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31. 큐티
이사야 9:1 ~ 7
그 나라
관찰 :
1) 흑암이 없는 나라
- 1절.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시고 계시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의 특징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고 계시다. 그 나라의 특징은 흑암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어두움으로 묘사되는 것은 본문에서는 특별히 멸시당함이다. 그 나라의 특징은 그 누구도 멸시당하지 않는 나라라는 것을 밝혀주시고 계시다. 이 땅에서의 나라는 어떤 나라이던지 빈부귀천의 구분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루실 그 나라에서는 바로 그런 멸시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라는 것을 밝히시고 계시다. 이런 나라는 역사속에서 존재한 적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이루실 것임을 약속하고 계시다.
- 2절.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 흑암,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이들이 큰 빛을 보고, 빛이 비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얼굴빛이 그들에게 비추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태양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광명의 빛이 멸시당하고, 두려움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던 이들에게 비추어짐으로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이 땅에서는 사망의 그늘에 앉아 눈물지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이제 참 자유를 누리며 진정한 나음과 누림을 향유하게 될 것을 말씀해 주시고 계시다. 이 빛이 인류의 소망이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런 빛을 인류는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2) 압제가 없는 즐거움의 나라
- 3절.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 하나님은 “이 나라”를 즐거움이 가득한 나라로 만드실 것이라 말씀해 주시고 계시다. 그 나라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지극히 번성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즐거움이 가득할 것인데, 마치 풍년을 맞아 추수하는 이들의 즐거움에 비교하고 있다. 또한 도둑질한 자들이 그 도둑질한 물건을 나누는 즐거움에 비교하고 있다. 여기서 초점은 즐겁다는 것이지 그 상황이 아니다. 그 나라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자들은 마음껏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 그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다. 비구속적결산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풍성한 것들을 그 나라의 백성들이 누리게 될 것에 대한 의미도 포함된다.
- 4절.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 그 나라에서는 노예들이 지는 무겁게 메는 멍에가 꺾이게 되어 벗어나게 될 것이다. 노예들에게 내리쳐 지던 채찍질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압제자가 노예들을 후려치던 막대기들이 꺾어져서 다시 때리게 되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본 절은 두 가지의 사건을 염두에 두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나는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탈출하게 된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미디안의 압제로 타작을 포도주 틀에서 할 수 밖에 없던 압제에서 벗어나게 된 기드온 사건이다. 둘 다 노예와 같은 삶에서 자유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집트에서의 삶은 노예에 대해서, 미디안의 날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나라에서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으로 자유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임을 말씀해 주시고 계시다.
3) 평강의 왕이 다스리는 나라
- 5절.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 그 나라에서는 압제받는 자들이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렇다면 압제하는 자들은 완전히 제거될 것이다. 그리고 이후로 전쟁이 사라지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 나라에서는 전쟁이 없다.
-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가막힌 묘사다. 그 나라에 전쟁이 없는 이유가 바로 그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평강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메시야가 어떤 분이신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 분이 임마누엘이시고,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은혜이다. “정사를 메었고”라는 의미는 당시의 왕들이 권위의 상징인 금고리나 열쇠를 어깨에 둘렀던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메시야의 권위를 의미한다. 이사야는 메시야의 이름을 통해서 그 분을 설명한다.
- “기묘자라, 모사라” => “기묘”(wonder)와 “모사”(counsellor)를 구분하여 해석할 수도 있으나, “기묘한 모사”(Wonderful counsellor) 라는 해석이 더 그 의미를 열어준다. 즉, 그 분은 어느 누구도 감히 생각지 못했던 놀라운 계획을 세우실 것이며,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I will be who I will be"로서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이름이다.
-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 신적인 계획의 수립과 성취라는 측면에서 첫째 이름과 둘째 이름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메시야로 오시는 그분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전혀 손색이 없는 분이시다. 이 이름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돌아와 부르게 될 하나님의 이름이다(사 10:21). 또한 구약에서 자주 사용되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렇기에 이 아기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신성을 소유한 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 “영존(永存)함”은 신성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점은 “아버지”에 있다. 히브리식 사고에서 아버지는 아들과 상관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부양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후원자, 보호자 등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아버지”는 그의 백성들, 더 넓게는 피조물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을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 “평강의 왕이라” => 마지막으로 그 분은 백성들을 돌보고 책임지는 자로서 “왕”이라 불리운다. 높은 곳에 앉아서 밑에 있는 백성들을 착취하는 왕의 개념은 성경에서 말하는 왕이 아니라 이방의 왕의 개념이다. 메시야로 오시는 그 분은 “평화의 왕”이시다. 그가 다스리는 나라는 평화의 나라이며, 그의 다스림 역시 평화를 통한 통치이다. 그 분이 평화의 왕이시기 때문에 그 나라 역시 평화가 지속된다.
- 7절.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 다윗 언약의 온전한 성취가 바로 장차 오실 메시야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 분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다윗에 위에 앉으심으로 평강이 무궁하게 될 것이다. 그가 세우는 그 나라가 영원히 정의와 공의가 이루어지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 일을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온전히 이루시기까지 쉬지 않으실 것임을 약속하고 계시다.
가르침 :
1) 이사야 9장은 본격적으로 메시야가 오셔서 이루실 나라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 나라의 특징은 흑암이 없는 나라이다. 멸시를 흑암으로 표현하는 이사야를 통해서 그 나라에는 완전한 평등과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고귀한 존엄과 가치가 온전히 드러나게 되는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나라는 역사 속에 없었고, 앞으로도 주님께서 이루실 그 나라에서만 성취하게 되는 나라가 될 것이다.
2) 또한 그 나라는 완전한 즐거움이 있을 나라이다. 이 나라의 즐거움은 모두가 참여하는 즐거움이다. 다윗은 승리하고 돌아와서 전리품을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자도 함께 참여하게 했다. 메시야가 다스리는 그 나라는 모든 백성이 함께 그 즐거움에 참여하는 나라이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나라에서 나누게 되는 탈취물이 바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기에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기에 그것을 나누는 일에 누가 더 받고, 덜 받고 할 일이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하시는 주님의 일에 반대하는 자도 있을 수 없다.
3) 이사야는 주님의 위대한 이름을 알려주시고 있다.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하나같이 우리에게 소망이 넘치는 이름이다. 기묘한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이 모든 것이 바로 메시야가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렇듯 분명하게 묘사하고 증거하는 메시야에 대한 증거를 듣지 못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언제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4) 주님 약속하신 메시야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이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묘한 모사로,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전능한 하나님으로, 평강의 왕으로 이미 오셨고, 앞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더구나 다시 오실 주님은 심판주로 오실 것이다. 그렇기에 주님을 두려워함으로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기쁨으로 그 분과 그 나라를 고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5) 구약에서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 알려주셨고, 그 분을 기다리는 유대인들이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왜 메시야로 인정하지 못했는지를 면밀히 살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적용 :
1)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그 나라”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 “그 나라의” 특징은 “그 분”이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그 분은 메시야이시고, 장차 오실 분이신데, 다윗의 후손으로 다윗 언약을 완성하시는 분이시다. 이분이 하나님이시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분이 통치하실 나라는 멸시당하는 자가 없는 나라, 전쟁이 그치고 영원히 평화가 있는 나라이다. 왜냐하면 그 분이 평화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오늘도 내가 간절히 소망하며 기다리는 나라가 바로 “그 나라”이다. COVID 19로 전세계가 난리인 작금의 상황에서 이곳 미얀마에서 더욱 간절히 소망하는 나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그 나라”이다.
2) 주님의 나라는 주님께서 기묘한 모사로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영존하시는 아버지로서, 평강의 왕으로서 다스리실 것이다. 우리 주님을 갈망할 이유가 너무나 충분하다.
3) 오늘 대한항공 특별기로 한국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있다. 미얀마에서 확진자가 14명이 되었고, 사망자도 1명 발생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 불확실성을 상황에서 주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그런데 아무리 편안한 상황에 거하고 있다하더라도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상황은 평안이 없다. 아무리 혼란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의지하면 평강이 있다. 그 이유는 주님이 바로 평강의 왕이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