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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읽어볼만한 자료입니다.
그리고 정치인은 과거 역사를 잘 파악해서 문중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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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 의 문
수신 : 국민의힘 당대표
참조 : 국민의힘 전당대회 선거관리위원회
발신 : 원주원씨 대종친회 , 역사가 백승종
제목 : 천아람 후보의 원균장군 역사왜곡에 대한 항의문
천하람 씨의 진정성 있는 공개 사과를 촉구한다.
1. (문제 제기의 취지와 목적) ‘국민의 힘’ 대표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후보로 나선 천하람 씨(이하 존칭 생략)는 임진왜란 후 선무공신 제1등으로 선정된 원균 장군을 모독하는 발언을 하였다(첨부 1을 참조).
문제가 된 천하람의 발언은 2023년 1월 14일자 인터넷판 <조선일보>에 소개되었는데, 아래에서는 천하람의 발언 내용을 분석하고, 그것이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는지를 당시의 역사 기록을 토대로 지적하고자 한다. 천하람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공개적으로 사과하기를 촉구한다.
2. (천하람의 문제 발언) <조선일보>에 공개된 천하람의 발언을 보도된 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편의상 본문에 (가),(나),(다)의 기호를 삽입하여 문제의 발언을 주제별로 나눈다.
천하람 후보는 정권 교체 과정을 임진왜란에 비유하면서 (가) “충신과 역신이 뒤집히고 공을 세운 자가 하루 아침에 비난의 대상이 됐다”라며 (나) “조선시대에도 윤핵관이 있었다. (다) 이순신이 아니라 윤핵관 원균에게 맡겼을 때 과연 12척의 배라도 남아있겠나”라고 했다. (<조선일보> 관련 기사)
3. (천하람의 세 가지 주장) 위에 소개한 문제의 발언은 세 가지 주제로 나뉜다. 첫째, “충신과 역신이 뒤집”혔다고 말하면서 구체적인 실명은 거론하지 않았으나, 문맥으로 보아 “충신”은 이순신이요 “역신”은 원균이라는 흑백논리를 구사한 것이 명백하다. 둘째, “조선시대에도 윤핵관”이 있었다면서 원균을 바로 그런 인물이라고 규정하였다. 끝으로, “원균에게 (수군을) 맡겼을 때 과연 12척의 배라도 남아있겠나”라며 원 장군을 모독하고 폄하하였다. 물론 이 세 가지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른 것으로, 충신인 원 장군에 대한 모독이자 한국역사의 왜곡으로 그 해독이 심각하다.
4. (천하람의 첫 번째 주장에 대한 반박) 이제 천하람이 원균을 “역신”, 즉 반역하는 신하라고 말한 점을 비판하겠다. 사전에서는 ‘역신’을 정의하기를, 임금에 반역(叛逆)하는 신하(臣下)라고 한다. 원균 장군이 과연 언제 어떠한 반역행위를 하였는가? 역사적 증거가 하나도 없는 허망한 주장인데, 천하람은 공적인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함부로 하여도 되는지 되묻고 싶다.
4.1 (왕조실록이 전하는 원균의 모습) 역사적 기록을 자세히 읽어보면 원균 장군은 정직하고, 성실하며, 국가를 위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컸던 인물이다. 몇 가지 기록을 구체적으로 읽어보겠다.
“조인득(趙仁得)이 아뢰기를, ‘소신(小臣, 조인득)이 일찍이 종성(鍾城, 함경도 종성)에서 그(원균)를 보니, 비록 만군(萬軍, 많은 군사)이 앞에 있다 하더라도 횡돌(橫突, 뚫고 나감)하려는 의지가 있었고, 행군(行軍, 군사지휘)도 매우 박실(朴實, 검소하고 착실함)하였습니다. 탐탁(貪濁, 탐욕스럼고 부정함)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조선왕조실록>>, 선조 29년 10월 21일 갑신)
“김응남이 아뢰기를, ‘이순신은 쓸 만한 장수입니다. 원균(元均)으로 말하면 (지나치게 고집스럽다는) 병폐가 있기는 하나 몸가짐이 청백하고 용력(勇力)으로 선전(善戰)하는 점도 있습니다.”(<<조선왕조실록>>, 선조 29년 6월 26일 임술)
“원균(元均)과 같은 사람은 성질이 매우 거세어서 상사(上司)와 문이(文移)하고 절제(節制)하는 사이에 반드시 서로 다투기는 합니다만 전투에 임해서는 제법 기용할 만하다고 합니다.”(<<조선왕조실록>>, 선조 29년 10월 21일 갑신 – 이원익의 주장)
류성룡: “(원균이)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깊습니다. (청주의) 상당 산성(上黨山城)을 쌓을 때, 원균은 토실(土室)을 만들어 놓고 몸소 성 쌓는 것을 감독하였다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1월 27일 무오)
“원균은 전에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로 있으면서 전쟁터에 나갔을 때, 사람들이 달려가지 않으면 칼로 그들을 쳤습니다. 그리하여 모두 원균 수사(元均水使)는 미련하다고 했지만, 그는 일에 임해선 강직했기 때문에 이순신을 (한양으로) 압송한 후 그를 임명하여 보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4년 1월 17일 병진)
“상(선조)이 말하기를, 원균(元均)이 전쟁에서 패한 후로 사람들이 그를 헐뜯고 있으나 나는 원균 같은 자는 용감하고 슬기로운 자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누가 한 가지 일을 잘 하면 모두 칭찬을 하고 한 가지 일에 실패하면 모두 비난한다. 원래 영웅(英雄)은 성패(成敗)를 가지고 논할 수 없다.” ( <<조선왕조실록>>, 선조 34년 1월 17일 병진)
4.2 (원균과 이순신의 관계) 이순신의 실수로 원균과의 관계가 나빠진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도 원균은 이순신을 모략한 적이 없다. 역시 이 점에 관한 사실을 확인해보겠다.
“임진년에 이순신이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로서 전함을 거느리고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과 함께 거제도(巨濟島) 앞바다에서 왜적과 싸워 크게 쳐부수고 왜적의 배 50여 척을 포획하여 전란(戰亂) 이래 제일의 공을 세웠었다. 그러나 그때 계책을 마련하여 먼저 (적선에) 올라갔던 것은 모두 원균의 솜씨에서 나온 것이고, 이순신은 다만 달려와서 구원했을 뿐이었다.
크게 승전한 뒤에 원균이 행조(行朝)에 치보(馳報)하려고 하자, 이순신이 속이기를 ‘공(公)과 협력하여 일을 한다면 왜놈들은 섬멸하고 말고 할 것도 못되는데 이러한 소소한 승전을 어찌 조정에 치계(馳啓)할 필요가 있겠는가. 내가 다른 도(道)에서 급작스럽게 구원하러 왔기에 병기를 갖추지 못했으니, 왜적에게서 노획한 것을 써야 하겠다.’ 하니, 원균이 그대로 따랐다.
그러고는 이순신은 비밀히 사람을 시켜 노획한 병기와 왜적의 배에 실려있던 금병(金屛)·금선(金扇) 등의 물건을 가지고 가 행조에 치계하도록 하여 과시하였으므로 전공(戰功)이 모두 그 자신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이때 행조(피난중의 조정)는 한창 다급하여서 치보를 받고 크게 기뻐하여 이순신을 통제사로 제수하고, 원균에게는 이순신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원균이 이 때문에 크게 화가 나 드디어 서로 협조하지 않았다.”(<<조선왕조실록>>, 선조 36년 4월 21일 정미 – 사관의 말)
“처음에 원균(元均)이 이순신에게 구원병을 청하여 적을 물리치고 연명(聯名)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다. 이에 순신이 말하기를 ‘천천히 합시다.’ 하고는 밤에 스스로 연유를 갖춰 장계를 올리면서 원균이 군사를 잃어 의지할 데가 없었던 것과 적을 공격함에 있어 공로가 없다는 상황을 모두 진술하였으므로, 원균이 듣고 대단히 유감스럽게 여겼다. 이로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공을 아뢰었는데 두 사람의 틈이 생긴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6월 1일 기축 – 사관의 말)
“김응남이 아뢰기를, ‘... 당초 수군이 승전했을 때 원균은 스스로 공이 많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순신은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선거이(宣居怡)가 힘써 거사하기를 주장하였습니다. 이순신의 공이 매우 크지도 않은데 조정에서 이순신을 원균의 윗자리에 올려놓았기 때문에 원균이 불만을 품고 서로 협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하고
정곤수(鄭崐壽)는 아뢰기를, ‘정운(鄭運)이 말하기를 장수(이순신)가 만일 (도우러) 가지 않는다면 전라도는 필시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협박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부득이 가서 격파하였다 합니다.’ 라고 하니,
상(선조)이 이르기를, ‘순신이 왜적을 포획한 공은 가장 많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곤수가 아뢰기를, ‘순신의 부하 중에는 당상관에 오른 자가 많은데, 원균의 부하 중에 우치적(禹致績)이나 이운룡(李雲龍) 같은 자는 그 전공이 매우 많은데도 그에 대한 상은 도리어 다른 사람만도 못하기 때문에 서로 분해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균이 하는 일을 보니, 가장 가상히 여길 만하다. 내가 저번에 남방에서 올라온 사람에게 원균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습증(濕症, 습도가 높은 데서 일함으로 얻은 병)에 걸린 몸으로 장기간 해상에 있으나 일을 싫어하는 생각이 없고 죽기를 각오하였다고 한다. 그의 뜻이 가상하다.
부하 중에 만일 공이 많은데 상을 받지 못한 자가 있다면 보통 사람의 정리로 보아도 박대한 것 같으니 그는 반드시 불만스러운 뜻이 있을 것이다. 당초에 어째서 그렇게 했는가? 과연 공이 많다면 지금 모두 상을 주어서 그의 마음을 위로하라.’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7년 11월 12일 병술)
“비변사가 아뢰기를, ‘원균(元均)의 관하에 있는 장관(將官) 우치적(禹致績)·이운룡(李雲龍) 등이 왜변이 일어난 초기부터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워서 왜장(倭將)이 탄 배를 고스란히 포획하고 전후 베어 죽인 수가 매우 많았으며, 먼저 적의 배에 올라가서 붙들려 간 우리나라 사람을 탈환하고 왜적을 사로잡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세운 공은 이와 같은데 아직까지 별다른 상전(賞典)을 받지 못하였으니, 앞으로 장사(將士)의 마음을 권장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대로 치계하도록 한 뒤에 다시 의논해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상이 따랐다.”(<<조선왕조실록>>, 선조 27년 12월 16일 기미)
4.3 (원균과 이순신을 대립시키는 것은 큰 잘못) 16세기 조선의 왕과 뜻있는 선비들은 이순신과 원균이 힘을 합쳐 나라를 구했다고 보았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이)순신이 원균과 함께 수군을 총동원하여 진격하였으나 적이 군사를 거두고 전투에 응하지 않고 높은 곳에 올라가 총을 쏘므로 수군이 육지로 오르지 못하고 빈 배 4백여 척만 태워버리고 퇴각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8월 1일 무자)
“원균(元均)과 이억기(李億祺)는 이순신(李舜臣)과 공이 같은 사람들이다. 품계를 높여 주고 글을 내려 아름다움을 포장하라.”(<<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 9월 1일 무오- 선조의 명령)
“이순신은 왜변 초에 병선(兵船)을 모아 적의 진로를 차단하여 참괵(斬馘, 적의 머리)을 바친 공로가 많았고, 원균의 경우는 당초 이순신과 협력하여 역시 적의 선봉을 꺾는 성과를 올렸으니, 이 두 사람의 충성과 공로는 모두 가상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7년 11월 28일 임인)
5. (천하람의 둘째 주장에 대한 반박) 원균은 과연 ‘윤핵관’인가, 하는 주장도 따져보겠다. 오늘날 일부에서 사용하는 ‘윤핵관’이란 표현은, 대통령 '윤석열의 핵심 관계자'를 가리킨다. 핵심 관계자는 대통령의 최측근을 가리킨다. 그럼 원균 장군은 선조의 최측근이었는가? 역사적 사실과는 동떨어진 억지 주장이다.
핵심 관계자라는 억측과는 달리, 사실 원균은 선조와 일면식도 없었다. 심지어 서울에서 단 하루라도 벼슬한 적이 없었다. 다음은 선조의 말이다.
“원균을 내가 (얼굴도) 보지는 못했으나, 당초 임진년에 이순신(李舜臣)과 마음을 함께하여 적을 칠 때 싸움이 벌어지면 반드시 앞장을 섰었으니, 그가 용감히 싸웠던 것을 알 수 있다.”(<<조선왕조실록>>, 선조 34년 1월 17일 병진)
왜란이 한창이던 시기에 조정의 핵심 관계자라면 첫째가 영의정 류성룡, 둘째가 우의정 이원익이었다. 그밖에는 왕의 신임이 때로 두터웠던 이산해, 정탁 등이었다. 이들 가운데서 그나마 원균 장군과 뜻이 통한 것은 이산해 정도였고, 나머지는 모두 이순신의 정치적 배경이 되었던 인물이었다. 특히 영의정 류성룡은 이순신과 인연이 깊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든든한 정치적 배경이 되어주었다. 엄격히 말해, 그 시대에 정치군인이 있었다면 단연 이순신이었다. 그에 비해 원균은 정치적 후원이 미약하였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원균을 이순신의 후임 “통제사”로 삼았다. 이것은 조정의 공론이 있어서였다. 그 점을 입증하는 역사적 기록을 소개한다.
좌의정 김응남: “수군으로서 원균만한 사람이 없으니, 이제는 (그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1월 27일 무오)
“상(선조)이 이르기를, 이억기(李億祺)는 내가 일찍이 본 적이 있는데, 쓸 만한 사람이다라고 하니, 이정형(李廷馨)이 아뢰기를, ‘원균만 못합니다.’하였다.(<<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1월 27일 무오)
6. (천하람의 셋째 주장에 대한 반박) 천하람에 따르면 원균은 우리 군사를 전멸시킨 무능하고 비겁한, 형편없는 졸장(拙將)이라는 것인데 과연 사실이었을까. 그 문제도 따져보아야겠다.
원균은 용감한 장수로 돌격전에 능하였다. 비겁한 장수가 아니라 가장 용맹스럽고, 공이 많은 장수였다. 이에 관해 많은 역사적 기록이 있으나, 지면 관계상 몇 가지만 간단히 열거한다.
“원균이 (이)운룡과 (우)치적을 선봉으로 삼고 옥포에 이르렀는데, 왜선 30척을 만나 진격하여 대파하니 남은 적이 육지로 올라가 도망하였다. 이에 그들의 배를 모두 불태우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노량진(鷺梁津)에서 싸워 적선 13척을 불태우니 적이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조선왕조실록-선조수정>> 선조 25년 5월 1일 경신)
“남쪽 변방을 침범한 왜적은 수사(水使) 원균(元均)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서 힘을 합해 잡았습니다.”(1592년 6월 18일 이전의 전투 성과를 기록한 것. <<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 6월 28일 병진)
“전라우도 수사(全羅右道水使) 이억기(李億祺)가 좌수사(左水使) 이순신(李舜臣),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과 협동하여 적선 39척을 쳐부쉈습니다.”(<<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 7월 9일 병인)
“원균(元均)이 먼저의 승리에 자신하여 곧장 대적하여 격파하려 하였다.”(<<조선왕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7월 1일 무오)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이 전후 누차에 걸쳐 병기(兵器)를 올렸는데 이번에 또 보내온 크고 작은 조총(鳥銃)이 70여 자루에 이르고 있으니, 이것만 보아도 그의 전공(戰功)을 알 수 있어 매우 가상한 일이다. 그것을 가지고 올라온 원사웅(元士雄)에게 직을 제수하라." <<조선왕조실록>>, 선조 27년(1594) 4월 23일(신미)
“임진년에 수전(水戰, 바다에서 싸움)한 장수 중에서 공이 있는 자는 손꼽아 셀 수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원균이 가장 우직하여 제 몸을 잊고 용맹을 떨치며 죽음을 피하지 않아서 공적이 매우 뚜렷합니다. 또 수전에 익숙하여 적을 보는 대로 나아가 이기기만 하고 지는 일이 없으므로 군졸이 믿어서 두려워하지 않는데, 이제 주사를 버리고 기보(騎步)를 거느리니, 병사(兵使)가 수사(水使)보다 높기는 하나, 이것은 옛사람이 이른바, 그 잘하는 것을 버려두고 그 재주를 못 쓰도록 한다는 것입니다.”(<<조선왕조실록>>, 선조 29년(1596) 11월 9일 신축)
“한산(閑山) 싸움에서 패전한 것으로 다투어 그에게 허물을 돌리지만,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조정이 그를 빨리 들어가도록 재촉했기 때문이다.”(<<조선왕조실록>>, 선조 34년 1월 17일 병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는 원균이 통제사가 되었는데, 왜적의 기세를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한산도(閑山島)로 물러나 지키고만 있고 싸우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 매우 급박하게 싸움을 독려하여 원수(元帥)에게 명하여 장벌(杖罰, 곤장을 침)하게 하였다. 이에 원균이 마지못하여 (왜적과) 싸우다가 패전하여 죽었다.”(<<조선왕조실록>>, 선조 36년 4월 21일 정미 – 사관의 말)
“주위 제장(諸將)이 모두 이순신의 막하(幕下)여서 서로 의논하지 않아 원균의 세력이 고립되었습니다. 그때 한효순(韓孝純)이 체찰사(體察使)에게 보고하여 조치하려고 했는데 미처 못하고 원균이 패전한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4년 1월 17일 병진 – 이덕형의 말)
“제장들의 말은 비록 믿을 수 없으나 격군(格軍)의 말은 믿을 만도 합니다. 부산(釜山)에 가서 공격할 때 우리나라 주사(수군) 90척이 곧바로 적을 행해 돌진하자 부지기수의 적선이 바다에 가득히 떠오니, 우리나라의 수효가 적은 주사로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어 한산을 향해 후퇴하는데 격군들은 밤낮없이 노질하여 춘원포(春原浦)에 닿았습니다. 적군들이 밤을 이용하여 정면으로 공격해 오는 바람에 힘이 지친 나머지 갑자기 당하는 변이어서 싸움도 하지 못하고 물이 마르듯이 다 도망쳐 한 명도 전사자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4년 1월 17일 병진 – 이덕형의 말)
“원균이 이미 싸움에 패하여 죽었으니 그 휘하들을 비록 다 죽이지는 못할지라도 사실을 밝혀 군율에 의하여 처리해야 옳다. 지금 원균의 후인(後人)으로서 고관 대작(高官大爵)이 된 자가 많은데도 그 싸움에 패한 죄를 유독 원균에만 돌린다면 원균의 본심이 후세에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구천에 있는 그의 넋도 어찌 자기 죄를 승복하여 억울하게 여김이 없겠는가.”(<<조선왕조실록>>, 선조 34년 1월 17일 병진 – 선조의 말)
7. (천하람은 공개 사과할 것) 이상에서 논박한 것처럼 천하람의 세 가지 주장은 어느 것 하나도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역사에 무지한 천하람을 깊이 나무라고 싶지는 않으나, 그는 공당(公黨)의 요직한 출마한 인사로서 크게 뉘우쳐야 한다. 시민에게 자신의 비뚤어진 역사 인식을 강요하려고 한 점을 스스로 깨닫고, 공개적으로 사과하기를 촉구한다. 평생 조국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순국하신 원균 장군의 명예를 모독한 죄는 용서받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지만, 그가 개과천선(改過遷善)하여 국가와 사회에 걱정을 끼치지 않는 올바른 정치가가 되기를 바란다.
2023년 2월 16일
사학자, 전 서강대 교수 백승종
원주원씨 원성백계 종친회장 원종관
원주원씨 시중공계 종친회장 원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