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되돌아보다 - 메카시 선풍
1919년 쏘비에트가 건설되고 그 해 노동절로부터 비롯된 노동자 대투쟁은 미국 사회를 적색공포로 빠트렸다. 여기에 여성의 투표권도 최초로 인정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의 보수 진영에서 각종 언론매체를 이용하여 사회주의 세력과 노동자에게 총체적 적색테러를 감행하였다. 1920년 사회당 의원 5명이 의회에서 제명되고서야 어느 정도 사태가 가라앉았다.
1949년 소련에서 미국에 이어 두 번째의 핵실험이 단행되었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50년 공화당 소속 연방상원 의원이었던 조셉 맥카시는 버지니아주의 작은 도시 윌링에 있는 여성공화당원 클럽에서 연단에 올라 종이 한 장을 꺼내들고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여기 들고 있는 명단에는 미국 국무부가 공산당원으로 파악하고 있는 데도 여전히 국무부에서 근무하면서 대외정책 수립에 관여하는 205명의 이름이 적혀있다.”
수천 명의 노동자가 투옥 또는 해고되고 사상검증의 열풍에 심지어는 헐리우드 배우도 300명가량 쫒겨났다. 이 메카시 선풍은 1954년 ‘내부안정법(=공산주의 통제법)’이 제정되어 서야 안정되었는데, 이 음모를 꾸민 자는 당시 미 연방수사국장이었던 ‘에드가 후버’였다. 물론 그 사이 사상검증을 기획하고 내쫒고 하는 무소불위의 기획자 역시 후버였다. 30년 후에야 밝혀졌다. 메카시는 당시 여러 사안의 치명적 비리에 노출되어 퇴출 위기에 놓인 정치인이었다. 그 후 메카시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스타로 떠올랐다.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통합진보당 사태에 우리 사회는 메카시 선풍에 빠져들고 있다.
조진호의 ‘진상보고서’는 ‘진실왜곡보고서’이다.
이미 본 카페에 자료를 올렸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한다. 다만 상식적으로 하나만 물어보자. 부정선거로 지목된 당사자들이 철저한 재조사를 요구하는데, 왜 신당권파에서는 외면하는가?
무엇 때문이었을까? 몇 가지로 추론해 본다.
첫째, 권력투쟁이다. 신당권파(진보신당 탈당파, 국참당)는 총선의 지역구에서 전멸했다. 최소 10석이 예상되었던 비례대표도 예상과 달라 그들의 후순위 비례대표가 탈락했다.
둘째, 사상투쟁이다. 기존의 구당권파는 노동과 통일을 중요시하는 대중적 진보정당의 성격이 분명했다. 이들은 대중적 진보정당의 뿌리를 굳건히 하여 2017년의 단독집권을 목적으로 하였다. 반면에 신당권파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개혁해 내는 개혁적 국민정당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셋째, 잘 모르겠다. 원내교섭 단체로 안 되는 정당 내부의 문제가 이렇게까지 국가 전체의 문제로 비화되는 것이 과연 내부의 힘으로만 가능했겠는가? 아니면? - 잘 모르겠다.
통진당 사태가 현재 우리사회에 가져오는 결과는 무엇인가?
첫째, 현 집권세력의 전반에 걸친 총체적 부정 사태를 덮어버렸다.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상하다시피 식물정권이 될 지도 모를 정도로 비리 문제가 폭발되는 순간이었다.
둘째, 야권연대가 무력화되었다. 총선에서 표의 결집으로 여권이 승리하였으나 표수는 야권연대가 더 많았다. 그 누가 아무리 차별화를 한다 할지라도 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다름 아닌 대권이다. 이 결정적 구도에 파열음이 난 것이다.
셋째, 진보세력과 국민이 분리되고 있다. 자칫 우리는 안보장사와 지역장사의 구조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상황으로 전개될 수 있다. 5․18과 6월 그리고 정권교체로 이룩해온 그나마의 열린 공간이 보수의 블랙홀로 빠져들어갈 위기에 처해버렸다.
넷째, 남북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가져 오고 있다. 향후 몇 년간은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매우 민감한 결정적 시기가 될 수 있는 때이다. 북미대결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종착역을 향하고 있다. 보수세력은 남북문제에서 통일문제를 사상(捨象)시키고 정경분리의 원칙에서 경제적 측면으로만 접근하고 싶을 것이다. 그들이 입장에서는 남한사회에 반공프레임을 보다 확실히 심어 놓을 필요성이 절실하다.
나머지는 이야기하고 싶은 기력조차 없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
아직 크리스트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기 이전이다. 로마의 권력자들은 땅바닥에 십자가를 놓고 그것을 밟지 않는 자는 잡아서 처형했다. 일제말기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가입자에게 전향서를 요구하고 거부할 경우, 형벌을 가했다.
여기저기에서 사상검증을 요구하고 있다. 박원순 시장이 후보였을 때, 누군가가 ‘천안함은 북한 소행이라고 믿느냐?’고 답변을 강요한 적이 있다. 지난달 KBS <심야토론>에서 전원책 변호사(한국자유기업원장)는 이석기 당선자에게 “김정일, 김정은에게 ‘개××’라고 해보라”고 하였다.
자발적 검증논자로 나타나고 있다. 안철수 원장도 “진보정당은 인권·평화 같은 보편적 가치를 중시하는데 이런 잣대가 북한에 대해서는 다르게 적용되는 건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물론 안철수 원장이 말한 핵심은 색깔론이나 이념논쟁으로 바뀌는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해 우려를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다른 해석의 여지도 있다 하겠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 시대의 프레임이며, 통진당 사태로 가속페달을 밟고 있는 현 시기의 작태이다.
한편으로 반공진보주의자인 진중권 류를 보라. 진중권은 반공의 배 위에 몸을 실고 있기 때문에 기타의 부분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매우 자유롭다. 그의 말은 거침없고 펀치도 세다. 그러나 그를 건드리는 보수세력은 별로 없다. 그는 위태로운듯이 보이나 사실은 안정적이다. 본질적으로 진중권은 그들의 아류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사실을 보고 들을 때, 한국 사회에 한없는 비애를 느끼며 내 자신에게는 치욕을 느낀다. 굳이 헌법에 명시된 ‘사상과 표현, 양심의 자유’는 관두더라도 인간의 존엄을 짓밟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석가가 ‘天上天下唯我獨尊(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하였던가!
사태의 흐름을 겪으면서
조준호의 ‘진상보고서’가 나왔을 때, 얼마나 실망스럽고 당혹스러운지 내 자신도 모를 지경이었다. 이정희의 거부가 나왔을 때, 또 한 차례의 충격을 받았다. 무엇 때문인가? 도대체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 판단을 유보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사실이 어느 정도 밝혀졌다. 부정선거는 대부분이 민노당의 비합시절부터의 관행이었고 오히려 신당권파의 부정이 더 클 지도 모르겠다. 진보당의 잘못된 관행도 잡아야 하고 혁신도 하고 당의 모습이 달라져야할 부분도 수없이 많다. 하지만 이러한 사항은 본 사태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나도 처음 사건이 터지자마자 당권파는 빨리 석고대죄하며 사퇴하고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꼬리뿐만 아니라 몸통의 일부라도 잘라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상이 조금씩 밝혀지면서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 이것은 도둑이 오히려 몽둥이를 든 賊反荷杖이 아닌가?
물론 역사 속에는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다소 억울하더라도 중도를 지켜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주장이 많이 있다. 그러나 中道란 무엇인가? 현실과 조응해서 최대한의 正道를 실천하라는 것이지 부당한 현실에 타협해서 수용하자는 뜻은 아닐 것이다.
식민지 시대에 독립운동을 한 사람더러 현실적으로 어려우니까 멈추라 할 수 없다.
독재 시대에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더러 현실적으로 어려우니까 멈추라 할 수 없다.
때로는 가시밭길이라도 거친 호흡으로 가야할 길이 있고 때로는 반동을 맞이할 수도 있다. 역사는 완성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역사의 과정 속에서 산다. 과정을 살아가는 과정에 목적이 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삶의 자취이며 여정이라 믿는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의 반동보다도 삶의 진실이 깨트려지는 것이다. 역사는 돌고도는 회전적 순환과 물적토대의 축적과 이에 따른 발전이라는 양 날개로 진행된다. 맞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톨레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고 했지 않았을까?
인간적(=자연적) 가치가 존중되는 사회를 원한다
우리 사회는 ‘성장, 반공, 지역’이라는 몇 가지 괴물이 뿌리 굳건히 버티고 있다. 이를 벗어나서는 사회 주류에 편승하기가 쉽지 않다. 나머지는 모두 경계의 대상 또는 척결의 대상이다. 이 이분법으로 인하여 우리 사회는 극심히 분열되어 있다. 이것은 태극이 兩儀(陰과 陽)로 구분되는 동양적 사유와는 같은듯하면서 다르다. 오히려 서구의 이분법적 사유와 합리주의에 보다 가깝다.
예컨대, 민주주의란 그야말로 民이 주인 되는 사회이어야 하는데 껍데기만 민주주의로 포장한 채, 가진 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형식논리로 전락하여 버렸다.
성삼문이 수양의 왕위찬탈에 반기를 든 것은 義라는 정신이었다. 실용적 관점에서만 접근하면 어린 단종보다 수양이 훨씬 유능했다. 그러나 이후의 조선은 어떠했는가? 찬탈의 피비린내에서 세조는 자유로울 수 있는가?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것은 한정적이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존재조건에 따라 자신의 의식을 규정할 만큼 천박한 존재가 아니다. 계급적 관점으로만 사회를 분석했을 때에 필연적으로 오류가 뒤따른다. 이러한 의미에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 수단이 정당하지 못했을 때, 목적도 희석화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삶의 바다에서는 존재와 의식, 목적과 수단이 딱 분리된 별개의 것이 아니다. 삶의 과정 하나하나가 삶의 존재이고 목적이기도 한다. 의식이 존재를 이루고 존재 속에서 의식이 파생되기도 한다. 이번 통진당 사태에서 뼈저리게 다시 느낀 교훈이기도 하다.
지성의 성찰을 촉구한다.
<시 한 수 올립니다>
폭포(瀑布)
김수영
폭포는 곧은 절벽(絶壁)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規定)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意味)도 없이
계절(季節)과 주야(晝夜)를 가리지 않고
고매(高邁)한 정신(精神)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金盞花)도 인가(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醉)할 순간(瞬間)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뒤집어 놓을 듯이
높이도 폭(幅)도 없이
떨어진다
김수영은 일제말기, 해방공간, 6․25, 4․19, 5․16라는 가장 참혹했던 우리 시대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시인이다. 일제말기에는 징용을 피해 일본으로 만주로 떠돌아 살았고 6․25 때에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3년 이상 갇히기도 하였다. 그리고 돌아와보니 그의 부인은 그와 절친했던 선배와 같이 살고 있기도 하였다. 본 작품은 아마도 4․19와 5․16을 겪은 후의 작품 같다.
시인은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고매한 정신처럼 ‘곧은 소리’를 내며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고 하였다. ‘곧은 소리’는 양심의 소리이며 정의의 소리이다. 김수영의 이 내면의 소리가 폭포의 곧음과 그 소리에 응하여 ‘곧은 소리’로 형상화되었다. 폭포의 물결을 규정하고 규정하지 않고는 시인의 마음에 달려 있다. 무엇을 규정할 수 없다고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폭포의 진폭과 낙차를 인간은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규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김수영은 리버럴한 사람이다.
나는 규정할 수 없으되 곧은 소리를 내는 시의 영상에서 시인의 모순된 삶의 현실을 엿본다. 해방공간 전후의 모순된 사회역사적 현실이 지식인들의 삶의 형식에 시인과 같은 모순을 강제한 측면이 있다. 그리고 이 현실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면서 문득 내 자신을 되돌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