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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12장 1-2절. 은혜와 진리를 받은 사람들의 특징1-예배드리는 삶
은혜와 진리는 땅의 사람을 하늘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육신이 이 세상을 떠나 천국을 옮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오라고 하시는 시간이 되어야 옮겨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하시면서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5절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여러분! 예수님은 언제라도 여러분들을 천국으로 데려가실 수 있습니다. 이 세상보다 천국이 훨씬 좋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러분들을 데려가지 않고 이 세상에서 예수님 자신의 증인들로 살게 하십니다. 그 이유를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는 가르쳐줍니다. 여러분들은 지난 주까지 은혜와 진리의 가치에 대하여 19가지 주제로 20회에 걸쳐서 들으셨습니다. 오늘부터는 15주 정도에 걸쳐서 은혜와 진리를 받아 새롭게 된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특징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듣고, 여러분 자신을 점검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모습을 더욱 갖추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주신 은혜와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 변화된 성도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제일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입니다. 은혜와 진리로 거듭난 사람들은 인생에 있어서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압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기뻐하시며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예배를 제사로 표현합니다. 이것을 제사로 표현한 이유는 항상 제물과 같이 드렸기 때문입니다. 제물은 가축으로 드리기도 했고, 곡식으로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돈으로 드리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것을 헌금이라고 하지요. 오늘날에는 추수감사주일에 드리는 곡식들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을 헌금으로 드립니다. 심지어 구약의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안식교도나 여러 이단들조차도 제물로 드리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모순적인 삶을 살면서도 모순적인 삶을 사는 지를 모릅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제사를 통해 제물이 아닌 또 다른 무엇인가를 통해 예배를 받으시고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도 그렇지만 선지자들이 예언한 내용들을 보면 제물의 종류가 아니라 믿음으로 자신을 드리는 삶의 제사를 먼저 받으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구약의 제사는 가축이나 곡식을 제물들로 드렸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하나님 아버지께 산제물로 드리신 이후로는 모든 사람들이 헌금으로 드립니다. 하지만 구약에서도 제물의 종류가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드리는 믿음의 삶을 우선으로 받으셨던 것처럼, 신약에서도 역시 드리는 헌금의 액수보다 더 중요한 제물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다 같이 오늘 본문인 로마서 12장 1-2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을 보면 예배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드려야 하는 지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예배가 어떤 것입니까?1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 말씀을 보면 그냥 예배가 아니라 영적인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예배는 그냥 예배가 아니라 영적인 예배를 드려야 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적 예배를 드리는데 있어서 여러분들이 알아야할 중요한 사실 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구약 성경에서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편 106편 1절을 보면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알면 감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알기에 힘쓰라는 말씀도 됩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어디에 나타납니까?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을 통해 하나님의 율법을 하나님의 율례, 계명, 법, 명령, 교훈, 말씀, 도 등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성경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바로 선하시며 인자하신 모습입니다.
그런 선하시며 인자하신 하나님을 신약에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편지하면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하며서 영적인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을 여러분들은 경험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은 모든 선인과 악인을 차별하지 않고 햇빛과 비를 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비유하실 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하신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신들을 원수로 생각하는 유대인이 강도만난 것을 보았을 때 그가 유대인이냐 사마이라인이냐가 아니라 그가 부상을 입고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자비를 베푼 그 마음을 하나님이 가지신 마음으로 표현하셨고 예수님은 너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이웃으로 생각하면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예배는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예배를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질문인 예배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입니다. 예배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영과 진리로써 자신의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 질문인 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에 대해서 하나님께 여쭈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영과 진리가 무엇입니까?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령과 진리의 말씀이 가르치고 인도하시는 바를 따라서 드리는 예배가 바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런 예배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시게끔 드리는 사람은 삶 자체가 하나님께 산제물로 드리는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예배가 영적인 예배며 참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한 예배가 됩니다. 이렇게 거룩한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2절 말씀대로 행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2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들은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가치관은 무엇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느냐를 결정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주시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때때로 충돌이 일어납니다.
로마시대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했던 이유가 바로 로마 황제가 하라고 하는 가치와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있는 가치가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시대에 로마가 가르치는 가치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설사 목숨을 잃을 지라도 그들이 절하는 우상들에게 절대로 절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로인해 로마 사람들은 자기들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게 되었고 감옥에 가두거나 사형을 시켰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대를 거스르지 않고 이 세대에 마음을 맞추어서 살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그런 사람들을 본받아가면서 편안하게 살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며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것을 본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시며,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알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산제물이 될 수 없는 이유 역시 거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산제물이 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들이 교회에 열심을 내고 종교적인 행위에 충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의 전부는 교회일에만 충실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교회 안에 있는 목회자와 성도님들에 대하여 최선을 다해서 섬기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매우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 주일 성수하고 예배때마다 참석하고, 십일조를 드리며, 감사헌금을 드리고, 또 주일헌금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기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교회의 전부는 아닙니다. 여러분!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렇다면 교회는 머리이신 예수님에게 듣는 일 역시 주일성수와 각종 예배에 참석하고, 십일조를 드리며, 감사헌금과 주일헌금, 그리고 각종 헌금을 드리는 것처럼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눈에 보이는 형식적인 것은 다 하지만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예수님과의 만남과 깊은 교제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며, 또한 세상의 이웃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셨고, 제자들을 사랑하셨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도우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께 산제물로 드리는 영적 제사의 방법이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31절을 보면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셨을까요?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셨던 표현방법의 첫 번째는 항상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시는 것으로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예배의 첫 번째 요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자리로 항상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매우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 기도의 자리는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장소를 잡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제자들에게는 골방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꼭 골방에서만 기도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방해를 받지 않는 곳, 또한 세상의 일 때문에 방해를 받지 않는 곳으로 찾아가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는 곳으로 찾아가셔서 아버지께 기도하셨고, 그런 아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시간에는 항상 제자들과 같이 계셨지만 기도할 때만큼은 제자들이 없는 오직 하나님만을 만나기에 적당한 장소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정신없이 일하는 마르다보다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를 더 칭찬하신 것입니다. 꼭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장 28절을 보면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는 말씀은 에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9절에서도 역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 앞에서 그 말씀을 가르치셨음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내가 자의로 말했다는 것은 임의로 말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 한 말씀도 자의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께서 아들이신 예수님께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것과 이르실 것을 친히 명령하셨다고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을 천사들이 전해준 말씀을 통해서 들었지만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직접 말씀해주신 그 말씀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항상 하나님 앞으로 나가셨던 이유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말씀해주셨고 아들이신 예수님은 그 들은 말씀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내신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예배자가 항상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이유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셨을까요? 그 첫 번째 이유는 아버지의 명령이 바로 영생인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장 50절을 보면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영생의 말씀을 받은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하셨고 그 말씀을 받으시기 위해 항상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셨던 이유의 두 번째는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7절을 보면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진리의 말씀만이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와 진리가 여러분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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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셨을 때말씀만 들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아들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본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기도로 자신에게 나온 아들에게 무엇을 보이셨습니까? 하나님이 지금 인간 세상에서 무엇을 행하고 계신지를 보이셨습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을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하나님이 옛적부터 해오신 일들과 지금 하고 계신 일, 그리고 앞으로 행하실 일들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아버지에게서 듣고 순종하시면서 아버지의 일을 이루시는 아들의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표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20절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그렇게 하나님 아비지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전하거나 행하실 때, 그리고 보이신 것을 보시고 아버지의 일을 하실 때 그것을 본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예수님이 표현하셨다면 두 번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전을 사랑하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월절 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가 성전으로 들어가셨는데 거기서 제사의 제물의 명분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격분하셨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들이 득실거리는 집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때리시면서, 그리고 그들의 돈바꾸는 상을 뒤집어 엎으시면서, 비둘기들을 날려보내시고, 묶어놓은 가축들을 성전 밖으로 몰아내시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청결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전을 굉장히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순수한 집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거기에 어떠한 불순물도 끼어 있어서는 안되는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시는 것을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31절을 보면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순종의 기초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명령하시는 모든 말씀을 가감없이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당연시 여깁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만하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매우 어려운 일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산제물로 드리는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립니다. 왜나하면 자신이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역시 아버지를 사랑하셨고 아버지께서 명하신대로 움직이셨습니다. 이것이 산제물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신 방법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예수님이 계실 때는 아직 교회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관심은 각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제자 삼으시고 삼년 반동안 함께 동거동락하시면서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한 자신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후에는 구약 성경에 예수님 자신을 두고 기록하신 말씀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승천하시고 나면 오실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몸으로써 자신을 증거할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만이 아닙니다. 전 세계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가 된 사람들이 모인 모든 공동체를 교회로 세우셨습니다. 그런 교회를 예수님은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을 보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부터 시작하심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을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신 이유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성령이 임하시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은혜와 진리를 받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교회에 충만히 임하시는 이유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이 복음은 온 인류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악 세상에서 죄에 빠져 죽은 인생들을 살리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바로 에덴의 회복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멀어졌던 관계가 이제는 막힌 담을 허물고 화해의 손을 잡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과의 화평이 이루어지고 또한 성도 서로간에 화평이 이루어지고 불신자들과의 관계에서도 역시 진리 안에서 화평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치료하시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면서 자신의 몸을 산제물로 드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선히 여기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게 여기시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물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자신의 몸을 산제물드린 수많은 헌신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은혜와 진리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받은 사람들은 모든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드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 예배를 드리는 삶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주님으로 믿으시는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부르심을 받고 그의 피로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이로인해 여러분은 지금 믿음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그 믿음의 길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점점 알아가고 배우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선히 여기시고 온전하게 여기시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요, 교회와 성령님을 통해 진리를 배워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삶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23-24절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리고 오늘을 사시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여러분들이 바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배우기를 갈망하십시오. 또 예수님을 알기를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로인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그 생명의 길을 따라 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예배를 드리는 삶이요,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제물로 아버지께 드리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진리를 받은 여러분들이 바로 이런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은혜와 진리를 받은 여러분들에게 믿는 사람으로서의 증거가 되어지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