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7.30(목)덥다, 바람 한 점 없다.
일진선사와 전화로 나눈 대화
삼복염천 무더위가 치성하는 오후 졸음이 오는 때 일진스님이 카톡 보내길, 유투브에 <직지선회>를 한번 보라고 하신다. 그래서 유투브를 봤다.
법수선원(서울 강남구 세곡동) 주지로서 직지선회를 주재하는 두타스님은 육조단경을 강의한다. 그분은 활산성수스님의 손상좌이자 자칭 법상좌이다. 남전참묘 화두를 들고 오매일여가 되기를 바라면서 의심을 일여 하게 지어가려고 용을 쓰다 거의 미쳐버릴 정도가 되자 문득 화두를 놓아버렸다. 그러고서 깨달음에 대한 열망을 품은 채 지내다 어느 날 도반이 두드리는 목탁 소리에 깨달음이 오다. 아하! 이 자리! 생각이 일어나기 전 바로 이 자리는 언제 어디서나 이대로 인걸 알지 못해서 헤매고 있었구나!
일진선사께 전화를 하여 대화를 이어가다.
원담: 두타스님이 제대로 깨달은 것 같이 보입니다.
일진: 허허, 그 스님의 목소리가 진중하고 풍채가 든든한 것이 믿음직해 보입니다. 그런데 조계종 소속이 아니고 선학원 소속이라, 선원에 오래 다니지 않았던 것 같아요.
원담: 그 스님은 조계종 화두일변도에 얽매인 수행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한편 성수스님의 직지법문, 조사선 가풍에 영향을 받아서 간화선 중심주의의 병폐에서 벗어나 自悟自得한 것 같아요.
남전참묘 공안에 대하여 이야기 볼 게요. 두타스님은 1800공안이란 깨달음의 경지가 일상의 갖가지 경우에도 그것이 자명한지, 여일한지를 묻는 실전 테스트라고 합니다. 선사들께서 ‘그때 너라면 어떻게 했겠느냐?’라고 묻는다는 말이죠.
일진: 남전이 칼을 들고 고양이를 베려 한다. 조주가 신발을 머리에 이고 밖으로 나간다. 이것은 천하인들의 혀를 끊는 제스쳐(gesture)기에 여기에 이렇다 저렇다 여러가지 해석을 붙이든지, 뭐라고 해도 틀려 버린다. 나라면 남전이 든 칼을 뺏어서 남전의 주둥이를 팍 쑤셔버려야지 뭘 꾸물대겠는가! 선사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
원담: 남전스님이 낮에 벌어졌던 일을 조주에게 말하며 ‘너라면 어떻게 했겠느나?’고 다그치니 조주는 짚신을 머리에 이고 나감으로써 절에서 벌어진 법거량이라는 때垢를 싹 쓸어버렸습니다. 두타스님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분이 평소 법문 할 때 자주 그랬던 것처럼 아마도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한 번 쳤을 것 같아요.
일진: 남전이 고양이를 들고 칼로 내려칠듯한 기세를 보이며 대중에게 ‘법에 맞는 한 마디 말을 해라, 그렇지 않으면 두 동강이를 내리라’고 호령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의 길(心路)을 -팍- 짤라 버려서 그 자리가 문득 드러나게 하는 겁니다. 선사들이 흔히들 하는 말, "물으면 죽어버리고 말하면 틀려버린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깨어납니다. 거기에 대해 뭐라고 입을 달싹이면, 그게 아직 덜 죽은 놈이라, 제 생각에 갇힌 겁니다. 뭉둥이를 50방, 박 터지게 뚜들겨 맞아야 합니다. 법 그 자리는 뭐가 조금이라도 붙으면 바로 '땡'입니다. 우리가 뭘 세우는 것, 생각이나 개념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이 선의 핵심입니다. 쉰다는 생각 없이 쉬는 것, 휴거헐거(休去歇去)!
원담: 그리고 얼마전에 제가 보내드렸던 책 <광운집-일휴선사 어록>에 보면 파자소암 공안에 대해 일휴선사가 말하길 ‘古楊春老更生稊’ 즉 고목이 된 버드나무에 새 가지가 돋아나는구나 라고 했는데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진: 파자소암 공안이야말로 수행자로 하여금 생각으로는 어찌해볼 수 없어서 옴짝달싹 못하도록 만드는 공안인데, 거기에 대해 뭐라고 입을 대려는 순간, 어떤 동작을 취해보려는 찰나 벌써 10만 8천리나 어긋납니다. 일휴스님이야 풍류객이니까 그런 멋스런 시구절로 자신의 경계를 희롱했다 치더라도 올바르게 이른 건 아닙니다. 그게 바로 그 사람의 기질입니다.
원담: 용성스님은 노파가 보낸 딸이 자신을 껴안은 그때, 딸의 등을 세번 쓰다듬어 주겠다고 말한 대목을 그 분의 어록에서 읽었어요. 법정스님은 ‘나라면 딸의 등을 세번 두드려 주면서 수고했다고 말해주겠다’고 책에 쓴 것을 기억합니다.
일진: 용성이나 법정은 인정상 그렇게 한 것이나 법으로는 맞지 않아요.
원담: 두타스님은 자기 무릎(혹은 딸의 무릎)을 탁 치겠다고 했는데요.
일진: 그건 아니지, 어떻게,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휘둘린 것이지. 직감적으로 그럴듯한 행동을 보이는 게 능사가 아니지. 그렇게 하려다 보니 천하의 수행자들이 여기에 꼬꾸라지고 말아요. 공안에 대한 답을 찾지 말아요. 그걸 묻는 놈의 멱살을 잡고 ‘왜 허공에 말뚝을 박으려 하십니까?’라고 묻는 놈의 입을 닥치게 만들어야 합니다.
원담: 과연, 과연입니다.
그리고 앙굴리말라 존자 산모 공안에 대해 말합니다. 앙굴리말라 존자가 탁발하다가 어느 집 문 앞에 섰는데 그 집안에서 산모가 출산하려는 찰나 앙굴리말라의 모습을 보고 갑자기 나오던 아기가 나오기를 거부하여 난산의 고통을 당하고 있었어요 이때 존자는 어떻게 해야 난산을 겪는 산모의 고통을 면하게 해줄 것인가? 이것이 공안인데, 여기서 아이라는 건 ‘생각’을 상징하기에, 산모와 그 남편에게 생각이 일어나지 않기에(아이가 나오기 않으려 하기에) 어떻게 하면 생각을 아이 낳듯이 쑥 나오게 할 수 있는가, 이런 공안입니다. 선문염송에 이 공안에 대해 평하기를 '알면 똥이요(會得如尿) 모르면 금이라(不會如金)' 라고 했어요. 전해듣기로는 성철스님이 고성 안정사 천제굴에서 계실 때 서옹스님이 방문했는데, 두 분이 앙굴리말라 난산 공안을 이야기하다가 성철스님이 서옹스님에게 묻기를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서옹 답하길 ‘殺盡死人 方見活人’ 죽은 사람을 죽여 다하면 살아있는 사람을 보리라’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순전히 원담의 기억으로 혹 잘못 전해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일진: 서옹의 답은 교과서적이어서 直指의 맛이 드러나지 않아요
원담: 제가 어디서 보았는데, 그때 묻는 산모와 그 남편의 머리를 주장자로 때려야 했다’고 합니다. 선문염송에 나오는 내용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마도 통도사 취운선원 신허스님(천봉약산이라 자칭하며, 당시 통도사 부방장이었음)이 그렇게 번역했던 것 같습니다.
일진: 아따, 그 대답 좋다! 우리가 뭘 '하려 함'과 '앎'을 동시에 타파하는 頓悟! 아! 德山 棒, 너무 멋져부러!
원담: 그리고 암두선사가 뱃사공 노릇하는데 노파가 아이를 물에 던진 공안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암두가 노를 들고 뱃전을 두드린 건 目前 分明한 소식을 보인 것인데 노파는 이를 긍정하지 아니하고 말하길 ‘내가 知音을 만나지 못해 또 마지막 남은 아이마저 물속에 던져버리네’했는데, 이때 던져 버린 아이는 진짜 아이가 아니고 ‘생각’을 상징하는 것이라, 암두를 긍정하지 않고 노파는 여섯 아이뿐만 아니라 마지막 남은 아이까지 던져버리니 과연 노파는 암두를 부정한 것인가, 아닌가? 또 왜 노파는 아이를 버린 것인가?
일진: 나라면 아이를 물에 던지는 노파에게 ‘할매, 아직도 거기에 머물러 있소?’라고 대질러 꾸짖겠다. 이것도 여타 공안과 마찬가지라, 암두와 노파가 연출한 한바탕 연극을 때려 부셔라. 왜 거기에 머물러 우왕좌왕, 우물쭈물하느냐? 노행자(육조 혜능선사의 행자시절 이름)가 절에서 듣고 깨달았던 금강경 독경소리, 應無所住 而生其心’은 선종에서 아주 중요한 핵심이다.
"應無所住 而生其心" 생각 감정이 일어나고 가라앉는 것을 잡지 않고 그냥 그대로 봄이다!
일어나는 생각, 감정을 보면 곧바로 해결된다. 일어나는 생각, 감정을 봐 버리면, 바로 거기 생각 감정에서 벗어난 '해탈'이다. 즉각돈오(卽刻頓悟)이다.
일어나는 생각 감정에 물들지 않는 것이 "깨달음"의 핵심이다.
반야심경에 심무가애(心無罣碍);마음에 걸림이 없다. 또 초기불교의 바히야경과 연결해서 해석해보라. 마조스님, "道用不修, 但莫汚染- 도는 닦는데 있지 않다. 다만 (일어나는 그 생각에)물들지만 말라" 와 일맥상통한다.
'일어나는 생각의 내용(의미)에 빠지지 않을 때, 일어나는 생각의 내용과 동일시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붓다께서 말씀하신 괴로움의 종식이며 해탈이로다.
원담: 원제스님의 유투브 강의에 대하여 어떻게 보십니까?
일진: 요즈음 깨달았다고 나오는 분들이 여럿 됩니다. 반갑고 환영할 일이죠. 다만 진정성, 진실성이 문제가 됩니다. 원제스님은 ‘깨달은 그 자리, 목전 분명한 자리’를 붙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그분 말씀에 ‘뭔가 깨달음이 훅 들어왔다’고 했는데, 이게 ‘내’가 있으니까 뭔가 훅 들어온 겁니다. 아직 ‘깨달은 나’가 묻어 있는 겁니다. 털끝이라도 붙어 있는 게 있다면 벌써 틀려 버린 겁니다.
나'가 없으면 뭐가 들어올 경계 현상도 없어요. 그래서 깨달으면 깨달음도 없다.
이상하게 알았다는 "나"가 묻어 있는 듯 합니다. 털끝이라도 뭐가 붙어 있는 게 있다면, 벌써 어긋나 버린 겁니다.
"나"라는 가상의 기준점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 공부는 모두 헛것이 되고 맙니다.
"생각 이전(以前) 자리, 눈 앞의 이 자리, 본성 자리.......'' 말만 있을 뿐,
거기에 해당하는 무슨 한 물건(개념)이 있는 게 아닙니다. 뭐가 실체(實體)로써 있는 게 전혀 아닙니다. 그는 생각 이전 자리.... 그 자리를 생각(相)으로 쥐고 있는 듯합니다.. 아직 주객 이원적인 상태이며, 진정한 깨어남이 아닌 듯합니다. 본래의 나'라는 것조차 존재하지 않기에, 잡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잡지 않고 그냥 볼 뿐입니다. 應無所住而生其心(생각 감정이 일어나고 사라짐에 물들지 않고 그냥 그대로 볼 뿐)이죠. 에고(생각)가 붙지 않아 시공(時空)이 사라진 '해탈자리'이죠.
내가 禪門에 들어온 지 47년이 됐어요. 갈수록 에고랄까 ‘나’라는 아상에서 희미해지고 약해져요, 그렇다고 에고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에고 있어요. 에고가 약해지고 희미해지니까 희한하게 상대적으로 "생각"이 크게 보여요. 이건 그냥 내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에고가 희미해지면, 일어나는 생각이 뚜렷하고 크게 보여요. 그래서 생각에 걸릴 확율이 확 줄어들어요. 때론 생각을 오히려 도구로 이용해 쓰기도 합니다.
생각이 보이니 걸리지 않고, 걸리지 않으니 툭 터진 한마디가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와요. 팔팔 살아있는 말(禪機)이 툭툭 터져 나오는 거죠.
원담: 무더운 여름날 건강 잘 챙기시고 보중하소서’
일진: 아따, 이 사람, 같은 부산에 살면서 가끔 연락하고 얼굴 좀 보게. 종종 소식 전하게.
첫댓글 내 마음의 울타리'에고'라는 녀석이
단단한 돌담인 줄 알았는데
물안개처럼 투명하고 희미해져요.
담장이 슥슥 낮아지니까이상하게도
담장 너머 풀잎들이
더 또렷하게 눈에 들어와요.
퐁, 퐁, 퐁, 머릿속에 피어나는
장난꾸러기 '생각'이라는 녀석이
이젠 커다란 돋보기처럼 선명해요.
너무 잘 보이니까 숨바꼭질하듯
쉽게 속거나 걸려 넘어지지 않아요.
오히려 내 손 위에 가만히 올려두고
예쁜 요술 도구처럼
재미있게 부려 보기도 한답니다.
ㅎㅎㅎ
마 하 반 야 바 라 밀 ,
재미나는 세상입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