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자의 슬픔] 12
“저런! 원 저런!”
이튿날 아침 엘리자베트에게 어젯밤 변동을 듣고 눈이 둥그레져서 그 핏덩이를 들여다보며 오촌 모는 지껄였다.
엘리자베트는 탁 그 핏덩이를 빼앗어서 이불 아래 감춘 뒤에 낯을 붉히며 이유 없이 씩 웃었다.
“어떻든 네 속은 시원하겠다. 밤낮 떨어지면 떨어지면 하더니…”
오촌 모는 비웃는 듯이 입살을 주었다.
이깟번에 웃은 엘리자베트는 이번에도 웃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는 억지로 입과 눈으로만 일순간의 웃음을 웃은 뒤에 곧 낯을 도로 쪽 폈다. 그리고 미안스러운 듯이 오촌 모의 낯을 들여다보았다. 오촌 모의 낯에는 가련하다는 표정이 똑똑히 보였다.
‘역시 가련한 것이루구나!’
그는 속으로 고함을 쳤다.
‘그것도 내 것이 아니냐!?’
어머니가 자식에게 가지는 육친의 정다움이 엘리자베트의 마음에 일어났다. 그는 몰래 손을 더듬어서 겁적겁적하고 흐늘거리는 그 핏덩이를 만져보았다.
‘어디가 엉덩이구 어디가 머리 편인고?’
하고 그는 손가락으로 핏덩이를 두드리고 쓸어주고 있었다. 차디찬 핏덩이에서도 엘리자베트는 다스한 맛이 올라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이란 이런 것이루다.’
그는 생각하였다.
물끄러미 한참 그를 들여다보면 오촌 모는 도로 전과 같은 사랑의 낯이 되며 생각난 듯이 말했다.
“잊었댔다. 오늘은 장날이 되어서 서울 잠깐 들어갔다. 와야겠다. 무엇 먹고 싶은 것은 없냐? 있으면 말해라. 사다 줄 거니…..”
“없어요.”
엘리자베트는 팔딱 정신을 차리며 무의식히 중얼거렸다. ‘서울’ 소리를 듣고 그는 갑자기 가슴이 뛰놀기 시작하였다.
‘저런 노파가 다 서울을 다니는데 내가 어찌…..’
그는 오촌 모를 쳐다보면서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오촌 모를 찾았다.
“아주머니!”
“왜?”
“서울 들어가세요?”
“응.”
엘리자베트는 비쭉하여졌다. 오촌 모의 “응”이란 대답뿐은 그를 만족 시키지 못하였다. ‘응, 들어가겠다’든지 ‘응, 다녀올란다’든지 좀 더 친절히 똑똑히 대답 안 한 오촌 모가 그에게는 밉게까지 보였다.
그렇지만 그의 정조(情調)는 그의 비쭉한 것을 뚫고 위에 올라오기에 넉넉하였다. 그는 좀 더 힘 있게 떨리는 소리로 오촌 모를 찾았다.
“아주머니!”
“왜?”
오촌 모는 또 그렇게 대답하였다.
“나두 함께 가요!”
“어딜?”
“서울!”
“딴소리한다. 넌 편안히 누워 있어얀다.”
오촌 모의 낯에는 무한한 동정이 나타났다.
“그래두….가구 싶어요!”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내 다 구경해다 줄 거니 잘 누워 있거라. 너 다 나은 다음에 한번 들어가 실컷 돌아다니자. 그래두 기즘은 못 간다.”
“길 다 말랐어요?”
그는 뚱딴짓소리를 물었다.
“응, 소낙비니깐 땅 위로만 흘렀지 속은 안 뱄더라.”
“뒤뜰 호박두 익었지요 인제. 메칠 동안 나가보지두 못해서…..”
그의 목소리는 자못 떨렸다.
“아까 가보니깐 아직 잘 안 익었더라.”
잠깐 말은 끊어졌다. 조금 뒤에 엘리자베트는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아-서울 가보구…..”
“걱정마라. 이제 곧 가게 되지.”
“아주머니!”
“왜 그러냐?”
“그 애들이 아직 날 기억할까요?!”
“그 애덜이라니?”
“함께 공부하던 애들이요.”
“하하! (한숨을 쉬고) 걱정 마라. 거저 걱정 마라. 내가 있지 않냐? 인젠 그깟 것들이 무엇에 쓸데가 있어? 나하구 이렇게 편하게 촌에서 사는 것이 오죽 좋으냐! 아무 걱정 없이….지난 일은 다 꿈이다, 꿈이야! 잊구 말어라.”
‘강한 자!’
엘리자베트는 속으로 고함을 쳤다.
‘아주머니는 강한 자이고 나는 약한 자이고….그 사이에 무슨 차별이 있을꼬?!’
“내 다녀올 것이니 편안히 누워 있거라.”
오촌 모는 말하면서 봇짐을 들고 나간다.
“무얼 사다 줄꼬 원. 복숭아나 났으면 사다 줄까. 우리 딸을…..”
엘리자베트는 자기 생각만 연속하여 하였다. 스스로 알지는 못하였으나 어떤 회전기(廻轉期) 위기 앞에 선 그는 산후(産後)의 날카로운 머리를 써서 꽤 똑똑한 해결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렇다! 나도 시방은 강한 자이다. 자기의 약한 것을 자각할 그때에는 나도 한 강한 자이다. 강한 자가 아니고야 어찌 자기의 약점을 볼 수가 있으리요?! 어찌 알 수가 있으리요?!(그의 입에는 이김의 웃음이 떠올랐다). 강한 자라야만 자기의 약한 곳을 찾을 수가 있다.
약한 자의 슬픔! (그는 생각난 듯이 중얼거렸다.) 전의 나의 설움은 내가 약한 자인 고로 생긴 것밖에는 더 없었다. 나뿐 아니라, 이 누리의 설움, 아니 설움분 아니라 모든 불만족, 불평들이 모두 어디서 나왔는가? 약한 데서! 세상이 나쁜 것도 아니다! 인류가 나쁜 것도 아니다! 우리가 다만 약한 연고인밖에 또 무엇이 있으리요. 지금 세상을 죄악 세상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니! 우리 사람이 약한 연고이다! 거기는 죄악도 없고 속임도 없다. 다만 약한 것!
약함이 이 세상에 있을 동안 인류에게는 싸움이 안 그치고 죄악이 안 없어진다. 모든 죄악을 없이하려면은 먼저 약함을 없이하여야 하고, 지상 낙원을 세우려면은 먼저 약함을 없이하여야 한다.
만일 약한 자는, 마지막에는 어찌 되노? …..이 나! 여기 표본이 있다. 표본 생활 이십 년(그는 생각난 듯이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참 약했다. 일 하나라도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어디 있는가! 세상 사람이 이렇다 하니 나도 이렇다, 이 일을 하면 남들은 나를 어찌 볼까 이런 걱정으로 두룩거리면서[크고 둥그런 눈알을 조금 천천히 자꾸 굴리다] 지냈으니 어찌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으리요! 하고 싶은 일은 자유로 해라. 힘써서 끝까지! 거기서 우리는 사랑을 발견하고 진리를 발견하리라!
‘그렇지만 강한 자가 되려면은……!’
그는 생각하여 보았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사랑하라!’ (그는 기쁨으로 눈에 빛을 내었다). 그렇다! 강함을 배는 태(胎)는 사랑! 강함을 낳는 자는 사랑! 사랑은 강함을 낳고, 강함은 모든 아름다움을 낳는다. 여기, 강하여지고 싶은 자는, 아름다움을 보고 싶은 자는, 삶의 진리를 알고 싶은 자는, 인생을 맛보고 싶은 자는 다 참사랑을 알아야 한다.
만약 참 강한 자가 되려면은?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한다. 우주에 널려 있는 사랑, 자연에 퍼져 있는 사랑,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사랑!
‘그렇다! 내 앞길의 기초는 이 사랑!’
그는 이불을 차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의 앞에는 끝없는 넓은 세계가 벌여 있었다. 누리에 눌리어 살던 그는 지금은 그 위에 올라섰다. 그의 입에는 온 우주를 쳐 누른 기쁨의 웃음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