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내용을 요악하자면 자본가가 이윤을 쪼개 노동자의 임금을 주는게 아니라 노동자의 임금이 되는 몫은 노동자가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상품과 동시에 생산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서 잉여가치는 모두 자본가의 몫으로 돌아가게 된다. 한편 이 생산이란 항상 사회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 생산자들은 수많은 사회적 관계를 맺게된다. 이를 생산관계라 한다. 이것은 생산수단을 누가 소유하고 있는가에 따라 그 성격이 규정된다.
생산관계는 인간의 의식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물질적 성격을 갖는다. 노예제 사회에서 있었던 생산관계가 원시사회에서는 존재할 수 없듯이 생산관계의 성격은 생산력의 발전수준과 성격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노예제사회 - 봉건제사회 - 자본주의사회의 흐름을 본다면 생산력에 변화가 생기면 - 대체로 증가한다. - 생산관계도 변하게 된다. 생산관계와 생산력은 분리된게 아니라 일정하게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역사적 유물론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일정한 통일은 생산양식이라 불리워진다. 앞서 기술했듯이 생산은 사회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생산양식의 경제법칙과 노동자들의 생활조건 및 노동조건, 생산력 발전에 영향을 끼치는 기타 요인들은 생산관계에 달려있다. 생산관계가 초딩이면 생산력발전도 크게 둔화되고 사회가 정체되게 된다. 그럼 생산관계는 어떤 상황에서 초딩이 되는가.
생산양식으로 표현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통일은 그것들 사이에 모순이 생길수도 있다. 이 양자 사이의 모순은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갖는 서로 다른 발전방식에서 찾을수 있다. 역사를 돌이켜볼때 인간이 지닌 기술이나 생산능력, 노동경험등은 꾸준하게 진보해 왔음을 알수있다. - 초딩들은 마르크스주의라면 이런 진보에 부정적일 것이라며 잘못 이해하는바가 있다. 지혼자만 잘못 이해한다면 괜찮은데 꼭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려 든다. - 앞서 생산관계는 생산수단을 누가 소유하고 있는가에 달렸다고 했다.
문제는 생산력의 발전을 생산관계가 못받쳐주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다. 계급사회에선 생산관계가 일단 발생하면 그것을 법이나 정치적 제도등으로 굳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생산관계는 초딩화되고 이럴때엔 생산관계를 새로운 생산관계로 교체해야 하며 이렇게되면 생산양식도 달라지게 된다. 원시사회 - 노예제사회 - 봉건제사회 -자본주의사회로 나누는 기준도 여기에 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갈등은 다양한 측면에서 모순을 첨예하게 만든다. 특히 초딩화된 생산관계에 이해를 갖는 계급과 새로운 생산관계에 이해를 갖는 계급간의 모순이 심화된다.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계급이 이미 초딩화된 생산관계를 유지시키려 발버둥을 쳐도 사회는 결코 과거의 생산력 수준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새로운 생산관계로 교체되어 새로운 생산양식이 출현하는 것만이 유일한 갈등의 해결방안이다. 그렇게 역사는 진보한다고 마르크스는 주장한다.
이처럼 역사적 유물론에 따르면 생산 양식에 근거한 하부구조가 상부구조인 정치나 법률, 사상, 문화등을 결정한다. 따라서 하부구조의 변화는 상부구조의 변화도 초래하게 된다.
흔히 초딩들은 마르크스의 주장은 폭력혁명에 의존한 주장이라고 매도하지만 글쎄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자연의 흐름처럼 스스로 할수있는게 아니라 아무리 조건이 들어맞아도 인간의 행동이 있어야 실현될수 있는 것이다. 폭력이란 일어날수도 안일어날수도 있는 유동적인 사안일 뿐이다. 초딩화된 생산관계에 이해를 갖는 계급이 역사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무슨 문제가 있을까.
그럼 초딩화된 생산관계에 이해를 갖는 계급과 새로운 생산관계에 이해를 갖는 계급에 대해 마르크스는 어떻게 설명할까. 우리가 지금 살고있는 이 자본주의사회를 예로 살펴보자.
모두가 알다시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선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이 기본 계급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들간에 힘의 균형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데 노동자계급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고 자본가계급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강점을 가지고 있다.
역시 모두가 알다시피 노동자가 처우개선을 요구하면 노동자들의 투쟁때문에 경제활동 못해먹겠다느니 내가 공장없애면 경제가 망가짍텐데 다죽어볼래라느니 갖은 협박을 다한다. 정부가 경제규제의 기미를 조금이라도 보일라치면 공장을 해외로 이전한다느니 외국 자본을 들여올수 없다느니 그렇게되면 경제가 풍지박살난다느니 역시 협박한다. 그리고 이런 협박들은 아주 잘먹힌다. - 이들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노동귀족이란 웃지못할 신조어까지 개발해 내었다. 한편으로 우리나라에서 첫손꼽히는 대기업인 삼성은 무노조를 고수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 앞서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력 이상을 생산해내지만 나머지 잉여가치는 자본가의 이윤으로 돌아간다고 설명했다.
생산은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데 반해 소유는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시스템이 자본주의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집단적 생산의 흐름속에 있으므로 자신이 직접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있으면서도 잉여가치의 존재를 알기 어렵다. 자본가들은 대개 이 점을 악용해서 노동자들의 처우개선 요구를 묵살하곤 한다. 실상은 생산과정 속에 이미 이윤의 원천이 가려져 있을 뿐이다. 이 사회적 생산과 사적 소유 간의 모순의 자본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모순이 되겠다. 이런 생산관계의 모순이 생산관계의 초딩화를 재촉하는 것이다.
일단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로 하겠다. 아는것도 별로 없으면서 마르크스의 사상을 언급한 것은 본론으로 들어가는 흐름에 맞추기위해 적은 것이다. 세계사의 흥미로운 사건들을 다룬후 진짜진짜 본론인 한국 현대사로 접어들어 하고싶은 이야기들을 늘어놓도록 하겠다. 초기 자본주의의 모습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까 한다.
역사 사기극의 종언 - 4
번호:857 글쓴이: 매미
조회:47 날짜:2004/08/09 09:08
자본주의가 시작된 초기의 자본(생산수단이나 화폐)은 애초부터 수많은 농민이나 수공업자 그리고 식민지 원주민들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자본의 축적은 경쟁이나 수탈을 통해 소수의 자본가가 다수의 소생산자, 혹은 식민지 원주민들의 자산을 장악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농민은 생산수단인 토지를 빼앗겼고 수공업자는 자신들의 작업장과 도구를 빼앗겼다. 이들에게 남은건 몸뿐이고 노동자계급을 형성하게 된다.
자본주의시대 전의 사회는 농업사회였다. 사회 구성원 다수가 농민이었고 이들의 몰락이 자본주의의 성공에 주효했다고 볼수 있다. 농민의 몰락과정을 근대유럽을 통해 알아보자.
15세기 농노제가 폐지되면서 농민들은 소자영업자가 되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팔았고 농업의 성격이 변화되면서 농민들 사이에서는 생산과 판매를 둘러싼 치열한 경쟁이 전개되었다. 흔히 이런 경쟁은 얼마가지않아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를 형성하게 된다. 당시 영국의 사정을 통해 이 경쟁의 결과를 살펴보자.
승자가 패자의 토지를 접수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토지거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토지시장의 변화를 부른 것은 직영지의 매각과 대여였다. 16세기에 들어 직영지는 소수의 부농에게 일괄적으로 임차되었다. 패자는 토지를 잃었기에 임금노동자로 전락했다.
토지 소유 격차를 가져온 두번째 요인은 헨리 8세에 의해 실시된 수도원의 해산과 그 토지의 몰수 매각, 왕실령의 매각이었다. 이에 따라 장원 - 봉건제 시대의 기본 경제활동영역이었다. 주로 영주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농노가 생산을 담당한다. - 의 매매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는데 토지를 사들인 계층은 도시 상인, 젠트리, 부농등이었다. 그 결과 영국에서는 농업의 자본주의적 분해(계급 성립)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자본주의가 성립하였다.
이때의 신흥 지주들의 토지 이용 방식은 영주의 장원처럼 권력의 기반이라기보다는 투자대상이었다. 토지를 이용해 보다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 곰곰히 앞의 내용을 짚어보자. 이윤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 봉건적 농업체제를 변혁하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었다. 즉, 생산관계의 재정립을 통해 생산양식이 바뀌어지는걸 뜻한다. 영국에서는 <엔클로저>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엔클로저는 두가지 유형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공동 경작을 해야하는 개방 경지제의 불합리성을 극복하기 위한 토지 통합이었다. 통합과정에서 패자는 배제되어 촌락의 공동 토지를 이용할수 있는 권리조차 상실당했다. 또 다른 유형의 엔클로저는 세계사 시간때 배우듯이 양을 키우기 위한 토지의 통합이었다. 모직물 공업의 발전과 모직물 수요의 급증이 농촌의 양목장화를 부른것이다. 양의 가치가 인간의 가치를 초월하는 대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양이 난폭해져 사람을 먹어치우기 시작한 것이다.' - 물론 초딩들은 그럴리가 있겠냐며 정색을 할테지만 - 아무튼 자본주의의 시작부터 이렇게 대부분의 사람들과 맞지가 않았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로 못넘어간 나라들은 사정이 좋았는가하면 그것도 아니다.
13세기 이래 프랑스에서도 고전 장원제가 해체되기 시작됐다. 역시 소규모 자영업자 농민들이 출현한다. 이 무렵 백년전쟁으로 더욱더 영주들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 드디어 숨죽이던 왕이 영주들을 완전히 복속시켜 절대주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농민들에겐 이 절대주의 시대가 일장일단을 갖고 있었는데 장점은 국왕은 영주들보다 농민들이 토지를 갖고있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오호~ 웬일~? 단점은 농민들의 안정적인 토지 소유를 도운것은 더 많은 세금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하하... 16세기 프랑스는 각종 전쟁을 일으키고 개입하여 유럽의 최강국으로 거듭났지만 이에 따라 전쟁비용을 대기위한 조세부담도 한층 늘어났다. 게다가 교회도 한몫보겠다고 여전히 수탈에 앞장섰고 소규모 토지는 인구의 증가로 더욱더 작게 나뉘어 분배되었다.
그러나 세금은... 더 올라간다!! 그나마 있던 몇몇 대농장 또한 자본주의적인 농업 경쟁과는 무관했다. 이들은 소작인에게 소작료를 받는데에 여전히 만족했고 그 결과 프랑스는 소농 경영 체제가 확고히 자리잡았고 농업 구조는 후진적인 상태에 머물렀다. 이런 상황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 신흥 부르주아가 전면에 나설때까지 달라지지 않았다.
쉬파... 동유럽은... 사실상 농노제로 돌아갔다. 영주들이 국왕을 여전히 누르고 있었다.
그 이후의 역사는 알다시피 영국의 명예혁명, 프랑스 혁명, 미국의 독립혁명등과 각국의 산업화로 이어진다. 초기 자본주의는 야만이 판을 치는 시기였다는 점도 잘알테니 당시의 비참하고 어이없는 대다수 노동자들의 삶은 지금 이야기하지 않겠다. 이들은 '당연히' 저항했고 러다이트 운동과 차티스트 운동을 거쳐 노동조합 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봉건제나 자본제나 사람과 맞지않는 제도였다.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바는 역사발전에 맞지않은 제도는 반드시라해도 좋을만큼 도태된다는 것이다. 봉건제를 누르고 역사에 등장한 자본주의도 이것을 거스를수 없다.
물론 많은 이들이 자본제야말로 인류역사의 종착역이라며 역사의 흐름은 끝났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이들중에서조차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에 완전히 만족하지 않은것도 사실이다.
자본주의를 봉건제로 돌리려는 시도는 곳곳에서 있었지만 일순간의 성공에 그쳤다. 오히려 그 성공이 자국과 자민족을 엄청난 불행에 빠뜨리며 반동을 기도한 이들에겐 자신에게 정해졌던 몰락보다 더 심한 몰락을 가져오게 한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의 주장에 공감이 가지 않는 것은 이들이 과거 박정희 독재개발시대에 워낙 짙은 향수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이 박정희 향수는 현재 우리나라를 정체내지 도태시킬 제1요인이며 이를 깨기 위해선 과거현대사에 대한 집중조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부르봉 왕가나 동유럽의 영주들처럼 더 큰 몰락으로 접어들고 싶지 않으면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도 현대사 재조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정치계에서 보수의 대표주자로 떠오른 발끈해 공주를 끌어내야 할것이다.
역사 사기극의 종언 - 5
번호:861 글쓴이: 매미
조회:32 날짜:2004/08/10 09:19
영국에서 엔클로저가 진행되어 자본주의가 세상에 모습을 드려내려는 시기와 함께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도 같이 진행된다. 같은 시기에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를 썼는데 소유의 평등을 도입하지 않고서는 정의와 번영을 실현할수 없다고 지적했다. - 김용갑,정형근 등의 시각으로 그의 사상을 잰다면 빨갱이 수괴급정도 되겠다.. - 그 이후에 토머스 뭔처나 재침례교 교도들의 평등세상을 향한 저항도 있었다. 18세기에 계몽주의가 유럽을 휩쓸다시피하며 절대주의 시대를 끝으로 봉건제는 막을 내리게 되지만 이후의 부르주아 체제에 만족을 못한 이들이 새로운 체제에 대한 고민과 실천을 하게된다. 근대 사회주의의 시초이다.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자로서 프랑스의 생시몽과 푸리에, 영국의 오웬 등이 있다는데 그중 생시몽은 과학기술과 생산자들의 역할을 중시했다고 한다. 시민혁명의 이념중 하나인 형제애의 복원을 기도했으며 이를 위해 새로운 기독교를 주장했다. - 생시몽은 콩트의 스승이기도 하다. - 푸리에는 독설과 풍자로 유명한데 가장 유명한 구절 하나를 소개한다.
"의사는 자기 이웃 시민이 자주 오랫동안 열병에 걸려주기를 바란다. 변호사는 모든 가정이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송사에 매달려 있기를 바란다. 건축가는 거리의 1/4가 불타기를 바라며 유리상은 우박이 쏟아져 창이 깨지는 것을 기뻐한다. -<중락>- 이리하여 문명하에서는 개개인이 다중에 대하여 의식적인 전쟁 상태에 있다. 이것은 반사회적인 산업제도하에서는 피할수 없다. 이처럼 웃지 못할 상태는 개인에게 좋은 것이다중의 복지와 합치되는 새 사회가 실현되면 소멸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오늘날에도 자동차 수리센터 사장의 딸은 사람이 다치지않는 범위하에서 자동차가 많이 망가졌으면 한다. 이라크의 불행은 한국에겐 기회가 된다고 굳게믿는 이들도 있다. 이들이 본래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이런 소망을 가지는건 아닐 것이다.
영국의 오웬은 직접 공장을 인수하여 자신의 믿는바를 실천했고 더 나아가 수십개의 공동체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셋다 이미 자본의 맛에 도덕적 이성적 방향감각을 상실한 사회에 대한 호소와 배려를 통해 사회개혁을 실행하려 했기에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들은 마르크스 이전의 사람들이다. 또한 이들은 계급투쟁이나 정치투쟁,혁명에 반대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건 싸늘한 무관심과 냉소였다. 마르크스주의의 탄생에 온갖 억지와 기만,독설을 내뱉기전에 이들의 호소에 귀기울여 봤어야 할것 아닌가?
봉건제를 혁파하고 새로 등장한 신체제인 자본주의에 대한 연구는 이제 유토피아를 꿈꾸는 공상의 단계를 지나 사회학적인 연구로 들어간다, 앞서 생시몽의 제자로 언급한 콩트 역시 그중 한사람이었으며 교육을 수단으로 해서 무산자 계급에게 인간의 귀함과 헌신이라는 감정을 일으키고 무산자 계급을 국가에 재통합하려 했다. - 그당시나 오늘날이나 교육마저 자본의 논리에 놀아나 이런 역할의 수행은 기대하기 어렵다. - 그는 생산 수단을 노동자 계급의 소유로 바꾸는 문제에만 집착하는 것은 중세 이후에 전개된 노동자와 기업가 사이의 분업과 보편적 종교를 통해서 인간을 훈련하고 인간을 고귀한 이상에 헌신하도록 할때에만 새로운 산업 사회의 체제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생각이라고 봤다. - 하지만 수구들은 입모아 이렇게 말한다. 이상이 밥먹여 주냐고. - 콩트를 탓하기보단 자본의 파괴력이 콩트의 예상보다 더 미쳤었다고 보는게 맞는듯하다.
자본주의의 형성과 발전에 사람마다 제각각 다른 분석을 내놓지만 자본주의를 앞정서서 이끈 곳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기존의 카톨릭 지배와 교리에 맞서 싸우던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거나 그 정신이 널리 전파된 곳이라는 것이다. 카톨릭 교회가 구봉건제나 절대왕정시대와 밀접한 연관을 지녔던 반발감도 있겠지만 신교의 그 무엇이 부르주아 계급을 감동시킨 요인도 있으리라. 남북국시대 신라 말기때의 교종은 신라왕실을 선종은 호족을 감동시켰고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듯이 말이다. 사실 자본주의는 15세기에 이미 매우 발달한 은행 체계를 가졌던 카톨릭 하의 이탈리아 도시들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비교적 후진국이었고 프로테스탄트 지역이었던 북서 유럽에서 발생했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가 자본주의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정신이 가진 가장 중요한 특징은 기업가의 경제 행위에 높은 윤리적 의미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기업가는 자본주의적 영리 행위를 단순히 '밥벌이'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윤리적 가치와 존엄성을 확인해 주는 행위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자주 악당으로 각종 연극이나 소설에 출연하여 욕을 얻어먹는 유태인들은 주로 상인이나 고리대금업을 맡았다. 경제적 영리 행위와 윤리,도덕,명예는 서로 반대편에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예전에 비하당했던 영리 행위의 윤리적 승화가 바로 자본주의 정신이 수행하는 기능이다. 그리고 베버는 자본가들이 돈을 벌어서 축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재투자에도 열심이며 대부분의 노동자는 하는일에 열심인 점에서 프로테스탄티즘에서 강조하는 '금욕'과 '절제','직업소명'의식 - 그는 프로테스탄트 종파들중에서도 칼뱅주의를 지적했다. - 이 구현되는 실례를 보았다.
우리는 칼뱅주의의 '구원예정설'이 숙명론적 체념이나 세상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타나지 않고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신의 구원을 확인하려 든다는 점을 고등학교때 배웠다. 칼뱅주의의 특징을 더 덧붙인다면 타 프로테스탄트 종파보다도 더 신의 초월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칼뱅의 구원예정설은 신도들에게 구원의 증거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켜 그들의 내면에 엄청난 긴장을 형성했다. 동시에 신의 초월성이라는 교리는 세계를 하나의 철저히 객관화된 영역, 세속적이고 의도적 행동을 통해 조작할수 있는 영역으로 인식하도록 했다. 이 두가지 교리가 서로 결합하여 개개인은 금욕주의를 통한 자신의 세속적 소명의 완수와 신의 의지의 실현을 동일시하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유물론, 베버는 관념론... 그래서 마르크스가 옳고 베버가 틀렸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자본주의의 기원을 경제적 하부구조가 아닌 종교적 상부구조의 관점에서 다루었고 유물론에 대한 비판이 다분하지만 이 둘은 근대 서구 문명의 가치와 운명에 대해 공통된 문제제기를 한다. 원래 수단이었고 또 수단이어야 할 노동과 이윤 추구가 목적으로 변질된 주객전도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베버는 이 변질된 상태가 바로잡히지 않을경우 인류의 미래가 암담하다는 경고를 했다.
위에 열거한 이들은 자본주의가 스스로 합리성을 갖추길 진심으로 원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후 자본의 역사는 이들의 기대에 부합하지 못했다. 불행하게도 초딩들은 베버가 자본의 번식본능을 미화시켜준데에만 눈이가지 그의 경고는 무시하기 때문이다. - 앞으로도 베버의 경고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 자본주의는 탄생했을때부터 수많은 노란신호등을 무시하고 과속폭력운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런데 이게 인류 최후의 선택일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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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기극의 종언 - 6
번호:862 글쓴이: 매미
조회:27 날짜:2004/08/10 23:44
1870년대를 기점으로 공업은 규모나 기술면으로 거대해지고 새롭게 탈바꿈했다. 강철,전기, 석유,화학이 공업의 발전을 주도했으며 특히 강철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조선업을 비롯해 건축등 다양한 분야에 사용되었다. 이런 공업들은 대규모의 부지와 값비싼 설비 그리고 많은 수의 노동자들을 필요로 한다. 자연히 기업의 설립과 운영에 소요되는 자본의 규모도 커졌고 그 결과 처음부터 거대한 자본을 끌어들일수 있는 소수의 기업만이 참여할 수 있었다. 이들은 자기 분야에서 독점적 위치를 확보했다. 자본가들은 당연히 많은 투자에 따른 이윤을 보장받고 싶어했고 이를 위해 생산력증대에 힘을 쏟았다. 이로인해 노동의 속도와 강도는 전에없이 강화되었다.
이와함께 소비시장이 엄청나게 커졌고 공장에서는 소비에 발맞추어 수많은 양의 상품을 생산해내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변화는 공황을 불러왔다. 엥...?? 당혹해하는 초딩이 몇몇 있을거다. 잘나가다 왜 공황으로 빠지는걸까하고 말이다. 중3사회 교과서에 힌트가 있다만 1929년 '암흑의 목요일'을 다루는 부분에서 알아보도록 하자.
아무튼 이 공황을 극복하기위해 각국이 앞다투어 내놓은 대안은 보호무역주의의 부활이었다. 국내 시장을 높은 관세장벽으로 지키는 것이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나라밖에 어디 상품을 팔아먹을 곳이 없을까 지구촌 방방곳곳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러나 보호주의와 시장 쟁탈전은 오히려 세계 시장의 수요를 더욱 위축시켜 불황의 심화만 불러왔다.
당연히 불황속에 각 기업들간의 경쟁은 더욱 쳠예하게 일어났다. 특히 이미 대량 생산 체제와 대자본은 가진 대기업은 가격경쟁을 통해 타 경쟁기업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하게 된다. 독점이 나타난 것이다. 이들 독점 기업들 간에서 여러 답합이 일어나고 그게 우리가 중3사회시간때 배운 카르텔(지들끼리 생산량과 판매를 조절하는것), 신디케이트(판매나 원료구입을 공동),트러스트(지들끼리 합치는 것),콘쩨른(재벌) 등이다.
산업에서 독점이 일어나는 것과 함께 은행에서도 독점이 일어난다. 이전의 은행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그냥 예금하고 돈빌리는 정도의 역할이었으나 산업의 독점화로 인해 많은 자본이 필요하게 되자 돈을 항시 쌓아놓고 있는 은행의 중요성이 커진 것이다. 중소 은행들의 합병으로 거대 은행이 만들어지고 이들은 기업에 대한 투자여부를 놓고 기업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물론 한편으로는 거대기업이 은행의 주식을 사들여 은행을 지배하는 현상도 일어난다. 그 결과 거대 금융 독점 자본이 형성된다.
이렇게되자 더더욱 국내의 협소한 - 상품이 필요하나 소비능력이 안되어 협소해져버린 - 시장으로는 도저히 이윤의 극대화를 이룰수 없게 된다. 상품을 내다팔곳도 필요하지만 넘쳐나는 자본의 수출 또한 필요해지게 된것이다. - 이해가 안되는 초딩은 열심히 <대항해시대 2>를 해보도록 - 물론 국내에서도 농촌의 낙후화를 막기위해서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중소기업의 최소한의 생존만이라도 지키기위해서 자본투자를 애타게 기다리지만 쓰바... 웬만해선 이런 것들은 '돈이 안된다.' 자본은 단 하나만 물어본다. '돈 되냐?'
당시 아시아나 아프리카에는 철도도,도로도,전기도,가스도 없었다. 자본은 부족하고 지대가 낮으며,임금이 낮고,원료의 값이 헐값이었다. 이런데에 투자하면 대박이다. 과잉 자본의 수출은 과잉 상품의 수출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는 19세기 민족주의에 기초한 '국가주의'와 결합해 '제국주의'라는 괴물을 낳게 된다.
19세기 제국주의의 전개는 모두다 잘 알것이라 믿는다. 우리나라도 일제에 의해 결코 잊을수없는 상처를 받았지 않았나. 또한 아직도 제국주의는 숨을 거두지 않았다는 것도 이라크전쟁을 통해 충분히 입증이 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 제국주의의 행진속에 우리나라도 끼어 '자랑스럽게도' 침략국 명단에 올랐다는 것이다. 그럼 이제 우리는 우리나라를 위해 열렬히 제국주의를 환영하고 기쁘게 생각해야하나? 19세기 유럽의 각국 국민들은 그렇게 했고 20세기에 이르러서는 국가가 두차례나 세계대전을 일으켜도 충성을 다했다. 물론 많은 국민들이 덧없이 목숨을 잃었고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은 잿더미 위에서 극도의 괴로움에 몸부림쳐야 했다. 또한 우리가 사는 한반도는 세계 최고의 화약고이다. 그래도 제국주의가 좋아?
제국주의라는 괴물은 자연스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괴물은 자본주의의 속성에 잘들어맞기 때문이다. 극도의 착취를 너그러이 허용해주는 이 좋은 괴물을 왜 갖다버리겠나.
첨언)
우리나라의 수구꼴통들은 다른나라의 꼴통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내었다. 간단히 열거해보면 일본에게 달라붙어 나라가 35년동안 일제의 식민지로 만든 일, 일제가 물러나자마자 미국에 달라붙어 살아남아 김구를 암살하고 분단의 고착화를 이끌어낸 일, 바뀌어진 주군인 미국에게 간쓸개 다빼내 아부하며 미국의 위성국가쯤으로 나라위신을 깍아내린 일, 미국과 함께 이라크를 침공, 침략국의 영예를 얻어낸 일등이다. 식민지,분단국가,위성국가,침략국가... 국가로서 받을수 있는 오명을 반세기만에 다 받아내는 재주는 아무나 부릴수있는 것이 아니다. 그뿐인가. 며칠전 지만원이 토론 석상에서 야간기습북폭을 주장했다. 나라가 완전히 지도에서 지워지는 멸망까지 원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 사기극의 종언 - 7
번호:904 글쓴이: 매미
조회:13 날짜:2004/08/23 11:28
비뚤어져가는 자본주의에 대한 조직적 저항중 대표적인 것은 3차례에 걸친 인터내셔널이었다. 마르크스는 제1 인터내셔널(국제 노동자 협회)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인터내셔널의 사상적 토대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란 구호로 집약된다고 본다. 노동자계급이 스스로를 자본의 멍에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전세계의 노동자들이 하나로 뭉쳐야만 한다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마르크스주의가 그동안 여러종류로 나뉘어 있었던 사회주의를 뛰어넘어 전세계에 퍼질수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제1 인터내셔널 전에 국제비밀조직이던 '공산주의자 동맹'에서도 마르크스는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1847년 공산주의자 동맹 2차총회에서 발표된 동맹의 강령도 마르크스가 쓴 것이다. 이 강령이 <공산당 선언>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의 1800년대 유럽은 새로 기득권자로 떠오른 부르주아 계급과 혁명의 주도세력이었으면서도 억압과 착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노동자계급간의 공방이 끊이지않던 시기였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자본주의가 무너지는 혁명이 있을것을 내다봤고 혁명의 때가 무르익었음을 확신했다.
<공산당 선언>은 강령의 의미를 지녀 내용이 논리적이라기보단 정치적 주장과 감정적 설득이 많은 글이라는 한계가 있다. 뭐 논리적인 내용이야 마르크스의 다른 저작들에서 충분히 찾을수 있을테니 그의 사상을 집약적으로 적어논 요약서라는 것이 큰 흠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마르크스는 1883년에 죽고 제1 인터내셔널은 창설된지 10여년만에 문을 닫았으나 이미 마르크스의 사상은 전세계에 퍼져 이후 전세계의 변혁운동에 중요한 사상적 토대가 된다.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의 주도로 제2 인터내셔널(국제사회주의자대회)이 출범한다. 전쟁의 세기인 20세기로 넘어가기 직전의 1889년의 일이다.
20세기로 넘어가는 시기는 유럽의 노동운동은 정치 운동이 활성화되는 때였다. 독일에서는 1875년 사회주의노동당(후의 사회민주당)이 만들어졌고 프랑스에서는 1905년 통일사회당이 등장했으며 영국에서는 1906년 노동당이 만들어진다. 잠시 노동자를 위한 정치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이해하지도 않고 - 이해할 머리도 안되며 - 극단적인 적개감을 보이는 수구꼴통들과 노빠들을 위해 한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영국에선 노동당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노동자의 대표가 국회의원이 되어 정치에 영향을 끼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어 1874년 15명의 노동자 후보가 출마, 2명이 당선되었다. 그 후 1893년 독립노동당이 만들어졌지만 노동자 국회의원은 얼마없었고 이들은 당시 2대 정당이던 보수당과 자유당 중 좀더 진보적이라 판단되는 자유당에 들어가 활동하게 된다. 노빠들의 소원중 하나인 열린우리당-민주노동당 연대가 당시 있었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1900년 태프베일 사건이라는게 터진다. 오늘날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손배소청구와 같은 성질의 사건이라고 보면 적당하겠다. 태프베일 철도 회사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자 회사측은 파업 파괴자를 모아 회사로 들여보내려 하지만 노동조합이 가로막자 회사측은 노동조합을 고소한다. 회사측이 재판에서 내놓은 요구내용은 회사측이 데려온 파업 파괴자들이 노동조합에 의해 방해받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려달라는 것과 노동조합에 대해서 조합 간부와 노동자가 파업 중에 회사에 끼친 손해를 물어내라는 것이었다. 재판은 회사측이 승리해 노조는 23,000파운드를 물어내야 했다.
그런데 본래 파업이란 기업주에게 손해를 줄수밖에 없고 그럼으로서 기업주가 노동자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도록 하기 위함인데 노동자의 파업으로 생긴 기업주의 손해를 노동자가 물어내야 한다면 근본적으로 파업을 하지 못하도록 묶는 조치이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은 새로 법을 만들어서라도 이 재판을 무효로 만들고자 하였고 이러한 노력속에 1906년 노동당이 만들어지게 된다.노동당의 제1목표는 태프베일 재판을 무효화하는 것이고 이런 과정을 거쳐 1906년 노동쟁의법이 만들어지게 된다. 다음은 노동쟁의법 4항이다.
'노조 자체를 상대로 하든가, 혹은 그들 자신 및 다른 모든 조합원들을 대표하는 조합원이나 그 간부를 상대로 하든가 하여, 노조 자신에 의하여 혹은 노조를 대표하여 저질러졌다고 주장되는 어떠한 불법 행위를 이유로 삼아 제기되는 소송은 어떠한 법원도 이를 받아들일수 없다.'
1900년대 초반에 이미 노동자계급은 사상적으로 많이 선진화되었고 여러 사회주의 이론가들은 유럽 도처에서 선전하고 있었다. 그 중심엔 제2 인터내셔널이 있었다. 그런데 자본주의 역시 1800년대 후반에 일어난 공황을 딛고 제국주의의 전개로 인해 유럽이 번영을 누리며 부르주아 정부가 노동자들에게 정치참여를 허용하는 양보를 단행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호황과 사회주의의 진전은 '점진적인 개량을 통한 사회주의의 실현'의 가능성을 찾을수있게 된다. 특히 영국의 경우 '해가지지않는 제국'답게 환상적인 번영을 누리어 이런 개량주의가 완전히 굳혀졌으며 독일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은퇴와 반사회주의자법 철폐(1890년)를 이끌어내며 1893년에는 지지율이 25%이상으로 뛰어오르는 정치적 발전을 이루게 된다. 제 2인터내셔널의 주요 구성원인 영국과 독일의 사회주의가 개량화를 띠면서 프랑스등 다른 유럽 나라들의 사회주의도 잠차 개량주의화 되어갔고 다만 기초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실행하지 못하고 차르의 전제정치에 눌려있는 러시아에서는 1800년대 유럽의 상황처럼 혁명의 열기가 고조되어 갔다.
그리고 파쇼다 사건(1898년)등 제국주의국가들간의 갈등 또한 심해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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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기극의 종언 - 8
번호:905 글쓴이: 매미
조회:5 날짜:2004/08/23 11:30
19세기말부터 1차세계대전발발까지의 기간에 서구에서는 많은 사상가와 이론가가 쏟아져 나온다. 역사는 예전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를 향해 항해하고 있었고 사회적 혼란이 끊이지 않으면서도 서구국가들은 엄청난 호황을 누리고 있었으니 다이내믹한 세상이 아니었겠나. 문제는 제국주의에 짓밟히는(혹은 그렇게될) 세계 역시 생사의 갈림길에서 여러 드라마 -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생각해도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안타깝고 격렬한 시기였나 - 가 펼쳐지고 있었으나 여기에 눈을 돌린 이들은 얼마없거나 사회적 영향력이 적은 상태였다.
1898년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은 <사회민주주의의 투쟁과 사회혁명>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초딩들은 논문 이름만 보고 겁먹지마라. 내용은 투쟁과 혁명에 대한 의심과 회의이니까. 그의 주장은 이렇다.
우선 자본주의 체제가 필연적으로 붕괴된다는 주장은 지금의 호황으로 봤을때 그 근거를 잃었다. 생산의 집중도 그렇게 심화되지 않고 자본주의의 전반적인 위나 악화의 징후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카르텔이나 트러스트가 형성되면서 자본주의의 자기통제력은 점점 더 강화되고 있다.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이 차츰 향상되면서 계급투쟁이 강화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 또 정치적인 면에서는 노동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운동들이 부르주아지로부터 많은 양보를 얻어냈고 이는 의회민주주의가 지배적인 곳에서는 국가가 더이상 계급지배의 도구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정치적 평등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경제적 불평등과 계급차별을 차츰 극복해나갈 것이다.
보틍의 노동자계급은 선진적이지도 도덕적이지도 않으며 또한 유한계층은 오히려 더 확대되고만 있다. 물론 사회주의운동을 포기하면 안된다. 그러나 이운동의 결과가 사회주의면 당근 좋지만 아니래도 괜찮다.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더 좋아지고 있지않나. 우리가 점점더 좋아지려면 계급투쟁과 혁명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확대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최고강령은 당면한 운동목표와 민주주의 과정에 종속돼야 마땅하다. 대충 이렇단다. - 자신이 부정하는 내용도 있고 인정하는 내용도 있다. 이미 망자가 된 그에게서 자세한 대답은 얻을수 없다. -
물론 당시 로자 룩셈부르크나 칼 카우츠키등 많은 이론가들이 이게 무슨 망발이라며 들고일어났다. 그러나 그후 러시아를 제외한 많은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이 그처럼 변해갔으며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베른슈타인에 대한 긍정적 비판과 약간의 호감, 혹은 찬사까지 이어지고 있다.
역사는 베른슈타인의 판단착오를 선언했다고 생각한다. 그후 역사는 1,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세계대공황의 발발과 나찌즘의 대두등으로 흘러갔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유한계층이 확대되기는커녕 20대80의 사회로 전진하고 있다. 유럽 각국의 사민당의 변질은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왜 베른슈타인은 폐기처리되지 않을까. 무엇보다 혁명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며 '하면된다'는 의지가 있다해서 성공할수 있는것도 아니며 우리는 혁명이후의 세계로서 몽상적 사회주의자들처럼 유토피아조차 꿈꾼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부르주아민주주의조차 급진과격으로 몰아 빨간칠하기 바쁜 수구초딩꼴통들과 하루라도 빨리 작별하고픈 마음도 있을것이다. - 노무현 대통령이 트로츠키주의자라고 규정하는 몰지각한 행위엔 뭐라 할말이 없음이다. 트로츠키가 암살당하지않고 살아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다면 일장비난연설을 퍼부어대며 하다못해 따귀라도 두세대 때렸을 것이다. -
노동자계급의 유한계급화를 추구한 베른슈타인 - 자신은 아니라고 할수도 있다. - 과는 반대로 유한계급을 박살내야 한다는 사상가도 있다. 미국의 베블렌은 각종 모순의 뿌리로 사유 재산과 자유 경쟁 체제를 지적하고 이들의 폐지를 주장하는 한편 유한계급의 과시적 여가와 소비 그리고 문화발전저해 등을 비난했다.
베블렌은 유한계급 제도는 하층 계급에게 되도록 많은 생활 자료를 거둬들이고 그들이 새로운 사고 습관을 익히고 채택하기 위한 잉여 에너지를 최소화하기 때문에 하층 계급을 보수화하는 작용을 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꿈과 희망에 젖어 금전 문화의 향유자인 유한 신사의 생활을 부러워했고 이들의 생활 양식을 선망하였으며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관을 받아들였다. 유한계급처럼 살지못해 아쉬울 뿐이다.
베블렌은 그들을 '고래의 뱃속에 갇힌 신밧드들'이라 표현했다. 생산의 배를 타고 좋은 사회를 향해 닻을 올려야 할 신밧드가 금정적인 경쟁을 부추기는 노다지의 신세계(고래의 뱃속)에 정박한 채 일상을 맴도는 것이다.
물론 베블렌의 주장은 여러 단점들을 가지고 있다. 베블렌은 여가나 소비를 유한계급의 위광을 뽐내는 낭비 혹은 생존에 필요한 최저 한도를 제외한 나머지라 보았으나 그렇게만 보는것은 현상의 한단면만을 이야기한 것이다. 특히나 베블렌의 지적처럼 유한계급은 단지 위광의 획득을 통해서가 아니라 억압적이고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을 통하여 국민과 대중을 다양한 방식으로 분할하고 이를 매개로 이들에 대한 헤게모니와 통제를 유지함으로서 기득권자로 등장한 것을 간과하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은 1900년대초까지만해도 격렬했다. 누구는 공격의 성과에 만족했고 누구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목표물에 대한 정확한 조준에 실패했다. 둘다 공통적으로 자본주의를 끝장낼 실천활동이 부족했고 제국주의가 호황을 누리게 만들어준 물적토대가 어디에서 왔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1907년 제2 인터내셔널은 전쟁이 일어나기전 전쟁을 막기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을 천명했다. 프랑스 노조측은 전쟁을 막기위해 국제적인 파업을 일으켜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막상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1914년 독일에서는 베른슈타인등과 사민당 다수파가 전쟁공채 발행에 찬성하는 대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베른슈타인은 뒤늦게 전쟁공채에 다시 반대입장으로 돌아갔으나 이미 때는 너무 늦었고 영국 노조들은 같은해 8월 산업 휴전을 선언하고 모든 파업을 중지했으며 제2 인터내셔널은 붕괴되고 만다.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라서야 노동자들은 전쟁이 노동자들에게 가혹한 고통을 주고있다는걸 인식하고 저항하여 노동운동이 다시 활기를 찾았다. 그러나 완전히 맛이간 독일사민당은 종전직전에 황제를 폐위한 11월혁명으로 집권에 성공한후 1919년 1월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히프크네히트등 좌파 저명 지도자와 다수의 노동자들을 살육하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베른슈타인은 혁명이후 재무부 차관에 오르고 1920년이후 의원활동을 하다가 1932년 12월 죽는다. 베른슈타인이 죽은지 6주후에는 히틀러가 독일 수상이 된다. 그리고 합법적으로 정권을 장악한 나치즘에 의해 사민당은 유럽에서 가장깊은 역사와 규모를 자랑한 좌파정당이었지만 제대로 저항한번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져버린다.
유럽의 사회주의세력이 허무하게 전쟁과 파시즘에 휘둘려 제역할을 못하고 있을때 다만 러시아의 볼셰비키만이 1907년 제2 인터네셔널의 전쟁반대 결의대로 전쟁의 위기를 혁명으로 전화시키는데 성공한다. 마르크스주의가 사상최초로 현실세계에 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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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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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기극의 종언 - 9
번호:906 글쓴이: 매미
조회:14 날짜:2004/08/23 11:47
지금까지 초기 자본주의의 역사를 돌이켜보았다. 자본주의의 시작과 함께 사회주의의 역사도 시작되었고 그 이전의 시기에도 착취의 모순이 있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억울한 피와 눈물 그리고 저항이 이어져왔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그이전의 시기와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는데 태어날때부터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내다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 마르크스만이 자본주의의 종말을 예언한 것은 아니다 - 초기 자본주의는 남을 등쳐먹는 일을 정당화시키는 악마였으며 혁명 이후 진행되는 유럽각국의 민주화 내용과도 맞지가 않는 체제였다.
19세기말 대다수 유럽인들의 정치이해수준은 그런대로 높았으며 자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지성인들이 각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물론 탄압도 있었지만 예전의 시기보다는 제한적으로 사용될수밖에 없었으며 반동이란 역사의 모든 시대에서 존재했음을 고려할때 폭력만으로는 오래 버틸수 없음을 폭력을 사용하는 이들도 폭력에 저항하는 이들도 알고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자본은 위기를 벗어났다. 제국주의라는 괴물이 유럽인 대 비유럽인의 대결구도를 만들어내어 유럽의 다수 노동자들이 제국주의에 말로는 반대하면서 실제로는 침묵 내지 협조해버린 것이다. 식민시절을 경험한 우리조차도 제국주의에 앞장서서 찬성하며 이라크진출을 꾀한다.
우리가 원했든 원하지않았든 결론은 같다. 말로는 반대를 외치면서 뒤로는 어쩔수없는일이라 자위했고 속으로는 자기합리화와 전쟁합리화에 몰두했던 개량주의자들이 걸었던 파멸의 길을 우리 역시 걷고있는 것이다. 이 역사기만의 대가를 유럽은 어떻게 치루었나? 역사는 예외를 두지않을 것이다.
각자의 문명을 꽃피우며 잘살아가던 아시아,아프리카는 제국주의의 침탈과 함께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게된다. 자연스럽게 저항이 이어지고 자본주의와 함께 사회주의 역시 전세계로 퍼지게 된다.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는 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의 이야기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주제는 자본주의 비판이었고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지만 이와함께 인류가 추구해야할 미래에 대해 여러 깨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실릴 것이다.
요약하자면 제국주의 - 먹고먹히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주름잡는 - 로의 회귀는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경쟁은 필요하나 생존을 걸고 벌여야할 경쟁은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며 미래에도 승부가 있고 승자와 패자가 있을 것이나 승자가 패자를 잡아먹거나 예속할수 있다는 논리는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 이걸 흔히 경쟁을 아예 하지말자는거냐며 시비거는 족속들이 있다. -
물론 역사이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수한 지성인들이 지적해온 사안이면서도 수천년이 흘러도 미래는 열리지않고 있다. 많은 이들이 미래를 열기를 단념했으나 과거와 같은 역사를 되풀이할수는 없는 일이다.
알제리의 독립운동가였던 프란츠 파농은 유럽의 부, 제국주의의 부는 아시아,아프리카인들의 땀과 시체를 통해 얻어간 것으로서 "우리에게는 마땅히 공정한 보상이 지불돼야"한다고 주장했다. 물질적 보상도 포함되는 이야기겠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서구 세계가 그런 결정을 하기위해선 3세계 민중들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며 서구 사회 내부에서도 자신들의 식민주의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한다. 서구 사회에서도 일대변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공정한 보상을 요구하는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자각과 우리자신의 식민주의에 대한 자각이 동시에 요구된다. 예를 든다면 생태계에서는 공식이며 파괴되면 안되는 것이지만 사람이 사는 세계에 그대로 대입되면 야만적이며 공공의 적인 먹이사슬에서 중간쯤에 속하는 위치에 속해있다.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자각은 완전하진 못하지만 충분한 정도에는 이르렀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자신이 타세계에 혹은 서로에게 벌이는 잔인한 식민주의에 대해서는 깨어나길 거부하고 있다. 편협한 국수주의,민족주의 - 모든 민족주의를 두고 말하는건 아니다. - 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시간이 갈수록 힘을 얻으며 체제에 위험이 닥칠때 히틀러나 무솔리니처럼 구원투수로 등장해 결국에는 나라를 말아먹고 말것이다. - 특히 무솔리니처럼 될 혐의가 짙다고 생각한다. -
파시즘의 징조는 아직도 뿌리뽑혀지지않은 박정희 향수이다. 박정희 정권 당시의 우리의 경제성장은 어떻게해서 이루어진 것인가 반성없이 공과 과를 구분해보자는 잡소리에 휘둘려 박정희가 뒤진지 30여년이 흘렀음에도 야만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안에서 혹은 베트남에서 휘두른 폭력과 제국주의에 대한 철저한 반성없이는 우리의 미래는 닫힐수밖에 없다.
'역사 사기극의 종언'이란 제목은 깊은 생각없이 직감적으로 정한 제목이었다. 이번까지해서 9편에 이르렀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부담가는 제목이라 다음편에는 다른 제목으로 1편으로 시작할 것이다. 그렇다고 '역사 사기극의 종언'연재가 끝난것은 아니다. 10이란 완전함을 의미하는 수이나 역사 사기극은 아직 결말에 다다르지 못했다. 그때 '역사 사기극의 종언 - 10'을 쓸 것이다.
파시즘과의 대결 - 1
번호:921 글쓴이: 매미
조회:22 날짜:2004/08/25 14:28
우리나라에 퍼져있는 파시즘의 실체는 친미반공으로 집약된다. 파시즘을 방어하고 힘을 강화시켜주는 역할은 딴나라당,열린우리당같은 썩어버린 기성정치세력과 국가보안법,집시법,테러방지법등 부르조아 민주주의조차 억제하는 악법들 그리고 여러 수구꼴통단체들과 수구족벌언론,노빠들같은 행동대장 역할을 맡은 떨거지초딩들이다.
그리고 군대는 파시즘의 근원으로 대한민국을 지키는 것보다 친미반공 파시즘을 지키는 역할에 더 충실하다. 이미 두번이나 전선을 버리고 서울로 쳐들어가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수백수천의 시민들을 학살한 전과도 있으며 한번도 제대로 그때의 일들에 대한 통렬한 반성을 한적이 없다. 오늘날에도 수구꼴통들에게 끊임없는 쿠데타 러브콜을 받고있으며 군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을 고의로 무시한 기상천외한 일을 저지를 정도로 기강이 해이해져 있으며 친미반공교육이 아직도 진행되고있는 곳이며 일상적인 파시즘을 훈련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군개혁없이는 파시즘은 그뿌리를 뽑을수가 없다.
모두가 군이 아직도 위험천만하다는걸 알고있으면서도 애써 회피하고자 한다. 다시는 군부가 대두하지는 못할것이라 자기최면을 거느라 바쁘다. 딴나라당이나 수구언론들은 군부에 비하면 별문제도 아니다.
우리나라에 파시즘이 득세할 것이라는 예상은 발끈해 공주의 대두때문이다. 과연 비주류에서 총선용이 아닌 명실상부한 대표까지 올라오는데엔 성공했지만 대권주자까지 될런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만약 발끈해 공주가 남자였다면 딴나라당에 그에 필적하는 인물이 전무하기에 당연히 대권주자가 되었겠지만 - 병역의혹도 없겠고 박정희에 대한 지지율이 80%가 넘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아마 대선에서도 압승하지 않을까 - 여성정치인이라는 점이 그녀의 대권가도에 가장 암초라고 본다.
하지만 그이외에는 모든게 딴나라당 대표주자로서 손색이 없다. 그게 불안하다. 아무튼 박정희 정권의 받침대 역할을 했던 자가 대선주자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일은 하루빨리 매듭을 지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충분히 히틀러나 무솔리니같은 역할을 수행할수있는 능력이 있다. 박정희의 후광 하나만으로도 말이다. 수구꼴통들 중에서 그녀 이외에는 아직 대중들을 끌어들일 흡인력있는 인물이 없는것 같다.
그래서 이번 과거사 진상규명 움직임은 절호의 기회라고 본다. 이처럼 확실하게 발끈해 공주를 매장시킬 방법은 없다. 파시즘이 단결할수 있는 구심점을 없앤다면 아무리 박정희 향수가 판을 치더라도 파시즘은 정치력을 키울수가 없고 세월이 흐를수록 약해지고 역사에서 사라질 것이다.
정치적 의도...? 풋... 있다한들 어쩔텐가? 누가 죄짓고 살래? 무슨 일이든 작든크든 정치적 의도가 없다면 거짓말이다.
이번부터는 전번에도 밝혔듯이 20세기 전반부터 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 일어났던 몇가지 사건들을 소개할 것이다.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성공하면서 마르크스주의는 본격적으로 현실에 도전하기 시작하며 자본주의는 1,2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거치면서 쇠퇴와 회복을 거듭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여러 열강들의 먹이감이 되어 떠돌다가 일제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된다. 파시즘이 판을 치는 시기이며 파시즘과 대적하며 사회주의가 성장하는 기간이다.
파시즘은 좋게 말한다면 자본주의를 위기로부터 구출하기위해 올라온 중간계투 내지 구원의 성격을 띠고있다. 나쁘게 말한다면 죽어가는 자를 혹은 이미 사망한 자를 살려내 좀비로 만드는 주술사의 역할을 한다고 본다.
우리나라는 다시 변혁의 시기를 맞았다. 우리나라의 경제체제는 큰 위협에 직면해 있으며 서민경제는 요동을 치고있다. 과연 정부가 이를 막을수 있을까. 정부에 기대거는 국민들은 얼마없을 것이다. 경제불안은 사회불안으로 이어졌고 치안은 점점 불안해져만 간다. 실업률 증가는 문제다 문제다 목소리가 드높지만 어쩔도리가 없다. 정치불안, 경제불안, 사회불안... 이 불안불안한 체제를 오래끌고갈수는 없게 된것이다.
수구꼴통들이 들이민 대안이란 것은 파시즘-신자유주의의 조합이다. 이 체제를 더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결과는 국내적으로는 빈부격차의 증대로 인한 정치,경제,사회불안이 증폭될 것이고 국외적으로는 동북아 긴장고조와 미국 의존의 심화이다. 국내적인 불안이 쌓이고쌓이다보면 폭발하기전에 어떻게든 관심을 돌리려 들것이고 가장 만만한 이북을 목표로 하게 될것이다. 군부가 다시 목소리를 드높일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는 것이다. 그이후는 상상하기조차 끔찍하다.
파시즘과의 대결 - 2
번호:935 글쓴이: 매미
조회:7 날짜:2004/08/27 12:25
연재를 마음먹었은 것부터 부담가는 일이었고 매회 내가 '감히' 공부도 제대로 안해놓고 이글을 쓸수 있나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특히 러시아 혁명을 소개해야하는 부분은 연재 초반에서 중반으로 넘어가는 대목인데 내용이 워낙 방대하고 다뤄야할 부분이 많아 계속 주저하게 되었다. 러시아 혁명을 소개할 여운을 남기고 마친 연재글이 몇편되는 것도 이때문이고 술술 연재가 진행되지 못하는것도 이때문이다.
이번 차례에도 다시 러시아 혁명은 뒤로 미루고 자본주의와 전쟁간의 관계에 대한 독설을 쓸려고 했었다. '러시아혁명이 있었다'는 사건에 대해선 모르는 사람이 없기에 아예 생략할까하는 고민도 들었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만악중의 최고라 생각이 굳어버린 초딩들이 아직 도처에 널렸고 러시아 혁명에 대한 수박겉핥기정도의 이해도 없이 폭력과격혁명이라 떠벌리고 다니는 꼴통들이 있기에 러시아 혁명에 대한 소개를 생략한채 연재를 이어가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러시아는 애초부터 그리 큰 영토를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몽고군의 말발굽에 짓밟힌적도 있고 폴란드의 등쌀에 시달리는 시련도 있었다. 그러나 차르체제가 굳어지면서 활발한 정복활동을 전개했고 북유럽의 강자 스웨덴,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등과의 전쟁에서 성과를 거두면서 영토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최대목표는 부동항을 찾기위한 남하였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아무래도 유럽의 가장자리에 위치했기에 강호에 속하면서도 역사의 주요무대에 주인공으로 등장한적은 별로 없었다. - 아예 없는건 아니고 이름값에 비해 - 서유럽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시기는 대부분의 경우 뒤쳐졌었고 19세기말에도 차르의 전제정치가 계속되고 있었으며 인구 대부분은 거의 농노나 다를바 없었던 농민들이었다. 그러나 동토의 척박한 땅에서 출발해 안으로는 귀족들을 누르고 밖으로는 나폴레옹을 격파하며 유럽의 강호로 나라의 위상을 높인 차르의 권위는 높았다.
그러나 크림전쟁 - 러시아가 오스만을 밀어내고 남하하려하자 프랑스,영국등이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를 침공해 일어난 전쟁이다. 나이팅게일이 이전쟁에서 대활약해 위인의 반열에 오른다. - 에 패배하면서 차르의 전제체제에도 위기가 찾아온다. 알렉산드로 2세는 크림전쟁 패배후 개혁을 단행해 농노제를 폐지하는등 응급조치를 실행했으나 농촌의 상황은 예전에 비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1890년대에 이르러 러시아는 산업화의 단계에 들어갔고 1891년에는 시베리아철도가 착공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산업화를 뒷받침해줄수 있는 자본의 축적이 이루어져 있지 않았기에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해 부족한 자본을 충당했고 이에 차관을 들여오는 주체인 차르의 영향력이 커질수밖에 없었다. 차르는 많은 채무를 지게 되었는데 차르정부가 자본을 대준 외국의 제국주의 세력에 좌우될 가능성을 안게 되었으며 재정적으로는 자국국민에 대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낮아져 전제적 지배체제를 떠받치는 힘이 된다.
한편 산업화에 따라 부르주아계급이 형성되나 산업화를 주도하는건 - 즉 돈줄을 움켜쥔 - 차르였고 부르주아 계급은 차르에게 잘보여 특권이나 보호를 받아야만 자신의 이익을 확보할 수 있었다. 부르주아 혁명조차 기대하기 곤란했던 것이다. 그러나 1903년 이들중 일부가 입헌민주당을 만들고 의회정치의 필요성을 거론하는등, 자유주의 개혁을 주장하는 정치세력이 등장한다.
19세기 중반부터 활동한 '나로드니키'는 러시아 변혁운동의 중심으로 농민을 꼽았다. 우리나라에서 일제시대 있었던 '브나로드 운동'은 이들의 활동을 본따 한것이다. 1860~70년대에 이들은 농촌에 뛰어들어 농민들을 깨우치려했다. 그러나 결국 실패하고 도시로 들어가 각종 비밀결사를 조직, 나중에는 알렉산드로 2세를 암살한다. 나로드니키는 1901년 사회혁명당을 만든다.
유럽의 산업화의 초기가 그랬듯이 19세기말 러시아의 노동조건은 극히 나빴고 유럽의 개량된 사회주의가 아닌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이념이 퍼지게 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1898년 사회민주노동당을 조직하며 가장 빠르게 당조직에는 성공하나 별볼일없는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러시아의 여러 정치세력들중 가장 영향력이 약했던 정치세력인 주제에 1903년 부르조아 계급과의 타협여부에서의 차이때문에 볼셰비키(다수파)와 멘세비키(소수파)로 나뉘게 된다. 그러나 이름만 다수파일뿐 이후에는 볼셰비키는 멘셰비키에게 주도권을 빼앗긴다.
러시아 혁명은 볼셰비키 - 가장 별볼일없는 정치세력이 분열해 그중에서도 항시 주도권을 빼앗기고 아웃사이더로 방황하던 - 가 주도하여 볼셰비키 혁명이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혁명의 중심인물인 레닌은 그들중에서도 처지가 고독했다.
이 세갈래의 정치세력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민심을 얻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1905년 1월 9일 '피의 일요일'사건이 터지며 유럽의 변방국 러시아에서 인류사를 뒤흔드는 사건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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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과의 대결 - 3
번호:936 글쓴이: 매미
조회:6 날짜:2004/08/27 12:32
1905년 당시 러시아는 일본과 전쟁중이었다. 러시아군은 연전연패중이었으며 안으로는 노동자,농민들의 폭동과 파업이 그치지 않았다. 그런 와중 1905년 1월 9일 가퐁 신부의 지휘아래 차르에게 경제적,정치적 요구가 담긴 청원서를 전달하기위해 수십만의 노동자들이 페테르부르크 - 당시 러시아의 수도는 모스크바가 아닌 페테르부르크이다 - 동궁(冬宮)앞 광장으로 행진했다. 몰려드는 군중에게 차르는 군대를 풀어 진압케하였고 5백명이상 죽고 수천명이 부상당하는 대참사가 일어난다. 그날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일기는 이렇다.
'슬픈 날이다. 노동자들이 동궁으로 들어오려고 했을 때, 성 페테르부르크에서는 질서가 파괴되는 중대한 사태가 일어났다. 군대가 여러곳에서 총을 쏘아야만 했다.'
그에게 중요한건 차르전제지배하에서의 질서였다. 노동자들의 요구조건이 무엇이었는가든지 그날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군대의 총앞에 죽고다쳤는지는 그의 관심사항밖이었던 것이다.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등 대규모 공장이 있는 대도시에서 노동자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고 탄압을 피해 뿔뿔히 흩어졌던 혁명가들이 도시로 들어가 혁명운동을 이끌었다. 그해 5월 러시아는 끝내 일본에게 패배해 강화를 맺었고 6월에는 포템킨호의 반란이 일어난다. 10월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시작되었고 페테르부르크 공장 노동자들이 소비에트(평의회)를 만들었다. 니콜라이 2세는 입헌군주제 헌법을 제정하여 두마(의회)를 만들겠으며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10월 선언'을 발표해 한숨돌리는데 성공한다.
트로츠키 등은 속임수임을 간파하고 속지말라며 노동자들을 설득했으나 소비에트는 파업을 일단 중지했다. 그러나 차르는 약속을 어기고 소비에트를 무력으로 진압해 결국 1905년혁명은 실패로 돌아간다.
혁명을 진압한후 두마선거에서 혁명정당들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자 차르는 두마의 권한을 다 빼앗아 허수아비로 만든다. 그후 5년동안 수상 스톨리핀의 공포정치가 시작되나 1911년 스톨리핀이 암살당한다. 국외적으로는 범게르만주의를 내세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발칸반도쪽으로 진출을 기도해 범슬라브주의를 표방하며 동방진출을 꾀하는 러시아와 대립적 관계에 있었다.
마침내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중서부유럽에 비해 낙후되어있던 러시아는 독일군에게 연전연패를 당하게된다. 전사자만 170만명에 달했고 포로가 250만명, 부상자가 500만명에 이르는 막대한 피해로 인해 러시아 사회는 폭발 직전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마침내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났고 입헌민주당이 주도하는 '임시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소비에트도 다시 부활한다.
부르조아 계급은 2월혁명으로 얻을것을 다 얻은 상태였다. 전제권력은 사라지고 전쟁은 한편으로는 그들이 떼돈을 버는 또하나의 시장이었다. 소비에트는 멘셰비키가 득세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가는 중간단계인 부르주아 혁명에서 이번 혁명을 그치고 부르조아와의 타협을 선택한다. 그러나 대다수 노동자와 농민들은 전쟁에 질려했다.
레닌은 2월혁명이 끝난후에야 귀국했다. 그리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로 유명한 4월테제를 발표한다. 혁명의 중심에서 부르조아,멘셰비키,볼셰비키중 임시정부나 소비에트 어느곳에서도 아웃사이더였던 볼셰비키만이 지지하고 나섰다. 그리고 6월 전국 소비에트 대회에서 볼셰비키는 멘셰비키에게 완패당하고 만다.
기세가 오른 임시정부와 소이에트는 6월 전세의 역전을 노리는 대공세를 폈으나 실패하고 만다. 7월 마침내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봉기가 터졌고 임시정부는 볼셰비키를 무력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8월 총사령관 꼬르닐로프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임시정부는 볼셰비키에게 도움을 청했다. 볼세비키는 즉각적인 평화,귀족토지의 몰수를 슬로건으로 제시했고 일련의 과정속에서 볼셰비키는 점점 지지층을 넓혀나갔다. 2월에 당원이 1만정도에 그쳤는데 10월에는 약30만명으로 급증하였던 것이다. 임시정부는 마지막까지 버텨보려했지만 10월 볼셰비키가 무장봉기를 일으키자 크게 패하고 무너지고 만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렇게 현실에 첫발을 내딛는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우선 자본주의가 높이 발전한후에 사회주의로 이행된 사례가 아니었고 만국의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세계혁명을 통해서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러시아 민중들은 자신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는 전쟁을 속히 끝내고 싶어했고 부르조아들은 자신들에게 부를 안겨주는 전쟁을 지지했다. 혁명 이외에는 별다른 뾰족한 수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세계혁명이 아니었기에 초창기 소비에트정권은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포위당한 상태였다. 이들과의 전쟁이 그치지를 않았고 한나라를 이런방식으로 이끌어나가는건 세계 역사상 최초였기에 시행착오도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살아남는데 성공했고 20여년후 2차 세계대전때에 승승장구하던 나찌독일군을 자력으로 완파하는 저력을 보여주게 된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