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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사군명은 표사들을 이끌고 후원으로 들어섰다.
표국에서 가장 인적이 드물고 그와는 인연이 깊은 곳이기도 한 후원으로.
"허어, 마님이 계실 땐 선계(仙界)가 부럽지 않은 곳이었거늘 이제는 황량하
기가 이를 데 없구먼."
철철이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기화이초는 간 데 없고 잡초와 들꽃만 무성한 후
원의 정경에 심사가 편치 않은 듯 고승후가 씁쓸하게 옛일을 들먹였다. 새권
표국에서 먹은 밥그릇수가 가장 많은 고승후는 지난날 후원의 아름다움을 아
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선계가 따로 있나? 불가(佛家)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으니
내 마음이 신선과 같으면 어디나 선계로 보이는 거외다."
왕충삼이 제법 그럴듯한 소리로 되받으며 주걱턱을 쓰다듬자 팽상문이 바로
면박을 줬다.
"틈만 나면 술타령을 하는 위인이 신선 같은 소리하고 있구먼 그래……."
"허어, 이런. 신선 중에 주선(酒仙)이 있다는 말도 못 들어 봤느냐? 하기야
자네같이 무식한 위인이 그런 경지를 알 턱이 없지!"
과거에 군교였다는 팽상문과 모함을 받아 몰락하긴 했으나 한때 조정의 높은
벼슬을 지낸 재상가(宰相家)의 후예라고 자부하는 왕충삼이 걸핏하면 아옹다
옹하는 사이라는 것은 표국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군교라 해봐야 품계도 없는 미관말직이고 자기는 군호(君號)를 받은 조정 대
신의 후예이니 알아서 모시라는 왕충삼.
설령 왕충삼의 출신이 사실이라 해도 그 놈의 고관들이 겨울밤 곶감 빼먹듯
군비(軍備)를 횡령하는 통에 변방에서 고생한 생각을 하면 이가 갈린다는 팽
상문.
그들이 사이가 좋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하나 왕충삼을 찾으려면 팽상문에게 물어보면 되고, 팽상문이 가는 곳에 왕충
삼이 안 보이는 경우도 별로 없으니 두 사람이 정말 앙숙인지 납득을 못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비무대회에 이어 유례없는 막대한 상까지 내걸 정도로 중요한 표행을 앞둔 시
점이지만 두 사람의 다툼은 그칠 기미가 안보였다.
"그만들 하게. 백기표사께서 말씀을 못하시지 않는가!"
고승후가 보다 못해 한마디하자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군명을 주시했
다. 상관을 대하는 정중한 태도였다.
그러나 정작 사군명은 민망한 표정으로 두 손을 내저었다.
"이러시면 제가 거북합니다. 그냥 예전처럼 대해 주십시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배로 모시던 사람들이었으니 깍듯한 상관대우가 어색할
법도 했다.
하나 사군명의 입장이야 어떻든 그들은 국주의 입을 통해 들은 대로 자신들을
이끌 우두머리가 사군명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처지였다.
"아니 될 말이오. 군율이 흐트러진 군사들이 싸우기도 전에 지리멸렬하는 것
처럼 중요한 표행을 떠날 마당에 상하가 분명치 않으면 곤란합니다."
"모처럼 옳은 소리를 하는구먼……."
정말 모처럼 왕충삼과 팽상문의 의견이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거, 그만들 좀 합시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소."
비록 막대한 상금 때문이긴 하지만 누구보다 이번 표행에 열의를 품고있는 최
흘(崔訖)이 두 눈을 반짝이며 사군명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그렇습니다. 호칭 따위의 형식은 중요한 게 아니니 서로 편한 대로 대하기로
하지요."
나무에 기대거나 바위에 걸터앉아서 혹은, 웃자란 잡초가 무성한 경사진 잔디
밭에 드러눕듯이 길게 앉아 사군명을 바라보는 여섯 명의 사내들.
과거에 어떠했고, 호칭이야 뭐라고 부르든 이제는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쥐
고 있는 사군명을 바라보는 그들이야말로 사군명이 국주의 승낙을 얻어 차출
한 인물들이었다.
사군명이 표사가 된 후 일곱 번의 표행을 나가며 함께 한 육십여 명의 표사들
중에서 선택한 사내들.
이제는 사군명과 함께 일생일대의 표행을 떠나야 하는 사내들.
그리고, 이번 표행을 마칠 때까지 사군명 자신이 목숨을 책임져야 하는 사내
들.
느긋한 듯 하지만 실상은 더 없이 진지하기만 한 그들의 시선에서 새삼 막중
한 책임을 느낀 사군명은 숨결을 가다듬고 말문을 열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이번 표행에 표국의 흥망이 걸려 있습니다."
어젯밤, 국주의 은밀한 부름을 받고 제각기 몸을 숨기고 있다가 표국이 어수
선한 틈을 타서 다시 모인 그들이었다.
"다른 조들의 표행이 출발한 후 우리도 출발합니다."
"무적세가로 간다는 예물이 표물입니까?"
갑자기 경비가 삼엄해진 창고에 들인 물건이 무엇인지 그들도 대충은 알고 있
는 처지였다.
"일단은 뭔가를 싣고 가겠지만……."
말을 멈추고 숨결을 가다듬는 사군명의 표정이 더 없이 신중했다. 표사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사군명을 주시했다.
"진짜 표물은 황농현(黃濃縣)에서 접수하게 됩니다."
육로를 택하든 수로를 택하든 북경으로 가려면 북문(北門)이나 동문(東門)을
통해야 하는데 황농현은 서문(西門)을 벗어나서 반나절을 달려야 나오는 마을
이었다.
"황농현이라……. 북경으로 가는 게 아니란 거요?"
"진짜 표물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표물이 대체 뭐기에 이렇듯 난리를 피우는 겁니까?"
표사들은 저마다 떠오르는 의문을 감추지 않았다.
사군명은 천천히 그들의 의문에 답했다.
"우리는 물론 다른 조들도 북경으로 가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다만 열 개의
조 중 두 개 조의 표물은 봉래도에서 보내는 예물과 혼수이고 나머지 여덟 개
조는 위장. 그리고, 우리가 맡은 표물은 사람이란 것뿐이지요."
"혼수? 사람……? 그럼 신부란 말이오?"
고승후가 먼저 갈피를 잡은 모양이었다.
"그렇습니다. 무적세가로 시집가는 봉래도의 군주입니다. 무적세가의 손발을
묶는 볼모로 쓸 수 있는 표물의 정체를 안다면 흑마방에서 필사적으로 노릴
것이 틀림없고 이미 심상치 않은 조짐이 눈에 띄는지라 신중을 기하느라고 여
러 가지 조치를 취한 거지요."
"……!"
약속처럼 입을 다물고 한껏 확대된 두 눈만 꿈뻑거리던 좌중에서 자조 서린
탄식이 새어나왔다.
"휴우, 드디어 죽을 길이 열리는 건가……."
"어쩐지 국주가 상상치 못할 거금을 약속한다 했더니,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
구먼."
"허허, 네미랄. 우리 마누라만 운수대통 했구먼. 고주망태기 서방은 십중팔구
저승 객이 될 테고, 평생 꿈도 못 꿀 거금을 손에 쥐게 생겼으니……."
화창한 봄날 난데없는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느낌이었다.
자신들을 은밀히 부른 국주가 다른 조에 비해 두 배에 달하는 상을 약속할 때
부터 뭔가 심상치 않다는 예감이 들긴 했었다. 하나 잘하면 팔자를 고칠 수
있다는 생각에 까짓 거 잘해봐야 죽기밖에 더하겠느냐는 호기가 솟은 것도 사
실이었다.
그렇지만 정작 일의 내용을 알게되는 순간. 스산한 한기와 함께 운명을 뒤덮
으며 밀려오는 먹구름을 느낀 것이다.
만에 하나 흑마방에서 표물의 정체를 알고 빼앗으려든다면 표행의 성공은커녕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은 아무리 생각해도 보이지 않았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황금이 귀해 본들 하나뿐인 목숨보다 소중할 리는 없지 않은
가.
사군명은 굳게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뭔가 말을 해야한다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수습할 일이 아니
라는 판단이 든 것이다.
고승후가 나선 것은 그때였다.
허리에 손을 얹고 가슴을 편 고승후의 말은 그의 자세만큼이나 당당했다.
"원, 사람들. 아, 흑마방이 별건 줄 아나? 이십 년 전만 해도 하남성 구석에
서 빌빌거리던 도둑놈들이 흑마방이었다고! 감히 표물을 노려? 그것도 세권표
국의 표물을? 어림도 없는 소리. 기껏 힘없는 장사꾼들 등짐을 털거나 시궁창
쥐새끼처럼 냄새나는 구석만 쑤시고 다니며 한몫 끼던 놈들이었지. 요즘 들
어 제법 세력이 커졌다고는 하지만 개꼬리 삼 년 묻어둔다고 황모(黃毛)되는
거 봤나?"
적지 않게 과장된 얘기라는 걸 누구나 알았지만 긴긴 겨울밤 담배연기 자욱한
봉로방에서 탁주잔을 기울이며 옛 얘기 풀 듯 지껄이는 고승후의 말은 묘한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자네들도 알다시피 내가 구두쇠 소리 들어가며 수십 년을 아끼고 모
은 돈이 황금 열 냥쯤 되는데 이번 일만 마치면 그 상금이 무려 사십 냥일세!
난 무조건 하겠네."
물론 표국에 매인 신세인 이상 내키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그만둘 수 있는 처
지도 아니었다. 하나 국주의 명으로 마지못해 나서는 것과 스스로 의지를 세
워 기꺼이 선택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나도 마찬가지요!"
최흘이 시퍼렇게 날이 선 안령도(雁翎刀)를 흔들며 외쳤다.
"황금 사십 냥이면 우리 어머니를 고치고도 남는 돈이오. 유복자로 나를 낳아
이제껏 고생만 하신 어머니의 병환을 고칠 수 있는데 이 마당에 주저한다면
사람의 새끼가 아니지!"
"거, 누가 못 가겠다고 한 사람이 있나. 왜들 그렇게 눈에 힘은 주고 그러시
나들……."
왕충삼이 건들거리며 뜻을 밝혔다.
느긋한 대꾸이긴 했으나 왕충삼으로서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동참의 뜻을 밝히자마자 그는 팽상문을 걸고 들어갔다.
"팽가야! 넌 빠질 궁리를 하는 게냐?"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팽상문이 퍼뜩 고개를 쳐들더니 지지 않고 이죽거렸
다.
"높고 귀하신 몸들이나 꽁무니를 빼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우리 같은 사람
이 그럴 리가 있겠느냐!"
팽상문의 시선이 사군명을 향했다.
"출발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있소이까?"
가뭄에 말라 비틀어졌던 초목(草木)이 단비를 맞아 소생하듯 점차 좌중에 번
지는 불퇴전의 결의를 느끼며 내심 이들을 선택한 자신의 결정에 스스로도 대
견해하고 있던 사군명은 난데없는 질문을 던지는 팽상문을 바라보았다.
팽상문의 눈이 번뜩이는 까닭은 몰랐지만 그의 눈길이 묘한 기대와 안도감을
불러일으켰다.
"황농현에 내일까지만 당도하면 되니 내일 오시(午時)경 출발한다고 치면 하
루쯤 시간이 있습니다."
"하루라……."
팽상문이 고개를 꼬며 중얼거렸다.
모두의 궁금증을 대변한 것은 역시 왕충삼이었다.
"무슨 꿍꿍이를 꾸미느라고 시간을 따지는 게야?"
"궁금해도 조바심 내지 말거라. 이 어르신이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니…….
프흐흐."
팽상문은 속셈을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더니 사군명에게 자못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내게 은자 백 냥만 내주시오."
표행에 드는 비용은 인솔자가 관리하는 것이 상례였으므로 필요하다면 요구할
수는 있었다. 게다가 표행의 중요성 때문인지 석백송이 내린 비용은 평소보
다 훨씬 넉넉했다.
"표행을 준비하는데 관계된 일입니까?"
"그렇소."
"그럼, 드리지요."
사군명은 품속에서 작은 금덩이를 꺼냈다.
"출발시간을 잊지 마십시오."
까닭을 묻지 않는 사군명 대신 왕충삼이 나섰다.
"속이 시커먼 자가 행여 그대로 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내가 함께 가겠소."
"이런, 주둥이 놀리는 꼴하고는! 가만히 있을 위인이 아니라 걸 진작부터 알
고 있었지……."
미간을 찌푸리며 노려보는 팽상문의 표정이 그리 기분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왕충삼이 따라나서지 않으면 허전해 했을지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늦어도 오늘밤에는 돌아 올 겁니다. 그때까지 굵은 대나무와 작은 옹기(甕器
) 몇 개, 철편(鐵片) 두어 자루. 에…… 또, 무쇠 솥도 몇 개 구해놓으십시오
."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끄덕인 사군명과 달리 고승후는 뭔가 짐작 가는 게 있
는 모양이었다.
잠시 멍한 표정이던 고승후가 황급히 질문을 던졌다.
"그, 그걸 만들려는 겐가?"
어느새 몸을 돌려 사라지는 팽상문의 어깨너머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
"프흐흐, 노인네 눈치 하나는 알아줘야겠구먼……."
돈을 품에 넣고 사라진 팽상문이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는지는 몰랐으나 고승
후가 기대에 찬 표정을 짓는 것으로 보아 표행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고승후가 사군명에게 내막을 설명했다. 설명을 요구
하지 않았어도 표행의 우두머리가 사군명인 이상 고승후에게는 당연한 일이었
다.
"그러니까 어디부터 얘기해야 하나……."
잠시 말머리를 잡느라 머뭇거리던 고승후가 이윽고 자세를 바로 했다.
"팽가가 군교였다는 것은 사실이오. 아니, 품계가 있는 벼슬을 지냈으니 군교
따위는 댈게 아니지."
순간, 좌중에 번져 가는 불신과 의혹의 빛은 고승후의 이어지는 말로 인해 더
욱 커졌다.
"적봉위(赤鳳衛)지휘동지(指揮同知) 척무광(戚武光) 장군휘하에서 소진무(所
鎭撫)의 벼슬을 지냈다 하오."
적봉은 장성부근의 성읍이오 위(衛)는 군사 주둔지, 소진무는 위에 속한 세습
무관(世襲武官) 중 하나였다. 지휘사로부터 시작되는 아홉 품계 중 가장 말직
이긴 했으나 일반 백성에게는 하늘과도 같은 벼슬이었다. 게다가, 세습직이었
음으로 한 번 되기는 힘들지만 별다른 과실이 없는 이상 대대로 물려받을 수
있는 직위이기도 했다.
언제나 맏형같이 듬직하고 자상한 고승후에게 속을 털어놓고 지내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팽상문도 그 중의 하나인 모양이었다.
고승후는 누구도 자세히 알지 못하는 팽상문의 내력에 대해 털어놓았다.
"젊은 시절 군포(軍布)를 내지 못해 병졸로 끌려가 적봉위에 배속된 팽가는
포로를 감시하는 일을 했다고 하오. 칠 년쯤 지났을까. 고향에 두고 온 동생
과 비슷하게 생긴 포로가 있기에 정을 주고 친절히 대했던 모양이오. 한데,
그 자가 알고 보니 화약(火藥)과 화포(火砲)를 다루는데 있어서 몽고족 제일
을 다투는 집안의 후손이라는 거였지. 위에서 알면 당장 엄중한 문초를 받을
처지였으나 팽가는 모른 척했다는 게요. 차츰 두 사람은 신분을 떠나 마음을
열게되었고 부상이 악화되어 죽어가던 그 포로는 시간 나는 대로 팽가에게 가
전의 비법을 전수했다고 하오. 결국 일년만에 그 자가 죽었을 때는 제법 쓸만
한 기술을 익혔다는 게요."
남에게 말못할 사연 한 자락쯤은 지니고 있는 사내들이었지만 고승후가 얘기
하는 팽상문의 과거사에 모두 진지하게 귀기울였다.
"그 자가 죽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지. 집안 대대로 연구하여 발전시킨 비법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전해 주기는 하나 자기 동족을 죽이는 일에는 쓰지
말아달라고……. 팽가도 굳게 약속했다지만 적의 칼에 죽으면 다행이오. 굶거
나 얼어죽기 십상인 전쟁터를 떠도는 신세에 약속을 지키기가 쉽지 않았던 모
양이오. 그자가 죽은 후 언제 죽을지 모르는 말단 졸병을 벗어나기 위해 일러
준 비법대로 쓸만한 무기 몇 가지를 만들었고 그 공으로 군교가 되고 벼슬까
지 얻었다고 합디다."
"허어, 포로 덕에 목숨을 구하고 벼슬길에 올랐다……. 그것 참 묘한 인연이
구먼."
과거에 신선술(神仙術)을 행하는 술사(術士)를 따라다니며 주술이며 의술 따
위를 배웠다는 말이 맞는지 늘 어설픈 주문(呪文)을 중얼거리고 다니는 천두
염(千荳念)이 제법 득도한 도인이라도 되는 양 무릎을 치며 장단을 넣었다.
"양심에 걸려 그 중 위력이 약한 몇 가지를 만들었고, 그 공으로 그나마 밥을
거르지 않고 혹한을 막을 옷 쪼가리를 걸칠 수 있는 군교가 되고 벼슬까지
얻었으나 약속을 저버린 꼴이 되었으니 마음이 편할 리 있나.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던 팽가는 결국 벼슬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군문을 벗어났는데 그게 병
졸로 끌려간지 십 년만의 일이라고 합디다. 그후 더 이상 악몽은 계속되지 않
았고 그 자의 기일(忌日)을 지켜 남모르게 제사상 차리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는 거요."
"하면, 팽가는 그 비법을 누구에게도 전수하지 않았다는 겁니까?"
좌중의 시선이 굵은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향했다.
반 년 전 표사를 뽑을 때 뛰어난 기마술(騎馬術)과 도법(刀法)을 선보여 발탁
된 자로 늘 과묵하고 자기 일에만 충실한 구태열(邱台悅)이 나직하게 말문을
연 것이다.
고승후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 당시 팽가의 상관이던 자가 군문을 벗어나는 대가로 비법을 요구해서
한두 가지 물건을 만드는 법을 일러주었다고 하는데 잘은 모르겠네."
구태열이 무슨 까닭으로 말문을 열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사군명에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럼 팽선배가 그때 배웠다는 물건을 만들기 위해 나갔다는 말입니까?"
고승후는 신중한 얼굴로 대답했다.
"술에 취했을 때 듣긴 했으나 대나무며 옹기 따위에 쇠 조각을 담아 화약으로
터뜨린다고 했으니 아마 틀림없을 겁니다. 듣기로는 근래 들어 서역에서 건
너온 화약이 성능이 뛰어나다니 아마 그걸 사러간 게 아닌가 싶소."
사군명이 뜻하지 않은 힘을 얻을 수도 있다는 희망에 들떠있을 때 한 사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뾰족한 음성으로 좌중을 재촉했다. 날렵한 몸놀림 못지
않게 눈치가 빠른 서수림(徐搜林)이었다.
"뭣들 합니까? 팽가가 구해 놓으라고 한 게 한둘이 아니지 않소!"
사실 옹기야 표국의 주방에도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그들의 귓가를 어지럽히는
소리가 후원의 대숲을 스치는 소리였으니 서둘 필요는 없었다. 성내의 대장
간에 가면 널린 것이 철편이었고…….
하나 공연히 일을 미룰 이유도 없었다.
사군명은 밝은 얼굴로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하지요. 다른 사람의 이목을 피해야 하니 옹기는 어두워진 후에 주방
에서 가져오기로 하고 우선 굵은 대나무부터 골라봅시다. 고선배는 구표사와
함께 대장간에 다녀오십시오"
아침햇살이 환하게 거리를 비치는 진시(辰時)초.
망루(望樓)를 겸한 세권표국의 대문위로 오색장삼에 화려한 깃털로 장식한 관
을 쓴 다섯 사람이 나타나더니 셋은 커다란 풀 나팔을 불고 둘은 북을 치기
시작했다.
뿌우, 뿌우……!
둥, 둥, 둥……!
나팔수(喇叭手)가 셋에 고수(鼓手)가 둘이면 대규모의 표행이라는 의미였다.
북소리와 나팔소리가 길게 여운을 남기며 울려 퍼지자 길을 가던 사람들이 발
걸음을 멈추고 세권표국 주위로 몰려들었다.
세권표국의 대규모 표행이 출발하는 광경은 항주 사람들에게 좋은 구경거리인
것이다.
천지신명(天地神明)께 도중의 가호를 비는 제(祭)를 올린 후 산뜻한 남색무복
을 갖춰 입고 늘씬한 준마에 올라탄 표사들이 날카로운 창검을 빼들고 마차를
호위하며 하나둘 활짝 열린 대문을 나서기 시작했다.
순간, 꼬맹이들은 환성을 질렀고 어른들은 괜스레 주먹을 불끈 쥐고 어깨를
들썩였다.
천하를 누비기는커녕 자란 곳에서 뼈를 묻기 십상인 팔자였지만 젊은 시절 가
슴속에 꿈틀거리던 웅심(雄心)은 아직 살아있는 까닭이었다.
"이야, 멋있다!"
"근데, 이번에는 맨 표사들뿐이네?"
보통의 경우 나팔수와 고수가 신호를 알릴 정도의 표행이면 짐수레가 줄줄이
늘어서고 표사들에 비해 몇 배나 많은 쟁자수(爭子手)들이 따르는데 비해 달
랑 한 대의 수레에 표두와 표사들만 보이는 것이 꼬맹이들의 눈에도 이상한
모양이었다.
그때 구경꾼 중에서 얼굴이 살짝 얽은 사내가 아는 척을 하고 나섰다.
"자네 아는가? 저기 저 시커먼 말을 탄 사람이 표두 중에도 제일 세다는 표풍
일수 하지철이란 사람이지."
"허어, 누가 그 정도도 모를 줄 아나? 저기 연자창(練子槍)을 들고 갈색 말을
탄 표사 양반이 나하고는 호형호제하는 사이란 말일세. 세권표국에 관해서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흔치 않을걸."
"이런 제길, 주루에서 술 한잔 나눴다고 형님동생이면 세상에 형제 아닌 사람
이 없겠네!"
넉넉한 살집에 늘어진 눈꼬리하며, 영락없이 호인으로 보이는 사내는 그러거
나 말거나 계속 입을 놀렸다.
주위에 늘어선 사람들의 귀가 자신을 향해 쫑긋거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
이다.
"이번 표행에는 표두고 표사고 모두 나선다는 구만. 그뿐인 줄 아나? 워낙 귀
중하고 신속히 운반해야 되는 표물이라 쟁자수 따위는 쓰지 않는다는 게야."
사내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는지 주변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알만하다
는 표정을 지었다.
하나 얼굴이 얽은 사내는 주위의 관심이 다른 사람에게 쏠리는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꼬투리를 잡았다.
"거짓말 말게. 세권표국에 표두만 열이요, 표사가 이 백을 헤아리는데 지금
저들은 이십 명뿐이 더 되나?"
그러고 보니 흙먼지를 일으키며 동문 쪽으로 사라지는 무리의 수는 아무리 봐
도 스물 남짓에 불과했다.
살집 좋은 사내도 이상하긴 했으나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망루를 가리키며
큰소리쳤다.
"아, 나팔수와 고수가 다 나온 것도 안보이나?"
순간, 그의 손짓에 화답이라도 하듯 다시금 북소리와 나팔소리가 울리더니 꼬
맹이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야! 저기 또 나온다!"
대문사이로 금모호 이규대가 이끄는 무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거 보게. 내가 언제 틀린 소리하던가?"
살집 좋은 사내의 의기양양한 표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세권표국의 기치를 높이 세우고 앞선 일행에 못지 않게 엄정한 모습을 드러낸
이십 명 정도의 무리가 하지철이 이끄는 무리와 다른 방향으로 길을 잡은 것
이다.
"흥, 모두 북경으로 간다더니 만 숫자도 얼마 안되고 그나마 방향도 제각각
이니 무슨 까닭일꼬?"
"그, 그거야……"
하나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사내를 비롯해 길가에 늘어선 구경꾼들 모
두가 영문을 모르고 있을 때 남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인물이 있었다.
항주성 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유한 상인인 듯 노복을 거느리고 사인교(四
人轎)에 앉아 사람들 뒤편에서 유심히 표행을 관찰하던 화복의 중년인이었다.
'흐음, 이십 명씩 표행에 나선다……. 봉래도에서 실어온 예물은 수레 두 대
분량이라 했으니 둘만 진짜고 나머지는 위장! 석백송이 머리를 쓰는군.'
항주 일대의 색주가(色酒家)와 도박장을 주무르며 세력을 떨치고 있는 귀수문
(鬼手門)의 문주로 이제는 흑마방 항주 분타의 책임자라는 신분을 지니고 있
는 흑수독심(黑手毒心) 나운(羅熉)은 더 이상 볼 것이 없다는 듯 노복으로 보
이는 말상의 사내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너는 여기 남아 끝까지 지켜보거라."
고개 숙여 인사한 말상의 중년인이 길가의 다루로 올라가자 나운은 가마꾼들
에게 명을 내렸다.
"금연루로 가자!"
원래 성품이 냉혹하기도 했지만 자신보다 지위가 아래인 것은 물론 모든 흑마
방도의 행동까지 감시하는 마안기무전 소속의 황대진에게 보고해야 하는 처지
가 못마땅한지라 나운의 음성은 냉랭했다.
하나 황대진에게 협조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내려진 이상 지금 본 것을 보고하
고 대책을 의논해야 하는 것이다.
'일전을 벌여 표물을 탈취한다면 몰라도 절강성을 벗어날 때까지 그저 놈들의
행로를 따라가며 감시하는 일쯤이야 분찰 소속의 쥐새끼들과 본 분타의 인원
만으로도 충분하리라.'
네명의 건장한 사내가 메고 가는 가마 위에 앉아 눈부신 햇살을 섭선으로 가
리고 아침부터 기루로 향하는 나운의 모습은 팔자 좋은 부호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순간, 나운과 족히 이 장은 떨어진 곳에서 사람들 사이로 발돋움을 하고 행렬
을 지켜보던 청년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사는게 한가롭기만 한 팔자 좋은 풍류공자로 보이는 청년은 의미심장한 눈초
리로 멀어져 가는 가마와 다루로 올라가는 사내의 모습을 살폈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매달고 나운의 뒤를 따르는 청년이 혼잣말인 듯 뇌까리
는 나직한 음성이 옥색장삼 자락을 스치는 바람결에 묻혀 흩어졌다.
"프흣, 흑마방이라……. 놈들을 그냥 둬서는 본가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 감
히 본인의 내자될 사람을 노리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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