수상했다.
카네기홀을 지켜낸 공로로 ‘알버트 슈바이처 음악상’을 받았고 ‘그래미 종신 공헌상’(1987) ‘미국 대통령 자유메달’(1992) 등을 수상했다.
[1999년] 미국 배우 조지 스코트 사망
← 배우 조지 스코트
전쟁영웅 ‘패튼 장군’을 연기해 1970년 아카데미 주연상에 선정된 미국 배우 조지 C 스코트(71세)가 1999년 9월 22일 로스앤젤레스 북서쪽 웨스트레이크 자택에서 숙환으로 숨졌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살인 분석’ ‘죄인’ ‘허슬러’로 연기력을 증명한 ‘가장 정력적인 연기자’이자, 기행을 일삼았던 영원한 할리우드 ‘왕따’ 스코트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살코기들의 행렬’이라고 비웃으며 1970년 상도 거부했다. 수상자로 호명될 때 그는 아이스하키 경기를 보고 있었다고 한다. 이듬해 아서 밀러 작 ‘더 프라이스’로 받게된 에미상도 거절했을 만큼 상의 권위를 철저히 무시했다. 젊은 시절엔 술을 입에 달고 살아, 다섯번 코뼈가 부러졌고 그중 네 차례는 술김에 싸우다 다쳤다. 다른 감독 배우들과 불화도 끊이지 않았다.
1927년 버지니아주 탄광촌에서 출생한 스코트는 디트로이트에서 자라 1945년 해병대에 입대했다. 4년 간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낮엔 매장 일을 하고 밤엔 술을 퍼 마셨다. 제대 후 기자가 되려고 미주리대에 입학했지만 연극단에 들면서 진로를 전향, 배우로서의 삶을 살았다./조선
[1994년] 미국의 만화가 자겐도르프(Sagendorf, Bud, 1915.3.22-1994) 사망
30여년동안 뽀빠이 연재만화를 그린 버드 자겐도르프(79)가 1994년 9월 22일 플로리다주 사라소타 근처 한 작은 마을의 요양원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워싱턴주 웨나치에서 출생, 소년 때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로 이주한 자겐도르프는 고교시절 산타모니카 부두에서 낚시를 하다가 만화주인공 뽀빠이를 만들어 낸 만화가 엘지 시거(Segar, Elzie, 1894~1938)를 만나 그의 조수가 됐다. 자겐도르프는 시거와 함께 '스위피' '신병 유진' '깡패 앨리스'와 같은 멋진 만화주인공을 만들어내 전세계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1938년 시거가 사망한 후 킹사의 만화 편집차장이 되었고 1959년부터 일간지와 일요판의 뽀빠이 만화를 맡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만화예술' (1955년) '뽀빠이 첫 50년' (1979년) 등 2권의 책도 저술했으며 시력악화로 일간지에 연재하던 만화작업을 1986년에 그만두었으나 일요판 신문의 연재만화를 계속 그려왔다. /조선
[1990년] 제11회 베이징 아시안게임 개막(9.22~10.7)
제11회 베이징 아시안게임이 1990년 9월 22일 오후 5시 베이징[北京] 공인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개막식과 함께 시작됐다. 단결, 우의, 진보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이번 대회에는 아시아 35개국 6천여명의 선수단이 출전, 이날부터 10월 7일까지 16일간 경기를 벌였다.
베이징 대회에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38개 회원국 중 이틀전 9월 20일 열린 OCA총회에서 회원국 자격을 상실한 이라크와 재정문제를 이유로 불출전을 통보해 온 요르단 예멘 등 3개국을 제외한 35개국이 출전, 1951년 뉴델리 제1회 대회 이후 가장 많은 출전국을 기록했다.
이번 대회에선 육상, 축구 등 27개 정식종목과 야구, 연식정구 등 2개 시범종목에서 총 3백13개(시범종목 5개 포함)의 금메달을 놓고 각국 대표선수가 열전을 벌였다. 27개 종목 3백8개의 금메달을 걸고 싸운 이번 대회의 종합패권은 금 1백83개의 홈팀 중국에 돌아갔으며 한국이 54개로 2위, 일본과 북한은 38개, 12개로 각각 3-4위에 올랐다. /조선
[1980] 이란-이라크 전쟁 발발
1980년 9월 22일 이라크 군대가 이란의 서부지역을 침공함으로써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했다. 이미 이라크와 이란 사이에는 영토 및 정치 분쟁이 산적해 있었다. 특히 이라크는 이란 국경지역에 위치한 풍부한 석유산출지역인 후제스탄을 장악하려고 했다. 마침내 이란을 급습한 이라크군은 넓은 국경선을 따라 신중히 후제스탄으로 진격해갔다. 그러나 1980년 12월 이란 영내에서 예기치 않은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자 이라크의 공격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1981년부터는 혁명의용군(혁명수비대)으로 정규군을 보강한 이란의 반격이 이어졌고 이라크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이란의 공세에 1982년말 이라크는 이란의 모든 점령지역으로부터 자발적으로 군대를 철수하고 이란과 평화협상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홀라 호메이니가 영도하는 이란은 타협에 불응하고 사담 후세인을 타도하기 위해 전쟁을 계속했다. 이후 몇 년 동안 혼란상태가 이어졌고 산발적인 공습이 계속되어 양국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1988년 이란의 경제가 심각하게 악화되고 이라크가 다시 전투지역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되자 이란은 내내 거부해오던 국제연합(UN)의 휴전중재안을 받아들였다./브리태니커
[1968년] 이집트 아부심벨 신전 이전공사 완료
고대 이집트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재위 BC 1301∼BC 1235)가 건축한 신전 유적지. 아스완댐의 상류 약 280㎞ 지점인 나일강 기슭에 있다. 신전은 왕 자신을 위한 대신전과, 왕비 네페르타리를 위한 소신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 바위 속에 구축한 암굴신전인데 기자(Giza)의 피라미드와 맞먹는 큰 건조물이다. 대신전의 정면은 높이 33m, 너비 38m, 안길이 63m에 달한다. 정면에는 4체(四體)의 왕의 의좌상(椅坐像)이 있는데, 그 높이는 모두 20m이다. 중앙에 태양신 라 호라크티의 상이 안치되어 있고, 상부에는 태양을 예배하는 동물 개코원숭이 무리를 새겼다.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너비 16.7m, 안길이 18m의 제1실이 있는데, 이곳에는 높이 10m인 오시리스 신을 본뜬 람세스상이 8체 있고, 벽면을 모두 덮는 그림과 문자들은 왕의 카데슈싸움의 경과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다. 카데슈는 시리아 땅이며, 람세스 2세 군대와 히타이트군의 결전장이었는데, 기록에는 이집트군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서술하고 있다. 미국의 이집트학자 J. 브레스테드가 <아르신전은 역사의 보고(寶庫)이다>라고 한 것은 이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제1실에 연결하여 좌우로 8실의 창고를 만들었다. 제2실은 너비 7.7m, 안길이 11.2m이며, 천장은 신상을 본뜬 4개의 기둥으로 떠받쳐 있다. 벽면 그림은 종교의식을 묘사하였다. 제3실은 너비 7.7m, 안길이 3.2m이며, 화면 내용은 제2실과 같다. 제4실은 지성소(至聖所)이며, 너비 4m, 안길이 7m이며, 제단에 4체 신상이 있는데, 신이 된 람세스 2세 자신과 라호라크티, 아모레, 프타하이다. 1년에 2회, 즉 2월 20일 무렵과 10월 20일 무렵 해돋이빛이 이 지성소를 넓게 비추어서 오른쪽 끝의 1체를 제외하고 3체의 신상을 떠오르게 한다. 소신전은 대신전 북쪽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다. 정면에 높이 10m인 6체의 거상(巨像)이 있는데, 왕비 외에 왕과 여신을 나타낸다. 안길이는 약 20m이며, 방이 3개 있고 벽면에 그려진 것은 종교적인 그림과 글뿐이다. 1958년 구체화된 이집트의 아스완하이댐 건설계획으로 이 신전들 외에 여러 유적이 있는 누비아지방이 수몰될 위기에 놓이자,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는 이집트정부와 수단정부의 요청을 받고 1960년 누비아유적 구제를 위한 세계적 캠페인을 시작하였다. 구제의 최대목표물은 아부심벨 신전이었다. 세계 여러 국가와 민간으로부터 기금이 갹출되고 여러 가지 구제안 가운데 스웨덴기술사단의 해체·이축안(移築案)이 채택되어, 스웨덴·이집트·독일·이탈리아·프랑스의 회사가 공동회사를 조직하여 1963년에 착공하였다. 1968년 두 신전은 원위치에서 63m 높은 120m 서쪽 지점에 옮겨 세웠다. /yahoo
[1966년] 김두한, 국회에 오물투척
← 1966년 9월 24일 밤, 구속 수감되고 있는 김두한 의원.
삼성그룹 계열사 한국비료가 건설자재를 가장해 2880만원 어치의 사카린 원료 ‘오스타(OSTA)’ 60t을 밀수한 사실이 드러나 여론이 들끓 때였다. 더구나 밀수로 벌어들인 돈이 공화당의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의혹까지 제기돼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이던 1966년 9월22일. 다혈질의 열혈남아 김두한 의원이 국회 발언대 위에 섰다.
그러나 “나는 무식하기 때문에 주로 행동에 옮기기를 잘한다”고 발언할 때도, “불의와 부정을 합리화시켜준 장관들을 심판하겠다”며 마분지로 둘러싸인 상자를 들고 각료석으로 다가갈 때도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 지를 헤아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각료석에는 정일권 총리와 장기영 부총리 등 다수의 각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윽고 김두한이 “이건 국민들이 주는 사카린이니 골고루 나눠먹어라”고 고함을 지르며 느닷없이 상자안에 든 물통을 들어 각료석에 퍼부었다. 파고다공원에서 가져왔다는 똥물이었다. 국민들은 속시원해 했지만 김두한은 이틀뒤 국회의장(議場) 모독과 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수감됐다. 한독당 내란 음모사건으로 갇혔다가 석방된지 9개월만이었고 횟수로는 45번째 철창행이었다. /조선
[1964년] 한국의 월남군사원조단(의료대) 140명 사이공 도착
최초의 한국군 월남파병은 1964년 9월 제1이동외과병원 병력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의 파견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브라운 주미대사와 베트남 정부의 지원 요청을 받고, 1965년 1월 26일 국회의 동의를 얻어 1965년 2월 비둘기부대로 명명된 2,000여 명의 후방 군사원조지원단의 파병으로 본격화되었다.
전투부대의 파병은 1965년 7월 2일 결정되어 10월 9일 해병 청룡부대가, 10월 22일 육군 맹호부대가 베트남에 상륙하여 미국으로부터 전술책임지역을 인수받았다. 이외에도 군수지원부대인 십자성부대, 군수물자수송을 담당한 백구부대 등이 파병되었다. 1966년 미국의 전투부대 추가파병 요청에 의해 국회의 논의를 거쳐 4월 16일 혜산진부대가, 8월 15일 백마부대가 베트남에 상륙했다. 이로써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하여 월남파병 국군은 4만 8,000여 명에 이르렀다. /naver
[1941년] 드골, 자유프랑스 국민위원회 조직
1940년 6월 16일 프랑스 정부는 합헌적인 절차에 의해 필리프 페탱 원수에게 인계되었는데, 페탱은 이미 독일과 휴전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결심한 상태였다. 2일 후인 6월 18일 프랑스군의 한 장교인 샤를 드골 장군은 런던에서 라디오 방송으로 프랑스가 계속 싸울 것을 호소했다. 영국측의 조심스러운 지원하에 드골은 영국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중심으로 전쟁 발발 전부터 영국에 거류하던 프랑스 교민 지원자들과 프랑스 해군 부대들을 모아 자유 프랑스군을 단계적으로 증강했다. 1940년 8월 아프리카의 3개 프랑스 영토인 차드·카메룬·무아앵콩고가 드골의 자유 프랑스 편으로 모였으며, 9월에는 인도와 태평양의 프랑스 식민지들이 그뒤를 따랐다. 1940년 9월 자유 프랑스의 다카르 원정군이 자유 프랑스에 대한 세네갈의 즉각적인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지만, 드골은 그해 10월 제국 국방회의를 신설했다.
조르주 카트루 장군이 지휘하는 자유 프랑스군이 1941년 6~7월에 영국이 주도하는 시리아 작전에 참가했다. 그 작전은 페탱이 비시에서 수립한 정부에 충성하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었다. 9월에 드골은 망명정부인 프랑스 국민위원회를 창설했다.
자유 프랑스군은 비시 정부에 의해 반군으로 매도되었다. 또한 프랑스의 많은 좌익주의자들은 드골의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싫어했으며, 영국은 드골이 프랑스의 위신이나 프랑스 주권의 화신이라는 자신의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에 관해 비타협적인 태도를 취해 골치를 앓았다. 비시 정부와 외교 관계를 지속하고 있던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1년 12월 자유 프랑스의 해군이 명목상 비시 정부가 통치권을 물려받은 뉴펀들랜드 근해의 생피에르 섬과 미클롱 섬을 점령한 데 기분이 상했다. 그때는 마침 미국이 아직 비시 정부의 프랑스는 적국으로 삼지 않고 추축국들을 상대로 전쟁에 돌입한 달이었다. 영국과 자유 프랑스 사이의 긴장상태는 자유 프랑스가 런던과 프랑스 국내에 있는 애국적인 레지스탕스의 수많은 항독(抗獨) 단체들 사이의 모든 비밀관계를 독점할 권리가 있는 듯한 태도를 취해 고조되었다. 레지스탕스와의 유대를 과시하기 위해서 드골의 운동조직의 명칭이 1942년 7월 14일자로 전투 프랑스군(Forces Françaises Combattantes/FFC)으로 바뀌었다. /empas /Google
[1937년] 중국 제2차 국공합작 성립
← 마오쩌둥(1966)
1937년 9월 22일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 간에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었다. 1924~27년에 이미 제1차 국공합작이 있었다. 그러나 장제스[蔣介石]는 개인 자격으로 입당한 중국공산당원들의 세력 확장을 우려해 홍군을 공격했다. 홍군은 정부군의 공세에 밀려 장정에 나섰다. 산시[陜西] 북부지역으로 옮겨간 공산당은 거국적인 항일 여론에 힘입어 항일을 호소하는 8·1선언(1935)을 발표하고 국민당에 제휴를 제안했다. 1936년에는 시안 사건[西安事件]이 일어나 장제스가 부하인 동북군 사령관 장쉐량[張學良]의 군대에 체포·연금되었다. 장제스는 내전을 중지하고 공산당과의 거국 통일전선을 수립하라는 장쉐량의 요구를 받아들인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국·공 간의 내전이 중지되었고, 양당의 담판 끝에 합작이 성립되었다. 제2차 국공합작으로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의 합법적 지위를 인정했다. 한편 공산당은 이 기간 동안 기반을 공고히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브리태니커
[1914년] 프랑스의 작가 알랭 푸르니에(Alain-Fournier, Henri) 사망
← 알랭 푸르니에, Andre Lhote가 그린 드로잉
1886. 10. 3 ~ 1914. 9. 22
셰르주(州) 출생. 시골의 소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행복한 소년시절을 보내고 파리의 리세(고등중학교)에 진학하여, 거기서 급우 J.리비에르(후에 평론가)와 사귀어 평생의 친교를 맺었다. 고등사범학교 재학 중에 군에 소집되었고, 제대 후 곧 문필생활을 시작하였다. 1905년에는 한때 런던 근처에서 일하였고, 1910년에는 《Paris Journal》지(紙)의 문예란을 담당하고, 또 여러 잡지에 평론을 기고하며, 시인·평론가인 C.P.페기와도 친교를 맺었다.
1913년 《NRF》지(誌)에 소설 《몬대장 Le Grand Meaulnes》을 발표하여 유명해졌다. 이것은 아름다운 전원을 배경으로, 청년의 사랑과 모험으로의 동경을 추억 속에 그린 청춘문학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출정하여, 베르댕 근처의 생 레미 숲의 전투에서 부상하여 행방불명되었다. 시·평론 등의 유고집 《기적 Miracles》(1924), 친구 리비에르와의 1905∼1914년에 걸친 《서신 왕래 Correspondance》(4권, 1926)와 《가족에의 편지》 등을 남겼다. /naver
[1914년] 영국 순양함 3척 독일 잠수함에 피격, 400명 사망
1914년부터 시작된 세계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 독일이 강화를 조건으로 항복할 때까지 해상에서는 잠수함의 전략, 전술적 운용이 처음으로 적용되어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핵심 전력으로서 미래 잠수함 전략 전개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잠수함은 그때까지 개발된 디젤/전기추진방식의 확립과 미국-영국의 주 보급로인 대서양을 주 전장으로 하였다. 독일 해군의 우수한 유보트 잠수함의 건조와 전술적 운용 등을 기반으로 독일은 영국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대서양에서의 무제한 잠수함전을 전개하였다. 결과로 영국의 전함 4척(Formidable, Dreadnought, Triumph, Majestic)과 순양함 5척(Pathfinder, Abouker, Cressy, Hogue, Hawke)을 포함하여 민간, 군함정 5,000여척이 침몰되고 15,000여명의 인명 손실이 발생하므로서 막대한 피해를 당하게되었다. 독일측에서도 유 보트는 개전 초기에는 20여척의 소규모였으나 전쟁 중 345척이 건조되어 작전에 참여하였으며, 유보트도 178척이 침몰, 파괴되어 13,000여명의 잠수함 관련 요원 등 5,000여명의 인명 손실을 가져왔다. (송광섭/잠수함전의 역사) /월간조선 /Google
[1911년] 시인·문학평론가 윤곤강(尹崑崗) 출생
1911. 9. 22 충남 서산~1950. 1. 7 서울 종로.
초기에는 퇴폐적인 시를 쓰다가 8·15해방 후 전통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 시를 썼다. 본관은 칠원(漆原). 본명은 붕원(朋遠).
보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8년 혜화전문학교를 중퇴했다.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센슈대학[專修大學]을 졸업했고, 1934년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제2차 검거사건 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자오선〉·〈낭만〉·〈시학〉 등의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해방 직후 한때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했다. 이어 보성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중앙대학교·성균관대학교 강사로 있었다. 1931년 시 〈옛 성터에서〉를 발표한 뒤 1936년부터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시세계는 크게 3기로 나뉜다. 초기에는 절망적인 시각에서 암울한 현실을 노래했는데, 첫 시집 〈대지 大地〉(1937)와 2번째 시집 〈만가 輓歌〉(1938)가 이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 발표된 시들은 절제되지 않은 격렬성과 관념적인 급진성이 빚어낸 감상주의적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중기에 해당되는 시집으로는 〈동물시집〉(1939)·〈빙화 氷華〉(1940)가 있는데, 〈동물시집〉에서는 현실세계의 갈등을 우화와 풍자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으나 대상이 시인의 내면세계와 융화되지 못하고 객관화되어 있다. 초기의 감상주의적 경향은 사라진 대신에 현실과의 대결의식이 약해진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문학비평에서도 드러나는데, KAPF의 창작방법이던 '유물변증법적 사실주의'에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로 바뀌었다가 다시 이것을 전향의 논리로 사용하여 초기에 비판했던 모더니즘 계열의 기법을 수용한 것이다.
후기에 해당되는 시집으로는 해방 이후에 발표한 〈피리〉(1948)·〈살어리〉(1948)가 있는데, 여기에 실린 시들을 보면 이제까지 서구의 시적 전통에 기울어 있던 것을 반성하고 전통시가, 특히 고려속요의 가락을 모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민족어에 대한 자각과 민족정서의 탐구 면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전통양식이나 정서에 대한 모방이 지나쳤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뒤따랐다. 평론으로 〈시적 창조에 관한 시감(詩感)〉(문학창조, 1934. 6)·〈시의 본질과 그것의 현대적 양상〉(비판, 1935. 8) 등을 발표했고, 평론집으로 〈시와 진실〉(1948)을 펴냈다./브리태니커
[1908년] 영화감독·작가 김유영 (金幽影) 출생
1908. 9. 22 경북 선산~1940 서울.
본명은 영득으로 김철이라고도 한다.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925년 보성중학을 졸업한 후 1927년에 세워진 조선영화예술협회의 연구부에서 영화수업을 받았다. 조선 프로 예술가 동맹(KAPF) 영화인들이 장악한 이 협회의 첫 작품인 〈유랑〉(1928)과 〈혼가 昏街〉(1928) 그리고 분열된 카프 영화진영의 서울 키노에서 〈화륜 火輪〉(1931)의 감독을 맡았다. 이무렵 〈영화가에 입하야〉(1929)·〈세계프로영화발달사〉(1930)·〈영화예술운동의 신방향〉(1932) 등의 영화운동론·영화평론을 발표했다.
그가 연출한 작품으로 일제의 식민지정책 때문에 땅을 빼앗긴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 유랑하는 상황을 그린 〈유랑〉, 고향을 떠나온 고학생·노동자·화부 등 세 청년이 미국에서 겪는 생활을 묘사한 〈혼가〉, 출옥한 지사의 공장투쟁을 그린 〈화륜〉 등이 있다. 그밖에 영화평론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반영하고 사회주의의 투쟁노선을 견지한 내용을 주로 썼다. 그러나 카프 영화부의 임화·윤기정 등의 치열한 비판과 흥행의 실패 등으로, 1932년 서광제와 더불어 일본에 영화연수를 다녀온 후 1933년에는 카프에 맞섰던 순수지향의 구인회에 참가해 방향전환을 했다. 1934년에는 카프 영화부에 합류했으나 같은 해 카프 2차 검거로 피검되었다. 카프 문예운동이 막을 내린 1935년 이후에는 도쿄유학파가 주축이 된 극예술연구회 영화부에서 활동했다. 문 닫을 지경에 놓인 아버지의 학교를 구하기 위해 마음에 없는 돈 많은 사람과 결혼하는 신식여성을 그린 〈애련송 愛戀頌〉(1939)과 젊은 과부의 애환을 서정적으로 그린 〈수선화〉(1940)를 유작으로 남겼다. 프롤레타리아 영화운동의 선구자로서 나운규 이후 이규환과 쌍벽을 이루는 영화작가로 평가받았다./브리태니커
[1905년] 시인·언론인 김광섭(金珖燮) 출생
1905. 9. 22 함북 경성~1977. 5. 23 서울.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고뇌와 민족의식을 관념적으로 읊다가 차츰 구체적인 현실을 노래했다. 시어가 풍부하고 다양하다. 본관은 전주. 호는 이산(怡山).
생애와 활동
아버지 인준(寅濬)의 3남 3녀 가운데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1년 가산이 기울자 온 가족이 북간도로 이주했다가 1년 만에 돌아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1915년 경성보통학교에 입학, 1920년 졸업했다. 1919년 이학순과 결혼했다. 1920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후, 중동학교에 들어가 1924년 졸업했다. 다음해 일본으로 건너가 나라의대[奈良醫大]에 지원했으나 색맹으로 불합격, 와세다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이때 이헌구·정인섭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해외문학연구회에 참여했다. 1932년 대학을 졸업한 뒤 귀국, 1933년 모교인 중동학교 영어 교사로 근무했다. 극예술연구회에 참가하여 서항석·함대훈·모윤숙·노천명 등과 사귀었다. 1941년 2월 창씨개명을 공공연히 반대하는 등 반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3년 8개월 동안 옥살이했다. 해방 후에는 민족주의 문학을 건설하기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는 데 참여했다. 1945년 중앙문화협회를 창립했고, 1946년 전조선문필가협회 총무부장, 1948년 이승만 대통령 공보비서관, 1956년 자유문학가협회 위원장을 지냈다. 1957년 자유문학사를 세워 〈자유문학〉을 창간했으며, 1958년 세계일보사 사장이 되었다. 1959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2~70년 경희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1964년 〈자유문학〉이 운영난으로 무기정간되자 그 충격으로 고혈압 증세를 보였다. 이듬해 서울운동장에서 야구경기를 관람하던 중 졸도,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다가 72세 때 죽었다. 198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이산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문학세계
1927년 와세다대학 조선인동창회지에 시〈모기장〉을 발표한 뒤, 〈해외문학〉·〈문예월간〉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본격적인 시창작은 1935년 〈시원〉에 주권을 상실한 우리민족의 좌절과 절망을 읊은〈고독〉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시집으로 〈동경 憧憬〉(1938)·〈마음〉(1949)·〈해바라기〉(1957)·〈성북동 비둘기〉(1969)·〈반응〉(1971) 등을 펴냈다. 그의 시세계는 크게 초기·중기·후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는 해방 이전으로 일제강점기의 우수와 불안, 비애와 절망 그리고 식민지 현실에 대한 관념적 저항을 노래했다. 중기는 시집 〈마음〉과 〈해바라기〉를 펴낸 시기로 지적 관조의 시, 옥중시, 조국해방을 노래한 시, 전쟁으로 인한 상실감과 향일성(向日性)의 의지를 읊은 시이다. 여기서 관조의 시는 현실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된 자연에의 몰입으로 나타나며, 옥중시는 일제 말기 자신의 옥중체험을 바탕으로 인생무상을 노래한 것이다.
후기는 시집 〈성북동 비둘기〉와 〈반응〉에서 볼 수 있듯이 공동체적 삶의 재발견 및 사회문명 비판의식, 생의 달관과 화해, 평화에의 추구가 중요한 시적 주제를 이루고 있다. 이 시기에는 이전의 불투명한 관념의 세계가 현실과 결부되면서 구체성을 띠게 되는데, 이같은 특징은 병상에서 깨달은 자연·인생·문명에 대한 통찰을 읊은〈성북동 비둘기〉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마지막 시집 〈반응〉은 시인의 지적 의지로부터 나온 '사회시집'(社會詩集)이다. 1957년 서울특별시문화상, 1970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과 국민훈장 모란장, 1973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77년 대한민국건국포장 등을 받았다./브리태니커
[1885년] 슈트로하임(Erich von Stroheim) 출생
1885년 9월 22일 태어남 / 1957년 5월 12일 죽음
← 슈트로하임, 영화 < 어리석은 부인들> (1922)에서
"프랑스에서는 50년 전에 좋은 책 한 권을 쓰고 훌륭한 그림 한 점을 그리고 빼어난 영화 한 편을 감독한 사람도 여전히 예술가로 인정받고 변함없이 존경을 받는다. 사람들은 모자를 벗어 깍듯이 경의를 표하고 대가 대접을 해준다. 그들은 잊지 않는다. 그러나 할리우드에서 감독은 마지막 영화와 동일시된다. 세 달만 손을 놓고 있어도 과거의 공적이 어떻든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 -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
슈트로하임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높은 평가를 받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영화감독이다. 감독 외에도 배우·극작가·편집자·제작자·의상 디자이너 등 영화와 관련된 거의 모든 방면에서 활동했다. 프랭크 노리스의 소설 <맥티그 McTeague>(1899)를 각색한 대표작 <탐욕 Greed>(1924)은 사람을 타락시키는 돈의 위력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획기적인 사실주의 영화로, 냉엄한 아이러니와 가차 없는 공정성을 보여준다. 이후로도 <즐거운 과부 The Merry Widow>(1925)·<결혼 행진곡 The Wedding March>(1928)·<여왕 켈리 Queen Kelly>(1928) 등이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낭비가 심해 경제적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완벽한 예술적 자유만을 지나치게 고집하며 문제성 있는 주제를 기교적으로 다룬다는 평판 때문에 할리우드에서는 더 이상 영화를 감독할 수 없게 되었다. 유럽으로 돌아온 슈트로하임은 배우로 활동했다. 장 르누아르가 감독한 <위대한 환상 La Grande Illusion>(1937)에서 포로수용소의 지휘관 역을 훌륭하게 연기했고, <선셋 대로 Sunset Boulevard>(1950)에서의 연기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조선
[1862년] 링컨 미국 대통령 ‘노예해방 예비선언’ 발표
링컨(Abraham Lincoln) 미국 대통령이 앤티담 전투에서 북부군이 승기를 잡자 이튿날인 1862년 9월 22일 ‘노예해방 예비선언’을 발표했다. 이것은 연방에서 탈퇴한 남부의 여러 주가 연방에 복귀하지 않으면 노예해방을 선언하겠다는 경고였다. 자치주가 이에 응하지 않자, 링컨은 1863년 1월 1일 흑인노예의 해방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선언은 반란상태에 있는 여러 주의 노예를 전부 해방하며, 해방된 흑인은 폭력을 삼가고 적절한 임금으로 계속 일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 이외에도 흑인들의 연방 군대 입대를 허용하고 있었다.
이 노예해방선언은 내전에서의 전략적 의의도 지녔는데, 그것이 노린 것은 남부의 사기저하와 남부 여러주의 연방 조기복귀였다. 더욱이 흑인을 북군 병력에 흡수할 수 있게 됨으로 북군이 더욱 강해지는 계기가 됐다.
링컨이 "자신의 이름이 역사에 남는다면 바로 이 노예해방선언 때문일 것"이라고 했듯이, 후세의 역사도 그의 바램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은 인도적인 명분에서 출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단지 미 연방의 대통령으로서 미 연방을 수호한다는 현실적인 목표를 위해 전쟁을 결심했고, 선언을 발표했?뿐이다. 노예해방은 단지 부수적인 산물이었을 뿐이었다.
노예해방의 실현은 북부의 산업 자본가와 남부의 대지주 사이의 경제적 이해대립이 전쟁으로 폭발한 뒤에야 형식적으로 이뤄진 셈이다. /조선
[1792년] 프랑스 국민공회, 왕정 폐지하고 공화정 선포
1792년 8월 9일 밤 프랑스 민중의 대표를 자임한 지구위원(地區委員)은 돌연 파리시청을 점령하고 혁명의 코뮌(commune:自治市會)을 수립하였으며, 국민군 사령관 망다를 사살하고 전지구에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8월 10일 이들의 호소에 호응한 수만의 시민이 집결하여 튈르리 궁전을 향해 진격을 감행하였다. 왕궁의 스위스 용병은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고, 국왕 일가는 난을 피하여 입법의회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의회도 시민대중으로 포위당하여 국왕 일가는 코뮌에 인도되고, 왕권도 일시적으로 정지되었다. 이후 약 1개월간 파리에는 정부 ·의회 ·코뮌의 3권이 분립하여 시민생활은 극도로 혼란에 빠졌다. 9월 2일에는 오스트리아군이 전진한다는 소식과 함께 사제(司祭)를 주로 하는 반혁명 용의자가 애국자의 손에 의해 대량학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792년 9월 20일 프랑스 입법의회는 해산하고, 다음날 국민공회(國民公會)가 성립되었다. 국민공회는 프랑스 왕정의 폐지, 공화정의 채택을 선언하였다. 이전의 좌익 지롱드파는 국민공회에서 우익으로 돌았고 좌익에는 새로이 산악파(山岳派)가 등장하였다. 지롱드파와 산악파는 처음부터 적대감정을 노골적으로 나타내어 항쟁하였다. 지롱드파가 의회주의를 내걸고 자유주의경제 ·지방자치의 우선을 주장하는 부르주아 공화파라면, 산악파는 ‘유일 불가분의 공화국’을 원칙으로 하고 중소시민·농민의 옹호와 해방을 주창하며 인민의 이름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수행하려는 과격파였다. 전자가 롤랑 부인의 살롱을 중심으로 계몽된 신사의 단체라면, 후자는 파리의 코뮌 자코뱅 클럽을 보루로 하여 실력으로 계급투쟁을 관철하려고 하는 애국자의 당파였다.
[1791년] 영국의 물리학자, 화학자 패러데이(Faraday, Michael) 출생
← 패러데이
1791. 9. 22 ~ 1867. 8. 25
런던 근교의 뉴잉턴 버츠 출생. 12세 때부터 서점 겸 제본업자 밑에서 일하며 틈틈이 읽은 책에서 과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일반 강연을 들으면서 화학실험을 시도하였다. 19세 때 H.데이비의 강연을 듣고, 그의 도움으로 1813년 왕립연구소의 실험조수가 되었다.
여기서 데이비의 실험을 보조하면서 화학 연구를 시작, 염화질소 연구로부터 여러 가지 특수강(特殊鋼) 연구(1819∼1824), 염소의 액화 연구(1823), 벤젠 발견(1825) 등 실험화학상 뛰어난 연구를 하였고, 1824년 왕립학회 회원, 다음 해 왕립연구소 소원(所員), 연구소 주임이 되었다.
물리학 특히 전자기학(電磁氣學)에 흥미를 가져 H.C.외르스테드가 발견한 전류의 자기작용(磁氣作用)을 조사, 연쇄적 회전(전자기회전)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였다(1821). 그 역현상인 자기의 작용에 의해 전류를 만들어내는 연구에 착수하여, 회로(回路)의 개폐에 의하여 제2의 회로에 발생하는 전류, 전자석, 이어 자석에 의한 똑같은 전류를 검토하여 전자기유도를 발견하였다(1831). 이것으로 맴돌이전류와 지구자기(地球磁氣)에 대한 응용에서도 성공하였으며, 자체유도(自體誘導)를 발견 ·해석하였다.
패러데이의 전자기학 연구는 다방면에 걸쳐 있으며 통일적이었다. 전기화학의 기초를 만든 전기분해법칙 발견(1833)과 방전현상 연구가 있는데, 이런 성과들에서 여러 가지 전기의 동일성을 간파, 보편성을 가진 통일 개념으로서의 전기를 제창하였다. 또한 그 때까지의 원격작용론(遠隔作用論)을 버리고 전자기적인 힘의 근원을 공간적인 상태로 되돌리려는 근접작용론을 제창하여(1827), 맥스웰의 전자기이론의 길을 열고, 빛의 전자기파론의 선구적 고찰도 하였다.
이 밖에 진공방전에 관한 ‘패러데이암흑부’(1838), 자기장(磁氣場)에 의한 편광면(偏光面)의 회전(패러데이효과), 반자성(反磁性) 발견 등 중요한 공헌이 많았다. 일반 강연도 훌륭하여 크리스마스 강연집인 <양초의 과학>은 오늘날에도 읽혀진다. /naver
그 밖에
1997년 기아자동차 화의 신청
1986년 스톡홀름 협약 조인
1983년 대구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발생
1982년 대처 영국 수상 중국 방문
1982년 한국, 서독과 재정협력협정 서명
1982년 국제의원연맹(IPU) 집행위원회, 83년도 연차총회 서울개최 의결
1981년 과기처, 10억원 규모의 기능장려기금을 마련. 국제기능올림픽 입상자에 장려금 지급하기로
1981년 한국-코스타리카, 입국사증면제 합의
1980년 남덕우 제14대 국무총리 취임
1977년 정부, 소비자보호 기본법안 마련
1975년 주민등록증 갱신 발급사무 시작
1975년 민방위대 발대식 전국에서 시작
1971년 판문점서 남북직통전화 개통
1969년 멕시코의 대통령(1958-64) 로페스 마테오스 사망
1966년 이병철 삼성그룹회장,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매스컴과 학원사업에서의 은퇴 발표
1965년 중앙일보 창간
1964년 프랑스, 신군비 5개년계획 발표
1960년 민주당 구파, 분당 선언
1955년 충주비료공장 기공
1950년 미국 제트 전투기, F84 첫 대서양무착륙횡단 성공
1949년 국회, 반민특위 폐지법안 가결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ㆍ공포
1947년 일본-소련 무역협정 체결
1942년 미국의 고딕 복고양식의 건축가 랄프 아담 크램 사망
1919년 조선미곡주식회사 설치령 공포
1911년 44세의 사이 영,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를 완봉
1503년 피우스 3세 교황에 선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