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격능선전투, 42차례 백병전 끝에 중공군 ‘생명선’ 끊어내
국군2사단, 1952년 10월 14일 선제 공격
6주의 전투 끝에 김화~금성 도로망 확보
군사분계선 설정 시 유리한 지형 차지해
11월 25일 국군9사단에게 지역 인계 후
백마고지서 2사단 패하자 9사단도 작전상 철수
저격능선, 휴전선 북방 비무장지대로 들어가
기사사진과 설명
저격능선 전적비. 국방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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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북방에서 백마고지전투가 끝나갈 무렵 좌측 인접 지역인 김화에서는 저격능선전투가 불붙기 시작했다. 저격능선은 철의
삼각지대(김화·철원·평강)인 우측 철원군 오성산에서 좌측 김화 지역으로 뻗어 내린 여러 개의 능선 가운데 남대천 부근에 솟아오른 1㎢ 정도의
장방형 돌출 능선으로, 해발 고도는 580m다.
철의 삼각지대는 중공군의 병력과 군수물자가 집결돼 있던 최대의
후방기지였다.
따라서 중공군은 이곳을 지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으며 국군과 유엔군도 철의 삼각지대를 차지하려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최후 격전을 벌였다. 특히 중공군은 이 지역을 ‘생명선’처럼 여기고 사수하려는 의지가 강해 피아의 격전이 극심했다. 중공군은
오성산(1062m) 일대에 제15군 예하 3개 사단을 배치하고 있었으며, 그중 저격능선은 중공군 45사단의 전초기지였다.
당시는
휴전을 앞두고 서로 휴전선 설정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혈전을 벌이던 시기였다.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하기로 결심하고, 오성산에 있는 두 개의 돌출고지(북쪽의 Y고지, 남쪽의 A고지) 중 A고지를 국군2사단에 공격 목표로 주었다.
A고지의 남쪽에는 매봉, 동쪽에는 돌바위 고지가 있어 저격능선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매봉과 돌바위 고지를 먼저 점령해야
했다.
국군2사단은 미 9군단에 배속돼 김화 지역 방어를 하고 있었는데 17연대, 31연대, 32연대와 배속된 37경보병연대 등
4개 연대가 있었고, 지원포병은 18포병대대, 30포병대대가 있었으며 980포병대대가 사단에 배속됐다. 사단의 좌측은 미7사단, 우측은
국군6사단이 인접해서 방어에 들어갔다.
저격능선은 아군 제2사단의 주저항선으로부터 불과 500m 전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1952년 10월 14일 국군2사단의 선제공격으로 전투가 시작돼 11월 24일까지 6주 동안 42차례에 걸친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다. 결과는
국군2사단이 승리해 김화∼금성 간의 도로망 확보와 군사분계선 설정 시 유리한 지형을 차지할 수 있게 됐다.
첫날인 10월 14일
05시, 국군2사단 32연대 3대대가 9개 포병대대의 포사격 지원을 받으며 공격을 시작했다. 32연대 3대대는 05시 정각에 공격개시선을
통과했다. 9중대를 우측에, 10중대를 좌측에, 11중대를 예비로 하여 저격능선을 향했다. 9중대는 돌바위 고지 전방 200m까지 진출했고,
10중대는 매봉 남쪽 100m 지점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강력한 포사격으로 아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9중대는 포복으로 다시 전진,
07시30분에 돌바위 남쪽을 점령했다.
그러나 주봉에 있던 중공군 토치카에서 기관총 2정이 사격을 퍼부어 고지 40m까지
접근했다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9중대장은 대대장에게 화력지원을 요청했고 곧 미 공군의 전폭기 편대가 날아와 4차례나 돌바위를 강타했다.
그러나 조금 주춤하더니 적 토치카에서 아군의 진출을 방해하는 기관총탄이 또 날아왔다.
2소대장 한계동 소위는 토치카를 폭파하기로
비장한 결심을 하고, 화염방사기 사수인 신민호 일병을 데리고 포복으로 접근, 수류탄과 화염방사기로 토치카를 폭파하는 데 성공했다. 토치카는
화염에 휩싸였다. 소대원들은 돌진을 감행했고 공격을 개시한 지 5시간30분 만에 돌바위 고지를 점령했다. 그러나 돌바위 우측에서 중공군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백병전으로 맞서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수적으로 부족한 9중대 2소대는 결국 후퇴하고 말았다. 이처럼 숨 막히는
공방전은 9중대뿐만 아니라 10중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3대대가 1차 공격에 실패하자 32연대장은 1대대 1중대를 3대대에
배속시켜 13시40분에 2차 공격을 감행했다. 이번에는 미 공군의 전폭기 편대와 포병 화력도 지원받아 중공군의 방어진지를 완전히 파괴하고 능선을
점령했지만 역시 그날 밤 중공군의 역습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두 번째 공격에 나선 국군2사단은 14시30분쯤 목표를
재차 탈취하는 데 성공했지만 역시 중공군의 야간 역습으로 철수하게 됐다. 국군2사단장은 32연대와 17연대를 교대해 17연대로 하여금 A고지를
탈환하도록 명령했고 17연대는 세 차례에 걸쳐 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17연대는 이후 미 공군의 항공기 폭격 지원을 받아
결국 A고지를 탈환했다.
이렇듯 강력한 화력전이 집중되면서 저격능선전투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공방전이 계속됐다. 국군2사단은 중공군
45사단과 11월 24일까지 6주에 걸쳐 총 42회의 백병전을 거듭하면서 고지의 주인이 12번이나 바뀌는 처절한 전투를 치렀다. 결국은 11월
22일 A고지와 돌바위 고지는 국군이 점령하고, Y고지는 중공군이 점령한 상태에서 전투가 일단락됐다. 중공군은 다음날인 11월 23일에도
A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공세를 폈으나 상황을 바꾸지는 못했다.
11월 25일 국군2사단은 책임지역인 저격능선을 국군9사단에 인계한
후 9사단이 맡고 있던 백마고지 일대로 이동하라는 미 9군단의 명령에 따라 아침 6시부로 교대됐다. 그러다가 정전협정을 며칠 앞둔 1953년
7월에 전개된 중공군의 마지막 공세(7월 13일) 때 백마고지 일대의 2사단이 무너지자 저격능선 지역을 맡고 있던 9사단도 작전상 철수하게 됐고
이때부터 저격능선이 휴전선 북방 비무장지대로 들어가게 됐다. 저격능선이란 이름은 1951년 미 25사단이 이 고지를 점령하려고 고지에 올라가기만
하면 중공군 저격병으로부터 총알이 날아와 많은 피해를 봤기 때문에 붙여졌다.
<배영복 전 육군정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