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과와 다섯 병정
이 문 열
팔월의 따가운 햇살 아래 마을은 한 폭의 동양화처럼 정지해 있었다. 짙은 녹음 사이에서 매미들이 요란스레 울고 있었지만, 그 요란스러움마저도 전혀 잡것이 섞이지 않은 상태여서 오히려 정적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런 마을을 바라보면서 그는 야릇한 감개에 젖어 들었다. 스물일곱 해 만의 귀향 ― 그러나 사실을 말하면 그것은 귀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낯선 곳으로의 첫 발걸음이라는 편이 옳았다. 그는 태어난 지 사흘도 안 돼 눈도 한 번 제대로 맞춰 보지 못한 채 그곳을 떠나야 했고, 그 뒤로는 그런 마을이 세상에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채 어느 외딴 산사(山寺)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허드렛일과 목탁 소리 속에 잔뼈가 굵어 가는 동안 그 역시도 자신의 출신 내력이나 부모가 궁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그걸 물을 때마다 묏덩이 같은 자신을 받아 길렀다는 조실(祖室) 스님은 애매하게 대답하곤 했다.
“너는 그저 불자(佛子)니라. 하늘과 땅이 네 어버이니라.”
그런 조실 스님의 태도는 그가 군에 입대하게 되었을 때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다가 복무 기간 동안 세속의 생활을 어느 정도 맛본 그가 전역과 함께 환속을 들고 나서자 비로소 일러 주었다.
“무슨 인연에 끌리어 그러는지 알 수 없다만 말리지는 않겠다. 그러나 한번 너를 버린 그 땅이 다시 따뜻이 맞아 줄 것 같지 않구나. 언제든 다시 돌아오너라. 산문(山門)은 항상 열려 있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한번 끊어졌던 세간과의 인연을 이어 주었다. 즉 그가 버림받은 땅과 그를 버린 어느 신심(信心) 깊은 마나님을. 그러나 그녀가 왜 약간의 논밭까지 곁들여 수백 리 떨어진 산사에 한 칠(七)도 안 난 그를 맡겨야 했는지 조실 스님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처음 그런 얘기를 듣게 되자 그는 오히려 그 땅을 찾는 일이 망설여졌다.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의 숨겨진 출신 내력 속에서 어떤 불륜과 치욕의 그림자를 감지한 탓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어쩔 수 없었다. 한 사문(沙門)으로 삼보(三寶)에 의지하든 범부(凡夫)로서 세간을 살게 되든 그 땅은 그가 한 번은 반드시 찾아야 할 유연(由緣)의 땅이었다.
찾고 있는 참봉댁과 과수원의 위치는 마을과는 좀 떨어진 강가의 산부리 아래였다. 그 과수원과 강둑 사이에는 울창한 아카시아 숲이 싱싱한 초목의 향기와 함께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는 그 아카시아 숲 사이로 난 폭 좁은 도로를 따라 들어갔다. 우마차나 경운기가 간신히 드나들 정도의 폭이었는데, 곧게 나 있어 멀리서도 산 밑 과수원의 탱자 울타리와 목재 대문이 보였다.
그런데 원인 모를 감동과 설렘에 젖어 그리로 다가가던 그는 돌연 한 떼의 이상한 인물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요즈음도 저런 군인들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남루한 차림을 한 다섯 명의 사병들이었다. 위장포도 씌우지 않은 알철모에 계급장도 명찰도 분명하지 않은 너덜너덜한 군복, 군화는 한결같이 진흙투성이인 데다 형편없이 긁히고 찢어진 것이었다. 얼굴은 더욱 심했다. 며칠이나 세수를 안했는지 기름때로 번질거리는 데다 불쑥 솟은 광대뼈나 충혈된 눈은 그들의 예사 아닌 피로와 굶주림을 나타내고 있었다. 함부로 자란 수염이나 눈썹 위에 하얗게 앉은 먼지 ― 거기다가 하나는 마치 허기진 사람처럼 철모에 담긴 아직 새파란 풋사과를 정신없이 씹어대는 중이었다.
그는 갑자기 까닭 모를 전율에 빠져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이 탈영병이거나 또는 그보다 더 끔찍한 범법자들일지도 모른다는 추측 이상의 어떤 섬뜩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자신들의 길을 갈 뿐이었다. 둘은 풋사과를 가득 싼 상의를 어깨에 메고 둘은 역시 풋사과로 불룩한 작업복 양 호주머니를 어루만지며, 그리고 하나는 여전히 아귀아귀 풋사과를 베어 먹으면서.
그러다가 그들과 엇갈릴 무렵 그는 다시 한 번 일층 강도 높은 전율을 경험했다. 한결같이 무관심하게 지나치는 그들 가운데서 한 사람 사과를 씹고 있던 사병이 잠시 날카로운 눈길로 그를 쏘아본 때문이었다. 일행 중에서 가장 앳되고 차분한 얼굴이었는데, 그 눈매는 뼛속까지 한기를 느끼게 할 만큼 차면서도 그윽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들은 별일이 없이 그를 지나쳐 갔고, 왠지 뒤가 끌린 그가 잠시 후 다시 돌아보았을 때는 강둑 너머로 사라진 뒤였다. 그도 이내 그들을 잊고 말았다. 어느새 그 앞에 다가와 있는 칠이 벗겨진 나무 대문과 무거운 정적 속의 고가(古家)가 그를 새로운 종류의 긴장과 흥분 속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대문은 반쯤 열려 있었지만 집 안은 텅 빈 듯, 가까운 과수 아래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비치지 않았다. 다만 늙은 개 한 마리가 툇마루 밑에서 졸고 있다가 머뭇머뭇 들어서는 그를 보고 게으르게 눈을 떴다. 그러나 별로 짖고 싶은 생각이 없는지 귀만 한 번 쫑끗 하더니 이내 스르르 눈을 감아 버렸다.
“계십니까?”
그는 손수건을 꺼내 땀도 없는 이마를 문지르며 목소리를 가다듬어 주인을 찾았다. 예상대로 대답이 없었다. 몇 번 더 불러 본 후에 그는 마침 가까운 나무 그늘에 놓인 살평상을 보고 그리로 갔다. 거기 앉아 담배라도 한 대 피우면서 주인을 기다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미처 살평상에 가 앉기도 전에 그 집 한구석에서 여자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요?”
“주인 되시는 분을 뵙고 싶습니다만…….”
“지금 들에 나갔으니 나중에 와요.”
“아뇨, 기다리죠.”
“멀리서 온 모양인데, 그럼 안으로 드세요.”
그러나 여전히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도대체 그 목소리의 임자가 어디 있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어디 ― 계십니까?”
“마루로 올라와서 곧장 왼편으로 돌면 돼요.”
그는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어 망설이다가 시키는 대로 했다. 집안은 겉에서 보기보다 훨씬 넓었다. 마루의 유리 덧문이나 일본식 내부 구조로 보아 그리 오래된 집이 아닌데도 낡은 고가(古家)처럼 느껴지는 것은 손질을 않아 퇴락한 탓인 듯했다. 굵지 않은 나무기둥과 창틀이 군데군데 거멓게 삭아 있었고, 회벽에도 여기저기 얼룩이 보였다. 발을 떼어 놓을 때마다 마룻바닥이 요란스럽게 삐걱거렸다.
그 목소리가 말한 대로 마루 왼편 구석에 문이 열려 있는 방이 하나 눈에 띄었다. 마당 쪽의 창문 곁에 낡은 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목소리의 임자는 거기 누운 중년의 여자였다. 그녀는 반듯하게 누운 채로 조그만 손거울을 통해 들어오는 그를 시종 비춰보고 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그녀가 마음대로 놀릴 수 있는 것은 두 손뿐인 것 같았다.
“어떻게 오셨지요?”
그가 방에 들어서는 것을 보며 여인이 여전히 억양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난감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자신을 설명해야 할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이로 보아 적어도 그녀가 핏덩이 같은 자신을 절로 보냈다는 그 마나님은 아닌 듯했지만, 그 집과의 관계를 확실히 모르는 이상 함부로 말을 꺼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난감함은 이내 그녀에 의해 사라졌다. 손거울을 통해 가까이 다가오는 그를 찬찬히 살피던 그녀가 갑자기 놀라움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표정으로 떨며 물었다.
“젊은 양반, 이름이 혹시…… 만서(萬恕) 아닌가? 백만서.”
“그렇습니다만…….”
그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상좌승조차도 모르는 자신의 속명(俗名)을 알고 있다는 사실보다도 완전히 정상을 잃은 그녀의 눈동자 때문이었다. 대답을 들은 그녀는 신음 같은 흐느낌과 함께 여윈 두 팔을 미친 듯이 허우적거렸다.
“아이구 내 새끼야, 네가 살아 있었구나. 결국 돌아왔구나…….”
어느새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도 갑작스러운 감격에 휩싸여 파리하고 야윈 그녀의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처음 그녀를 대할 때부터 이상하게 가슴 깊이 닿아 오던 예감이 마침내 적중한 셈이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그 오랜 궁금함과 그리움과 원망 대신 그리고 당장의 낯섦과 서먹함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바로 자기 어머니란 사실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일이었다. 조금 과장하면 그저 어디 긴 여행에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녀는 완전히 몸을 떨며 흐느끼고 있었다.
“돌아올 줄 알았다. 내 아들아…… 암 돌아오구말구…….”
그리고 손을 놓은 그녀는 다시 맹렬하게 두 손을 허우적거리며 그를 안으려 애썼다. 그도 차츰 콧머리가 시큰하고 목이 메어 왔다. 그는 별다른 마음의 준비 없이 거의 자연스럽게 허리를 굽혀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처음 맡는 냄새였지만, 분명 긴 유년의 꿈속에서 맡았던 바로 그 어머님의 냄새였다. 끝내 그의 볼에도 두 줄기 눈물이 타고 내렸다.
잠시 후에 다시 마음을 가다듬은 그는 조용히 그녀의 품을 빠져나가 침대 모서리에 앉았다. 이제야말로 오랜 의문 一 자신의 출생 내력을 알아볼 차례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본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궁금증을 억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의 얼굴은 신열과 흥분으로 벌겋게 달아 있었다. 숨결마저 듣기조차 괴로울 만큼 거칠어졌다. 그러나 입만은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쉴 새 없는 물음들을 쏟아 놓았다. 어디서 어떻게 자랐는가, 지금은 무얼 하며 앞으로는 또 어떻게 할 작정인가, 몸은 건강한가, 장가는 갔는가 따위.
그가 그런 물음에 띄엄띄엄 대답하고 있는 사이에 들에 나갔던 외삼촌 부부가 돌아왔다. 중년의 평범한 시골 농부들이었다. 그들로 보아 그 집이 자신의 친가는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지만 난생처음 핏줄기를 대하는 감격은 여전했다. 그러나 그들 부부가 그를 대하는 품은 전혀 뜻밖이었다. 어머니의 감격에 찬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들 부부의 표정에서는 원인 모를 악의와 냉담이 시종 떠나가지 않았다. 그가 애써 말을 붙여도 깍듯한 존댓말로 자신들과 그의 관계에 대한 부인을 대신했다. 한 가지 뚜렷한 것은 그의 출현이 도무지 엉뚱하고 성가시다는 기색뿐이었다.
거기다가 더욱 알 수 없는 일은 그들도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점이었다. 과도한 흥분으로 기력을 소모한 어머니가 끝내 혼절하듯 잠들어 버린 후 그는 에돌 것 없이 곧바로 외삼촌에게 자신의 내력을 물어보았다. 실망스럽게도 대답은 모르쇠나 다름없었다.
“하두 오래되고 一 또 그때는 내 나이 어린 데다 ― 워낙이 비밀로 처리된 일이 되어서…… 어머님께서 주관하셨지만 이미 돌아가셨고 ― 누님은 통 말씀이 없으셨으니…….”
진지한 표정으로 보아 외삼촌이 적어도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그래서 외삼촌이 약간 굳은 얼굴로 이런 부탁을 해왔을 때도 그는 별 저항감을 느끼지 않았다.
“젊은이가 이렇게 찾아온 것이나 누님의 태도로 보아 굳이 우리 관계를 부인하려는 건 아니지만, 남들에게는 비밀로 해 주게. 이곳은 우리 집 안의 300년 세거지(世居地)라네. 누님은 처녀로 깨끗이 늙은 걸로 되어 있고오.
거기다가 ― 물론 젊은이가 무슨 죄가 있겠나만 ― 아버님과 형님이 돌아가시고 집안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젊은이의 출생 때문으로 알고 있네. 지하에 계신 아버님과 형님을 위해서라도 젊은이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심정을 이해해 주게.”
결국 늘어난 것은 의문뿐, 모든 것은 여전히 그의 어머니가 실마리를 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밤늦도록 그는 어머니의 침대 곁에서 기다려 보았으나 그녀는 밤새도록 고열과 신음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이튿날도 그의 어머니는 깨어나지 못했다. 외삼촌의 청으로 면(面)의 공의까지 다녀갔지만 소용이 없었다. 간간 의식이 회복되어도 기껏 그녀가 하는 일은 그의 존재를 확인하고 불덩이 같은 손으로 그의 두 손을 꼬옥 잡는 것이 전부였다. 되도록이면 곤두선 그녀의 신경에 지나친 자극을 주는 일은 피하라는 공의의 주의가 아니더라도 도무지 무엇을 물어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외삼촌 내외는 그런 그들 모자의 주위를 불안스러우면서도 못마땅해하는 침묵으로 맴돌았다.
오전 내내 그와 같이 답답하고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보낸 그는 점심을 먹자마자 강가로 나갔다. 어머니가 얼마 전부터 혼수상태에 가까운 잠 속에 떨어져서 굳이 침대 곁을 지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람 한 점 없는 후덥지근한 병실에서 그것도 답답하고 어색한 분위기에 눌려 기다리기보다는 시원한 강물에 몸이라도 식히고 앞으로의 거취나 생각해 보는 편이 옳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강물에 한동안 몸을 식힌 후 아카시아 그늘에 앉아 이것저것 생각에 잠겨 보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자신의 출생에는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어둡고 경우에 따라서는 참혹하기까지 한 이면이 있음에 분명했지만, 하룻밤에 그의 궁금증도 몇 배나 가열해져 있었다. 그 끔찍한 비밀로부터 도망치고 싶기는커녕, 그것을 알기 전에는 앞으로의 삶을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을 것 같은 심경이었다.
잠시 후 그는 나올 때나 별반 다를 바 없이 막연하고 우울한 기분으로 과수원을 향했다. 그런데 그 아카시아 숲 사이의 길에서 그는 또 어제의 그 군인들을 만났다. 모든 것이 어제와 똑같은 것이 묘하게 섬뜩했다. 남루한 복장에 지치고 허기진 표정. 거기다가 둘은 여전히 사과를 가득 싼 군복 상의를 메고, 둘은 사과로 불룩한 것임에 틀림없는 작업복 양 호주머니를 어루만지며, 그리고 하나는 철모에 가득 찬 풋사과를 열심히 씹으며.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들과 엇갈릴 때 사과를 씹던 그 사병이 어제보다 좀 더 오래, 그리고 더 깊고 그윽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는 정도였다. 그 자신도 어제와는 달리 세찬 전율 속에서도 왠지 낯익고 친밀한 느낌이 들어 한동안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전날의 기억보다는 훨씬 잘생긴 얼굴에 왼쪽 이마의 꽤 깊게 팬 한 줄기 상처가 새로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가 돌아오니 과수원은 조용했다. 외삼촌 부부는 보이지 않고 늙은 개만 졸고 있었다. 그러자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여러 가지로 보아 그들 다섯 명의 군인들은 분명 그 과수원에서 사과를 얻었을 텐데 과수원에는 전혀 그들이 다녀간 흔적이 없었다. 그들에게 사과를 팔거나 준 사람이 없을 것 같은 데다, 몰래 들어와 훔치기에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너무 높고 빽빽해 보였다.
“뭘 그렇게 살피고 있니?”
그가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병실 쪽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에 들어가 보니 어머니가 뜻밖에도 말짱하게 회복된 얼굴로 손거울을 들고 있었다. 그걸 보고 그는 불쑥 물어보았다.
“웬 군인들이죠? 방금 나간 사람들 말입니다.”
“아무도 오지 않았는데…….”
“어제도 다녀갔는데요. 사과를 사 간 것 같던데…….”
“사과를 사? 요즈음은 차라리 낙과로 버려두지 풋사과를 주워 팔지는 않는걸.”
“외삼촌이 모아 두었다 주셨겠죠.”
“외삼촌은 어제오늘 건너 논에 농약을 치고 있어.”
“그럼 훔쳤나?”
“그럴 리도 없어. 사방이 탱자 울타리로 막혀 있어 대문으로밖에 들어올 수 없으니까. 도대체 몇 명이나 되던?”
“다섯 명이었어요.”
“그럼 더욱 내가 못 봤을 리 없어. 어제는 하루 종일 이 손거울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고, 오늘도 네가 없어진 후부터는 줄곧 너를 기다리느라고 밖을 살폈으니까.”
“그래도 분명히 여기서 나오던데…….”
“이상한 일이다. 알 수 없어…….”
그 말을 듣자 그는 더욱 그들 다섯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면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급히 집 밖으로 나가 보았다. 그러나 아카시아 숲길은 물론 멀리 강둑까지 뛰어가 보았지만 그들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었다.
강둑 위에서 이리저리 사방을 살피던 그는 가까운 원두막에서 한 늙은이가 담배를 태우고 있는 걸 보고 다가가 물었다.
“할아버지, 이리로 군인들 지나가는 것 못 보셨습니까?”
“군인들? 못 봤는데.”
“분명히 여길 지났을 텐데요.”
“몇 명이나?”
“다섯 명이었습니다.”
“거참 모를 일이로군. 한둘도 아니고…… 이 근처에는 군부대가 없어. 어쩌다 휴가 나온 이곳 젊은이들이 있지만 한둘이 기껏이지. 다섯씩 이나 몰려 다니다니…….”
“그렇다면 정말로 이상하군요. 어제도 보았는데.”
“어제도? 아닐걸. 나도 어제는 왼종일 이 원두막을 지켰는데, 그리고 참봉댁 과수원에서 나왔다면 여기 앉은 내 눈을 피할 수 없어. 보아하니 어제 온 참봉댁 젊은 손님 같은데.”
“그럼 어제 제가 오는 것도 보셨습니까?”
“물론 봤지.”
“그런데 저와 엇갈려 간 그들을 못 보셨다니요?”
“글쎄, 아무도 없었대두”
“혹시 저 아카시아 숲에 샛길이 있는 게 아닙니까?”
“가다가 한번 들어가 보게나. 어찌나 나무들이 모질게 엉켰는지 들짐승도 뚫고 다니기 힘들걸세. 어쨌든 잠깐 올라오게. 더운데 여기서 쉬었다 가지.”
그가 아직도 미진해서 머뭇거리다가, 재촉을 받고서야 마지못해 원두막으로 올라가자 늙은이는 생각난 듯 강가로 내려가더니 샘 줄기에 채워 둔 수박 하나를 꺼내 왔다. 그러는 늙은이는 목발을 짚지 않는 게 용하다 싶을 만큼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었다.
수박은 생각보다 훨씬 달고 시원했다. 그는 늙은이가 권하는 대로 사양 않고 받으며 이것저것 외가에 관한 것을 물어보았다. 그가 늙은이를 통해 들은 것은 대강, 외가가 그 마을의 오랜 명문으로 가까운 조상에 참봉(參奉) 벼슬을 한 이가 있어 참봉댁으로 불린다는 것, 그래도 인물들은 계속 났는데 ‘6·25’ 통에 외조부 부자(父子)가 한꺼번에 없어지자 그나마 끝나고 말았다는 것 등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것은 외삼촌이 말한 대로였다. 그러면서 늙은이는 그의 정체에 대해 궁금히 여기는 눈치였으나 그는 굳이 자기를 참봉댁의 먼 친척으로만 둘러대었다. 외삼촌의 부탁보다는 이상한 방어 본능에서였다.
그런데 한동안 그런저런 얘기를 들려주던 늙은이가 문득 무얼 생각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참, 아까 그 군인들이 다섯 명이라고 했지?”
“네, 분명 다섯 명이었습니다.”
“말이 났으니 얘기네만, 그 다섯이란 숫자가 묘하게 맘에 걸리누먼.”
“어째서요?”
그러나 늙은이는 다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는 없지. 이런 대명 천지에. 아니야…….”
그는 그러는 늙은이를 의아스럽게 쳐다보았다.
“뭐가 말입니까?”
“아니, 아니 그저 갑작스레 옛날 일이 떠올라서.”
“무슨 일인데요?”
그렇게 묻자 늙은이는 다시 망설이는 눈치더니 드디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때 여기서 정말 참혹한 일이 하나 있었네. 바로 6·25 사변이 난 해였지. 저 산 너머 큰 강을 두고 피아간에 한참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으니까 아마 이맘때쯤이었을 거야. 밤새 조명탄이 올라 벌건 하늘 한가운데로 앞산 그리매가 거멓게 드러나고, 어떤 때는 미군이 강물 위에 휘발유를 퍼붓고 소이탄을 쏘아 어둠속에 낙동강을 건너는 인민군을 아예 튀겨 죽였다는 끔찍한 소문도 나돌기도 했지. 하지만 중국 팔로군인가 하는 무서운 군대에서 이름을 떨쳤다는 인민군 장군의 부대 하나가 죽기 살기로 악착같이 싸워 저 위쪽 샛강 쪽을 지키던 국군 부대를 밀어내면서 이 마을은 인근 동네 너댓과 함께 한 달포 적치(赤幟)하에 들어간 적이 있었네.”
거기서 갑자기 늙은이의 말투가 지긋해지고 표현이 제법 세밀한 서술조가 되면서 무언가 긴 얘기의 밑자리를 깔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게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 늙은이가 무언가 자신이 알아야 할 일을 들려줄 것 같은 예감에 은근한 기대까지 품으며 쓸데없는 대꾸로 늙은이의 말을 끊지 않았다.
“바로 그 인민군 부대가 저쪽 산 너머에서 비 오듯 쏟아지는 국군의 포격을 뚫고 샛강을 건너 이 일대를 점령하기 전날이었을 거야. 그때도 나는 이미 두 다리가 이 모양 이 꼴이어서 들일을 제대로 나가지 못하고 이 비슷한 원두막에서 밭작물을 지키고 있었네. 지금처럼 수박 참외가 아니고 늦감자와 올강냉이였지만, 각지에서 밀려온 피난민 때문에 지금보다도 훨씬 엄중하게 지켜야 했다네.
그날 꼭 이 무렵이었지 아마. 그러잖아도 샛강 쪽을 맡고 있는 국군부대가 허술해 방어선이 곧 뚫릴 것이네, 마네 하는 흉흉한 소문이 대놓고 하는 수근거림으로 떠돌고 있을 때였어. 뒤승숭한 마음으로 강변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국군 다섯이 저쪽 산마루를 타고 내려와 이 마을로 들어서더군. 다른 곳에서 싸우다 인민군에 밀리고 밀려 거기까지 온 낙오병인지, 앞산 너머에서 샛강 방향을 지키다가 부실한 보급에 배가 고파 잠시 전선을 이탈한 국군들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모두 총이 없는 데다 행색들이 무척 남루했네.
강둑을 따라 내려온 그들은 미리 말이라도 맞추고 온 듯 곧장 참봉댁 과수원으로 들어가더군. 그때는 흔한 게 군인이고 군복이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긴장한 내 눈길은 뒤쫓듯 그들 다섯의 움직임을 살펴보게 되었네. 그 바람에 나는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감시하듯 면밀하게 지켜볼 수 있었지. 더구나 그때는 저 아카시아 숲이 지금처럼 우거지지도 않아서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지금보다 훨씬 더 잘 알아볼 수 있었어.
참봉댁 과수원 안으로 들어간 그들 다섯은 어찌된 셈인지 한 식경이 가깝도록 조용하데. 그런데 이런 딱한 일이 있나. 그들이 아직 과수원에서 나오기도 전에 헌병 셋이 나타났어. 계급장이 갈매기 셋에 작은 별까지 얹힌 특무상사에다 헌병 사병 둘이었는데, 셋 모두 권총을 차고도 사병 하나는 장총까지 들고 있더군. 그들은 이미 누구에겐가 들어 국군 사병들에게 총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어. 나에게 따로 물을 것도 없이 바로 과수원 대문께로 가서 탱자나무 울타리 뒤에 숨어 기다리더군. 나는 그걸 보자 까닭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지만, 그래도 그 다섯 국군을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어. 헌병들에게 걸려 봤자 아군끼리니까 무슨 끔찍한 일이야 당할까 했던 게야.
얼마 뒤 그들 국군 사병 다섯이 풋사과를 잔뜩 따서 싸고 메고 과수원을 나오자 헌병들은 총을 겨누며 그들을 정지시키더군. 그리고 무슨 말인가로 국군 사병들을 앞세운 헌병들은 아카시아 숲을 가로질러 강변 솔무더기 쪽으로 데려가더라고. 그때 이미 장총을 든 헌병이 총부리로 그들을 이리저리 몰아대는 듯했지만 나는 그들이 차마 아군을, 그것도 한꺼번에 다섯씩 이나 어찌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 그때만 해도 그쪽에는 마을로 내려가는 샛길이 있었으니까 기껏해야 헌병대로 데려가 혼찌검을 내려고 한다는 정도로만 짐작했던 거야. 그러나 아니었네. 그들 모두가 다복솔 그늘 아래 들어갔다 싶기 바쁘게 요란한 총소리가 나더니 오래잖아 헌병 셋만 그 솔무더기에서 다시 걸어 나왔어. 어찌된 셈인지 앞장선 특무상사가 손에 쥔 소총에서는 한 줄기 푸르스름한 화약 연기가 아직도 새어 나오고 있는 것 같더라고. 그들 헌병 셋이 그 다섯 병정을 모두 총살해 버렸을 거라는 근거 없는 단정이 내게 헛것을 보게 했는지도 모르지만.
나중에 총소리에 놀라 모여든 마을 사람들에게 그 헌병 상사는 무엇 때문인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하더군. 낙동강 방어선이 오늘내일하는데 그 다섯 병정이 전선을 이탈해, 더군다나 약탈로 양민들에게 민폐까지 끼쳐 즉결처분 했다는 거야. 전시에는 헌병에게 독전대(督戰隊)로서의 임무가 있어 무단이탈이나 투항은 재판 없이 총살할 수 있다나 어떻다나…….
내가 보기에 그 다섯 병정이 군복 차림이면서 총도 없이 마을로 내려온 것은 그 무렵의 급박한 전황으로 부실해진 보급 탓이 아니었던가 싶어.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잠시 마을로 내려온 그들은 무어로든 요기를 좀 하고, 남은 것은 같이 굶주리는 전우들에게 나눠주려고 싸 가려는데 운수 나쁘게 헌병들이 들이닥친 거지. 다섯 모두 작업복 상의 가득 풋사과를 싸고 바지 주머니가 찢어지도록 풋사과를 채워 넣은 것은 그 때문이었을 거야. 맞아. 알철모 가득 풋
사과를 담아 안고 있는 병정도 있었던 것 같아. 거기다가 나중에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시체를 묻으러 가서 보니 그들 가운데 하나는 아직도 베어 먹다 만 풋사과를 그대로 움켜쥐고 있더라고 했어. 정말이지 내 평생에 다시 보게 될까 끔찍한 시절의 이야기야. 다섯 모두가 꽃다운 나이였지. 어느 집 귀한 자식들이었는지…… 이쪽저쪽 피 맛을 본 사람들이 모두 미쳐 있었던 게지. 탈영이나 투항이 아니라 그보다 더 모질고 끔찍한 죄를 지었기로서니 그 새파란 생명을, 다섯씩 이나…….”
늙은이의 말은 꽤 길었으나 여느 시골 무지렁이들과는 달리 조리 있고 앞뒤 연결이 반듯했다. 그는 가슴 서늘한 감동으로 지루한 줄 모르고 들었다. 얘기를 그친 늙은이가 수박을 몇 입 크게 베어 물어 목을 축인 뒤에 다시 한 번 그의 얼굴을 구석구석 뜯어보듯 유심히 살피더니 얘기를 이어 갔다.
“자네 물상에는 분명 참봉댁의 그늘이 짙지만 또 다른 야릇한 선이 있네. 왠지 내게는 익숙하면서도 섬뜩한 그 어떤 건데, 그게 난데없이 옛날 일을 시시콜콜하게 얘기하도록 만드는구먼.”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가 선잠에서 퍼뜩 깨어나는 기분으로 물었다. 그러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을 잠시 살피는 듯한 눈길로 맞받던 늙은이가 짐짓 덤덤하게 말했다.
“바로 자네의 그 눈길 같은 거. 나를 쳐다보면서도 실은 내 뒤의 어떤 멀고 깊은 것을 그윽이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하던 얘기는 매조져야겠지. 특히 참봉댁과 관련된 뒷얘기는.”
그러고는 무슨 재촉이나 받고 있는 사람처럼 다시 스물일곱 해 전 그 여름을, 시골 늙은이 같지 않은 기억력과 묘사력으로 어제그제 본 일처럼 되살려 냈다.
“국군 다섯이 즉결된 바로 그다음 날인가, 섬들[島坪] 혹은 무섬[水島]이라 불리던 샛강 남쪽 여러 마을을 맥없이 포기하고 낙동강 원줄기 건너로 밀려나 버티던 국군이 다시 이 마을로 돌아온 것은 그렇게 떠난 지 한 달포 만이었네. 북쪽의 선무대(宣撫豚)니 정치군관이니 하는 것들이 이런저런 교육도 하고 사람들을 모아 놓고 여러 가지 좋은 소리로 달래기도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이곳 대여섯 마을은 흔한 인민위원회 하나 결성될 틈도 없이 대한민국으로 되돌아갔지.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 날이었네. 이번에는 국군 선무대와 헌병들이 들어와 난데없고 괴이쩍은 추모 사업을 하나 벌이더군. 즉결당한 국군 다섯이 묻힌 곳을 전사자 임시매장지로 지정해 봉분을 하고 이미 육탈(肉脫)이 시작된 시신에서 어떻게 찾았는지 군번 패 넷을 찾아내 영현(英顯)처리과에 넘긴 일이 그래. 그들은 그 다섯 병정을 죽인 것이 국군 헌병 복장을 한 인민군 편의대(便衣豚)였다나, 유격대였다나 하고 우겼는데, 그 모든 광경을 멀지 약은 곳에서 바라본 내게는 정말 터무니없더군. 그 다섯을 죽인 뒤 동네사람을 데려다 시체를 묻게 한 그 특무상사나 헌병 사병들은 하나 같이 이북 사투리를 쓰지 않았거든. 복장도 국군 헌병으로 수상쩍은 데가 전혀 없었고. 거기다가 봉분을 올릴 때 그 국군들의 군번패 네 개가 찾기 좋은 곳에 함께 몰려 있던 것도 이상했고.”
“혹시 기억의 청소 또는 조작 같은 게 아니었을까요? 그 즉결처분이 지나쳤다고 생각한 헌병대가 주동이 된…….”
그가 송연한 느낌 가운데서도 문득 그렇게 물었다.
“몰라. 어쨌든 그때 봉분 작업에 동원된 동네 사람들은 한결같이 인민군들 짓이라고 들었다더군. 그리고 대부분은 새로 온 헌병들에게 들은 대로 황급히 기억을 바꾸었지. 그런데 말이야, 거참 야릇도 하지. 여럿이 그러니까 나도 차츰 이상해지데. 그 몇 달 시도 때도 없는 쌕쌕이 폭격 소리와 밤마다 산 너머에서 쿵쿵거리던 포격이며 콩 볶듯 하던 총소리에 머리가 휘황해지기라도 한 건지, 여럿에게 되풀이 그 소리를 듣자 나도 슬며시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라고. 인민군 유격대가 거기까지 넘어와 전선을 이탈해 민폐를 끼치던 국군 다섯을 몰살시키고 간 거라고. 그 재수 없는 국군 병정들이 된통 걸린 거라고.”
“그런데 말입니다. 조금 전에 죽은 그들의 군번 패 넷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하나는……?”
그가 이상하게 그 일이 마음에 걸려 물었다. 늙은이가 깜박 잊고 있었다는 듯 받았다.
“듣고 보니 그러네. 하지만 뭐 죽은 병정들 가운데 하나쯤은 민가로 내려간다고 군번 패를 목에 안 걸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죽이고 묻고 하느라 수선스러운 통에 하나쯤은 따로 묻혀 찾지 못했을 수도 있고…….”
그렇게 말끝을 흐리다가 난처한 자리를 빠져나가듯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내 기억은 그 뒤 참봉댁이 치러야 했던 곤욕 때문에 차츰차츰 제자리로 돌아오더만. 자네 들었는지 모르지만, 참봉댁 어른께는 일정 때 동경 유학까지 다녀온 맏아들이 하나 있었네. 일찍부터 좌익에 물들어 해방 뒤에는 건준(建準)에 나가더니 끝내는 박헌영이 따라 월북했는데, 그게 뒤늦게 문제가 되었어. 국군 병정 다섯이 몰살당한 게 참봉댁 과수원 앞이다 보니 엉뚱한 의심을 받게된 거네. 수복 뒤에 떠돈 소문에는 참봉댁 맏이가 인민군 군관 복장을 하고 안동까지 내려온 걸 봤다는 게 있었는데, 다시 칠곡 철교 부근에서 말 타고 지나가는 걸 봤다는 사람이 나와 더욱 일을 이상하게 꼬아 놓았어. 그 인민군 유격대가 공연히 이 마을까지 온 게 아니라 참봉댁 맏이가 보낸 거라는 헛소문에 이어, 맏이 자신이 옷을 갈아입고 왔을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수근거림으로 번지더군. 먼빛으로나마 지휘자인 헌병 특무상사뿐만 아니라 그 부하 둘까지 눈여겨 바라본 적이 있는 나는 그런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참봉댁이 무언가 좋지 않은 일에 말려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네. 국군 병정 다섯을 죽인 게 기실 인민군 유격대란 말은 생판 거짓으로 꾸며진 것이고…….
예감대로 일은 점차 고약하게 돌아갔어. 서울이 수복되었다는 날 참봉댁 어른이 그새 기세가 살아난 경찰서로 끌려가 며칠 엄한 취조를 받는 사이 대구 고모 집에서 용케 난리를 피한 참봉댁 둘째가 국군에 자원입대하고 다시 참봉댁 마님은 무전옥답 서른 마지기를 팔아 여기저기 풀어먹이며 영감마님 구명에 나서야 됐지. 그러다가 찬바람 불 무렵에야 참봉댁 어른이 상한 몸으로 풀려나시게 되었는데,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식인가. 그사이 일선에 나간 둘째의 전사 통지가 날아온 거네. 중공군의 갑작스러운 참전에 화를 입은 것인데, 그러잖아도 자신이 겪은 혹독한 고초와 생사를 모르는 맏이 일로 상심해 있던 참봉댁 어른은 둘째마저 죽었다는 소리에 고목나무 무너지듯 하시더군. 전사 통지서를 전해 받고 그대로 혼절하시더니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말았지. 그러자 철석같다던 참봉댁 마님도 그리 오래 버텨 내시지는 못하셨어. 이듬해 오월 마지막으로 따님을 입원시킨다며 대구 병원으로 옮기더니 얼마 안 돼 따님과 나란히 과수원으로 실려 온 뒤 곧 세상을 떠나셨지. 이 큰 과수원에는 병든 따님과 이제 열다섯인 참봉댁 막내만 남겨 놓고.
그 뒤 10여 년, 전쟁 때만 해도 코흘리개였던 참봉댁 막내가 중학교 고등학교에 군 복무까지 마치고 돌아와 사과 농사를 맡을 때까지 병든 따님이 창밖으로 내민 손거울 하나로 안팎을 살피며 지켜 내던 참봉댁 과수원집은 이 마을에서도 가장 외지고 으스스한 곳이 되고 말았어. 벙어리 할멈을 데리고 살던 농막 김씨와 그들 내외처럼이나 말하기를 꺼려하며 그림자처럼 참봉댁 따님을 수발들다가 맞교대라도 하듯 막 제대하고 나온 젊은 주인에게 평생 누워지내는 그 누님을 맡기고 홀연히 떠나 버린 언년이 처자 ― 가끔씩 그 과수원을 지나치다 보면 대낮에 나타나도 되는 귀신들처럼 소리 없이 제 할 일을 하던 그들이 꼭 기괴한 옛 그림 속의 사람들 같았지. 건넌방 창틀 너머로 올라와 있던, 손거울을 움켜쥔 그 집 따님의 길고 푸르스름한 손가락까지…….”
이제는 제법 세련된 묘사력까지 드러내며 자신의 얘기에 취해 있던 늙은이가 그쯤에서 말끝을 흐리며 얘기를 그쳤다. 자신의 난데없는 열심이 민망스럽다는 듯, 혹은 홀로 취했다가 깨어나는 겸연쩍음 같은 것으로. 그러다가 변명이라도 하듯 머뭇거리며 덧붙였다.
“어쩌다 보니 묻지도 않은 참봉댁 얘기를 있는 것 없는 것 다 끌어대 수다를 떤 셈이 됐네. 젊어 먼빛으로 볼 때 그토록 형세 좋던 집이 저리 폐가처럼 된 게 햇 영감을 중언부언 말 많게 한 것 같구먼. 참, 그 집 친척 된다고 했지. 어느 쪽으로 친척이 되는지 몰라도 젊은이에게 썩 듣기 좋은 얘기는 아닐 텐데. 하지만 풋사과를 싸든 국군 병정 다섯이란 말이 문득 까마득한 그때 일을 떠올리게 해서. 물론 젊은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일지도 모르고. ― 따라서 젊은이가 아까 보았다는 그 국군 병정 다섯과는 전혀 무관하겠지만…….”
그러나 그는 왠지 자기가 만난 그들이 늙은이가 말한 그 다섯 병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에 오싹했다. 그는 문득 무언가 할 일을 않고 있다는, 또는 긴치 않은 일에 너무 오래 붙들려 있었다는 느낌에 수박 풀로 끈적거리는 손을 수건으로 닦으며 서둘러 일어났다.
“그럼 가 봐야겠습니다. 할아버지, 수박 잘 먹었습니다.”
그가 까닭 모르게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뛰듯이 돌아가니, 어머니는 손거울로 밖을 내다보며 열심히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래, 그들을 찾았니?”
“아뇨, 벌써 어디론가 없어졌어요.”
“그럼 이리 와서 그들 얘기를 다시 해 봐라, 다섯이라고 했지?”
“왜 아실 것 같으세요?”
“글쎄, 섬뜩하기는 하다만 어쩌면 그들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라니요?”
그가 다시 이상한 예감으로 다그쳐 묻자 어머니는 잠깐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달콤한 어조로 말했다.
“하여튼 그 다섯 병정의 얘기를 한 번 더 해 봐라.”
그는 자기가 이틀에 걸쳐 만난 그들 다섯에 대해 소상하게 얘기했다. 갑자기 듣고 있던 어머니의 얼굴에 짙은 의혹과 놀라움의 표정이 떠올랐다.
“분명히 그들 같애. 혹시 너를 빠안히 쳐다보았다는 그 사람 얼굴에 무슨 상처 같은 건 없디?”
“왼쪽 이마에 무엇에 찢긴 것 같은 상처가 있었어요.”
“포탄 파편이 스친 거야. 틀림없이 그분이로구나…….”
그녀는 혼잣말처럼 망연히 중얼거렸다.
“누군데요?”
그가 묻자 그녀는 대답 대신 베갯잇 속에서 기름종이로 싼 조그만 꾸러미를 꺼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펴서 그에게 내민 것은 끈 없는 군번 패 하나였다. 아라비아 숫자가 여섯 자리밖에 안 되는 게 얼른 보아도 아주 오래된 군번 같았다.
“이게 그분의 것이다. 어쩌면, 아니 틀림없이 너의 아버지다.”
그는 머릿속이 휑한 가운데도 명치끝을 스쳐 가는 찬바람에 온몸이 으스스했다. 어머니는 어느새 신열에 들뜬 얼굴로 아무런 조짐도 예고도 없이 자신만의 회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무렵의 며칠은 밤새도록 포격 소리가 요란하고 앞산 등성이는 곧잘 조명탄으로 훤했다. 그러다가 포격이 뜸해지며 샛강 쪽 국군이 밀리고 있어 인민군이 여기까지 밀고 들지 모른다는 소문까지 나돌던 날이었어. 전날 세상 형세를 살펴본다며 면사무소가 있는 장터로 나가신 어머님 말고도 과수원 식구들이 모두 집을 비워나 홀로 이 방에 누워 있었지. 내 나이 스물하나 때였는데, 그때 이미 나는 척추 카리에스〔骨結核〕로 두 팔과 목 위만 남기고 온몸이 마비된 채로 누워 지내던 터였다.
전날 밤새도록 서북쪽 하늘을 밝히던 조명탄과 새벽까지 잦아들지 않는 포 소리에 잠을 설친 탓인지, 한낮인데도 혼곤히 잠이 들어 있었는데 그들이 들이닥친 거야. 틀림없이 네가 말한 그들 다섯이었어. 점박이가 시끄럽게 짖어 대는 바람에 손거울을 창들 위로 내밀어 살펴보니 국군 다섯이 집 마당가 홍옥(紅玉) 나무에 매달려 정신없이 사과를 따 먹고 있더구나. 붉게 익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홍옥이고 아무리 먹을 게 변변찮은 전쟁 때라지만, 그래도 양력 칠월 하순의 풋사과가 그리 맛날 수는 없는데 그들은 사과를 씹어 먹는 게 아니라 퍼마시기라도 하듯 설익은 풋사과를 두 볼이 터지도록 우겨 넣고 있는 거야.
주인에게 묻지도 않고 함부로 과수에 손을 대는 것도 그렇지만, 아직 상품이 되지도 못하는 풋사과를 그렇게 마구잡이로 따 먹는 것도 여느 때 같으면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거기다가 남의 것을 훔쳐 먹으면서 조금도 경계하거나 거리껴 하는 눈치가 없는 그들의 태도도 주인 되는 내게는 은근히 부아 돋는 일일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을 처음 손거울 속에서 보게 된 때부터 배를 채운 그들이 이제는 제법 사과 품종까지 가려 가며 먹을 만한 풋사과로 한 보따리씩 싸고 지고 우리 과수원을 떠날 때까지 나는 한 번도 그들에게 화를 내지 못했다. 오히려 터질 것처럼 풋사과를 우겨 넣은 그들의 두 볼이 견과류를 가득 채운 다람쥐의 볼 주머니처럼 우스꽝스럽고, 제집 과일 따듯 그때로서는 고급 품종인 고리땡(골든)이나 인도 같은 나무에까지 함부로 손을 대는 그들의 배짱이 오히려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먼저 배를 채우고 가까운 펌프를 찾아 목까지 축인 그들은 집안에서 이렇다 할 인기척이 없자 아무도 없는 과수원으로 알았던지 염치없는 여유까지 부렸다. 가까운 데 흩어져 품종을 살펴 가며 저희 부대로 가져갈 풋사과를 골라 따기도 하고 그늘 좋은 곳에서 편안히 담배를 피우거나 더러는 그대로 사과나무에 기대앉아 슬그머니 다리를 뻗기도 했다. 그런데 ―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그들 가운데 하나가 머뭇머뭇 집 쪽으로 다가들더니 이내 중문 안으로 모습이 사라졌다. 이어 대청마루에 저벅거리는 군화 소리가 나면서 조심스럽기는 하나 이 방 저 방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가 드디어 발자국 소리가 내 병실 앞에서 멈추고 소리 없이 방문이 열렸다. 내가 손거울을 내밀고 밖을 내다보는 문 맞은편, 대청과 툇마루로 연결된 안마당 쪽 지게문이었다.
자식 되는 네게 그분에게 욕된 말은 피하겠다만, 처음 그분이 이 방으로 들어설 때 내가 두려움에 떤 것은 사실이었다. 고녀(高女)에 들어간 첫해에 이 모진 병을 얻어 몇 군데 병원을 돌다가 이 방으로 돌아와 누운 지 다섯 해째 되는 그때까지 또래의 젊은 남자 누구도 홀로 내 방에 든 적은 없었다. 자라면서 네 외할머니에게서 들은 가장 엄한 교훈은 정조를 잃은 여인의 불행과 비참이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직 첫날밤의 내 낭군에게 티 없는 몸과 마음을 바치게 되리란 환상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그때 가슴 아래 어느 한곳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있었더라도, 나는 비명과 함께 머리맡의 가락곳(가락)이라도 집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보다는 훨씬 더 자유로웠던 두 팔을 가슴에 모아 다가오는 그분을 밀쳐 낼 자세를 갖추는 것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그분이 발소리를 죽이며 내 침대 머리맡에 다가오더니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분이 덮쳐 오는 대로 밑어낼 태세를 하고 있던 나는 그분이 더 다가오기를 멈추는 바람에 엉거주춤 두 팔로 젖가슴을 감싸 안듯 하며 마주 올려 볼 수밖에 없었다. 뜻밖으로 맑고 고요한 그분의 눈빛이었다. 그을고 거칠어져 있었지만 피부에는 해맑고 윤기 나던 시절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얼굴의 음영도 깎이고 거세진 대로 한때의 수려함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거기다가 무엇보다 그때의 내 가슴을 철렁하게 한 것은 그분의 모습 어디엔가에서 풍기는 낯익음이었다. 조금 전까지 훔친 풋사과를 아귀아귀 베어 먹던 그 초라한 전선 이탈 병사와는 전혀 다른…….“
그러는 어머니의 얼굴은 어느새 신열로 벌겋게 달아 있었다. 그가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이대로 괜찮으시겠어요? 옛날 애기는 좀 쉬었다 들려주셔도 되는데…….”
“아니, 괜찮아. 오히려 아침보다 훨씬 좋아졌다. 아주 오랜만에, 그것도 나 아닌 사람에게 처음으로 해 보는 그분 얘기라 볼이 좀 후끈거리긴 한다만.”
어머니가 그래 놓고 다시 무엇에 취한 사람처럼 조금 전의 어조를 이어갔다.
“어찌 보면 급박하고 그지없이 짧은 시간이었겠지만 나는 침착하고 진지하게 떠올려 봤어. 그분을 언제 어디서 보거나 만났는지를. 그러나 가물가물 잡힐 듯하면서도 그게 언제 어디서였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더구나. 그때 그분이 불쑥 말했어. 요즘 들어 자주 꾸는 꿈인데 그 꿈속에서 당신을 봤소. 나는 죽기 전에 꼭 당신 같은 사람과 만나 사랑하고 싶었소, 라고. 마치 하던 얘기를 이어 가는 것처럼. 이제 와 생각하면 그 무슨 괴이쩍은 소린가 싶기도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화들짝 놀랐어. 비로소 그분을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 떠올랐기 때문이야. 바로 그였어. 내가 어린 소녀 적부터 꿈꾸고 그리워했던 님. 모진 병으로 이 외진 방에 갇혀 지내게 되어서도 아직 잊지 못한 님. 그분이야. 그분이었어. 너는 어떻게 듣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게 지금보다는 훨씬 더 움직이기에 자유롭던 내가 그분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게 된 까닭이었어.
우리는 오래된 약속을 서둘러 이행하듯 짧고 격렬한 사랑을 나누었지. 함께 온 군인들이 그분이 없어진 것을 이상히 여기고 집 안 구석구석을 뒤져 오자 바로 달려 나가 그들 모두를 과수원에서 데려 나갈 수 있었을 만큼. 어쩌면 처참한 전장 한 모퉁이에서 순간으로 피었다 스러진 스물한 살 동갑내기의 슬프고도 불같은 사랑이었을지도 몰라. 아까 준 군번 패는 그분이 그렇게 달려 나가면서 자기 목에서 끌러 준 거야. 더럽고 질긴 목숨으로라도 그 비정한 전장에서 살아남기만 한다면 반드시 나를 찾아올 거라 했어. 만약 찾아오지 않거든 이 사람이 죽은 거라고 알아 달라고도 하면서.
물론 그날 나도 들었다. 그들이 우리 과수원을 떠나고 오래잖아 아카시아 숲 쪽에서 나던 그 불길한 총소리와 그들이 모두 헌병에게 즉결처분 당했다는 소문을. 그리고 나중에 벌어진 인민군 유격대 소동도. 하지만 나는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늘 죽음을 앞세우긴 해도 그분은 결코 죽을 수 없을 것 같았고, 그래서 언젠가는 꼭 나를 다시 찾아올 것만 같았다. 내가 이런 몸으로도 지금까지 목숨을 이어 온 것은 무엇보다도 그분을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또 너 ― 처음 내 몸 속에서 뛰는 너를 느꼈을 때 나는 오히려 기뻤다. 병든 내 몸에도 새로운 생명이 깃들일 수 있었다는 것뿐 아니라 그분과 나를 잇는 어떤 확실한 고리를 지니게 된 느낌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걸 오랜 외로움과 병고에서 온 일시적인 이상 심리라고 말했지만, 나는 끝내 너를 낳았어.
하지만 네 외가는 너를 용서할 수 없었다. 큰오빠의 월북이나 아버지의 죽음이나 동생의 자원입대처럼 무엇이든 집안의 재난은 네 아버지와 그 일행에게 책임을 돌리던 때였으니까 거기다가 그들은 또 지켜야 할 가문의 체통이란 것이 있었지. 어머님은 아무도 모르게 너를 낳게 하시더니 멀리 있는 재궁(齋宮) 부근의 절에다 몇 마지기의 위토(位土)와 함께 맡겨 버리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나는 네 외삼촌에게 사정하여 그 절로 사람을 보내 보았지만 그가 가져다준 소식은 네가 홍역으로 죽었다는 것이었지. 그러나 나는 역시 믿었다. 너 또한 어디선가 자라고 있고, 그래서 언젠가는 반드시 나를 찾아오리라고.
그래 ― 이제 너는 돌아왔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분도 ― 결국 돌아왔다…….”
거기서 그의 어머니는 갑자기 숨이 가빠지고 목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런 말을 마지막으로 길고 긴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병화(兵火)에 그을린 귀신은 원귀(寃鬼)가 되지 못한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아직 그들이 이 세상을 떠도는 것은 풀지 못한 한의 무게 때문일 게다. 그 한을 풀어 드리도록 해라. 하지만 그 한이 지난 시대의 눈먼 증오에서 비롯된 거라면 새로운 증오로는 풀지 못한다. 그 시대의 광기(狂氣)에서 비롯된 거라도…… 역시 새로운 광기로는 풀 수가 없을 거야…….”
그리고 사흘 후 숨을 거둘 때까지 그녀는 끝내 깨나지 않았다. 그동안 종종 그는 으스스한 기대로 아카시아 숲 길을 배회했지만 그 다섯 명의 군인들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흘 후, 그는 어머니의 하관이 끝나자마자 그곳을 떠났다.
― 내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 것은 어떤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 젊은 운수승(雲水僧)이었는데, 그때 나는 무슨 괴기담(怪奇談)을 듣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생각한다. 그들 다섯이라면 50년 정도는 이 땅을 중음신(中陰身)으로 떠돌아도 좋다고. 그리고, 우연히 펼친 책갈피에서나 지나가다 마주친 나이 든 이들에게서 그 시대의 끔찍한 증언과 접하게 될 때, 또는 까닭 없이 잠 못 이루는 밤이나 주제넘게도 역사가 슬프고 한심스럽게 느껴질 때 나는 생각한다. 항상 밝은 쪽에 아첨하기 잘하는 우리의 간사한 기억과 근시적인 이기와 번잡한 일상, 그리고 이 시대의 괴질인 불문(不問)과 타성 같은 것들에 가리어 잘 만나지지는 않지만, 그와 같이 이 땅을 떠도는 것이 어찌 그들 다섯뿐이겠느냐고.
(1981년)
2016년 11월 24일 읽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