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5.2. 2) 말씀/ 창세기 1:28 주인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 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추석 연휴 잘 보냈습니까? 저도 사모와 누가가 잠시 내려와서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나답게 사는 그리스도인’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주인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란 주제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또 노예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구체적으로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의미를 살펴보면서 왜 우리가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야 하는가 당연성과 태도를 배워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1장 28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 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8) 또 시편 8:4-5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이 말씀 속에 ‘정복하고 다스리라’, ‘영화와 존귀로 관을 쒸우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만물의 영장 주인으로 세우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주인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돈과 물질의 노예, 명예의 노예, 사물에 대한 우상숭배 또는 사람의 눈치를 보며 사는 것은 주인으로서의 삶이 아닌 굴종입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이런 세상의 하찮은 것들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노예란 단지 흑인시대 노예나 로마시대 권력자의 집의 노예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기 결정권이 없는 사람, 남을 의존하는 사람,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심지어 생각마저 남의 생각을 의존하는 사람, 먹고 살기 위해서 남 눈치보는 사람. 모두가 노예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기 꿈과 이상이 없는 사람도 역시 노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 속에서 요셉, 다니엘. 모르드게, 에스더, 바울,이런 분들의 삶을 통해서 주인의 삶이 어떤 것인가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옥에 갇히기도 하고 타국에서 이국의 왕을 섬기는 삶을 살기도 하고, 억을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기도 하였지만 신앙을 부인하거나 삶의 주도권을 남에게 넘긴 적이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그들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오히려 환경을 다스리고 주변의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삶을 창조 해 내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는 어릴 때부터 기라성같은 형들사이에 힘없는 막내둥이로 살았습니다. 형들이 죽으라하면 죽어야 했고, 노예로 팔아버리면 노예가 되어야 했습니다. 실제로 형들에 의해서 애굽상인에게 팔려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노예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지 않고 열심히 맡은 일을 잘해서 보디발의 인정을 받아 가정 총무까지 됩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지만 단호히 거절하고 무고하게 옥에 갇힙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그는 성실하게 죄수들을 섬김으로 간수로부터 인정을 받아 옥중의 모든 일을 책임맡아 죄수들을 섬깁니다. 그러다가 바로의 술맡은 관원장과 떡굽는 관정원장도 만나서 상담해주다가 그 계기로 바로 왕 앞에까지 서게 되어 애굽의 2인자 총리의 자리에까지 오릅니다. 요셉은 일략 애굽의 주인이 되어 7년 대 흉년의 때를 대비하고 세상과 이스라엘을 구원하는데 구원자로 쓰임받게 됩니다. 우리가 요셉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분은 노예라도 당당히 주인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현실의 조건과 타협하고, 남의 눈치보며 비굴하지 않고 모든 일을 자발적으로 합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탓하거나 굴하지 않고 아모르파티 하였습니다. 니체는 운명을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노예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주인만이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운명을 띄어넘어 진짜 삶의 주인이 됩니다. 주인으로 사는 사람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귀하게 쓰십니다. 젊은 시절 한 청년이 남의 부자집 머슴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 하지도 비관하지도 않고 작은 것부터 성실하게 열심히 일했습니다. 청년은 매일같이 아침 일찍 일어나 자발적으로 주인의 요강을 깨끗이 닦았습니다. 시키는 일만 하면 칭찬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가까이 이 청년의 자세를 지켜 본 주인은 보통 청년이 아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머슴살이 하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여 학자금을 대어 주며 평양에 있는 숭실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켰습니다. 마침내 청년은 숭실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오산학교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분이 민족주의자요. 독립운동가 유명한 조만식 선생님 이십니다. 그는 항상 제자들에게 인생의 성공비결을 물을 때마다 이렇게 일러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사회에 나가거든 요강을 닦는 사람이 되십시오" 삶의 주체자 주인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된다는 것은 꼭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머슴이지만 작은 일일도 스스로 하면 주인입니다. 처음에는 주인 집의 요강을 닦았지만 후에 도산은 큰 그릇이 되어 나라를 섬기는 주인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주인으로 살지 못하고 노예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7년 흉년을 피해 요셉을 따라 애굽에 들어갔고, 나중에 요셉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이 생육 번성하자 이스라엘을 모르는 새 왕은 위기 위식을 느끼고 이스라엘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였습니다(출1:14). 또 아이를 낳으면 여아는 살려주고 남아는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노예 백성으로 전락하여 애굽에서의 400년이나 흘러갔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오랜 고역으로 시달리다보니 하나님의 백성의 자긍심은 다 사라지고 어느새 노예근성이 스며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노예근성에 빠지면 먹고살기 위하여 자존심도 다 내팽개치고 비굴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출애굽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지만 노예근성에 찌든 백성들은 다시 홍해를 건넜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울부짖습니다. 그들은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난다고 하였습니다. 주인의식이 사라진 자리에는 이렇게 노예 근성이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배고프다고 팥죽 한 그릇에 장자명분을 판 에서처럼 부추, 파, 수박 먹고싶다고 다시 애굽의 노예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주인으로 살지 않으면 이렇게 사람은 생존을 위해 스스로 노예가 됩니다. 노예근성! 이는 우리가 평생 싸워야할 무서운 죄성입니다.
다음 다니엘의 이야기도 한번 해보겠습니다. 나라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함과 서러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중에 왕족 출신으로 다니엘고 몇 몇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느부갓네살 왕궁에서 특별히 왕을 섬기기 위해서 선별된 자들로 그만큼 특별대우도 받게 되었습니다(단 1:6). 문제는 음식입니다. 왕을 섬기기 위해서 기름진 음식을 멍어야했는데 그 음식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들 이었습니다. 신앙을 무너트릴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예게는 선택이 없습니다. 왕명을 거절하면 죽음입니다. 이때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환관장에게 뜻을 구합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노예였지만 신앙 안에서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주인이었습니다. 음식을 먹고 안 먹는 것을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하나님은 환관장의 마음을 음직여 그 뜻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주인이란 이렇게 먹고 마시는 일상의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는 자입니다. 다니엘과 친구들 뿐 아니라 에스더서를 보면 바사왕 아하수에로 왕밑에서 소수민족으로 힘없이 살아갈 때 모르드개와 에스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에스더는 탁울한 욤모로 왕의 후궁이 되는데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키운 삼촌 이었습니다. 그는 권력 서열 2인자인 하만의 오만함에 머리를 숙이지 않습니다. 그는 비록 힘없는 약소 백성이지만 권력을 두려워하거나 선민의 자존심을 팔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온 민족이 말살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지만 거국적 기도하며 저항 운동을 합니다. 이 때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자세로 왕 앞에 나아가 백성들을 살릴 것을 진언합니다. 마침내 원수 하만의 무리를 물리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주인된 모습이 무엇입니까? 노예는 살려주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 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주으면 죽으리라 죽음도 불사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자기 땅에 와서 자기 배성이 영접지 않았지만 그 백성을 살리시기 위해서 죽음 앞에 당당히 나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맞서는 것은 주인된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다니엘과 친구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온 나라의 박수와 술객보다 10배나 띄어나게 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신약 성경으로 넘어가서 고린도전서에서도 우리는 사도 바울의 신앙철학, 주인의식을 배울 수 있습니다.
9절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 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고전 9:19-23) 이 말씀을 보면 바울은 자유자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을 얻고자 스스로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율법적이지 않지만 율법에도 속하고 유대인들에게도 속할 수 있는 자유자입니다. 종이 아니지만 스스로 종이 될 수 있는 것은 주인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영혼들을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 종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인은 이렇게 자유인입니다. 자유인으로서 이렇게 주인도 되고, 종도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죄와 율법과 관습에 갇히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삶의 주인이면서 스스로 종도 될 수 있는 자유,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주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유자로 산다는 것이며 삶의 결정권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스스로’입니다. 누가 시키는 일은 아무리 중요해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효율성도 떨어집니다. 위기의 순간이 오면 피하게 되고 핑계를 댑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스스로 하는 일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하게 되고, 일을 끝고 맺는 책임도 집니다. 청소도 누가 시키면 짜증이 나지만 스스로 하면 땀 흘려 수고해도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엄마가 바닷가에 가서 모래를 바게스에 퍼 오라고 하면 아이들은 짜증이 나고 싫어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이 자기들끼리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는 놀이를 할 때 땀흘려도 재미있어합니다. 스스로 주인이 되어 하기 때문입니다. 공부도 누가 하라고 하면 하려고 하다가도 기분이 상하고 하기 싫어집니다. 스스로 해야 재미있고 효과가 있습니다. 저는 학생시절 숙제하고 레포트 내고 하는 공부가 참 재미가 없었습니다. 학교 성적도 잘 오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교과과정에 맞춘 시키는대로 하는 공부가 체질에 맞지 않고 제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학교를 졸업 후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을 때 책을 읽으면서 다시 인생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너무 재미가 있었습니다. 스스로 하는 공부! 사이토 다카시는 이런 공부가 호흡이 깊은 공부라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책을 읽으며 평생 공부하는 것이 살며 사랑하며 배우고 성장하고 누리고 나누는 삶의 철학이 되었습니다. 이런 책 읽기가 삶에 실천되고 신앙에 적용되면서 세상과 차별된 우주교회 독서모임을 이루게 되어 어느덧 3년이 흘렀습니다. 세상에 독서모임이 많지만 우리 우주교회 독서모임을 저는 아주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신앙과 연결되어 사유의 폭을 넓히고, 실천력을 기르며 서로 책을 읽고 배우고 나누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유익하지 모릅니다. 지난 해는 세계 최초로 로마 독서 트래킹도 다녀왔습니다. 그냥 책이나 많이 읽는 모임이라면 그냥 여러 모임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많은 자식쌓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날로 날로 성장하며 달라져가는 지체들의 모습을 볼 때 소감을 들을 때 감탄을 합니다. 역시나 신앙 교육도 더디더라도 주체적으로 스스로 주의의식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배우며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인문고전 전인적 성장을 위한 두 개의 기둥입니다. 자,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나는 그래도 주인된 삶을 사는 의미를 깨달아, 주체적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배우고 좋은데 남편, 아내 자식들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할까요? 지난 주 수요일 오행언 목사님 영숙 사모님 오셔서 한마디 할 때 직장에서 다른 사람은 나에게 상담도 요청하고 그렇게 상담해주면 좋은데 자녀들은 내맘대로 안된다고 했습니다. 여기 내 말속에 문제가 있습니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여러분, 절대로 급하다고 내 맘대로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정답을 빨리 가르쳐주고 큰 소리치면 빠르겠다는 생각, 절대 아닙니다. 그럴수록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시키는대로 하는 노예가 되도록 강요하는 꼴이 됩니다. 나는 남편의 주인, 아내의 주인, 자식의 주인이 아닙니다. 각자가 다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각자가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교육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 말없이 먼저 내 자신이 스스로 주인된 삶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하도록 하면 됩니다. 고린도전서 11:1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베드로전서 5:3 베드로도 이렇게 말합니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바울도 베드로도의 이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말로 시켜서 수동적으로 하게 하지 말고 본을 보고 스스로 울어나와서 따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효과적인 신앙교육 역시 스스로 주인의식 갖고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교육 방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결론적으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삶의 주체자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첫째는 주인이 되어야 자기 인생의 스스로 책임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노예는 시키는대로 남을 의존하여 살기 때문에 자기 인생의 책임이 없습니다. 자신의 인생의 계획과 꿈과 비죤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충성하는 것이 노예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다릅니다. 하루를 살아도 자기 인생의 책임자로 삽니다. 일하고 싶으면 밤새도록 일할 수 있고, 쉬고 싶으면 문 닫고 쉴 수도 있습니다. 융통성과 자유가 있습니다. 노예는 끌려가는 삶이라 재미가 없지만 주인은 스스로 살아가는 인생이라 삶이 즐겁고 행복합니다. 둘째 주인이 되어야 성장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노예는 지시한 일만 하니 성장 발전이 없ㅅ브니다. 그러나 주인은 계속 더 나은 것을 생각하고, 더 아름답고 더 효율적인 삶을 창조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계속 살며 사랑하고 배우며 공부를하고 자기 삶을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노예와 주인의 삶의 완전히 180도 다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지만 보잘것없는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죄인들을 섬기시고,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고 죽기까지 하나님 앞에 복종하셨습니다. 종으로 섬기시되 한번도 사람 앞에 비굴하신적이 없으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다이루시고 구원의 완성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수를 만유의 주로 높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삶의 주인으로 살며 동시에 스스로 세상을 섬기는 종으로 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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