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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욕망이론
자크 라캉(Jacques Lacan)
프랑스 정신 분석 학자.
- 정신 분석과 철학,
- 문학 이론 형성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파리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자격 취득 후
1932년부터 평생을 정신분석가로 활동했다.
젊었을 때부터 초현실주의자들과 광범위하게
교류했으며,
파리에서 열린 코제브의 헤겔 강독 모임과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최초 공개
낭독회에 참석하는 등 정신분석 외에도
20세기의 다양한 지적 흐름과 교류를 계속했다.
국제정신분석학회(IPA)에서의 데뷔는
1936년 마리엔바트에서 열린
제13차 국제정신분석 총회에서
‘거울 단계’를 발표한 것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 발표가 어니스트 존스에 의해 중단된 것은
그의 이후 활동과 관련해서도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이후 1951년부터 매주 사적으로 열리던 세미나가
1953년부터 생탄 병원에서의 공개적인 세미나로
전환되면서 그 뒤 사망하기 직전까지 이어진 긴
‘세미나’가 시작된다.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이 시기 라캉의 입장은 당시 IPA를 연상시키는
소피스트들에 맞서 제자들에게 산파술을
가르치던 소크라테스의 입장과 흡사한 것이었다.
이 해는 분석 실천 방법에 관한 의견의 불일치로
라캉이 동료들과 함께 파리정신분석학회(SPP)를
떠나 프랑스정신분석학회(SFP)를 결성한 해이며,
1960년대는 IPA 내에서의 SFP 지위에 관한
협상으로 시작되는데,
이는 결국 라캉의 ‘대파문’으로 끝난다.
하지만 이러한 파문과 무관하게 라캉은
알튀세르와 레비스트로스의 후원하에
생탄 병원을 떠나 고등사범학교라는
프랑스 지성계의 최고 기관에 새로운
‘기지’를 마련하고,
1959~1960년의 세미나인 『정신분석의 윤리』에서
‘우리 시대의 윤리’를 욕망과 관련해 새롭게
탐색하기 시작한다.
욕망이론, 자크 라캉
라캉의 욕망이론은 소쉬르 언어학에 근본을 두고, 프로이드의 무의식을 은유와 환유로 읽어낸 구조주의 분석이다. "인간의 언어는 무의식의 정신세계를 반영한다"고 그의 사상 을 요약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의식적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는 데, 여기서 "무의식"은 자신을 이끄는 타자로 보았다. 그는 "자아 또는 주체가 아닌 타자가 인간을 말하고 행동하게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대타자, 팔루스는 은유로 시작해 환유로 끊임없이.차연된다.
주요 사상은
- 무의식,
- 은유와 환유,
- 남근(팔루스),
- 상상계와 상징계,
- 시선과 응시로 볼 수 있는데,
- 인간의 욕망이 주체이며 반복과 주체분열 등을
통하여 형성된다고 한다.
이러한 것이 구조주의의 다른 이론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남근으로 보였던 대상이 근접하면서 오인임을 알 수 있으므로
대상의 입장에서 볼 때는 기호학이 된다.
대상은 실체 같지만 신비의 껍질을 벗기면 허상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욕망을 지연시키는 욕망의 미끼 "오브제 프티 아"의
입장에서 보면 후기 구조주의이다.
은유와 환유의 차액에 의해 욕망의 충족이
끝없이 지연되는 것은 차이와 연기가
합쳐진 데리다의 "차연"과 같다.
바르트의 욕망에 대한 기호학적 접근도 마찬가지이다.
연인에게는 사랑에 빠진 대상이 은유지만
그녀는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될 수 없다.
그의 욕망이 너무 강해서 견디지 못 하고 죽는다.
아니면 그녀를 잊고 다른 대상에 몰입한다.
혹은 그녀를 얻었을 때는 그녀는 더 이상 별이 아니다.
그러므로 은유에 대한 환상은 곧 환유로 이어져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모던 시대의 자아 중심적인 분석에 반해서 프로이드의 무의식을 재해석한 라캉의 정신분석은 주체의 분열에서 시작된다.
주체의 분열을 인식한 주체는 '거울 단계'라는 오인의 구조가 바탕이 된 언어의 세계에 산다. 거울 단계를 지난 주체는 아버지의 질서인 언어의 세계로 들어서고, 상상계적 믿음이 오인임이 드러난다. 여기서 욕망이 대상을 향하는 단계가 상상계이고,
그 대상을 얻었을 때 욕망의 완성이 아니라, 어긋나 버리는 단계가 상징계이다. 이 두 가지 사이에 발생하는 차액(잉여쾌락)에 의해 다시 욕망이 지속되는 것이 실재계이다. 이 차액은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다시 욕망을 부르게 되는 미끼 "오브제 프티 아"가 된다.
어머니를 둘러싼 아버지와 나 사이의 욕망의 갈등의 삼각 구조에서 상상계가 끝나고 상징계로 어긋나는 것을 라캉은 프로이드의 거세 콤플렉스로 설명한다. 나는 아버지의 존재를 인식하여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즉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들어서는 순간 주체는 거세되므로, 대상이 욕망을 완벽하게 충족시키지 못하고 차액을 남김으로 욕망의 회로를 맴도는 주체는 반복과, 주체 분열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거짓말을 하는 나와 그것을 보고 있는 나를 말하기도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나를 보여지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서 보는 것 은 시선eye 이고 보여지는 것은 응시 gaze 이다. 내가 보기만 한다고 믿는 단계는 상상계이고, 보여짐을 아는 단계가 상징계이다. 이 둘을 합한 변증법으로 바라봄과 보여짐이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된 것이 실재계이다.
다음은 라캉의 이론을 용어에 의해 설명하고자 한다.
(1) 주체의 분열 : 은유와 환유
프로이드는 사회에서 금기된 욕망이 꿈으로 나타나 꿈의 내용이 압축되어 어떤 물건이나 이미지로 바뀌는 대체, 또 옆의 것과 자리를 바꾸는 인접성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여기서 은유는 대체요, 환유는 인접성이다.
라캉의 주체에 은유와 환유를 대입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은유는 거울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완벽한 반영이라고 믿는 이상적 자아, 어머니 혹은 대상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리라 믿고 자아가 대상의 남근이라고 믿는 상상계이다. 거울 단계를 지난 주체는 아버지의 질서인 언어의 세계로 들어서면서 이 상상계적 믿음이 잘못임을 안다. 이 러한 상징계의 어긋남이 환유이다.
라캉은 주체가 상상계와 상징계로 이루어진 것은 은유와 환유로 이루어진 것과 같은 말이므로,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으며, 언어는 은유와 환유로 이루어진 것이다. 욕망이 대상을 향해 가는 단계가 상상계, 그 대상을 얻었을 때 느끼는 어긋남이 상징계요, 이 둘의 차액(a)에 의해 욕망이 지연되는 것이 실제계이다.
(2)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주체의 주체성의 형성 과정을
- 상상계,
- 상징계,
- 실재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상상계(the imaginary)는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어린아이가 마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총체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처럼 환상을 모르는 주체의 단계다. "우리는 거울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를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점에서 일종 의 기표(시니피앙: signifiant)라고 생각할 수 있고, 아이가 거울에서 보는 이미지를 일종의 기의(시니피에: signifie)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이가 보는 이미지가 어느 정도는 자신의 '의미'이다. 여기에서 기표와 기의는 소쉬르의 기호에서와 같이 조화롭게 통합되어 있다." 이 거울 앞에 섰을 때 '기표로서의 아이'는 거울 속에 반영된 '기의로서의 자신'에게 완전하고 흠 없는 일체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가 개입하게 되면서 아이는 탈구조적인 불안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데, 이 때 아이는 성차(性差)를 인식하는 것과 동시에 언어를 발견하게 된다.
상징계(the symbolic)로의 진입이 시작된 것이다.
어린아이가 언어를 사용하는 질서의 세계로 뛰어드는 단계가 바로 상징계다. 그러나 가정과 사회를 이루는 사회적이고 성적인 역할이 미리 주어진 구조인 '상징적 질서'로 옮겨가게 되면 주체는 분열되고 주체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 상실된다.
상징계에서는 주체가 변형되고 재현되기 때문이다.
"아이는 현실을 '충분하게' 상상적으 로 소유하던 세계에서 언어라는 '공허한' 세계로 추방당한 것이다. 언어는 차이와 부재의 무한한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에 '공허한' 것이다. 이제 아이는 어떠한 대상을 충분하게 완전히 소유하는 대신에, 잠재적으로 무한한 언어적 연쇄를 따라 하나의 기표에서 다른 기표로 이동할 뿐이다." 이러한 기표들의 무한한 운동이 바로 라캉이 말하는 '욕망'의 의미다. 욕망은 결핍에서 비롯되고 그 결핍을 메우려 부단히 노력하지만, 언어 자체가 결핍(차이와 부재)에 의거해 작동하기 때문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이 욕망인 것이다.
실재계(the real)는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항상 의미작용의 영역 너머에 존재하는, 즉 상징적 질서 바깥에 존재하는 접근할 수 없는 영역과 분리되는 것을 뜻하는데, 라 캉은 이 영역을 '실재계'라고 부른다. 특히 우리는 어머니의 몸과 분리되어 있다. 사람들이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위기를 겪은 다음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 소중한 대상을 다시 획득할 수는 없는 일이다." 비유적으로 얘기하면, 상상계(바라봄만 있는 세계)와 상징계 (보여짐을 의식하는 세계)가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된 것이 실재계다. 즉 나의 욕망을 완벽히 충족시킬 짝이라고 믿었다가(상상계), 포착하는 순간 허상이 되고(상징계), 이때 상징계로 들어가며 제외된 부분이 잔여물(대용물)로 남아 다시 숭고한 대상이 생긴다(실재계).
이 잔여물을 라캉은 '오브제 프티 아(object little a)'라고 불렀다. 라캉의 실재계는 우리의 일상생활의 균형을 탈선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바로 이러한 균형을 지탱시켜 주기도 한다.
(3) 욕망의 공식 : 잉여 쾌락
프로이드는 "쾌락 원칙을 넘어서 Beyond the pleasure Principle"에서 인간의 욕망을 충 족시키는 유일한 대상은 죽음뿐이다라고 한다. 현실에 의해 지연되는 쾌락, 신기루가 없으면 사막을 걷지 못하듯이 욕망의 지연이 없으면 인간은 존재하지 못한다. 이러한 인간의 삶을 지속시켜주는 것이 잉여쾌락이다. 라캉의 잉여 쾌락은 끝없이 대상을 추구하게 하는 삶의 동인이다. 대상이 완전히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리라고 믿고 다가섰는데 그 대상은 <흘러넘침 jouissance>이어 차액이 남는다. 이 차액으로 인하여 욕망은 충족되지 못하고 대상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차액이 잉여 쾌락이며, 삶을 지속시키는 동인인 오브제 프티 아 (a)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욕망의 공식이 성립된다.
S <> a, 주체에는 타자가 개입되어(S) 대상(a)을 추구하지만 그 대상은 주체의 욕망과 일치되지 못하고 차액(<>)을 남긴다.
사랑은 추상적인 요구demand 인데 그가 그녀에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성적 결합이라는 욕구need의 충족이고 요구와 욕구의 차액은 남게되어 다시 그를 욕망의 회로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대상은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는 존재하고 목표가 되지만 그것을 소유하게 됨으로 무가치한 것이 된다. 이러한 설명의 이해를 돕는 예로 아프리카의 이구아나라는 뱀을 든다. 그 도마뱀은 찬란한 색채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도마뱀에게 화살을 꽂는 순간 영롱함은 사라지고 칙칙한 색으로 변한다.
라캉의 용어로 다시 설명하면 이구아나는 대타자(O)요 빛을 잃고 손에 남은 칙칙한 것은 소타자(o)이다. 대타자에서 소타자로 옮겨자는 과정이 욕망의 공식이요. 욕망은 완벽한 충족을 모르기에 지속된다. 매혹의 본질은 환상이었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4) 응시와 시선
라캉의 주체는 거세되었기 때문에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는 자아 충족 주체 가 아니라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은 곳에서 존재하는" 분열된 자의식적 주체이다.
"나는 거짓말을 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거짓말을 하는 나와 그것을 보고 있는 나를 암시한다.
거짓말을 하는 나는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보는 것 eye과 보여지 는 것 gaze의 변증법이다.
- 내가 보기만 한다고 믿는 단계는 상상계이고,
- 보여짐을 아는 단계가 상징계이고,
- 바라봄과 보여짐이 연결된 것이 실제계이다.
주체가 대상의 응시를 알아채거나
자신의 욕망을 대상의 욕망과
일치시킬 때 환상은 깨어지고
도착증이 나타난다.
포르노 영화는 전체주의적이다.
주체의 욕망이 대상의 욕망과 일치하여,
시선과 응시의 교차가 없고 보여짐이 없이
바로 봄만 있는 주체이다.
그래서 주체의 욕망은 곧 객체의 욕망이 되고
이것은 환상을 억압한다.
환상이 없는 곳, 욕망이 없는 세계가 전체주의다.
주체는 대상의 응시에 압도되어 환상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주체는 대상의 응시를 모를 때만 그 대상에게 매혹되는데,
포르노 화면은 관객을 유혹하려는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하면 대상이 주체의 자리에 들어서고
주체는 마비되고 경직된다.
(S <> a --- a <> S ) 반면에 노스탈지아 영화는
시선과 응시의 교차에 의해 환상이 있는 세계이며,
대상의 응시를 주체가 모를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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