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⑧일본출장을 떠난 김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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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70년대 이래 각종 굵직한 국가 주도 고고학 발굴사를 이야기할 때 김정기(金正基)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973년에는 경주 천마총을 발굴했고 이듬해부터는 곧바로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황남대총 발굴에 매달렸으며 그 후 잇따라 진행된 안압지와 월성해자, 황룡사터, 익산 미륵사터 등등의 발굴은 모두 김정기의 지휘 아래 진행됐다.
김정기는 원래 고고학자가 아니라 건축학자였다. 일제 식민강점 시절인 1930년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서 태어난 그는 1943년 일본 시즈오카(靜岡)현 가케가와중학교에 입학했으며 45년 일제가 패망하자 귀국해 창녕공립중학교를 거쳐 1950년 마산 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56년 메이지(明治)대 공학부 건축학과를 졸업해 공학사 학위를 따면서 그해 도쿄(東京)대 공학부 건축사연구실 조교가 됐다.
조교 생활 4년째인 59년 어느날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의 한국측 일원이었던 황수영(당시 동국대 교수)이 불쑥 찾아왔다. 황수영은 고려대 교수 이홍직과 함께 국교정상화 회담에서 약탈 문화재 반환 문제에 관여하고 있었다.
이날 만남에서 황수영은 김정기에게 한국에 돌아와 일하는 게 어떻냐는 제안을 한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김정기는 일본에서 다른 계획이 있었다. 지바(千葉)현 어떤 사찰의 관음전이 해체 수리중이었는데 그 기술을 배우고자 했다.
하지만 4-5년 정도 더 일본에서 머물고자 했던 김정기의 계획은 황수영이 한국에 돌아가고 난 뒤 고국에서 날아온 편지 한 통을 받고는 전면 수정됐다. 그에게 편지를 보낸 주인공은 당시 국립박물관장 김재원이었다. 김재원은 이 편지에서 귀국해 박물관에서 일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정기는 '국립박물관장이라는 분이 나한테 손수 편지를 써서 요청하셨고, 또 나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1959년 돌아왔다'고 회상하고 있다. 아마도 김재원에게 김정기를 추천한 사람은 황수영이었을 것이다.
돌아온 그해 10월 김정기는 국립중앙박물관 보급과 학예연구관이 되고 61년 1월에는 고고과 학예연구관이 됐으며 64년에는 고고과장에 취임한다.
이런 그에게 69년은 또 다른 전환기였다. 문화재관리국이 문화공보부 외국(外局)으로 독립하면서 문화재연구실이라는 문화재 조사 전문기관을 창설했는데 그해 11월 초대 실장으로 김정기가 취임한 것이다.
지금도 그렇거니와 출발과 더불어 국가 주도 발굴을 전담한 문화재연구실은 75년 현재의 국립문화재연구소로 명패를 바꿔 달게 됐는데, 김정기는 문화재연구실장 6년을 포함해 국립문화재연구소장으로 18년을 일하다가 87년 명예퇴직했다.
김정기가 천마총 이래 여러 대형 발굴에 관여한 것도 이런 경력 때문이었다. 그런데 후세가 김정기를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나, 그가 한국 고고학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 가운데 비록 건축학 전공이긴 했으나 이론과 실전을 겸비한 남한 최초의 고고학자라는 사실을 빼놓을 수는 없다.
59년 귀국하기까지 김정기는 일본을 대표한다는 유서깊은 사찰인 오카사(大阪)의 사천왕사(四天王寺) 터를 비롯한 일본 고대 절터 발굴에 직접 참여했고 이 과정에서 고고학 발굴은 실측(實測)을 비롯한 기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체득했다.
그가 귀국할 당시 남한 고고학은 명색이 고고학이었지 그 수준은 그냥 파헤치는데 불과했고 실측이란 개념은 더더구나 모르고 있었다.
불모지인 남한 고고학은 김정기가 귀국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가 유물과 유적에 대한 실측이라는 개념이 도입됐고 나아가 사찰 혹은 사찰 터와 같은 고대 건축물에 대한 발굴 및 해체복원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김정기의 약력, 그중에서도 그가 문화재연구실장 및 문화재연구소장으로 재임했던 69-87년을 살펴볼 때 특이한 점은 71년 7월 대목에 당연히 들어가야 할 공주 무령왕릉 발굴조사가 빠져 있다는 점이다.
무령왕릉 발굴은 71년 7월에 있었다. 이때 발굴조사기관은 문화재연구실이었다. 물론 발굴을 실제 쥐락펴락한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원룡과 공주박물관장 김영배였으나 서류상으로 보면 김원룡과 김영배는 문화재연구실 조사를 자문하고 지도하는 말 그대로 '자문위원'에 불과했다.
발굴단장은 당연히 문화재연구실장인 김정기여야 했다. 그러나 김정기는 여기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다. 왜 그랬을까? 발굴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령왕릉은 71년 7월부터 10월까지 모두 4차에 걸친 조사가 있었으나 무덤에서 유물 3천점을 몽땅 들어낸 1차 발굴이 가장 중요하고 그 이후 추가 발굴은 수습 혹은 뒷정리에 불과했다.
김정기는 왜 무령왕릉 1차 발굴에 참여하지 못했는가? 그해 7월 초순 어느날 오전 김정기에게 보고서 하나가 올라온다. 송산리 고분군 배수로 공사 현장에서 석회 흙과 전돌(=벽돌)이 발견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날 김정기는 일본 출장을 떠나기로 돼 있었다. 때문에 그 보고를 뒤로 하고 예정대로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 전돌을 출토한 곳이 무령왕릉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김정기는 이 보고를 받은 정확한 날짜와 당시 일본 출장 목적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전돌이 발견됐다는 내용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보고를 받은 날짜는 틀림없이 7월 5일이었을 것이며 그때 김정기는 박정희의 지시로 불국사 복원에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위한 자료 수집이 일본 출장 목적이 아니었던가 싶다.
김정기가 귀국한 것은 무령왕릉 2차 발굴이 시작되기 전이었다고 한다. 2차 조사위원 명단에 김정기라는 이름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어떻든 김정기가 무령왕릉 1차 발굴조사에 참여하고 못하고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역사는 가정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많은 고고학계 인사가 '김정기 박사가 있었더라면 무령왕릉을 그처럼 졸속 발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국내 고고학 종사자 가운데 발굴은 어떻게 해야 하며 또 그 과정에서 유물이나 유적에 대한 실측 하나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던 거의 유일한 인물이 김정기였다.
물론 이런 가정에 대해 김정기 자신은 '그때 현장에 없었고 또 현장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알 수도 없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으며 또 설사 내가 있었다 한들 하룻밤만에 발굴하지 않았으리라는 법은 없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다.
그러면서 김정기는 무령왕릉 졸속 발굴을 주도했다는 마음의 짐을 안고 살다가 93년 먼저 세상을 뜬 김원룡이 생전에 자기에게 했다는 말을 소개했다.
'삼불(김원룡의 호) 선생이 어느날 나한테 그럽디다. '내가 잘못해서 무령왕릉을 저렇게 만들고 말았노라'고. 제가 말씀드렸어요. '선생님 잘못이 아닙니다. 그때 누가 발굴했어도 그랬을 것입니다'라고 했지요' 물론 김정기가 있었다고 해서 졸속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김정기가 하필 송산리 고분군에서 전돌이 출토되던 날 일본 출장을 떠난 것은 무령왕릉 졸속 발굴을 위한 충분조건은 되지 못할지언정 필요조건이 되기에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