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44
11월14일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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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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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ZVR8MMPkJws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8984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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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루 하루를 꽃밭으로>
《인생수업》(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ㆍ데이비드 케슬러 공저, 도서출판 이레)이란 책을 읽고 있습니다.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 엘리자베스와 그 제자 데이비드 케슬러는 죽음 직전의 사람들 수백 명을 인터뷰했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이 남긴 유언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살아있음을 가장 큰 축복으로 여겨라, 하루하루를 꽃밭으로 장식하라, 매일 매일을 충만한 기쁨으로 엮어가라'였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은 '삶을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말았어야 했다' 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천국을 향한 순례자들이며, 잠시 지나가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끽하기 위해 여기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우리의 눈이 찬란하지 않다면, 어떻게 이 아름다운 세상을 반영할 수 있겠냐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십시오." "삶에서 가장 큰 상실은 죽음이 아닙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 하십시오."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후회 없는 삶을 살았으면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을 바라보던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말했을까요. "나는 은하수로 춤추러 갈 거예요. 그곳에서 노래하며 춤추며 놀거예요."
2004년 8월, 78살 나이로 별세한 저자 엘리자베스의 장례식 때 일입니다. 두 자녀가 그의 관 앞에서 작은 상자를 열었습니다. 상자 안에서는 한 마리의 호랑나비가 날아올랐습니다.
동시에 조문객들이 미리 받은 종이봉투에서도 수많은 나비들이 일제히 날개를 펄럭이며 파란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위령성월에 걸맞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날과 그 시간'에 펼쳐질 광경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시는 한편, 그날과 그 시간은 언제 올지 모르니 항상 깨어 준비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의 마지막 날, 우리의 죽음이 어쩌면 한 개인의 종말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날과 그 시간을 잘 준비한 우리에게 있어 임종의 순간은 두려움의 순간이 아니라 축복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 영혼은 갓 허물을 벗은 한마리 어여쁜 나비가 되어 자비로운 하느님 품으로 훨훨 날아오르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그렇게 두려워하는 죽음은 다름 아닌 영원한 아버지의 집으로 건너가는 생명의 다리입니다. 그 순간은 우리의 인간적 나약함과 그로 인해 빚어졌던 그 숱한 과오들, 그 많은 죄악들이 주님 사랑 안에 말끔히 씻어지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더 이상 방황도, 더 이상 고통도, 더 이상 눈물도 없게 되는 그 순간, 갖은 속박에서 훌훌 털고 일어선 우리는 꿈에 그리던 대 자유를 얻어 영원한 아버지 나라로 훨훨 날아가게 될 것입니다.
요즘 며느님들이 시어머님들께 주로 많이 한다는 거짓말 '베스트 5'가 있더군요.
5위: "저도 어머님 같은 시어머니가 될래요."
4위: "전화 드렸는데 안 계시더라구요."
3위: "어머님이 한 음식이 제일 맛있어요."
2위: "용돈 적게 드려 항상 죄송해요."
1위: "어머님, 벌써 가시게요? 한 며칠 더 계시다 가세요."
반면에 시어머님들은 이런 거짓말을 많이 하신답니다.
"내가 얼른 죽어야지!"
말은 그렇게들 하시지만 정말 두려운 것이 죽음입니다. 일생일대의 가장 큰 과제가 죽음입니다. 뿐만 아니라 정녕 견디기 힘든 고통이기에, 또한 가장 큰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기에 사람들은 기를 쓰고 죽음을 피해 다닙니다.
그러나 죽음처럼 공평한 것이 또 없습니다. 그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부자건 거지건, 최고 권력자건 서민이건 대상을 가리지 않고 찾아옵니다. 피하고 싶더라도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손님이 죽음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우리는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매일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잘 있어라'는 말 한마디도 남기지 못한 채 순식간에 이 세상을 떠나가지만, 그 죽음이 적어도 내게는 아직 멀었으려니, 내게는 해당되지 않으려니,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때로 죽음이 내가 매일 출입하는 문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음에도, 전혀 생각하지도, 준비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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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cGQkLiNpv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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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멸망: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때>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으로 향하는 이때 우리는 세상 종말과 심판의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을 복음으로 듣습니다. 많은 학자는 이대로 가면 지구는 100년 이내에 멸망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 종교가 망하고, 한 나라가 망하고, 온 인류가 망하더라도 우리는 구원되어야 합니다. 커다란 흐름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흐름대로 가면 안 됩니다.
망하는데도 법칙이 있는데 그 법칙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그리고 이런 종말에 관한 것은 우리 각자의 세대에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상기시키시기 위해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 멸망의 법칙에 해당하지 않도록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법칙을 말씀하셨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무렵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해와 달과 별이 사라지면 인간에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관계가 단절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태양이 어두워졌습니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한 아홉 번째 재앙이 어둠이었습니다. 모두가 소경이 되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되면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면 우리는 사람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안 본다고 여기고 하고 싶은 대로 하므로 죄를 짓습니다. 그러다 세상에 자기 혼자 남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엔 언제나 죄를 짓고 주님을 잃어 이렇게 관계의 단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외로움에 지쳐 자살을 시도합니다. 지구가 멸망하여 자기가 유일한 생존자라 믿습니다. 그의 꿈은 누군가와 접촉해서 자신도 인간임을 느끼고 싶은 것뿐입니다. 자살 직전에 라디오 주파수에 여자 목소리가 들립니다. 힘든 몸을 이끌고 그 주파수를 따라갑니다. 아파트 단지가 나옵니다. 몇 시간 동안 모든 방을 뒤집니다. 그러나 아무도 없습니다. 지쳐 쓰러지기 직전 마지막 한 방을 뒤졌을 때 여자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죽어있었고 카세트테이프가 무한 재생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절망에 빠져 그 여자 옆에 잠이 듭니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환시까지 봅니다. 아기가 자기 품에 안겨 있습니다. 자신도 미쳐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심지어 어떤 여인까지 다시 나타납니다. 죽은 여인의 환영이라 생각한 그 남자는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도망칩니다. 그제야 정신이 든 남자는 방금 그 여인은 사람이었음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그 오랜 시간 말을 하지 않아 어떻게 말해야 하는 줄도 모른 채 그 여자를 쫓아갑니다. 여자는 자신을 죽이려고 오는 줄 알고 그 남자에게 총을 쏩니다. 그렇게 그 남자는 죽어갑니다. 마지막 그 여자가 남자의 눈을 감겨줍니다. 남자는 그 접촉만으로도 행복하게 죽어갑니다.
‘FINITE’라는 단편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접촉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관계를 맺지 않으면 죽는 편이 낫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결국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인간이 살아있고 주위에 사람이 많다고 모두 서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살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똑같이 이웃과의 단절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영향력이 끊기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이 그 사람의 종말이 됩니다. 그렇게 되는 데는 다른 게 필요 없습니다. ‘삼구’(三仇)만 있으면 됩니다.
이것을 멸망의 법칙으로 하면 이렇습니다. 우선 돈을 섬겨야 합니다. 오늘 복음 이전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있어서는 안 될 곳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서 있는 것을 보거든 ─ 읽는 이는 알아들으라. ─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라.” 예수님께서는 채찍을 만들어 성전 안의 장사꾼들을 쫓으셨습니다.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성전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마음이 중심을 잡고 있다면 그것이 사람이건 종교이건 나라건, 세상이건 멸망의 단계를 밟기 시작한 것입니다. 솔로몬도 결국엔 돈에 집착하여 여러 나라 우상을 섬기고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육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다!’, 또는 ‘보아라, 저기 계시다!’ 하더라도 믿지 마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이들까지 속이려고 표징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이다.” 자기 내면에서 구원을 찾으려 하지 않고 외적인 데서 구원을 추구합니다. 당시 유다인들도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자기 내면엔 자아가 왕으로 있기에 외부에서 구원자를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다윗도 밧세바를 탐할 정도로 육적인 인간이 되어 아들에게까지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내면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은 육적인 인간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나오는 것이 세 번째 법칙입니다. 영적인 영향력이 떨어지니 폭력을 쓰는 것입니다. 부모든 자녀든 서로에게 자유를 빼앗는 폭력을 쓴다면 서로 멸망으로 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친교는 무력으로 할 수 없습니다. 사울은 자기 영향력을 지키기 위해 도전자로 보이는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폭력을 쓴다는 것은 이미 영향력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리비아에서 40년 넘게 독재를 했던 카다피는 국민의 총에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집안은 리비아의 모든 돈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할 정도로 사치스러웠습니다. 육체적인 타락은 이루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선글라스를 왜 끼느냐고 할 때 자신의 미래가 너무 밝아서 낀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그를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폭력을 쓸 수밖에 없었고 폭력으로 망했습니다. 그는 실제 너무 외로운 사람이었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삼구로부터 자유로웠던 분들은 어떻게 사셨을까요? 예수님은 무력을 쓰지 않으셨는데도 많은 이들이 따랐습니다. 마더 데레사도 마찬가지고 이태석 신부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력을 쓰지 않는데도 영향력이 컸습니다. 이분들은 멸망의 법칙과 반대로 갔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삼구는 타인과의 관계를 단절하여 세상에 살면서 혼자가 되는 고통을 겪게 만들고 그렇게 멸망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종말은 현재 우리 각자가 맞게 될 종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 중심에서 돈을 좋아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자신 안에서 주님과 사귈 줄 알기 위해 육체를 절제하며 겸손하여 누구의 자유도 강요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때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주십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외롭다, 외롭다 하다가 갑자기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신 것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저에게 영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외롭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제 주위에 친구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 같았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이웃과의 관계의 밑거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태양이신 것입니다.
삼구를 좇으며 있거나 말거나 한 사람, 오히려 사라졌으면 좋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영향력이 떨어지면, 나를 찾는 사람이 줄어들면, 나는 멸망으로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가 필요해서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멸망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사람의 기억에서 잊힐 때, 어쩌면 그것이 진짜 멸망일 것입니다. 내가 누구에게도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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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3,24-32: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오늘의 전례는 만물이 어떻게 마지막 날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밝혀줌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악에 대한 선의 승리,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 그리고 잠시 지나가는 시간에 대한 영원의 승리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역사를 외면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인간성을 완전하게 성장시킬 수 있도록 역사 속에 깊이 잠기는 것을 말한다. 다니엘서의 내용은 육신의 부활을 긍정하는 구약의 문헌 중의 하나이다(2마카 7,9 참조). 이제 인간은 마지막 때에 하느님을 자기 전 존재로서, 즉 육체를 가진 자로써 만나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마르코 13장 전체에 걸쳐서 하신 종말론적 담화이다. 오늘의 이 대목은 예수님의 종말론적 메시지를 “아들”(32절)이신 예수님께도 알려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신앙의 차원으로 확대해 실현하게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먼저 예루살렘이 당할 재난을 말씀하시고, 당신이 마지막 날에 심판자로 다시 오시리라고 하신다.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오는 것’”(26절)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하느님의 영광에 들어가시고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시며(마르 16,19) 마지막 날에 영원히 계속될 하느님 나라에 뽑힌 이들을 모으기 위해 다시 돌아오실 분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27절)라는 말은 히브리 사상에서 기다림에 대한 응답이다. 구약에서는 이것을 오직 이스라엘 12지파의 재결합만을 생각했지만(신명 30,4; 에제 34,12~; 이사 27,12-13; 43,5-6; 즈카 2,10; 8,7-8
참조), 여기서는 모든 믿는 이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다.(참조: 요한 11,52) 그러나 그러한 일들이 언제 일어날 것인지는 예수님 자신도 모른다고 하시며 알려주시고자 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라고 할 수 있으나 복음사가가 의도하는 것은 오셔야 할 그분은 어느 때나 어느 순간이나 오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잠시도 긴장을 풀지 말고 깨어있어야 하는 ‘기다림’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29절).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28절), 주님이 문 앞에 다가온 줄을(29절) 알 수 있는 표징들이 있다. 예루살렘의 종말은 그 동시대인들에게 표징이 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건이 종말의 예표일 수 있었고, 예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32절) 그러기에 항상 우리는 깨어있어야 한다.(마르 13,35-36 참조)
그러므로 종말론적 삶이란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일상 활동에서 이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온갖 사물과 이 세상을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더 합당한 요소가 되게 하고, 언제나 나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지금의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언제나 오실 수 있는 그분을 맞이하는데 떳떳하고 기쁘게 나아갈 수 있는 삶을 사는 삶을 말한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대해 계속 전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사제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영광스러운 사제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아버지 오른편에 계시면서 당신의 사제직을 수행하고 계시다. 즉 현재에도 실현되고 있는 사제직이다.
둘째는 종말론적 내용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이제 그분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판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히브 10,12-13).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때에 우리를 만나러 오실 때에는 심판관으로서의 모습이지만, 또한 우리에게 대사제이신 분이시다. 그래서 지금도 아버지 오른편에서 수행하고 계신 사제직 때문에 더욱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닥칠지 모르는 마지막 때를 잘 맞이하기 위해서도, 그때가 되어 여러 가지 어려운 때가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이 잃지 말아야 할 희망을 간직하고 이겨내고, 또 항상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깨어있는 삶은 우리를 더욱 자유롭게 해 줄 것이며 완성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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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그 무렵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마르 13,24-2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의 일에 관한 말씀입니다. ‘환난’은 이 말씀 앞에 있는 ‘종말 전의 재난들’을 가리킵니다.(마르 13,14-23)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라는 말씀은, 종말과 재림은 지구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주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1) 해와 달과 별들이 빛을 잃는다는 말을,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영광에 비하면 그것들의 빛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우주 전체를 압도한다는 것입니다.)
2)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떨어지거나 흔들린다는 말을, 종말의 날이 되면, 영원할 것만 같았던 우주 질서가 무너지게 될 것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하늘의 세력들’은 ‘별들’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라는 말과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라는 말은 같은 말이 반복된 것으로 해석됩니다.) 우주 질서가 무너진다는 것은, 그 우주 질서에 기반을 둔 인간의 과학도 무용지물이 된다는 뜻입니다. (물리학 법칙 같은 것들이 전부 다 소용없게 될 것입니다.)
3) 이 말을, ‘낡은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새 세상’이 온다는 것을 뜻하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묵시 21,1) 종말의 날이 되면 우주 전체가 새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3)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묵시 22,5)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주 전체를 통치하는 하느님으로서, 또 모든 사람을 심판하는 심판관으로서 재림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나자렛 출신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 모습만 보고 있지만, 그때에는 하느님이신 분의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것이다.”는 “모든 사람이 볼 것이다.”인데, 이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그날이 곧 심판의 날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루카 17,24)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심판을 받으면서 후회만 하게 될 것이고, 충실하게 준비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예수님이 곧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되고 믿게 될 것입니다. 안 믿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 믿은 것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3)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보는 순간 심판이 이루어지고, 금방 끝날 것입니다. 피하거나 숨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재림의 일차 목적은 ‘구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선택한 이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충실하게 응답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구원받을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택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라는 말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라는 뜻인데, 구원받을 자격을 갖추고도 억울하게 탈락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마르 13,28-31)
여기서 여름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추수철이, 즉 심판이 가까이 왔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종말 전의 재난들을(마르 13,14-23)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라는 말씀은,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떤 재난이 ‘종말 전의 재난’인지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종말과 심판에 관한 말씀들을 모두 종합하면,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지금 즉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고,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곧 ‘완성’될 것입니다. 각 개인의 인생을 생각하면,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인생은 죽음을 향해서 가는 ‘짧은 여행’이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여행입니다. 죽음 너머의 새 인생을 원한다면 미루지 말고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말씀은, 인류 전체의 공심판이든지 각 개인의 사심판이든지 간에 ‘주어진 시간’이 별로 많지 않다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종말, 재림, 심판이 조만간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 13,32)
이 말씀은, ‘지금’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날과 시간을 미리 계산하려고 하는 것은, 회개를 그때까지 미루겠다는 속셈으로 하는 짓인데, 인간은 그 날과 시간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 날을 미리 알려 주시지 않는 것은, 회개하기를 바라시고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또 해야 하는 일은 회개하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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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수를 배울 때는 수가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수학을 배우면서 수가 점차 어려워졌습니다. 수에는 유리수와 무리수가 있습니다. 유리수에는 음의 정수, 0, 양의 정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집합으로 표현하면 수라는 전체집합이 있고, 그 안에 부분집합과 교집합이 있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있습니다. 어린이와 어른이 있습니다. 동양인과 서양인이 있습니다. 이것도 집합으로 표현하면 사람이라는 전체집합이 있고, 그 안에 부분집합과 교집합이 있습니다. 시간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있습니다. 이것도 집합으로 표현하면 시간이라는 전체집합이 있고 그 안에 부분집합과 교집합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우리는 유추해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3차원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생로병사’의 ‘틀’에 머물며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세상에서 문화, 역사, 문명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것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입니다. 대부분의 생명은 ‘번식과 생존’이라는 ‘틀’에 머물며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또 다른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윤회’를 이야기합니다. 현재의 삶의 결과에 따라서 또 다른 생명으로 태어난다는 믿음입니다. 선을 행하고, 덕을 쌓으면 좋은 환경에서 아름다운 생명으로 태어난다고 믿습니다. 악을 행하고, 욕심을 채우면 나쁜 환경에서 추한 생명으로 태어난다고 믿습니다. 생로병사의 틀을 벗어버리고 깨달음을 얻으면 윤회에서 벗어나 극락에 이른다고 믿습니다. 이런 윤회의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윤회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의 전례는 2가지의 축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었다는 주님의 탄생입니다. 태초부터 있었던 하느님의 아들이 죄, 죽음, 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2,000년 전에 이 세상으로 오셨다는 믿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죽었던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세례를 받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면 우리들 또한 부활 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교회는 우리의 삶이 윤회의 과정을 거친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한번이지만 그 한 번의 삶을 충실하게 살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부활한 사람을 눈으로 보지는 못하였지만, 신앙은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믿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순교자들의 죽음도, 우리의 신앙도 헛된 것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3가지 차원의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시간과 공간에 머물며 살아가는 현실의 세상입니다. 다른 하나는 죽어서 육체는 땅에 묻히지만 삶의 결과에 따라서 가는 세상입니다. 교회는 그런 세상을 지옥, 연옥, 천국으로 이야기합니다. 지옥, 연옥, 천국은 장소의 개념일 수도 있지만 상태의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곳은 이 곳에서도 이미 천국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잃어버린,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지 않는 곳은 이곳에서도 이미 지옥입니다. 두려움과 근심 때문에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고, 다시 멀어진다면 그곳은 아마 연옥일 것입니다. 복자 황일광 시몬은 백정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이 세상에서 천국을 체험했다고 했습니다. 교우들이 천민이었던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 그러나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 무궁히 빛나리라.” 어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사람이 영원한 치욕을 받을까요?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분명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제는 날마다 서서 같은 제물을 거듭 바치며 직무를 수행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결코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는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 나라를 볼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선택받는 사람과 버림받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구원 받는 길은 특별한 수행을 해야 하고, 많은 공부를 해야 하고, 세상의 삶에 성공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글을 모르는 사람도, 세상의 지혜를 모르는 사람도, 특별한 수행을 하지 않은 사람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진리의 길은, 깨달음의 길은 구원의 길은 아주 평범한 곳에 밝혀 놓으셨다고 합니다. 하늘의 별, 구름, 들의 꽃,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 평범한 일상의 삶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하느님의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을 변화 시키는 것은 어렵지만, 내가 변하는 만큼 세상은 그만큼은 변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구원의 문제도 그리 큰 숙제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우리들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면 세상은 그만큼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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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채홍락 시몬 신부님]
<이해할 수 없다면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가? 가난을 이해하지 못하면 가난한 사람을 사랑할 수 없고, 가난한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면, 하느님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 또한 불가능할 것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잉태와 출생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명령이자 사명이며 요구이자 결단입니다. 인간은 도전받지 않고서 진정한 자신이 되지 못합니다. 자유를 행사하여 인간이 되는 것, 그것이 우리 존재의 법칙입니다. 자유로이 인간이 되는 이 과정에는 유혹과 시련이 따릅니다.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잘못될 위험 때문에 인간은 인간 본성의 잠재적 반역자로 살아갑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가난한 자’가 되셨다는 것, 하느님 앞에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초월적인 하느님의 총체적 요구에 직면하여 인간 정신의 빈곤을 선언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사탄은 이러한 자기 포기, 이 철저한 ‘가난’을 방해하려 합니다. 사탄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성 안에 있는 하느님의 무력함의 힘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탄의 유혹은 하느님의 자기 비움에 대한 공격이며, 영적 풍요에 대한 거부의 유혹입니다.
하여 인간을 향해 ‘너는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라는 것이 사탄의 슬로건입니다. 그것은 사악한 자가 우리에게 주어진 인간성에 대한 진리를 거부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며, 무수한 변형으로 우리 앞에 제시하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비참함 속에 몸을 담그시고, 인간의 길을 끝까지 따라가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으로서 가난이라는 어두운 신비에서 벗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완전한 포기 안에서 예수는 자신의 존재 깊은 곳에서 일어난 일을 행동으로 완성하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인성을 고백하고 받아들이셨으며, 우리의 몫을 짊어지고 견디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 (필리피서 2장 6절-7절)
그분은 인간이 타고난 영적 빈곤에 대해 “예”라고 말하기 위해 온 마음을 다해 애쓰며 우리와 함께하셨습니다. 그렇게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전적인 헌신의 유산, 곧 우리의 빈곤에 대한 하느님의 신실하심의 증거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영적 가난의 성사이며, 죄 많은 세상을 향한 참 인간의 성사입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자신의 인간성에 충실했고, 완전한 순종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표시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참 인간이 되는 방법을 봅니다. 그에게서 인간의 상상할 수 없는 높이와 깊이를 봅니다. 그에게서 인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타고난 가난을 예리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그분의 아빠(Abba), 아버지에 대한 신비한 의지의 현현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처럼 사람이 된다는 것은 영의 가난을 실천하는 것이며, 우리의 타고난 가난을 의지의 순종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만남이 참되려면 영적 가난에서 영감을 얻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접근하게 하려면 마음을 열어 그 사람의 독특한 성격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난의 다른 이름은 비움입니다. 우리 자신이비워질 때 하느님의 공간이 열리며, 타자에 대한 연민의 공간도 열립니다.
우리는 비움을 통해서만 자신을 개방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으며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삶은 존재의 따뜻함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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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주효상 알렉산델 신부님]
<도시락 하나의 미소>
매번 느끼는 생각이지만, 전례력의 마지막으로 나아가는 이 시기에는 많은 것을 돌아보게 만드는 말씀들을 만나는 것 같습니다. 이번 한 주간의 복음만 돌아보더라도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시는 주님께서 종말에 대한 비유들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 또한 하늘의 징조보다 시대의 표징을 분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가끔 한국 방송을 보면 벌써 따뜻한 패딩 광고들을 보게 됩니다. 한국은 벌써 기온이 많이 떨어졌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제가 살아가는 태국 파타야에는 여전히 찌는 듯한 더위에 시원한 커피 한 잔이 생각나는 나날들입니다.
하지만 제가 처음 이곳 사목지에 부임했을 때와 다른 점들이 있습니다. 바로 코로나로 인한 경제 상황이 악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네온사인들이 불빛을 잃었고, 상점들은 문을 닫았으며 길거리엔 노숙자들이 넘쳐나기 시작합니다. 큰 번화가들이 이제는 슬럼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루는 차를 타고 해변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한곳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면서 이런 시국에 많은 이들이 모여서 무얼 하나 지켜보았습니다. 바로 한 끼 식사를 제공받기 위한 무료급식을 기다리는 줄들이었습니다. 참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간절한 맘에 모여 있는 것인데, 그것을 모르는 나는 위험한 시기에 많은 이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며 속으로 투덜거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나서기로 했습니다. 많은 것은 아니지만 주변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한 주에 한 번이라도 그들을 위해서 무료급식을 하기로 했습니다. 본당 교우들과 멀리 한국에서 온 도움들로 좋은 도시락을 만들었고, 급식을 받아 가면서 행복해하는 이들의 모습에 현지의 지역 경찰들도 도움을 주며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저에겐 마음속 미안함을 씻어내면서, 그들의 미소에 저 또한 행복함을 느꼈습니다.
시대의 징표라는 것, 크게 거창하게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 곁에, 우리의 삶에 함께 존재하는 것이 시대의 징표입니다.
특별히 이번 주간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제정하신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복음 속 주님의 말씀을 본받아 교황님께서도 직접 우리에게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주님의 모범과 교황님의 모범처럼, 우리 또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러한 시대의 징표를 마주하고 그것들을 외면하지 않으며 직접 실천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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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강우 클레멘스 신부님]
<종말과 준비된 삶>
전례력으로 보았을 때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계십니다. 묵시문학적인 표현을 빌려서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올 것이라고 합니다.(마르코 13장 26절 참조)
예수님께서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새 세상, 더 나은 세상이 도래하리라는 것을 암시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정작 그 날과 시간에 대해 말씀하지는 않습니다. 그날이 언제일지 모르므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늘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마르코 13장 32절-33절 참조) 개인적인 신앙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경우를 보게 되더라도 예측불허의 죽음, 곧 종말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의 성장처럼 그 끝을 예감하고 준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준비는 그 결과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준비를 잘 해야 합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얼마나 예측불허의 상황이 많습니까?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방학 기간 내내 놀다가 개학을 앞두고 숙제를 꼬박꼬박 열심히 잘한 경우에는 당당할 수 있었지만, 만일 그렇지 못한 경우라면 허둥대면서 벼락치기로 고생을 하면서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또 다른 형태의 삶을 생각해보면, 갑자기 닥친 어려움에 평소 저축이라도 열심히 한 사람의 경우라면 담담해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라면속을 태우고 발을 동동 구를 것은 뻔한 이치이기도 합니다.
평소에 잘 해둔 것은 언젠가 급한 경우가 닥칠 때 그 빛을 발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말에 대한 두려움에 앞서 잘 준비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착실히 준비된 삶은 그 끝이 명쾌하고 깨끗한 삶이 됩니다. 깨어 있고 준비된 삶이 된다면, 밀린 숙제 없이 제날짜에 깨끗하게 정리해 나간 그런 삶이 된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날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닥치더라도 상관치 않고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없는 마음으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성실한 신앙생활 해나가도록 합시다! 깨어 있고 준비된 삶이 된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날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닥치더라도 상관치 않고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없는 마음으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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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낙엽이 우수수 지는 11월의 늦가을은 그 자체로 우리의 스승입니다. 무화과나무 한 그루도 그 자체로 우리의 스승입니다. 싹이 돋고, 꽃이 피고, 잎이 지고, 열매를 맺는 이 모든 것이 곧 하느님의 현존을 알리는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전례시기>의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종말”에 대한 ‘징표’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징표’는 미래의 세상 종말에 대한 지식을 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종말에 대한 예고와 더불어, 구약에서 처음으로 죽은 자에 대한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장면입니다. 곧 재앙의 시기와 더불어 박해받는 자의 구원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말은 재앙의 때이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받으리라는 위로가 약속됩니다. 이처럼, 종말사상은 부활과 직결됩니다. 그래서 재앙은 단순히 미래를 앗아가는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와 용기가 됩니다.
<제2독서>는 구약의 사제직을 초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사제직에 대한 말씀입니다. 구약의 사제들이 “날마다 서서 같은 제물을 거듭 바치며 직무를 수행한데”(히브 10,11) 반해, 신약의 사제 예수님은 “단 한 번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 쪽에 앉으셨음”(히브 10,12)을 말해줍니다. 곧 구약의 사제의 제물이 반복해서 봉헌되어도 결코 그 죄를 사할 수는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희생 제물은 모든 죄가 용서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말합니다.
“이미 죄가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제물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히브 10,18)
오늘 <복음>에서는 종말에 대한 표상을 이렇게 드러내줍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발이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린다.”(마르 13,24-25)
이러한 종말론적인 표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파괴될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새롭게 창조될 것이라는 약속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떼이야르 드 샤르뎅이 지적한 대로, 세상의 종말은 집단적 죽음이나 멸망, 결별이 아니라, 하나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인간의 종말은 분열과 죽음이 아니라, 일치된 사고를 통해 시간과 공간 밖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탄생이 될 것입니다. 곧 종말은 대재앙이 아니라, 정신적 역전이 될 것입니다. 사실상, 그것은 물질과 역사의 모든 조건을 초월하는 자유, 곧 하느님 안에서의 희열일 될 것입니다. 정신은 역전하고 다른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며, 세계는 순간적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에서 그리고 있는 종말론적인 표현들을 우주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신학적인 표현으로 알아듣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느님 나라는 시작되었고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종말, 곧 완성의 때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언제가 먼 미래에 오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오셨습니다. 사실 지금, “주님은 오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내년이 아니라 올해, 우리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가 아니라 그 비참함 한가운데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으로 주님은 오십니다.”(헨리 나웬).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삶 안에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들어옵니다. 곧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질 때, 그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완성과 영광은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때”에 결정적으로는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무화과나무에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알 수 있듯이, 세상의 사건들을 통해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을 깨달아야”(마르 13,29) 할 일입니다. 곧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할 일입니다.
시대의 징표를 깨닫는다는 것은 단순히 비가 올지 안 올지, 날씨가 추울지 더울지를 감지해내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를 통해 하느님의 마음을 읽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그렇게 마련해주신 하느님의 마음을 읽을 때 비로소 시대의 징표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대의 징표를 깨달을 때, ‘하느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모든 사건과 만물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부어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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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마르 13,28)
주님!
그날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가 아니라 그 비참함 한가운데로 찾아옵니다.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다른 곳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바로 이곳 입니다.
오늘의 결별에서 새롭게 변형되게 하소서.
오늘의 죽음에서 새롭게 탄생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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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마르13,32)
<두 번째 오심을 잘 준비하자!>
지금 우리의 때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끝자락에 와 있다보니, 복음은 계속해서 종말에 관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인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말씀입니다.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는 그리스도의 재림은 최후의 심판이 내려지는 '세상 종말의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오셨을 때에는 악의 세력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두 번째 오실 때에는 결코 첫 번째처럼 그렇게 당하지 않고 강력한 힘으로 악의 세력을 처단하실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마르 13,31-32)
'그러니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21,36 참조)
"늘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다락방 안으로 들어가 철야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일까?
"늘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이 '나의 믿음과 기도가 죽지 않고 살아 있어야 한다.'는 의미, '행동하는 믿음과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오늘은 다섯 번째 맞이하는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은 마음과 육신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예수님의 친구였고, '그들이 바로 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5,31-46 참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너를 위한 희생제물이 됩시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나의 것을 내어놓는 희생제물이 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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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선택받은 이>
마르코 13,24-32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무화과나무의 교훈, 깨어 있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무렵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선택받은 이>
어둠에 가려진 빛을 보는 이
미움 가운데 사랑을 심는 이
가름 녹이는 이음을 사는 이
홀로가 아닌 함께 이루는 이
절망 속에서 희망 보듬는 이
죽임 거슬러 살림 돋우는 이
끝 너머 시작을 기다리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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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학생 때 어떤 교우분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학사님! 학사님은 늘 행복해 보여요. 그래서 학사님을 보면 기분이 좋아요. 앞으로도 쭉 행복하세요.” 당시 저는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신부의 길을 계속 갈 수 있겠냐는 불안감과 성소에 대한 의심으로 부정적 생각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저를 향해 행복해 보인다고 하니, 이분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 이분의 말씀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기에 그 자체로 행복해 보인 것입니다. 즉, ‘조명연’이라는 사람을 본 것이 아니라, 조명연이 함께 하는 주님을 보셨기에 제가 행복하게 보인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주님과 함께하기는 그 길이 쉽지 않지만, 그곳에 늘 행복이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대부분 행복하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적인 판단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판단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보다 하느님의 가치를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는 뜻보다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스스로는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분명 다른 이로부터 행복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행복의 길이었음을 조금의 시간이 흐르면 분명히 알 수 있으며 실제로 행복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이 끝나는 날 다시 오실 때의 상황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큰 환난에 이어서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라고 하시지요.
어떻게 보면 아주 무서운 말씀입니다. 두려움 속에 살라는 것일까요? 우리를 행복하지 않은 삶으로 이끌기 위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진짜 행복으로 우리를 이끌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진짜 행복을 위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주십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 13,32)
그 누구도 모르는 시간이므로, 주님 말씀에 따라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에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행복의 길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삶이 다니엘 예언자가 말하는 구원의 길이 됩니다.(다니 12,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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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에서 자유로워지기>
신학생 때 어느 신부님의 강론 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신학생이 버스를 탔습니다. 그리고 빈자리가 있어서 자리에 앉았는데, 다음 정거장에 너무나 아름다운 아가씨가 탄 것입니다. 그 미모에 자꾸 시선이 갔습니다.
얼른 기도했습니다. “주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주세요.” 이 아가씨는 빈자리를 찾다가 신학생 옆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신학생은 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잠시 뒤, 이 아가씨가 피곤했는지 졸다가 신학생 어깨를 베개 삼아 자는 것입니다. 신학생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유혹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유혹은 분명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유혹은 이겨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포기해야 할까요? 우리 삶을 더 힘들게 하기에 안 됩니다. 이겨내기 힘든 유혹이지만 어떻게든 힘을 내야 합니다. 한 번이라도 이겨내면 다음에는 훨씬 이겨내기 쉬워질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과 가까워집니다.
어렵고 힘듦만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겨냈을 때의 기쁨에 주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훨씬 힘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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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축제 인생>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인생 3계명-
“삶은
외로움을
견뎌내는 것
외로움 중에도
묵묵히
꽃들 피어 내는 것
하늘이
별들 피어 내듯
땅이
꽃들 피어 내듯”-2001.8.18.
만 20년 전 시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외로움 중에도 묵묵히 별들 피어 내는 하늘처럼, 꽃들 피어 내는 땅처럼, 오늘 지금 여기서 사랑의 별꽃들 피어 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제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마침 지인이 보내준 젊은 신혼부부의 아름다운 사진도 가을 축제의 아름다움을 북돋우는 느낌이었습니다.
“인생은 아름다워라(Life is beautiful)!”
축제 노년 가을 인생을 살라고 온통 황홀한 단풍 가을 축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집무실에서 일하다가 자주 집무실 문을 열고 아름다운 가을 단풍 축제 장면을 바라보면서 천국체험을 즐깁니다. 그러나 가을 단풍 축제의 아름다움은 죽음의 문, 천국의 문이 열렸을 때의 천국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할 뿐이겠습니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다.”(마르14,3)
전례력으로 연중 제33주일인 오늘 11월14일은 제5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이고 윗 성구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이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인간의 본질이 가난과 외로움이요, 이에 대한 답은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아씨시의 대주교 도메니코 소렌티오가 그리스도의 눈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보는 교황님께 찬사를 드리며 한 말씀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가장 곤중중에 있는 이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항구한 태도로 변형되어야 한다. 애덕은 우리의 끊임없는 봉헌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인 분을 발견했습니다. 세상 떠난 이들의 마지막 이사를 돕는 예비신자인 특수청소업체 바이오해저드 대표 ‘유품정리사’ 김새별씨입니다. 그에 관한 일부 인터뷰 기사와 그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7계명을 소개합니다.(가톨릭평화신문 2021.11.14.10쪽; 도재진 기자)
“일반적인 유품이 아니고 고독사와 자살, 살인사건 현장에서 특수청소를 하고 돌아가신 분들의 유품 정리를 하고, 나머지 이삿짐을 나르는 일을 합니다. 모든 정리를 끝낸 후 나오면서 고인에게 ‘다음 생애는 외롭게 사시지 마세요.’ 말합니다.
고인의 메모장이나 사진을 보면 그리움이 묻어 있고 외로움이 젖어 있어요.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런 모습이 아닌 나쁜 모습만 보고 기억해요. 실제로 고인에게도 아픈 사연이 많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어요.”
김새별 대표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7계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1.삶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정리를 습관화하라.
2.직접 하기 힘든 말은 글로 적어라.
3.중요한 물건은 찾기 쉬운 곳에 보관하라.
4.가족들에게 병을 숨기지 마라.
5.가진 것들을 충분히 사용하라.
6.누구 때문이 아닌 자신을 위한 삶을 살라.
7.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이다.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남겨라.
무엇보다 주님과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 가까운 이웃들과 사랑의 추억입니다. 저는 연중 제33주일인 오늘 여러분에게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3계명을 소개합니다.
첫째, 말씀을 사랑하십시오.
말씀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말씀은 빛이요 생명이요 영입니다. 말씀과 일치될수록 영원한 삶입니다. 경거망동, 부화뇌동하지 않습니다. 표류하거나 방황하지 않고 영원한 안식처이자 피난처인 하느님 안에 깊이 정주의 뿌리를 내리며 영원한 삶을 삽니다. 주님의 나의 목자이니 아쉬울 것도, 부러울 것도, 두려울 것도,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바로 다음 말씀이 결정적 깨우침이자 가르침을 줍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 내 길을 비추는 빛입니다. 인생 무지, 인생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주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고해인생의 어둠을 몰아내고 아름다운 축제인생을 살게 합니다.
둘째, 희망을 사랑하십시오.
우리의 궁극의 희망은 그리스도요, 그리스도께서 계신 하느님의 옥좌입니다. 히브리서가 명쾌하게 밝혀 줍니다. 궁극의 승리자 그리스도님이 우리의 영원한 궁극의 희망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이제 그분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판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진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거룩해진 우리들이요 영구히 완전해진 우리들입니다. 다니엘서가 우리의 부활후 빛나는 희망의 미래를 보여줍니다.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 그러나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을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
과연 나의 미래는 어느쪽에 속할까요? 천국과 지옥도 선택이자 은총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한 희망이신 그리스도 주 예수님을 선택하여 창공에 빛나는 별처럼 아름다운 축제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셋째, 오늘을 사랑하십시오.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오지 않았습니다. 어제와 내일은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마지막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십니다. 죽음의 시간이, 최후심판이 바로 그러합니다. 알 수도 없고 알려고 할 것도 없습니다. 최상 최고의 대책은 오늘 지금 여기를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유일한 길은 그분의 사랑과 섬김안에서 오늘을, 매일을 사는 것입니다.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현재입니다. 여기와 지금에 집중하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이미 주님의 나라에 들어왔고 조만간 그분은 우리를 부르러 오실 때, 옛 친구들과의 재회도 이뤄질 것입니다.
사실 그분은 이미 여기 계시고, 언제나 계셔왔고, 언제나 계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음을 통과해 다른 세상의 삶으로 들어갈 것이며 그분과의 관계도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 사랑의 우정관계입니다.
쏜살같이,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갈날도 얼마 안남았다는 통절痛切한 자각自覺에 휴가가는 것을 잊고 산지 수십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날로 당신과 깊어지는 사랑의 우정을 살게 하십니다. 말씀을 사랑하며, 희망이신 주님을 사랑하며, 오늘을 사랑하며 ‘아름다운 3계명’의 축제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마지막 제 사랑하는, 늘 읽어도 늘 새로운 좌우명 고백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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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세계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사람의 아들의 날"을 이야기하십니다.
제1독서인 다니엘 예언서와 마르코 복음에는 "사람의 아들의 날"의 두 국면을 보여 줍니다. 곧 구원의 얼굴과 재앙의 얼굴입니다. 여러분은 미사 독서들에서 어떤 얼굴과 마주하셨는지요? 구원에 대한 희망으로 기쁘셨나요, 아니면 심판의 두려움으로 불안하셨나요?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마르 13,27)
언제일지 아무도 모르는 그날은 해와 달이 빛을 잃고 하늘과 땅이 뒤흔들리는 엄청난 물리적 재해를 동반할 것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한다 해도 자연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는 우리는 미처 겪어 보지 못한 천재지변의 재앙과 변고에 당황하며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지요.
"선택한 이들"
그날 영광 속에 다시 오실 사람의 아들은 당신이 선택한 이들을 잊지 않고 찾으실 것입니다. 구원입니다. 땅 끝, 하늘 끝까지 흩어져 있는 선택받았던 이들은 그 부르심이 완성되는 결정적인 일치의 시간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고, 지상 순례 기간 동안 간절히 바라 마지 않던 영원한 사랑 안에 잠기게 될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울려퍼지는 구원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때에 네 백성은, 책에 쓰인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다니 12,1)
이렇듯 주님께서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주님께 선택되어 사랑과 신의를 고백하며 삶과 죽음으로 증거한 이들은 모두 약속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요. 바로 그날 그분 앞에서 그 책이 펼쳐질 것이고, 그들은 평생 그리워하고 기다리던 주님과 복된 해후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제2독서는 여전히 심판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에게 격려가 되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로 바치시고 나서 ...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히브 10,12.14)
우리의 정화와 성화는 우리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희생제사의 열매입니다. 그분은 매번 속죄 제물을 바쳐야 하는 여느 인간 사제들과 달리 단 한 번, 당신 자신의 피로 영원한 계약을 완성하셨지요.
우리는 그분이 그렇게 치르신 피의 대가로 구원을 약속받았습니다. 적극적인 자의로 사랑을 거부하거나 신앙을 저버리지 않는 한 구원의 가능성은 쉬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여전히 희망해도 좋습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복음 환호송)
깨어 있음과 기도가 구원을 향한 우리의 바람을 현재화시켜 줍니다. 기도는 그분을 사랑하고 향유하는 구원 상태를 앞당겨 누리는 맛보기이고, 깨어 있음은 그 기도가 삶의 구석구석에 구체적으로 반영되게 해 줍니다.
사랑하는 벗님! 특별히 세계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며 기도와 선행으로 그들에게 손을 내미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 우리를 데리고 오라고 주님께서 보내실 천사들이 바로 그들이 될 것이고, 그들이 주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큰 소리로 증언을 해 줄 것입니다. 그들 마음에 새겨진 우리 이름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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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EBvnSWtgD-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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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마르 13, 32)
11월의
남은
단풍잎들이
오늘의 바람에
떨어져내린다.
벌써 연중
제33주일이다.
시간을 붙들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울고 웃던
모든 시간이
소중했다.
슬픔과 기쁨은
우리네 인생의
소중한 몫이다.
소중한 것들과
가난한 것들
사이에 구원의
복음이 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마지막까지
찾으시는
주님이시다.
버려진 것과
사라질 것들
사이에
가난이 있다.
모든 아픔의
시작에는
가난이 있다.
가난하기에
자주 넘어지고
자주 통곡하는
아픈 삶이다.
고통과 비참을
끌어안으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가난의 흔들림을
지나치지 않으시는
나눔의
주님이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나눔이 있어야
한다.
분주한
일상안에서도
가난한 이를
기억하고
기도하고
나누는 은총의
오늘, 주일이다.
우리의 나눔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가난의 족쇄를
푸는 사랑을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다.
가난에 가려진
인격을 다시
되찾아주시는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마음과 일상을
어루만져 주신다.
우리의
모든 길이
되어주시는
주님이시기에
그 날과
그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나누고
사랑해야 할
순간은
오늘이라는
시간이다.
오늘이
나눔이고
감사이다.
가난한 이들을
향하는 뜨거운
복음이다.
++++++++++++++++++
(2)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마르 13, 32)
빈 들판을
바라봅니다.
빈 들판처럼
비워내야 할
은총의 때입니다.
모든 것에는
마지막이 있습니다.
고마운 마무리의
시간입니다.
마무리가 있기에
모두가 고마운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에는
마무리또한 새로운
시작임을 보게됩니다.
새로운 시작은
늘 십자가의 죽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시작과 마무리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죽음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유한한 시간을 사는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이와같이 자비가
필요한 가난한
영혼들의 시간입니다.
가난한
이를 위해 기도하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것이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따르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우리또한
가난하지만
시간과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고마운 마음을
나누고 떠나듯
끝이 아름다운
영혼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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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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