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최고라다(의회)는 20일 탈영병이 부대로 복귀할 경우, 형사 처벌을 면제하는 법안을 채택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의회는 이날 군 복무중 무단 이탈및 포기, 소위 탈영(러시아 약어로는 소치 СОЧ, 우크라이나어로는 СЗЧ)에 대한 처벌을 면하는 조항을 넣은 병역 관련 법안을 찬성 270표로 채택했다.
전쟁 중인 나라에서 탈영한 군인들을 가볍게 처벌하거나 처벌 자체를 면제하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법안이다. 이유가 있다.
스트라나.ua는 이 법안 채택의 가장 큰 이유로 병력 부족을 들었다. 러시아 쿠르스크주(州) 공격과는 별도로, 우크라이나군이 돈바스 지역(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의 주요 전선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은, 병력부족 때문인데,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크라 의회인 베르호브나야 라다(최고라다)/사진출처:НикВести
우크라이나는 현재 동원법의 대폭 강화에도 불구하고 동원 대상 남성들의 기피로 기대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터에, 탈영병도 크게 늘어났다고 한다. 인터넷에는 탈영을 미화하는 '밈'(트렌드를 따라하는 콘텐츠를 만들어 올리는 현상)이 확산일로에 있다고 스트라나.ua는 전했다.
고민 끝에 우크라이나 당국은 탈영병을 더욱 무겁게 처벌하는 대신, 다시 전선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사면 조항'을 넣어 복귀 물꼬를 터주는 방법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무단으로 부대를 떠난 혐의가 있는 병사가 계속 복무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면, 형사 책임을 면제하고, 부대로 복귀시킨다"는 내용이다. 일시적으로 탈영했더라도 부대로 복귀하면 일체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뜻이다. 나아가, 병영 혹은 부대 내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탈영했을 경우, 타부대로의 전출도 가능하다고 했다.
한마디로 고육지책이다. 부대 지휘관들이 부대원들의 탈영을 곧바로 보고하지 않은 채 병력 보충만 요구하니 상급 부대에서는 별다른 대책이 없다. 보고하더라도, 무장 탈영병을 잡을 수 있는 방안도 마땅치 않다. 그럴 바에야 탈영병을 어렵게 잡아 감옥에 보내느니, 자진해서 부대로 돌아오도록 유도하는 게 현실적으로 이익이다.
문제는 현실성이다. 탈영한 병사가 자진해서 부대로 돌아올까?
공교롭게도,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9일 러시아가 만성적 병력 부족 속에 탈영과 병역 기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탈영병에 관한 새 법안을 채택한 우크라이나를 먼저 떠올리게 하는 듯하다.
우크라이나 군 병력/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연합뉴스에 따르면 WSJ은 러시아 인권단체의 집계를 인용해 "탈영하거나 징집(동원)을 피해 달아난 러시아 남성들은 최소 5만명에 이른다"며 "체포된 뒤 부대 복귀나 입대를 선택해 혐의가 무마되는 이들도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규모가 훨씬 크다"고 했다. 기사 내용으로는 러시아도 탈영병(혹은 기피자)이 부대로 복귀하면 없던 일로 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면서 탈영이나 병역기피 혐의로 입건된 사건이 공식적으로 1만건이 넘는다고 WSJ은 밝혔다. 병역기피가 1년에 2번씩 이뤄지는 신병 입대(통상 '연례 징집'이라고 부른다/편집자)인지, 예비역을 대상으로 한 동원인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2022년 9월 발령된 부분동원령은 사실상 종료됐다. 새로 동원되는 예비역이 없는 만큼, 병역기피는 신병 입대로 보인다. 신병 입대한 병력은 공식적으로 우크라이나와의 전투에 투입되지 않는다.
아니면, 부분동원령 발령이후 지금까지의 누적 기피 건수일 수도 있다. 탈영과 병역 기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럼에도 WSJ이 이를 같은 선상에 두고 집계한 것은 그 규모를 키우기 위해서라는 의심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또 하나, 전쟁에서는 상관 명령을 거역하거나 탈영할 경우, 현장 즉결 처분도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게 우리네 상식이다. 물론 실전에서 적용 여부는 현장 상황과 지휘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우크라이나 군인/사진출처:우크라군 합참 페북
러시아 군인들을 변호하는 아르켐 무구냔츠 변호사는 WSJ에 "군인들 사이에서 휴가 뒤에 부대에 돌아가면 바보라는 인식이 있다"며 "범죄 혐의로 기소될 가능성이 죽을 가능성보다는 덜 나쁘다는 얘기"라고 부대 분위기를 전했다.
이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계엄령과 총동원령에 따라 전선에 나간 우크라이나 군인에게는 휴가 자체가 아예 없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동원강화법을 심의하는 과정에서도 일정한 기간 복무하면(예컨대 1년에 한번) 휴가를 보장하고 2년을 복무하면 전역하기로 한 조항은 막판에 우크라이나군의 거센 반발로 빠져버렸다.
그러다보니 탈영병에 관한 끔찍한 보도들이 현지 언론에 오르내린다.
탈영중 해외로 탈출하다가 사살된 우크라이나군인/사진출처:텔레그램
스트라나.ua는 지난 7월 17일 사흘전(14일)에 발생한 탈영병 저격 사건을 크게 보도했다. 몰도바 국경에서 15km 떨어진 오데사 지역에서 국경 수비대가 군인 1명을 사살했는데, 희생자는 훈련장을 탈영해 해외로 탈출하려던 4명 중 한명이었다는 것. 이 매체는 "탈영병이 해외로 탈출을 시도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면서 "그러나 비교적 드물게 보고된다"고 짚었다.
이 매체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법원의 공식 기록에도 탈영병 사건들이 많이 올라와 있다. 하지만, 이 사건들은 해외 탈출에 실패한 경우이고, 성공한 군인들은 해외에서 최대한 신분을 속이고 군 복무에 대해 아예 입을 다문다는 것.
우크라이나군 해병대 훈련 교관 중 한 명은 스트라나.ua 측에 “몇 달 전에 뱃사람 출신의 지원 병력이 도착했다. 이들은 계약에 따라 해군의 지휘를 받는 해병대에 복무하도록 분류된 병력이다. 하지만 일부는 배에서 내려 훈련장으로 오는 도중에 탈영했고, 그중 대다수가 이미 우크라이나를 빠져나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스트라나.ua가 접촉한, 해외로 탈출한 탈영병 2명의 진술은 우크라이나가 처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 탈영병 1
"2022년 2월 자원 입대했다. 검문소에서 복무하던 중 휴가도 없다는 걸 알았다. 이듬해(2023년) 봄에 육체적으로 너무 지쳤고,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있어 치료를 위해 집으로 올 수 있었다. 그러나 군 복무중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일을 할 수 없었다. 조만간 다시 부대로 소환될 것으로 생각해 해외탈출을 결심했다. 그 당시, 군인들은 국경 지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국경수비대 지역에서 보면 몰도바 마을이 바로 반대편에 보인다. 문제는 국경 수비대다. 2만5,000달러에 협상한 뒤 새벽 4시에 국경을 건너기로 했다. 사복으로 갈아입고 젖먹던 힘까지 다 짜내 몰도바를 향해 달렸다. 성공한 나는 몰도바를 거쳐 지금은 독일에 와 있다."
우크라이나 탈영(우크라이나어로는 СЗЧ)에 관한 밈/틱톡 캡처
#탈영병 2
"2023년 초에 동원됐다. 1년도 버티지 못하고 탈영했다. 솔직히 말해 죽고 싶지 않았다. 매일 눈 앞에서 다리나 팔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니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다. 아버지를 만나 새 휴대전화를 받고 전쟁 전에 발급한 외국 여권을 받았다. 체르니우치 지역에서 루마니아로 떠났다. 그 여정 자체가 어렵고 위험하지만, 가장 위험한 곳은 나무가 없는 공터다. 카메라가 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국경을 넘었고, 처음엔 루마니아에 와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마을로 내려가니 루마니아어로 된 표지판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누구에게도 내가 군인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