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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당연히 강등될 팀’으로 분류된 유일한 팀인 체스터필드의 기자회견장은 생각보다 시끄러웠다. 체스터필드라는 팀보다는 스티드 말브랑크라는 선수가 가지는 명성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카메라의 앵글은 전체적으로 말브랑크 쪽으로 쏠려 있었다.
“풀햄에서도 친정팀 복귀를 강하게 희망했다고 하는데, 말브랑크 선수가 최약체 체스터필드를 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뭐...”
스티드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기자들은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바짝 긴장했지만, 스티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문에 찬 기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나란히 앉아 있던 크루이노프와 후버드도 그를 바라보았다.
“...왜요. 뭐 다른 이유가 필요합니까?”
스티드는 이제 히죽히죽 웃기까지 한다. 기자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이유 같은 거 없습니다. 선수 인생을 끝내려고 할 즈음에 체스터필드에서 나를 원했고, 나를 원했기 때문에 여기에 온 겁니다. 나를 원하지 않은 팀에서 뛰어본 적은 맹세코 없습니다. 체스터필드는 다른 팀들처럼 나를 원했고, 그래서 체스터필드로 왔죠.”
“풀햄도 스티드 선수를 원했다고 들었는데요?”
“글쎄요, 연락 못 받았는데요. 쑥스럽지만 에이전트가 없어서...나한테 직접 연락이 온 적은 없어서요.”
“어우, 지겨워. 이런 거, 다음부터 안 했으면 좋겠어요.”
“서른여섯이나 먹고는 투정부리기는. 장난하지 마, 임마. 가서 빨리 준비하고 훈련장으로 가라. 오전에 기자회견 하느라 오전 훈련을 빼먹었잖아. 서른여섯 늙은이라고 봐줄 생각 전혀 없으니까, 각오해야 될 거야.”
리차드슨은 식당에서 말브랑크에게 가벼운 점심을 먹이고는 첫 훈련을 준비시킨다. 선수들과의 대면에서는 또 어떻게 진행될지가 궁금했다. 뭐, 그가 아는 한 말브랑크가 결코 낯을 가리는 선수는 아니기 때문에, 선수들과 금방 친해질 건 뻔하기 하지만. 그나저나, 크루이노프 이 사람은 어딜 간 건데 이렇게 안 와? 기자회견을 끝내자마자 어디를 잠시 다녀오겠다며 코치들에게 오전 훈련을 일임한 채 클럽 하우스를 나가버렸는데, 점심때가 지난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흠,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혹시라도 하나 건졌나 모르겠네.
“와 - 말브랑크! 싸인, 싸인!”
으이그, 추접스러운 녀석들. 같은 팀 동료한테 싸인을 받는다는 게 말이나 되냐! 하는 주장 케빈 하트의 목소리가 웅성거리는 선수들의 목소리에 섞여 들린다. 하지만 말브랑크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정도로 훌륭한 선수였다. ‘포스트 지단’으로 평가받았지만 2006년 독일 월드컵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이 때 말브랑크의 나이가 스물여섯이었다. 뭐, 리차드슨이 알아본 바로는 나름대로 절치부심하며 국가대표에 뽑히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는 말이 들려왔다. 때마침 유로2008 예선을 기해 프랑스의 감독이 바뀌었다. 말브랑크로서는 일생에 한 번 찾아올까 말까한 찬스인 것이다. 그의 자리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던 지네딘 지단은 은퇴했고, 로베르 피레스나 루도빅 지울리, 프랑크 리베리와는 충분히 경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런데다가 그를 철저히 외면했던 레이몽 도메네크 감독이 물러나면서, 말브랑크는 대표팀에 올라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차기 대표팀 감독으로 낙점된, - 유벤투스를 세리에 B에서 한 시즌 만에 다시 세리에 A로 복귀시킨 - 디디에 데샹의 마음을 사로잡는 플레이를 펼쳐 보인다. 그의 드리블은 갈수록 간결해졌고, 또 갈수록 과감해졌다. 레블뢰 군단의 유니폼을 입은 그는 지단의 공백을 점차 훌륭하게 메워갔다. 유로2008 지역예선에서 덴마크를 상대로 보여준 그의 환상적인 드리블은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의 것이었다. 끈덕지게 달라붙는 수비수 세 명을 끝내 제치고서는 골키퍼와 맞섰고, 반대편으로 살짝 밀어주며 티에리 앙리의 골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 경기를 바탕으로 해, 그는 유로2008에 전 경기 풀타임 출장할 수 있었고, 대표팀의 새로운 중심으로 되살아났다. 드물게도 오른쪽 미드필더로써 대표팀의 중심이 된 것이다. 물론 중앙에 디아라와 페드레티 같은 젊은 미드필더들이 그 뒤를 받쳐주는 핵이 되긴 했지만, 오른쪽 미드필드에서도 충분히 경기 전체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는 이후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프랑스 대표팀의 중심을 맡아 1골 3도움을 기록하는 맹활약으로 대표팀 인생을 마감했다. 그리곤 리옹으로 복귀해 선수 생활을 계속했고, 올해로 계약이 파기되어 이제 더 이상 선수로 뛰는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할까하는 걱정이 앞서던 때에, 말브랑크는 체스터필드에 합류한 것이다.
“좋아. 난 체스터필드의 주장인 케빈 하트. 물론 말브랑크 선수가 나보다 세 살이 많지만, 우리 팀의 규율은 이래. 감독님과 코치님의 철저한 지시고. 난 주장이고, 편하게 말하도록 하지. 선수들 소개부터 먼저 해줄까?”
“아니, 아니. 내 소개부터 먼저 해야겠지.”
말브랑크는 슬쩍 앞으로 나섰다. 과연 노련하게 선수들을 휘어잡는 뭔가가 있었다. 이게 바로 ‘젊은 팀’ 체스터필드에 필요한 노련미요 관록이다. 순간적으로 선수들의 주의를 집중시킬 수 있는 능력.
“난 스티드 말브랑크다. 솔직히 말해서, 웬만하면 다 나를 알겠지? 정말 국가대표 경기를 아예 안 보고 자란 녀석이 아니라면 말이야. 어쨌든, 난 오른쪽 미드필더다. 경쟁자가 누군진 아직 잘 모르겠지만, 잘 해 보자고. 아, 그리고 서른여섯 살이지.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
있을 리가 없다.
“역시 내가 제일 노땅이군. 좋아, 뭐 더 할 말 없지. 잘 해 보자고.”
“좋아. 그럼 내가 선수들 소개를 해 줄게. 음...그래. 먼저 샘킨스. 오른쪽 윙백이고, 프랑스인이야. 반갑지?”
“뭐, 그닥 국적에 얽매이진 않아서. 어쨌든 반갑다, 샘킨스.”
“영광이에요. 말브랑크 선수와 같은 팀에서 뛴다는 건.”
샘킨스는 수줍게 뒷머리를 긁었다. 그 뒤로 하트는 여러 선수들을 쭉 소개시켜 나갔다. 그리고.
“음, 말브랑크. 이쪽은 문. 네임은 의혁이야. 문의혁. 발음하기 힘드니까, 그냥 문이라고 불러도 좋아.”
“아... 잘 부탁해. 넌 포지션이 어디지?”
“오른쪽 윙어. 잘 부탁해.”
의혁은 다부지게 말브랑크가 내민 손을 꽉 잡았다. 포지션 경쟁을 해야 할 상대가 들어왔다는 건 제법 꺼림칙한 일이었다. 의혁은 닉 애쉬튼과의 주전 경쟁에서 이미 한 발짝 앞서 있는 상태이긴 했지만, 서효범 역시 언제든지 오른쪽 윙어로 뛸 수 있었고, 말브랑크까지 들어왔기 때문에 의혁도 쉽게 주전을 장담할 순 없었다.
“흠. 드디어 나왔군. 오른쪽 미드필더라. 나한테 자리 뺏기지 않게 조심하라고. 나이가 들어서 헉헉대면서 뛸지는 몰라도 7~80분은 거뜬하니까. 10분만 그라운드에 있는 데 만족하는 선수는 아니겠지?”
“물론.”
오호,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데? 최고의 축구인생을 보내고 그 마지막을 장식하려는 말브랑크와, 주전 자리를 꿰차고 앉아 그를 맞이한 문의혁. 일이 심상찮게 흐른다. 벌써부터 묘한 라이벌 관계가 형성된 느낌이다. 하트도 그걸 느꼈는지, 빨리 다음 사람으로 넘어간다.
“여긴 세오. 문처럼 코리안이지. 우리 팀의 ‘나름’ 판타지스타라고.”
“하하하. 잘 부탁해, 말브랑크.”
“응. 잘 해 보자고, 세오.”
모든 선수들과 말브랑크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이제 막 가벼운 러닝훈련에 들어갔을 무렵이 돼서야 크루이노프가 훈련장에 엉기적대며 나타났다. 리차드슨은 그에게 다가가 퉁명스럽게 면박을 준다.
“벌써 몇 분을 늦은 겁니까. 선수들에게 매기는 대로 벌금 무셔야죠.”
“아, 그렇게 말하지 마. 애들이 들을라. 나도 나름으로 열심히 하고 왔단 말이야.”
“뭘요?”
“음...아, 그렇지. 미리 알면 재미없을 거야.”
크루이노프는 후후후 웃으며 운동장 쪽으로 걸어나간다. 그러면서 자신도 가벼운 스트레칭을 한다. 아무래도 몸이 결려 있으면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많으니까.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선수들과 피치 위에서 직접 땀을 흘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축구하는 사람들은, 그 땀으로 서로 소통하니까.
훈련이 끝나고 나서, 크루이노프는 말브랑크를 따로 불렀다. 아무래도 선수들과는 사이가 금방 친해지겠지만, 감독은 경우가 다르다. 물론 리차드슨이라는 걸출한 조력자가 있겠지만, 감독도 나름으로 선수와 친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부르셨나요.”
“응, 들어와.”
크루이노프는 따라 놓은 커피를 내밀었다. 말브랑크도 사양 않고 받아들었다.
“할 만 한가? 체력적으로는 어때?”
“이제 겨우 한 번 훈련했을 뿐인데요, 뭐. 넉넉하죠. 이 정도는 너끈합니다.”
“다행이네. 하지만 훈련의 강도는 점점 높아질 거야. 각오하고 있어야 될걸.”
“물론이죠. 리옹에서도 정상적으로 훈련을 소화했어요. 이곳에서도 가능할겁니다.”
“난 제법 힘들게 시킬 생각이야. 늙었다고 봐주는 건 없을 거네.”
“압니다. 리차드슨이 감독님에 대해 여러 번 얘기했거든요. 그런 것 쯤 각오하고 왔죠.”
“미리 들었다니 다행이네. 흠. 또...올해까지만 뛸 생각인가?”
“흠. 글쎄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럴 수도 있죠. 아닐 수도 있고요. 하지만 템포 빠르기로 유명한 프리미어리그에서 서른일곱이라면 좀 힘들긴 한 나이죠.”
“하긴. 그건 그렇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체스터필드에서 미래가 더 보이면 몇 시즌 정도 더 뛰는 것도 생각해 볼 겁니다. 웬만한 일이 없다면 아마 은퇴도 여기서 하게될 것 같고요. 그나마 리차드슨이 있어서 이 정도로 결정한 거죠. 아니었다면 제가 체스터필드라는 팀을 알기나 했을까요. 솔직히 말하면, 몰랐어요.”
“그랬을 만도 하지. 뭐 자네야 워낙 톱스타였으니까. 괜찮아.”
둘의 대화는 제법 길게 이어졌다. 크루이노프는 궁금했던 점을 거진 다 물어보았고, 아무래도 사교성이 좋은 편인 말브랑크에게 금방 호의를 가질 수 있었다. 톱스타답지 않게 어느 정도 겸손한 면까지 갖추고 있었기에 더더욱 맘에 쏙 드는 친구였다.
“좋아. 가 봐도 좋네. 푹 쉬고, 내일 오전 훈련 늦지 말고. 늦으면 벌금이야.”
“흠, 알겠습니다.”
문을 열고 나가는 말브랑크의 뒷모습에서, 크루이노프는 한 줄기 희망을 본다. 이제야 한 사람이 생긴 것이다. 팀의 구심점이 되어 이끌어줄 만한 진짜 인물이. 그것이 그라운드 위에서건 아니건 대스타의 존재만으로도 그것은 충분히 핵이 될 수 있다. 흔히들 말하는 정신적 지주라는 것이다. 크루이노프와 리차드슨, 후버드가 원한 선수들은 바로 그런 선수들이었다. 비록 늙었다 할지라도 오랜 경험으로 인해서 팀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선수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경기를 할 때는 이렇게 해야 하는 거야!’ 라고 그라운드 위에서 이끌어갈 수 있는 선수들. 상대는 더 이상 번리나 헐 시티, 코벤트리 시티 같은 팀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체스터필드의 상대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아스날, 첼시, 리버풀 같은 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역할을 해줄 선수 중 한 명이 바로 스티드 말브랑크이다. 크루이노프는 오늘, 제법 편안하게 자리에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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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구절, 어디서 본 건데 인용했습니다(-_-) 어디서 봤더라..칼럼이었나, 뉴스였나, 할 겁니다.
그 '상대는 더 이상~ 팀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요.
독서실인데 평소처럼 읽기에 편한 줄 간격이 나오질 않네요. 죄송합니다. 눈이 아프시더라도
이해해 주시길 -
첫댓글 1등
에이 일등독자 뭐이래 아니아니 악플부대원이엇구나 역시 그랫어 [정신분열]
2등
미워요ㅠㅠ
로드님 자서전은 정말 재미있어욤 =_=ㄲㄲㄲ
감사합니다ㅇㅍㅇ 다음회에 또뵈요!!
잘봤습니다 넘재미있네요.^0^
체스터필드 동지님이네요ㅠ_ㅠ 아마 카페에 우리 둘밖에 업ㅂ을거에요(...)
선립흘
악플세데스 컬흐흑이병과 합동공격이라니 립흘만남기고 내용안봤다 파문 일파만파
좋은 내용이였음. 보진않았지만(...)
되게재미씸ㅜㅜ
감사합니당ㅇㅇ감사해용ㅇㅇ
스테 말브랑코가 나오다니 ㅠㅠ
1편을 안봤다는소리 OTL
진짜 진지하네요 이소설은.. 그만큼 재미있음..
언제나 처럼 잘 보고 갑니다... 로드님 그동안 쓰셨던 소설들의 제목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언제 한번 그동안의 소설들을 다시 처음부터 보고 싶네요...^^
내용은 봤는데 후감상이 귀찮데(...)
동감동
이사람 연재속도가 빨라졌다 ㅇ_ㅇ
뭔가 밀려오는 포스에 산뜻합니다 ㅋㅎ
잼있네요 저도 이거보고 하위리그 팀해서 승격시키려구요 ㅎ
역시 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