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견 -
☆ 2014년 가해 6월 11일 (홍)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청주] 거저 주어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빈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사도 11,21ㄴ-26 ; 13,1-3
† 복음 마태 10,7-13
바르나바 성인은 키프로스 섬의 레위 지파 출신으로, ‘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본이름은 요셉이며(사도 4,36 참조) 마르코 성인의
사촌(콜로 4,10 참조)이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 11,24)으로
칭송받던 바르나바 사도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 교회 공동체에 바치고 다른
사도들과 함께 열성적으로 선교하여 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성인은 60년 무렵 키프로스의 살라미스에서 순교하였다.
★ 예루살렘 교회는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파견한다. 성품이 착하고
믿음이 충만한 그는 바오로를 안티오키아로 데려온다. 얼마 뒤 성령께서는
안티오키아 교회에 바르나바와 바오로에게 특별한 소명을 맡기셨다고 알려
주신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파견하신다. 그들은 하늘 나라를 선포해야
하며 자신들이 거저 받은 은총을 거저 전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전대에
돈도, 여벌 옷과 신발도 가져가지 말 것이며, 마을에 다다르면 마땅한
사람의 집에 머무르라고 명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은 성 바르나바 사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키프로스 출신으로
본이름이 ‘요셉’인 바르나바 사도의 성품에 대하여 성경은 짧지만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인간적으로 후덕할뿐더러 신앙으로 뜨거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뵙지는 못하였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제자였습니다. 이러한 그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
교회에 바치고(사도 4,37 참조)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여행에 동참하였으며,
독자적인 선교 여행으로도 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였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바르나바 사도는 키프로스의 살라미스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교회의 시대’에 사도로서, 또한 선교사로서 산다는 것의 모범을 보여
준 사도라 할 수 있습니다. 바르나바 성인은 사람들을 품어 주고 격려하며
용기를 주는 데 각별한 능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본이름
대신에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을 지닌 ‘바르나바’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생각합니다(사도 4,36 참조). 그러한 까닭에 바르나바 사도는 ‘우울한
이들의 수호성인’으로도 일컬어집니다.
복음을 온몸으로 전하는 사람이란 결코 아집이나 우월감 또는 자기도취에
빠져 있는 자가 아니라, 만나는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며 격려하고
포근하게 안아 주는 이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바르나바
사도처럼, 주님께서 만나도록 섭리해 주신 사람들과 함께하고 그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위로의 자녀’가 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참된
소명이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거저 주어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6월11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마태10,7-13)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7-13
거저 주어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10,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한 무소유를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말단을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특별히 성직자, 수도자, 선교사들은 물질에 구애받지
않고 일합니다.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불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것에 매이면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그것에 끌려 다니게 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철저한
무소유의 정신을 통해 가진자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용해야 할 곳에
제대로 써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 때문에 하느님을 소홀히 합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다 뭐냐’ 고
합니다. 그리고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내셨으며 물질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존중할 때 물질도 가치를 얻게
됩니다.
성경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 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0-21).
나의 삶에 있어서 참으로 보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이 보물일 수 있고, 부모나 배우자, 자녀나 어떤
물질이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보물을 잘 간수하고 빛나게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쌓아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야말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니 만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사용해야 합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는 잠시
관리자로서 관리하는 것일 뿐인데 왜 그렇게 욕심을 부리며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보통 돈과 물품만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입니다. 금전적인 도움은 즉각적으로 수혜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받은 돈이 떨어지면 또 다른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을 공감해 주고
베풀 수 있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물질보다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요즘은 재능기부도 많이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자기의 경험과 지식, 삶의 경륜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주십시오. 그렇지만
기왕이면 물고기를 잡아 주지 말고, 물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결코 물질 때문에 하느님께 소홀히 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정말로 자랑스러워할 것은 무엇입니까?
2014년 가해 6월11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7-13
언젠가 목욕탕에 갔다가 온 몸에 화려한 용 문신을 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얼굴도 약간 험상궂게 생겼습니다. 또 걸을
때에도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걷다보니, 사람들이 이 사람 곁을
피하더군요(물론 저 역시 피했습니다). 본인은 자신의 온 몸 문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저는 ‘참 쓸모없는 짓을 하고 다닌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의 거부감을 자아내는 저 용 문신에 대해
과연 늙어서도 자랑스러워할 수 있을까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쓸데없는 것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앞선 사람처럼
화려한 용 문신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도 있고, 죽으면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없는 것들을 움켜잡고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도 있지요. 금은보화, 세속적인
지위들……. 물론 이를 위해 자신이 기울인 노력을 생각하면서 자랑을
하려는 것이겠지만, 진정으로 자랑할 만한 것들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다음은 어떤 분으로부터 SNS 메시지를 통해 받은 이야기입니다.
중국 절강성의 경제계 인물인 왕쥔야오가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부인이 19억 위안(한화로 약 380억)을 상속받게 되었지요. 그리고
얼마 뒤, 이 부인은 전 남편의 운전기사와 재혼을 한 것입니다. 이 전 남편의
운전기사는 행복에 겨워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에 나는 내 자신이 왕 사장님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야
왕 사장님이 계속해서 나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많은 재산은 결국 누구의 것이 되었습니까? 나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이 되고 말았지요. 따라서 세상의 것에 연연하는 등의 쓸데없는 일에
전념하는 것보다는,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삶을
선택하여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나의 노력과 재주만으로 지금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갖게 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나의 능력과 힘을 뛰어넘는 주님의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에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거저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를 거저 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모든 것들을 하늘나라에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까?
정말로 자랑스러워할 것은 무엇입니까? 화려한 용 문신? 많은 금은보화?
높은 지위와 명예? 이러한 것들은 잠시의 만족만을 가져다 줄 뿐으로,
정말로 영원한 만족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인정해주는 삶.
바로 나눔과 사랑의 삶인 것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바르나바 성인이 바로 그런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 교회 공동체에 바치고 열성적으로
선교하여 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였지요. 이처럼 주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것을 거저 내어 놓을 수 있는 결단과 용기, 그리고 주님께 대한 순명을
보여주신 성인의 모습을 닮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휴식은 게으름도, 멈춤도 아니다. 일만 알고 휴식을 모르는 사람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이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쉴 줄만 알고 일할 줄
모르는 사람은 모터 없는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아무 쓸모가 없다(헨리 포드).
무엇이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떤 사건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걱정거리라고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사람의 상태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달라지는 것이지요.
이런 차원에서 죽음이란 것도 본래 그 자체는 두려운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만약 이것이 진정으로 두려운 것이었다면 가톨릭 안의 많은
순교자들이 나오지 않았겠지요.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우리들과는 달리
모두 죽음 앞에서 당당했습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결국 무섭고 두려울 것이라는 우리들의 선입견 그 자체가
아닐까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신부 -
◈ [수도회] 새로운 시작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6월11일 수요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사도11,21ㄴ-26;13,1-3 마태10,7-13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7-13
새로운 시작
끝은 시작입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 주신 새날의 선물입니다.
영보성모수녀원 연피정(2014.6.2-10) 지도를 끝마치고 귀원하는 도중 신심
깊은 부부와 함께 용인 땅에 소재한 '은이(隱里)와 골배마실' 성지를
순례하며 '십자가의 길'을 바쳤고, 성지순례 책자에 성지 담당 양형권
바오로 신부님의 싸인도 받았습니다.
골배마실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곳이고,
골배마실과 이웃한 은이성지는 사제가 되어 귀국한 김대건 신부가 택한 첫
사목지로, 신부님이 체포되기 직전 공식적으로 최후의 미사를 드렸던
곳입니다.
신부님의 생가터인 골배마실 커다란 바위판에 새겨진 신부님의 말씀이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 지어다. 가련한 세상에 한 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 없고“
-김대건 신부님의 마지막 회유문에서-
신부님의 회유문 말마디를 인용하여 성지 성당 주보의 제목 역시 '우리
벗아'로 명명되어 있었습니다.
모두가 자신을 내신 하느님을 알기를 갈망하는 성인의 마음이 잘
들어납니다. 사실 하느님을 아는 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습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이요, 하느님을 모르면 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매일 주님을 만나 주님과 함께 새롭게 떠나는 여정이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사도들이 그 좋은 모범입니다.
온전히 주님의 뜻에 따라 주님과 함께 새롭게 떠나는 파견의 여정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바르나바 사도의 여정 역시 물흐르듯 자연스럽습니다.
사도행전의 다음 대목이 사도의 면모를 요약합니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사도11,24).
하여 '위로의 아들'이라 불렸고, 개종한 바오로를 도와 함께 동행하며 그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사도였습니다. 바르나바 사도뿐 아니라 복음의
사도들 역시 온전히 주님께 의탁한 참 자유롭고도 적극적인 파견의
여정입니다.
주님은 사도들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7-8).
흡사 영적전쟁터에 파견되는 '주님의 전사들'같습니다.
영적전쟁에 승리의 비결은 단 하나 '거저 받았으니 거져 주는 삶'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이요 우리 모두는 이웃을 향한 하느님 '은총의 통로'
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삶의 선물 중 제일은 평화입니다.
무욕(無慾)의 텅빈 마음에서 샘솟는 주님의 평화입니다.
이런 평화가 있어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를 실감나게 체험합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마태10,12).
우선 만나는 모든 이에게 주님의 평화를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텅 빈 우리 안에 당신 평화를 가득
채워주시어 우리 모두 당신 평화의 사도로 파견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기타] 신앙이란 죽음을 넘어서는 힘입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진정 우리가 청해야 할 치유는 삶과 죽음, 그리고 영원성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래야만, 삶도 죽음도 아름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14년 가해 6월11일 수요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복음묵상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마태오10,8)
---
무병불사(無病不死)가 가능하지 않다면, 생물학적인 완치란 없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어떤 중병으로부터 의학적이던, 그 밖의 다른
어떤 방법에 의해 치유가 되었다고 해도, 결국 우리의 몸은 소멸과 생성을
반복하면서 늙어가고 병들어가다가, 이내 우리의 생체 시계는 정지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이 말씀을 생물학적이거나 생체의학적인 의미보다는 영성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에게 신앙이란
죽음을 넘어서는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끝나고 말
육체로 인한 안위가 아니라,
우리가 영원한 삶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요?
병자성사를 청하고 치유미사에 참례하는 본당 가족들이 많이 있습니다.
병자방문도 잦은 편입니다. 그들 중에는 이미 하늘나라로 가신 분들도
계십니다. 병을 받아들이는 태도,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느냐를 읽게 합니다.
사제는 온 마음을 다해 병이 치유되기를 기도합니다.
하지만 병의 치유 이전에 영적 평화를 청합니다.
신앙적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신부의 눈으로 볼 때,
참으로 많은 이들이 마음의 병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심지어는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도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촉구하십니다.
너희가 진정 청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참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지금의 삶밖에는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먼저 영적 치유를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는 누군가의 아픈 영혼을 보듬어줄 수 있음을 믿습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2014년 가해 6월11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7-13
지난주일에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났습니다. 미국으로 이민 간 친구가
한국에 잠시 왔고, 그래서 모처럼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삼성과 현대에서
일을 하는 친구들은 반도체 관련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한 친구는 장안평에서
자동차 딜러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으로 간 친구는 우체국에서 일을 한다고
합니다. 79년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났으니 벌써 35년이 되었습니다.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하는데 한 친구가 제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조 신부는
어째서 우리에게 성당에 다니라고 선교하지 않는가?’ 친구들은 제가 있었던
성당에 왔었고, 작년에는 용문 수련장에도 왔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 번도
친구들에게 성당에 다니라고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변명삼아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너희들이 고등학교 때 보았던 나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좋겠다. 성당에 다니는 내가, 천주교회의 사제가 된 나의
모습이 너희들 보기에 좋다면 그것이 선교라고 생각한다.’ 다음에 만나면
가까운 성당을 소개해 주고, 예비자 교리 반에 등록하는 방법도 알려 주려고
합니다.
오늘은 바르나바 사도 축일입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바오로 사도와 함께
초대교회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방인을 위한 선교를 많이
하였습니다. 이분들의 땀과 노력이 결실을 맺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생겨났고, 유대인의 회당이 아닌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에게
설명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교회란 무엇일까요?
저는 교회는 고속도로의 휴게소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먼 길
운전을 하다, 고속도로의 휴게소에서 잠시 쉬기도 합니다. 간식을 먹기도
하고, 차에 기름을 넣기도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고속도로 휴게소는
시설이 무척 좋아졌습니다. 우선 깨끗하고, 음식도 맛이 있고,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추었습니다. 아무리 고속도로의 휴게소가 좋아도 그곳에서
자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시금 목적지를 향해서 떠나게 됩니다. 인생이라는
고속도로에 많은 휴게소들이 있습니다. 사찰, 회당, 사원, 교회들이
있습니다. 각 종교는 저마다 삶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인생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영원한 삶을 이야기 합니다. 가톨릭교회는 2000년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사’를
통해서 신자들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 교회에 다닐까요?
고속도로의 휴게소에는 누구나 머물 수 있습니다. 교회도 누구나 다닐 수
있습니다. 아프고, 가난한 사람도, 외롭고 지친 사람도 교회에 올 수
있습니다. 인생을 잘못 살았고, 많은 죄를 지은 사람은 교회에 와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양심대로 살았고,
인생을 올바르게 살았던 사람도 교회에 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교회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있기 때문에 늘 순결하고, 깨끗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빛이 교회를
비추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교회에 다닐 수 있을까요?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사람은 톨게이트에서 티켓을 뽑아야 합니다. 휴게소를
이용하면서 비용을 지불합니다. 교회에 다니기 위해서는 먼저 교리를
배워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인지, 종교란 무엇인지, 하느님은 어떤 분인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지, 성사는 무엇인지, 성서는 어떻게 쓰여졌는지,
교회의 법과 제도는 무엇인지, 기도와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는지와 같은
것들을 배웁니다. 교리를 다 마치면 세례를 받고 세례를 통해서 지난날의
모든 죄는 사해지고,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누가 교회를 세웠을까요?
길이 먼저 있었고, 그 길 위에 휴게소가 생기듯이 교회는 길이요 진리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고, 그분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여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했고, 그 가르침을 성사로
구체화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셨듯이 제자들은
세례를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해 주었듯이 제자들은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 기름을 바르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고픈
사람들을 측은하게 생각하시고 5000명을 먹이셨듯이 제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빵을 나누었고, 마지막 날에 빵과 포도주를 축복하셔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신 것을 기억하며 제자들은 함께 모여 빵과 포도주를
축복하여 마지막 만찬을 재현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가정을 축복하였듯이
제자들은 혼인을 축복하였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
주셨듯이 제자들은 성령의 은사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들을 선택하셨듯이 제자들은 교회를 위해서 봉사할 사람들을
선발하였습니다. 이런 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성사’입니다.
신앙인들은 교회를 통해서 삶의 위로를 받고, 새로운 길을 향해서 나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 영성생활입니다. 영성생활은 왜 필요합니까?
세상의 것들에 우리들의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증오, 분노,
시기, 질투가 내 안에서 생겨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아름다운 세상에서 기쁘고 행복하지 못 하기 때문에 ‘영성생활’이
필요합니다.
- 서울 대 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병에 걸린 이들을 돕고 싶습니다.
2014년 가해 6월11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7-13
병에 걸린 이들을 돕고 싶습니다.
앓는 이를 귀찮아하고 죽어가는 이를 모르는 체 하게 된 지금 후회합니다.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생각하며 고독과 홀로 자찬하며 지냈습니다.
이렇게 버티다 보니 이젠 불안하고 힘들고 귀찮은 삶이 됐다는 생각입니다.
세상에서 감염되기 쉬운 이런 불안한 병에 걸린 이들을 돕고 싶습니다.
그래야 저도 고쳐질 것 같고 그러면 좀 평화스러울 것 같으니까요.
예수님은 이웃의 병 고쳐주고 죽은 이를 살리고 마귀를 이기라 명하십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오 10,8)”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