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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 아사냐는 라디오 방송으로 대국민 연설을 하고 나서 첫 번째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아사냐는 정의와 자유, 헌법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아사냐는 또한 의회의 승인을 받아 “공공사업을 장려하고, 실직 문제와, 집권 세력이 된 ‘공화주의자, 프롤레타리아적 정당들의 동맹’(인민전선)을 가능케 한 모든 사항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노동과 생산을 수호하고 국가를 회복하는 위대한 역사에 착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사냐 정부가 맞닥뜨렸던 가장 시급한 문제는 부르고스, 카르타헤나, 발렌시아에서 일어난 교도소 폭동에서 볼 수 있듯이, 사면령 발표였다. 정부는 의회를 소집할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2월 23일 정부는 카탈루냐의 헤네랄리타트와, 1934년 10월 혁명 이후 전국적으로 금지했던 사회주의 평의회들을 복원했다. 동시에 아사냐는 공화 정부에 충성하는 장군들을 요직으로 앉히고, 쿠데타 모의에 가담할 가능성이 높은 장군들을 마드리드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에 임명하는 방식으로 군 지도부 재편에 착수했다.
또한 정부는 토지개혁기구를 재가동하기로 하고, 농업부 장관 마리아노 루이스 푸네스(Mariano Ruiz Funes)에게 안달루시아와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의 토지 개혁을 지휘하게 했다. 헤네랄리타트의 수장 유이스 콤파니스는 푸에르토데산타마리아 감옥에서 바르셀로나로 돌아왔으며, 그가 카탈루냐 의회의 개회를 선언하자 엄청난 군중이 환호했다. 3월 16일 아사냐는 산후르호 쿠데타에 연루된 귀족들의 토지 몰수를 재개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10월 혁명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직장을 잃은 모든 노동자들의 복직을 결정했다.
마리아노 루이스 푸네스
경제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1931년 이후로 개인 투자가 가파르게 하락했고, 1936년의 투자는 1913년 수준으로 떨어졌다.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지만 새 정부가 계획안을 발표하자 자본이 순식간에 스페인을 빠져나갔다. 담배 밀수로 많은 돈을 벌어들인 마요르카 출신의 백만장자 후안 마르치(Juan March)는 감옥행을 피해 스페인을 떠났다. 그는 외국에 정착한 다음 외환 시장에서 페세타화에 불리한 쪽으로 환투기에 집중했다. 로스안데스 백작(Count de los Andes)이 회장으로 있는, 공화국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인 단체는 2천만 페세타를 모금했는데, 그 가운데 10분의 1이 마르치가 기부한 것이었다.
후안 마르치. 당시 스페인 최고 갑부였으며 세계에서 6번째 부호로 알려졌다. 그의 재산은 당시 화폐로 160억 달러에 달했으며 후에는 그는 내전 중에 프랑코측에 자금 지원을 하였다.
좌파의 선거 승리가 낳은 경제적 결과는 후안 마르치의 재정적 책략이 안겨준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노동자들은 공장이나 회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임금을 요구했다. 파업이 급증하고 실업자가 증가했으며 외환 시장에서는 페세타화의 가치가 급락했다. 아사냐의 중도 좌파 정부가 부딪힌 진짜 문제는 강경 좌파인 카바예로파와 맺은 파우스트식 계약의 결과였다. 카바예로파는 아사냐 정부를 러시아의 케렌스키 체제와 비슷한 존재로 보았는데, 우파 역시 이 시각에 공감했다. 자유주의 정부는 이제 혁명을 향해 달려가려고 하는 선거 동맹 세력들에게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으며, 지지자들에게 법을 존중하라고 설득할 능력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클라리다드> 편집인이자 사회주의노동자당과 노동자총동맹 내 볼셰비키 경향을 대변하던 루이스 아라키스타인(Luis Araquistain)은 선거 기간 중에 스페인은 1917년의 러시아처럼 혁명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공장 점거 같은 혁명적 행동은 단지 중간계급을 겁먹게 하고 경제를 파괴할 뿐이라고, 한때 노동자총동맹 지도자였던 훌리안 베스테이로가 전에 했던 경고를 무시했다. 좌익 단체들은 각각 의용군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의용군이 가장 훈련이 잘 되고 효율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반대파의 공격에 대비하여 무장한 채 다녔는데, 이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보편적으로 법과 질서가 붕괴되었다는 인상은 비민주주의 우파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우익 신문들은 좌파의 무질서를 비난했고, 좌파 역시 그런 우파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우파는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으며 의회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고 주장했다. 중간계급과 상층 여성들은 거리에서 군 장교들을 보면 그런 정부 하나 거꾸러뜨리지 못하는 겁쟁이들이라고 모욕했다.
루이스 아라키스타인. 내전 중 공화국의 프랑스 대사로 임명되어 그곳에서 공화국을 위한 무기를 구입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우파 중에서 격렬한 분란을 일으킴으로써 쿠데타가 일어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단체는 팔랑헤당이었다. 팔랑헤당은 여러 곳에서 자금을 지원받았다. 에스파냐혁신(Renovacion Espanola)은 매월 1만 페세타를 지원했고, 비스카야 은행과 후안 마르치도 자금을 댔으며, 그런가하면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도 파리 주재 이탈리아 대사관을 통해 매월 5만 페세타를 보내왔다. 그러나 나치는 팔랑헤당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100만 마르크를 지원해달라는 요청도 거절했다. 팔랑헤당은 빠르게 성장했기 때문에 돈이 필요했다. 국민행동(Accion Popular) 청년단원들이 합류하면서 당이 급성장했는데, 1936년 봄에 단원 1만 5천 명이 합류함으로써 팔랑헤당은 거의 두 배로 늘어 당원이 3만 명에 달했다.
호세 안토니오 데 리베라(앞줄 가운데)와 그의 팔랑헤 동료들
에스파냐 혁신의 문양. 전 국왕이었던 알폰소 13세와 그의 아들 돈 후안을 지지하는 단체이다.
팔랑헤당은 1933년 10월 29일 마드리드의 희극 전용 극장에서 탄생했다. 팔랑헤당을 설립한 호세 안토니오 데 리베라는 독재자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의 장남이자 젊은 변호사로서, 얼굴은 가무잡잡하지만 잘생긴 편이었고, 상당히 매력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파시스트 지식인 집단을 매혹시켰으며, 학생들, 그중에서도 세뇨리토(Senoritos)라 불리는 부잣집 아들들과 사회 변화로 위기감을 느끼던 중하층 계급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팔랑헤당에는 또한 10년 전 안토니오의 부친이 이끌었던 애국연합의 옛 구성원들과 좌절한 왕당파와 좌파의 선거 승리로 위협을 느낀 보수주의자들이 합류했다.
팔랑헤주의는 매우 보수적인 성격이었다는 점에서 나치즘이나 파시즘과 달랐다. 무솔리니는 단지 선전 효과를 노리고 연설할 때 로마의 상징과 제국의 형상을 사용했을 뿐이다. 그에 비해 팔랑헤당은 근대적이고 혁명적인 표현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근본은 반동적이었다. 그들에게 교회는 스페인다움의 핵심이었다. 새로운 국가는 ‘전통적 가톨릭의 정신에서 영감을 끌어낼’ 것이라고 했다. 팔랑헤당의 상징은 페르난도와 이사벨의 상징물인 권위주의 국가의 멍에와 이단을 쓸어버리기 위한 절멸의 화살이었다. 그들은 상징물만 차용한 것이 아니라 카스티야식 정신도 부활시키려고 했다. 그들에게 이상적인 팔랑헤 전사는 ‘반은 수도승, 반은 병사’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민족주의적 요소와 사회주의적 요소 간의 분열적 성격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호세 안토니오는 ‘자본주의의 사회적 파산 상태’를 공격하고, 노동자, 농민의 열악한 생활 조건을 비판했다. 그러나 그는 이데올로기로서 마르크스주의는 스페인의 사상이 아니며, 계급 투쟁이 국가를 악화시킨다는 이유에서 혐오했다. 국가는 고용주가 피고용인을 착취할 수 없는 체제에서 하나로 통합되어야 했다. 한때 호세 안토니오는 사회주의자인 프리에토와, 이어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들의 전국노동연합과 손을 잡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후에 그는 프랑코에게 문명은 결국 한 무리의 병사들에게 구원받는다고 한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의 말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그 병사들이 구원할 문명은 혁명적인 국가사회주의의 형태가 아니라 한 보수주의자의 완벽한 세계의 이미지였다.
오스발트 슈펭글러. 독일의 역사가로 서양 문명의 몰락을 예언한 것으로 유명하다.
팔랑헤당은 시가전에 대비하여 더 많은 화기를 구입하려고 애썼고, 호세 안토니오는 제임스 본드 스타일의 음모를 꾸몄다. 왕당파 신문 <아베세>의 런던 특파원 루이스 볼린(Luis Bolin)은 클라리지 호텔에서 은밀한 신호를 주고받는 방식으로, 중요하지만 이름이 밝혀지지는 않은 한 영국인을 만나 다량의 기관총을 샴페인 상자에 포장한 다음 독일에서 개인 소유 요트에 실어 스페인으로 들여오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그 물건은 제시간에 스페인에 도착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볼린은 런던에서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거래를 시작했다.
루이스 볼린. 내전 기간 동안 프랑코의 홍보 담당자였으며 내전 후 스페인의 관광 부서 장관이 된다.
한편 팔랑헤당은 이미 다른 통로로 무기를 구해놓고 있었다. 3월 10일 알베르토 오르테가(Alberto Ortega)가 이끄는 한 무리의 팔랑헤당원들이 사회주의노동자당 의원 루이스 히메네스 데 아수아(Luis Jimenez de Asua) 교수를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치고 그를 경호하던 경찰 한 명이 살해되었다. 팔랑헤당원들은 나흘 뒤에는 라르고 카바예로의 목숨을 노렸다. 같은 날, 즉 3월 14일 호세 안토니오는 공동의 행동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 프랑코의 동서인 라몬 세라노 수녜르(Ramon Serrano Suner)의 집에서 프랑코를 만났다. 다음날 정부는 라르고 카바예로 암살 미수 사건의 책임을 물어 팔랑헤당을 불법 단체로 선언했으며 호세 안토니오를 불법 무기 소지죄로 체포했다. 널리 알려진 호세 안토니오의 인간적 매력과 그의 추종자들이 저지른 잔인한 행동, 파리 호텔에서 열린 약식 연회복 차림의 모임에서 그의 패거리들이 내뱉은 공공연한 인종주의를 연결짓기란 쉽지 않다. 어찌됐든 이 괴팍한 안달루시아인(호세 안토니오)에게는 폭력이 비록 추상적 의미에서 머물렀지만 그의 연설이 분명히 사람들을 선동했다는 점에서 그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루이스 히메네즈 데 아수아
라몬 세라뇨 수녜르(좌)와 프랑코(중), 무솔리니(우)
권위주의적인 우파가 더는 의회 제도를 통해 무언가를 해보지 않기로 작정한 마당에 전통적 스페인을 수호한다는 이상은 이제 적극적인 준비를 요구했다. 피레네 산맥에서는 카를로스파가 무장에 나서서 의용군인 레케테(Requete)를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카를로스파 의용군은 19세기 카를로스파 전쟁 이후 그들의 상징이 된 붉은색 바스크 베레모를 쓴 군복으로 유명했다.
빨간색 베레모를 쓴 카를로스파
카를로스파 운동은 초(超)보수적이었다. 공식 운동 명칭는 ‘전통적 교우회’였는데, 그동안 일종의 세속의 예수회로 불렸다. 그들은 스페인을 소련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유대인-마르크스주의자-프리메이슨’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고 믿었다. 교회 지도부와 마찬가지로 카를로스파 역시 자유주의를 모든 악의 원천으로 보았으며, 또한 포퓰리즘 형태로 국왕이 지배하는 가톨릭 신정주의의 부활을 꿈꾸었다. 이 운동은 안달루시아 등 다른 많은 지역에도 지지자들이 있었지만 운동의 주력은 피레네 산맥 쪽에 있었다. 카를로스파는 이제 더는 지역주의적 요구에 동정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예전에 지역주의에 동정심을 보였던 것은 자신들의 주요 거점이 과거 나바라 왕국에 있었으며, 19세기에 카를로스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바스크인과 카탈루냐인들의 지지를 끌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36년이면 그들은 오히려 바스크와 카탈루냐의 민족주의를 혐오하게 되었다.
많은 카를로스파 장교들이 무솔리니의 도움으로 이탈리아에서 훈련을 받았으며, 지도자인 팔 콘데(Fal Conde)와 로데스노 백작(Count of Rodezno)은 무기를 구입하러 독일로 건너갔다. 레케테 의용군의 전력을 정확하게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1936년 초 나바라 지역에서 1만 8천 명이 넘는 대원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국적으로는 3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다. 그들을 지원하던 호세 루이스 오리올(Jose Luis Oriol)은 배편으로 벨기에에서 6천 정의 라이플 소총, 150정의 중기관총, 300정의 경기관총, 500만 발의 탄약, 1만 발의 수류탄을 구입해 들여왔다.
레케테의 지도자 팔 콘데
카를로스파 지도자인 7대 로데스노 백작 토마스 도밍게즈 아레발로
호세 루이스 오리올
1936년 봄 카를로스파 최고군사위원회가 하비에르 데 보르본 파르마(Javier de Borbon-Parma) 왕자와 팔 콘데의 주도로 프랑스와 가까운 국경 바로 너머에 있는 생장드뤼스(Saint Jean de Luz)에 설치되었다. 이 기구는 전임 장교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이 우익 집단으로 군대 내 우익 장교들의 비밀 결사체인 에스파냐 군사동맹, 알폰소 13세를 지지하는 왕당파, 팔랑헤 등과 함께 모여 반란을 모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을 연결하는 고리는 예전에 피레네 산맥에서 비밀리에 카를로스파 레케테의 군사 훈련을 지도했던 호세 발레라(Jose Valera) 대령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마드리드의 아사냐 정부는 이런 일련의 준비를 막연한 소문으로만 듣고 있었다.
카를로스파들이 진정한 왕위계승자로 생각했던 하비에르 데 보르본 파르마
호세 발레라 대령. 내전 중 프랑코의 가장 중요한 야전사령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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