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le border="0" cellpadding="2" cellspacing="0" width="100%">
<tr>
<td colspan="2" height="8">
</td>
</tr>
<tr>
<td bgcolor="#ffffff"><font size="-1" color="#ffffff">
..
</font></td>
<td bgcolor="#ffffff" width="100%"><font size="-1">
연하가 어때서 17회
<br>
가을이 끝났군요. 가을의 말미에서 난 한 사람을 잊기로 했습니다. 잠시 스쳐 떠
<br>
나는 여러 사람들보다 더 큰 내 마음 속 자기만의 공간을 가졌던 친구 하나는 연
<br>
인이 되려다 잊혀 지기로 했습니다. 내년 가을 때도 생각이 나겠지요. 후 내년
<br>
봄에도 설레임으로 남아 있겠지요. 그래도 잊혀 질 겁니다. 잊기로 마음 먹었으
<br>
니까. 아직도 이해가 안되네요. 사랑한다고 고백한 여자를 그 이유 때문에 부담
<br>
스러워 했던 것을, 난 승주를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하니 열 받네요. 나
<br>
같은 미녀가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으면 감격하며 받아 들였어야지, 별로 잘난 것
<br>
도 없는 게 나에게 상처를 주었어요. 23살 인생을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남자에
<br>
게 차여봤다.
<br>
사방이 벽으로 둘러 쌓인 도서관 열람실은 다가오는 기말시험 때문에 학생들로
<br>
붐비네요.
<br>
"미안한데요, 그 자리 주인 곧 들어 오거든요."
<br>
"아, 예."
<br>
난 메뚜기 하면 그 자리가 내 자리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난 메뚜기를 하
<br>
면 공대 남학생 자리에 잘 앉아요. 순진한 공대생들은 간혹 내 미모를 의식하고
<br>
가방을 빼 버리는 경우가 있지요. 호!호!호!
<br>
근데 이 녀석은 어딜 간 거야? 내 옆자리는 철수 그 녀석 자리지요. 제가 자리
<br>
좀 잡아 달라고 부탁을 했었습니다. 화장실 가는 척하고 나가더니 30분이 지나도
<br>
록 나타나지 않네요. 자꾸 메뚜기들이 녀석의 자리를 탐 내는데, 녀석은 어디로
<br>
갔는지 나타나지 않습니다.
<br>
녀석이 요즘들어 더 귀엽습니다. 생각보다 순진한 구석이 많아요. 그런 순진한
<br>
녀석에게 난 잘못한 게 있습니다. 바로 내 생일 다음 날 새벽이었지요. 내 생일
<br>
날, 난 승주에게 상처를 받았고 외로웠지요. 그 외로움 때문에 잠시 철수 녀석에
<br>
게 보상 심리를 느꼈습니다. 승주를 잊기로 한 공허함에서 그리고 뭉개진 자존
<br>
심 때문에 철수에게 하지 말아야 했을 말을 하고 말았네요. 사귀자고 말했던 것
<br>
말입니다. 그 날 기분따라 뱉은 말에 철수가 장난스럽게 받아 들이지 않았다면,
<br>
철수는 며칠 동안 내게 연인의 정을 느꼈을 것이고 짧은 시간 후에는 그가 어색
<br>
해 졌겠지요. 솔직히 철수는 남자로서 매력은 없어요. 너무 어려 보이거든요. 그
<br>
냥 동생으로 생각하니까 붙어 다니는 거죠. 철수에게 상처를 줄 뻔 했어요. 내
<br>
기분따라 철수를 아무렇게나 대해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 했습니다. 후훗, 철
<br>
수 방에서 두 번이나 잤네요. 나 같은 정숙한 여자가 남자 방에서 두 번이나 밤
<br>
을 보내다니. 날 믿는 울 아빠가 그 사실을 알면 땅을 치겠네요. 처음은 의도한
<br>
일이었지만, 두번째는 나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왜 술취한 상태에서 철수를
<br>
찾아 갔었는지, 철수가 내게 뭔가 위안을 줄 거라 생각했을까요. 그래요 철수 때
<br>
문에 엉망이었던 기분이 많이 풀어 졌어요. 그가 준 잠옷은 예쁘진 않았지만 맘
<br>
에 드는 것이었지요. 철수의 성의가 참 고마웠습니다. 참, 그러고 보니 그 잠옷
<br>
을 철수네 방에 그대로 두고 나왔네요.
<br>
내가 니 침대에 벗어 논 잠옷 가져 와, 뭔가 어감이 이상하네요.
<br>
<br>
녀석이 한 시간 째 들어 오지 않습니다. 나도 오래 앉아 있었네요. 잠시 바깥
<br>
바람이나 쐬고 와야 겠습니다.
<br>
<br>
"군대 잘 갔다 와. 내가 그 사자머리 잘 다독거려 줄게."
<br>
"이 새끼가. 당구 강의 해 달라더니, 내 군대 가는 얘기는 왜 해? 그리고 의정
<br>
이 얘기를 또 왜 하냐?"
<br>
"걔하고 진짜 연인 사이냐?"
<br>
"응."
<br>
"걔는 뭐 고무신 거꾸로 신을 일은 없겠다."
<br>
"그럼, 내가 제대할 날짜만 기다리면서 내 생각만 할거야."
<br>
"미친 놈. 걔가 딴 남자 생각을 해도 딴 남자들이 걔 생각을 안 할거야."
<br>
"너, 예쁜 의정이를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결투다!"
<br>
"그래, 나 80놓고 칠테니 넌 250 놓고 칠래?"
<br>
"미쳤냐? 100대 200."
<br>
내가 밖으로 나갔을 때, 난 철수를 바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참 잘 생긴 그의
<br>
친구와 함께 별 시덥지 않은 얘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춥지도 않나? 벤취에 구겨
<br>
진 종이 컵을 각각 들고서 계속 이야기 중이네요. 무슨 얘기를 하는 뒤에서서 들
<br>
어 봤습니다.
<br>
"눈에 콩깍지가 씌으면 달라진다더니, 나와 비슷한 외모를 가진 잘생긴 네가 그
<br>
런 독특한 여자를 좋아하게 될 줄이야."
<br>
"내가 잘 생긴 건 아는데, 니가 내 정도 된다는 말은 괴변이다."
<br>
"나도 잘났어 임마."
<br>
"그래서 미팅 나갔다 오면 예외없이 꺼이꺼이 울었냐?"
<br>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br>
"그래도 나는 내가 찍은 여자가 날 찍어 주었어. 유지를 못해서 그렇지."
<br>
"그런데 어떻게 사자머리와는 유지가 되었냐?"
<br>
"응, 날 위해서 자기를 많이 희생을 하니까. 만날 수록 편해지고 또, 나도 자
<br>
길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무언가가 생기니까 자꾸 가까워 지더라."
<br>
"연인사이에 희생이란 말은 쓰지 마라. 그냥 배려하는 맘이지. 무식한 놈."
<br>
"그래, 배려하는 맘. 넌 요즘도 그 나이 든 누나들 따라 다니니?"
<br>
"내가 따라 다니는 게 아니지, 친구야. 솔직히 당구 잘치던 그 누나 졸라 예쁘
<br>
지 않냐?"
<br>
철수가 나를 알아 주는군요.
<br>
"그런대로."
<br>
뭐야 이 자식. 나는 자기를 참 잘생겼다고 생각해 주는데, 뭐 나보고 그런대로?
<br>
"그 예쁜 누나가 날 따라다니잖아. 사자머리하고 사귀는 너 하고는 차원이 틀리
<br>
단 말이야. 내가 연상만 아니었어도. 그 누나가 언젠가 내 발을 잡고 눈물을 뚝
<br>
뚝 흘리며 연하도 괜찮으니까 제발 좀 사귀자고 그러는 걸, 내가 거절했어. 나
<br>
너무 매력적인 놈인가 봐."
<br>
"의정이도 그 누나 만큼 예뻐."
<br>
"너 장님이냐? 둘을 세워 놓고 지나가는 사람 100명한테 물어 볼래? 사자머리
<br>
예쁘다고 하는 사람 세 명만 되어도 내가 니 대신 군대 간다."
<br>
"나는 목에 칼이 들어 와도 의정이가 더 예뻐."
<br>
"그래 넌 의정이하고 한 평생 살아라. 하여튼 너 정희 누나도 잘 알지? 그 누나
<br>
도 내가 연하만 아니었어도 자기 애인을 만나지 않았을 거라 말했어. 하지만 버
<br>
트, 나는 절대 연상에게는 넘어 가지 않지."
<br>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을까. 이런 놈에게는 내 기분따라 아무렇게나 대해도 순전
<br>
히 자기 맘대로 해석해서 자기 유리한 쪽으로 생각할 놈이다. 그래도 내가 예쁜
<br>
것은 인정을 해 주는군.
<br>
"그래, 잘했어. 나이 든 사람은 나이 어린 사람에게 뭔가 꼴리는 게 있는가봐.
<br>
절대 유혹에 넘어 가서는 안된다? 내가 우리 누나들에게 시달려 봐서 아는데, 나
<br>
이 든 여자들이랑 놀면 빨리 늙을 뿐 도움 되는 게 없어. 이제 우리 결투 하러
<br>
가자."
<br>
"그래. 나 100 놓을 테니까, 넌 250 놔라."
<br>
"좋다. 내 선심 한 번 쓸게."
<br>
유유 상종이네요. 도대체 한 시간 동안 무슨 얘기를 나누었을까요. 이제 열람실
<br>
을 들어 와도 상당히 오랜 시간 좌석을 비운게 되는데, 뭐 이제 당구장을 가겠다
<br>
는 저 놈. 의기 양양하게 일어서는 두 녀석 중 철수의 목덜미를 잡아 챘습니다.
<br>
"뭐야, 씨?"
<br>
"사귀자고 따라다니지 않을테니까, 이제 열람실로 들어 가시죠 철수씨?"
<br>
잘 생긴 철수의 친구가 나를 보며 머쩍게 씩 웃는군요.
<br>
"철수야, 내 말 상기하고 꿋꿋하게 버텨."
<br>
"야, 같이 가."
<br>
"나는 누나들을 상대해 봐서 아는데, 저 누나 모습은 아까 우리들 대화를 모두
<br>
들었다는 표정이거든?"
<br>
자식이 잘 아네요.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지요.
<br>
"그래서 임마?"
<br>
"나 나이 많은 여자들 무서워. 나 먼저 간다."
<br>
총알 같이 뛰어 가는 친구를 물끄러미 바라 보다가 철수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
<br>
며 웃습니다.
<br>
"헤헤, 진짜 다 들었어요?"
<br>
"응. 내가 눈물을 흘리며 니 발을 잡고 사귀자고 매달렸었니? 기억이 끊겨서
<br>
잘 모르겠네."
<br>
"나 당구장 가야 되요."
<br>
"너 도서관은 왜 나왔니?"
<br>
"누나 자리 잡아 줄 목적이었잖아요. 나는 시험 보려면 며칠 더 있어야 되요."
<br>
"들어 가서 공부 해."
<br>
"누나가 뭔대?"
<br>
"정희에게 이른다? 아까 니가 한 말 다 들었어."
<br>
"일러요. 목 깃 좀 놓으면 안될까요?"
<br>
"싫다."
<br>
"나 잡으러 나온거에요?"
<br>
"응."
<br>
"아무리 그래도 난 연상에겐 관심이 없어요."
<br>
철수가 일어섰던 그 벤취에 도로 앉았습니다. 무슨 얘기 하는거야 근데.
<br>
"흑흑, 왜 나는 안된다는 거죠? 정희는 고려해 볼 맘이 있다면서."
<br>
녀석 때문에 나도 장난스럽게 되 버렸네요. 쩝.
<br>
"정희 누나가 내게 그런 말을 하면 그건 진짜 결심한 마음에서 나온 거에요."
<br>
"무슨 말 하는거야?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정희에게 질투심 생기네."
<br>
"정희 누나는 오래전부터 알아 온 사이잖아요. 누나에게 말하지 말아요. 내가
<br>
짝사랑 했던 사람이에요 헤헤. 정희 누나가 간혹 내게 연하만 아니었으면 하는
<br>
말을 했어요."
<br>
"안 들어 갈거야?"
<br>
"정희 누나 때문에 연상에겐 잘못된 감정 가지지 말자라고 생각했지요."
<br>
녀석이 들어 가기 싫어서 자꾸 다른 말을 하네요.
<br>
"내가 사귀자고 했던 말은 장난이었어. 왜 그래 너?"
<br>
"내가 생각하기로 연상의 여자가 연하의 남자를 대할 땐 사랑하는 맘이 있어도
<br>
가벼운 것 같아요. 가볍다는 것은 어느 누군가 스며 들기가 쉽다는 거겠지요. 나
<br>
도 한 구석에는 성숙한 면이 있는데, 자꾸 어린 쪽으로만 보더군요. 남자는 다스
<br>
리려는 심리가 강하고 여자는 기대고 싶은 심리가 강하죠. 내가 누나를 다스리려
<br>
고 생각한다면 누나가 비웃겠지요? 감싸 주고 싶은 생각도 누나는 그냥 헛웃음으
<br>
로 던져 버리죠. 여자들은 연하의 남자에게서 보다 나이가 들고 성숙한 남자에
<br>
게 더 기대기를 원하나 봐요. 그리고 연상의 남자가 자기를 이해하고 더 잘 감
<br>
싸 줄 것이라 믿나 보죠."
<br>
녀석이 자뭇 심각하네요. 이 녀석 정말 정희를 좋아 했나 봐요. 진짜 질투 나
<br>
네.
<br>
"치, 그런 말들을 어디서 줏어 들었니?"
<br>
"줏어 듣다니. 많은 연구에 의해서 스스로 깨달은 건데."
<br>
"이제 21살짜리가 뭘 안다고 그런 말들을 내 뱉는거니? 내가 나이가 조금 더 들
<br>
고, 인생 경험이 늘면 그걸 반박해 줄게. 들어가서 공부 해 빨리."
<br>
"봐요, 누나도 내가 어리다고 바로 깔아 뭉개잖아. 우쒸. 당구 한 시간만 치고
<br>
오면 안될까요?"
<br>
"들어 가자? 안 그러면 동아리 방 칠판에다 은정이는 철수와 사귀기로 했음,이
<br>
라고 적어 놓는다? 그러면 너 학교 다니기 힘들어 질 걸. 정희에게도 니가 짝사
<br>
랑하고 있다는 말 전한다?"
<br>
"정희 누나 반 만 닮아라 씨. 정희 누나도 내가 자길 좋아하는 거 알아요."
<br>
"그래, 그건 아는 거 같더라. 들어 가지 이제."
<br>
"결투 해야 되는데, 씨."
<br>
철수를 결국 도서관으로 데리고 왔지요. 말을 물가에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먹
<br>
이지는 못한다. 그는 바로 엎드려 자 버리는군요.
<br>
<br>
한 동안 철수와 잘 지내었습니다. 여름 방학 때와는 달리 시험이 끝나고 서울
<br>
로 돌아 간 철수와 자주 만났지요. 철수와 같이 있을 때면 그냥 편하고 재밌고
<br>
좋았어요. 심통을 부리긴 하지만 배려하는 맘도 있었고, 말을 잘 듣는 편이었지
<br>
요.
<br>
<br>
12월 중순을 넘어선 어느 날, 그와 함께 겨울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br>
나는 그에게 뭔가 종이 상자를 건네었습니다.
<br>
<br>
"이게 뭐에요?"
<br>
"선물."
<br>
"선물인건 알겠는데, 뭐냐니까요?"
<br>
"뜯어 봐."
<br>
"음, 그러지요. 이런다고 내가 누나에게 연민의 정을 가질거라 생각지는 말아
<br>
요."
<br>
"알았어, 알았어."
<br>
나는 철수에게 삐삐 하나를 선물 했습니다. 자식에게 연락 할 방법은 집에 전화
<br>
를 하는 수 밖에 없는데, 녀석의 아버님이 받으시면 뭘 자꾸 꼬치꼬치 물어 보시
<br>
더라구요. 그리고 집에 없으면 도저히 연락할 길이 없어서요. 올 겨울 크리스마
<br>
스는 할 수 없이 녀석과 보내야 겠군요. 그냥 당분간 다른 이들에게 다가갈 마음
<br>
이 생기지 않는군요. 누군가 잊고 싶어서 그런 거지만 철수도 한 몫 하고 있다
<br>
는 것은 부인하지 못하겠네요.
<br>
"삐삐네? 근데 디자인이 너무 여성스럽잖아."
<br>
"주면 그냥 고맙게 받아라."
<br>
"번호는요?"
<br>
"***.272.0865. 달달이 고지서 너에게 줄테니까, 그건 니가 내라."
<br>
"알았어요. 이름은 내 이름으로 했지요?"
<br>
"응. 주소만 우리 집으로 했어."
<br>
"나도 삐삐가 생겼구나. 누나 헨드폰 잠깐 줘 봐요."
<br>
"왜?"
<br>
"개통식 해야 될 거 아닙니까. 줘 봐요."
<br>
"에그, 내가 해 줄게."
<br>
녀석 앞에서 삐삐를 쳐 주었지요.
<br>
"지이잉!"
<br>
"아니 이것은 진동? 푸하하!"
<br>
철수는 바로 일어서 쪼로로 어딘가로 달려 갔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제 헨드폰
<br>
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br>
"여보세요?"
<br>
"아, 0865로 삐삐 치신 분이요?"
<br>
철수는 좀 황당하게 귀여운 녀석이군요.
<br>
<br>
<br>
<br>
연하가 어때서 18회
<br>
그해 겨울은 따뜻했지만 외로웠습니다. 아니군요. 외로웠지만 따뜻했습니다.
<br>
<br>
한 해를 마무리 하라는 눈이 오네요. 오늘 아침 내 창가에 눈이 기웃거렸습니
<br>
다. 기분 좋게 내리지만 쌓이지는 못하고 눈물을 떨구어 버립니다. 하늘에서는
<br>
반가운 것이 내리지만 쌓였던 것은 지워져 버립니다.
<br>
요즘은 철수 그 녀석이 자주 보고 싶어요. 무슨 감정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그
<br>
래도 같이 있고 싶은 녀석입니다. 눈이 오면 누군가와 그 눈 속을 거닐고 싶어
<br>
요. 아무리 방학이지만 철수 녀석, 일어 났겠죠? 삐삐를 쳐 보았습니다.
<br>
호호, 바로 전화가 오네요.
<br>
"0865로 삐삐 치신 분인가요?"
<br>
에그, 항상 이렇죠.
<br>
"너 내 헨드폰 번호 모르니?"
<br>
"아, 알지만 다 이렇게 물어 보더라구요. 왜 삐삐를 치셨나요?"
<br>
"눈 오거든?"
<br>
"그래서요?"
<br>
"그래서라니? 눈 온다구."
<br>
"겨울에 눈 오는 거 당연하잖습니까."
<br>
"에그 인간아. 여자가 눈 온다고 전화를 하는 것은 어디 근사한 곳으로 가고 싶
<br>
거나 낭만적인 만남을 기대하는 것이거든? 뭐? 겨울이니까 눈 오는 거 당연하다
<br>
구?"
<br>
"그런 걸 왜 나한테 기대를 해요?"
<br>
"자기 생각을 해 주면 감사할 줄 알아야지. 어디 교외로 드라이버 나갈래?"
<br>
"눈 오는데 차를 몰고 교외를 나가요? 눈 오면 교통 체증이 얼마나 심한데..."
<br>
"내가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됐을까? 너 그러면 진짜 여자 못 사귄다."
<br>
"어디 가고 싶은데요?"
<br>
내 의도대로 따라 오지만 꼭 기분좋게 따라 오지는 않죠. 그것이 녀석의 매력
<br>
인가 봅니다.
<br>
<br>
크리스 마스가 다가 온다. 오늘 같은 눈은 크리스마스 이브날 내려야 하는데,
<br>
나 태어나서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감성이 물들지 않았던 초등학교 1학년 때를 제
<br>
외하곤 한 번도 이루어 지지 않았다. 서울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먼지가 끼여 별
<br>
로 하얗지 못할 것이다. 우리 학교 근처만 해도 그런대로 깨끗한 하얀 눈일게
<br>
다. 서울 하늘은 매연이다, 먼지다 하여 눈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 잔뜩
<br>
끼여 있다. 우리집 옥상에서 맞는 눈은 먼지 바닥에 잘 못 넘어진 신부의 웨딩
<br>
드레스 같은 빛이다.
<br>
오늘 아침에 밥을 먹는데, 창 가로 하얀 것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감성이 풍
<br>
부한 것 같다. 아무도 눈오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나는 밥을 먹고 난
<br>
뒤, 옥상으로 올라 갔다. 그리고 눈을 반겼다.
<br>
아래를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쌓인 눈을 모아 내리는 것보다 많은 눈을 던
<br>
져 주고는 숨곤 했다.
<br>
"어떤 놈이 눈을 던진겨?"
<br>
쌈쟁이 할머니에겐 함부로 장난 치지 말아야 겠다.
<br>
눈이 내린다.
<br>
제 죽을 곳이 땅 임을 알면서도
<br>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냥 내리고 있다.
<br>
눈물 흘려야 할 이별을 알진데
<br>
무슨 깊은 그리움이 있는지
<br>
잠시간의 만남을 위해
<br>
제 죽을 곳으로 부질없이 내려 앉는다.
<br>
"지이잉!"
<br>
옥상에서 추위에 떨면서도 눈을 반기며 청승을 떨고 있는 데 삐삐가 울렸다. 나
<br>
에게 삐삐 쳐 주는 사람은 은정이 누나 뿐이다. 삐삐 번호를 친구 두 명에게 알
<br>
려 주었지만 그 놈들은 아직 한 번도 삐삐를 쳐주지 않았다. 하기야 한 놈에겐
<br>
군 입대하는 날 가르쳐 주었으니 하고 싶어도 못할 것이다. 내 추리닝 바지 호주
<br>
머니에 넣어 두었던 삐삐가 울렸다. 거의 죽어 있는 삐삐라서 집에 있을 때도 항
<br>
상 가지고 다닌다. 은정이 누나가 연락해 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삐
<br>
삐를 꺼내 보았다. 눈을 맞으며 삐삐 번호를 확인하는 것도 낭만이 있다. 삐삐
<br>
가 울리면 만남이 있다. 보나마나 은정이 누나의 헨드폰 번호가 찍혀 있겠지만
<br>
드물게 잘 못 걸려 온 번호일 수도 있기에 확인을 했다. 은정이 누나구만. 눈 오
<br>
는 데 어디 교외라도 나가자고 했으면 좋겠다.
<br>
"용인 쪽으로나 내려 가 볼래?"
<br>
이 여자가 날 닮아 가나요? 그 쪽 눈은 깨끗하겠지요? 눈이 많이 오진 않지만
<br>
분명 운전하는 데 있어 애로사항이 있을 법 한데. 무모하네요. 그래도 반가운 말
<br>
이다.
<br>
"용인 쪽은 왜 가는데요?"
<br>
"자연농원 가자. 눈 오는 날, 공원 가면 재미 있을 것 같아."
<br>
"가까운 곳에 롯데 월드 있잖아요."
<br>
"거긴 실내잖아."
<br>
"얼어 죽고 싶어요?"
<br>
"가기 싫음 말아. 예전부터 꼭 토를 달아요."
<br>
"내가 따라 갈 줄 알고 연락한 거 아니었어요?"
<br>
"응."
<br>
"가기 싫음 말아라는 소린 뭐에요?"
<br>
"그냥 해 보는 소리."
<br>
"진짜 운전해서 갈려구요?"
<br>
"응."
<br>
"데리러 올 거에요?"
<br>
"30분 뒤에 길가로 나와."
<br>
눈 오는 마로니에 공원을 여자친구와 팔짱 끼고 거니는 것은 언젠가 실현이 되
<br>
겠지요. 오늘은 자연농원이나 가자.
<br>
추위에 단단히 대비를 했다. 큰 장갑을 끼고 두툼한 목도리를 했다. 모직 자켓
<br>
은 이런 날 쥐약이다. 무스탕도 쥐약이다. 내 외투중에 모직 자켓이나 무스탕은
<br>
없다. 그냥 있는 척 해 봤다. 우주복 같은 조끼 패딩을 속에 받쳐 입고, 스키복
<br>
같은 다운 파커를 또 껴 입었다. 그래도 불안해서 패션 돌돌이 모자까지 썼다.
<br>
밑이 허전해서 속바지를 껴 입었다. 준비 완료다.
<br>
"어디 가냐?"
<br>
"자연 농원에요."
<br>
"눈 오는데 미쳤냐?"
<br>
우리 아버지가 근엄하시게 말씀 하셨다.
<br>
"용돈 좀 주십시오."
<br>
그래서 근엄하게 대답을 했다.
<br>
"자주 전화 오던 그 아가씨가 꼬시던?"
<br>
또 근엄하시게 물으셨다.
<br>
"네."
<br>
당연하다는 듯 대답을 했다. 우리 아버지가 혀를 차신다. 혀를 차시는 울 아버
<br>
지가 별 말씀 하지 않고 근엄한 표정으로 거금 10만원을 주셨다.
<br>
"올 때 같이 정신병원이나 들렸다 와라."
<br>
마지막 말씀을 하실 땐 근엄하시지 않으셨다.
<br>
<br>
나는 모르겠는데, 은정이 누나는 정신 상담을 받아야 겠다. 심각한 공주 증세
<br>
가 있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누나는 꼴랑 니트 하나에 바람이 잘 통할 것 같
<br>
은 정장용 바지를 입고 있었다. 뒷좌석에 벗어 던져 놓은 쟈켓 또한 별로 두꺼
<br>
워 보이지 않았다. 차 안의 따뜻한 온도에 바깥 기온을 인식하지 못했나 보다.
<br>
"그런 차림으로 안 춥겠어요?"
<br>
"너처럼 두툼하게 입으면 둔해 보이잖아. 내 날씬한 몸매가 죽어 버리거든."
<br>
"자연 농원 그냥 구경만 하다 올거에요?"
<br>
"무슨 소리야, 탈 거 다 타야지."
<br>
"추울텐데..."
<br>
"옷 벗어 달란 소리 안할테니까 염려 마. 나 보기는 이래 보여도 감기 한 번 안
<br>
걸려 본 여골이야."
<br>
"진짜에요?"
<br>
"그럼. 그리고 나 추위를 별로 타지 않아."
<br>
보통 한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였지만 두 시간이 넘게 걸려 자연 농원에 도착했
<br>
다. 눈은 많은 양은 아니지만 계속하여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운전해서 피
<br>
곤했을 만도 한데 누나는 자연 농원의 놀이 기구들을 보자 흥분이 되는 모습이
<br>
다. 나이 많다고 자랑을 하더니 나보다 더 어려 보이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br>
"우리 청룡열차도 타고, 후룸라이드도 타고 음, 바이킹도 타자."
<br>
후룸라이드는 물이 얼어서 타지 못했다.
<br>
<br>
차에서 내리자 마자 추위가 바로 느껴졌다. 얼레? 누나는 춥지 않은 듯, 벗어
<br>
놓은 외투를 걸치고 즐거운 표정으로 매표소 앞으로 뛰어갔다. 너무 얻어 먹을
<br>
수만 없었다. 용돈 받은 것도 있는데...
<br>
"자유 이용권으로 두장 주세요."
<br>
내가 표를 샀다. 사고 나니까 좀 아깝다. 하루 종일 당구 치고 탕수육 시켜 먹
<br>
어도 남을 돈이 나갔기 때문이다.
<br>
<br>
자연 농원을 입장한 시간은 12시 정도였다.
<br>
푸하하, 그 동안 당했던 설움을 한꺼번에 씻는 듯 했다.
<br>
"이제, 바이킹을 타러 갑시다."
<br>
사람들이 거의 없던 관계로 타고 싶은 거 맘대로 탔다.
<br>
"나 추워. 이제 가자."
<br>
"무슨 말씀, 자유 이용권인데 다 타 봐야지요."
<br>
누나가 너무 추위에 떠는 것 같아 파커를 벗었다. 그리고 패딩 하나를 벗어 주
<br>
었다. 옷 벗어 달라는 소리 하지 않겠다는 말을 불과 몇 시간 전에 했던 거 같은
<br>
데, 누나는 파커를 탐내는 눈 빛이다. 이건 줄수 없다. 그래도 목도리는 벗어 주
<br>
었다. 그래도 추웠을 것이다.
<br>
"야, 신난다!"
<br>
바람을 가르며 청룡열차가 하늘을 날았다. 청룡 열차에 탄 사람? 누나하고 나
<br>
뿐이다. 두 번 탔다.
<br>
"나 이제 갈래."
<br>
"어허, 무슨 말씀. 한 번 더 탑시다."
<br>
돌돌이 모자를 내리 쓰고 신나게 탔다. 내 옆에서 청룡열차의 무서움 보다 추위
<br>
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은정이 누나의 모습이 가여워 보였다. 그렇지만 또 한편
<br>
으로 고소하기도 했다. 눈 바람에 화장이 지워지고 빨갛게 솟은 가는 핏줄들로
<br>
누나의 모습은 더 이상 세련된 미인이 아니었다. 머리도 엉망이고 콧물까지 흘렸
<br>
다.
<br>
"나 이제 안 타. 너 나뻐 씨."
<br>
"누나가 먼저 오자고 했잖아요."
<br>
"겨우 이것만 벗어 주고 말이야. 그리고 내 생각은 않고 계속 타자고 졸라되기
<br>
나 하고..."
<br>
누나가 진짜 삐쳤나 봐요. 아무말 없이 그냥 밖으로 나가 버리네요. 따뜻한 커
<br>
피 두잔을 사가지고 누나를 따라 갔다.
<br>
"옷은 벗어 주고 가야지!"
<br>
세시가 못 되어 자연 농원을 나왔다. 자유 이용권 괜히 끊었다.
<br>
<br>
차 안에서 누나는 히터를 최고로 틀어 놓고 코를 풀고 있었다. 그래도 튼튼한
<br>
여자다. 나도 상당히 추위를 느꼈는데, 겨우 저 것만 입고 내가 조른다고 탈 거
<br>
다 탔으면서 저 정도면 아주 튼튼한 여자라고 인정을 해 주어야 한다. 코를 풀
<br>
고 난 다음 팩을 꺼내서 화장까지 고친다. 그 곱던 하얀 손은 검붉게 변해 있었
<br>
지만 물수건으로 몇 번 문지르고 크림을 바르니까 빠른 시간 내에 제 모습을 찾
<br>
았다.
<br>
"약한 여자는 아니네요?"
<br>
"그럼, 내가 얼마나 튼튼한데. 그런 내가 코감기 걸렸어 너."
<br>
"여기 끌고 온 건 누나에요. 커피 드세요."
<br>
"원두 커피?"
<br>
"자판기에서 원두 커피도 팔아요?"
<br>
"그럼 나 안 마실래."
<br>
마시긴 싫음 마라. 창 밖은 눈이 제법 쌓였다. 하지만 눈은 더 이상 내리지 않
<br>
았다. 운전대 앞에선 누나가 코를 풀고, 거울 보고. 코 풀고 거울 보고. 한 참
<br>
동안이나 차를 출발 시키지 않았다. 따뜻한 차 안에서 누나 옆에 앉아 있는 이
<br>
시간이 쌓인 눈 속에서 그냥 곱다. 그 고운 기분으로 옆에 앉은 누나가 또한 그
<br>
냥 좋다. 저 누나를 연상이고 뭐고 간에 꼬셔 볼까? 불가능하겠다. 그리고 연인
<br>
으로서 유지 시킬 자신도 없다. 아무리 장난 스럽게 말했다고 날 인정하지 않았
<br>
던 정희 누나의 가벼운 말들에도 상처를 받았던 내가, 옆의 저런 여자를 어떻게
<br>
감당을 하겠냐. 요즘 누나가 외로움을 타는 것 같다. 좋아하던 사람에게 바람을
<br>
맞았는데, 외로움 탈 만도 하다. 잘난 여자기 때문에 다른 남자 만날 때까지 별
<br>
로 긴 시간이 흐를 것 같지는 않지만 그 시간동안 가볍게 대할 수 있는 나를 자
<br>
주 찾을 것 같다. 그러면 됐지 뭐.
<br>
시간은 네시에 가까워 졌다. 그러고 보니 밥도 먹지 않았다.
<br>
"출발 안 해요? 나 배 고픈데."
<br>
"그래, 가면서 식당 나오면 밥이나 먹자."
<br>
<br>
차는 아주 느릿하게 움직였다. 쌓인 눈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늘에선 또 눈송이
<br>
가 하나 둘씩 떨어졌다. 외대 근처 어느 식당에서 따뜻한 갈비탕을 먹었다.
<br>
"갈비탕 사 주었다?"
<br>
"어, 기억하고 있었네. 그때 갈비탕 사 주지 않고 그냥 떠나 버린 누나를 얼마
<br>
나 원망 한 줄 모르죠?"
<br>
"치, 먹는 것에 삶의 목적을 두는 것 아니니?"
<br>
"누나도 자취 해 봐요."
<br>
"나도 내년엔 자취나 할까?"
<br>
"차도 있는 사람이 자취는 무슨..."
<br>
"정희가 병원에 취직이 되었으니까, 자취방을 비우겠지? 그걸 내가 인수할까?"
<br>
"왜? 등,하교 하기가 힘들어요?"
<br>
"그건 아닌데, 4학년 때는 아무래도 늦게까지 학교에 있어야 될 일이 많을 것
<br>
같거든. 그리고 대학원 가게 되면 또 밤샐 일이 많을 것 같고."
<br>
"누나 대학원 갈거에요?"
<br>
"응. 어짜피 나는 직장이 정해 졌잖아. 울 아빠 약국 아니면, 울 엄마 병원."
<br>
"좋겠수."
<br>
"넌 군대 안가니?"
<br>
"나도 대학원 갈거요."
<br>
"잘됐네. 그럼 나하고 하나, 둘, 셋. 삼년은 더 학교에서 보겠다. 이렇게 데리
<br>
고 다니다, 진짜 연인 사이로 발전하면 어떡하지?"
<br>
누나는 손가락질을 하고 난 다음 미소를 지었다. 그렇네. 삼년 동안 저 누나의
<br>
곁에 있으면, 오늘 같은 기분이 제법 많이 들 것이고, 혹시나 사랑하는 마음도
<br>
생길 수 있겠다. 안되는데... 누나가 연상이라서가 아니라 너무 버거운 상대
<br>
다. 에이, 될대로 되라.
<br>
"연상은 관심 없다니까."
<br>
"훗! 너 그 소리 언제까지 나오나 한 번 보겠어."
<br>
식당에서 속도 따뜻하게 만든 다음 밖으로 나왔다. 눈 졸라 온다. 뭉치면 산다
<br>
는 식으로 떼거지로 땅에 내려 앉고 있었다. 그리움이 많으면 이별의 시간도 늦
<br>
어 지겠군.
<br>
<br>
"이래 가지고 서울 갈 수 있을려나?"
<br>
"그래, 눈 오는 데 차 끌고 나올 때부터 뭔가 찜찜했어."
<br>
"너, 씨."
<br>
누나는 차를 조심스럽게 몰았다. 쌓이는 눈 때문에 차가 불안하게 흔들리기도
<br>
했다. 그리고 오늘 중으로 서울 가기는 힘들 것 같았다.
<br>
<br>
"누나 차라리 학교로 가요."
<br>
"학교?"
<br>
"나는 내 자취방에서 자면 되거든요. 누나는 밤새 부지런히 운전 해 가면 내일
<br>
새벽에는 집에 들어 갈 수 있을거에요."
<br>
"뭐야?"
<br>
"나 졸라 심심해요. 누나는 운전이라도 하지."
<br>
"이게 진짜. 눈길이라 초보에게 운전을 맡길 수도 없고, 이런 날씨의 운전이 얼
<br>
마나 짜증나고 피곤한 지 모르지?"
<br>
"한 시간이 지났는데 2,3킬로 미터 왔어요?"
<br>
"그거 보단 더 왔다."
<br>
"수원은 가까우니까, 학교로 가요. 정희 누나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br>
"정희 없어도 돼. 내가 니 방에서 자면 돼. 넌 친구 자취방 많을 거 아냐."
<br>
"내 방에요?"
<br>
"두 번이나 잤는데, 못 잘것도 없지."
<br>
"나도 내 방에서 잘거야."
<br>
"자라."
<br>
"남자 방인데 꺼림찍하지 않아요?"
<br>
"내가 너를 의식해? 아서라 얘야."
<br>
이건 분명 나를 무시하는 언사다.
<br>
<br>
학교까지 가는데도 세시간이나 걸렸다. 나는 혹시 누가 볼까 봐 주위를 살피면
<br>
서 내 방문을 열었는데, 은정이 누나는 아주 당당하게 걸어 들어 왔다. 아무리
<br>
나를 동생으로 취급한다고 이 건 너무했다.
<br>
아까 혹시나 했던 생각 접어야 겠다.
<br>
나는 누나가 샤워한다는 얘기를 듣고 밖으로 나갔다. 눈은 하염없이 계속 내리
<br>
고 있었다.
<br>
떼거지로 내려도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다. 암만 쌓여 봐라. 해 한번 기분좋게
<br>
내리면 금방일 걸.
<br>
<br>
내가 들어 갔을 때 누나는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옷장 속에 넣어 놓은 거 어떻
<br>
게 찾았을까?
<br>
"나도 옷 갈아 입어야 되요."
<br>
"갈아 입어라."
<br>
"나도 남자에요. 그리고 진짜 여기서 잘 거에요?"
<br>
"응, 넌 바닥에서 자."
<br>
"옷 갈아 입게 나가요."
<br>
"고개 돌리고 있을게."
<br>
"나도 자존심이 있어요."
<br>
좀 심각한 어조로 답을 했다.
<br>
"삐쳤니? 진짜 기분 나쁜거야?"
<br>
"너무 어린 애 취급 말아요."
<br>
"나 잠옷 입고 있는데, 밖에 나가 있어야 돼?"
<br>
"우쒸!"
<br>
내 방에서 내가 눈치 보며 화장실 가서 옷을 갈아 입게 될 줄이야. 침대도 뺏기
<br>
고 말이야.
<br>
"집에 전화는 했어요?"
<br>
"응, 정희네서 자고 간다고 했어."
<br>
"딸자식 키워나도 소용없다는 말이 누나 때문에 생겼구만."
<br>
남아 있던 강냉이 누나가 다 먹어 치웠다. 티슈도 코 푼다고 다 써 버렸다. 그
<br>
러고선 또 요구를 했다.
<br>
"티비도 하나 사고, 오디오도 하나 사라. 방에 문화시설이라곤 컴퓨터 한대 밖
<br>
에 없네? 책도 모두 전공 서적들 뿐이고, 가서 만화책 좀 빌려 와. 참 먹을 것
<br>
도 좀 사와라."
<br>
누나가 만원짜리 한 장을 내 손에 꽉 쥐어 주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밖으로
<br>
나갔지요. 섧어라. 추리닝을 입고 딸딸이 신은 맨발로 쌓인 눈을 밟으며 만화방
<br>
으로 갔다. 내가 순정 만화를 빌려 보게 될 줄이야. 누나가 말한 책은 200원짜리
<br>
도 아니고 300원을 줘야 빌릴 수 있는 그런 만화책이었다. 10권에다가 먹을 거
<br>
사고, 티슈 사니 내게 떨어지는 것은 없었다.
<br>
그래도 기분 좋게 내 방으로 왔다. 발은 시렸지만 방학이라 사람들 발자국이 없
<br>
는 서울보다 깨끗한 눈이 쌓인 거리를 마냥 밟으며 달렸다.
<br>
<br>
"삼권 좀 던져 줄래?"
<br>
"나는 아직 일권도 다 안봤는데?"
<br>
"재밌지?"
<br>
"뭐가 잼있어요. 과자 흘리지 마요."
<br>
"알았어. 삼 권 줘."
<br>
난 또 전공책에 수건 말아 베개 삼고, 싸늘한 방바닥에서 무거운 찬공기 마시
<br>
며 만화책을 보았지만, 누나는 스팀 모락 나는 침대 위에서 두터운 이불을 덮고
<br>
깨끗하지는 않지만 푹신한 베개를 가슴에 묻으며 한 쪽팔은 호랑이 배에 얹은
<br>
채, 그 손으로 과자를 집어 먹으며 만화책을 보았다.
<br>
한참 뒤, 나는 만화책 보다 잠이 든 누나를 바로 해 주어야 했다. 엎드려 자면
<br>
몸에 좋지 못하다. 누나의 불안하게 자는 모양을 바른 자세로 해 주는 내가 어찌
<br>
보면 누나보다 훨씬 어른 스러운데... 호랑이를 뺏으면 또 이불을 말겠지? 니 다
<br>
해라 씨. 누나를 바로 눕혀 이불을 덮어 주고는, 나는 방바닥에서 추위에 떨며
<br>
만화책을 끝까지 다 보았다. 순정만화 치곤 괜찮네! 나도 자야지 이제.
<br>
일어 나 괜히 누나의 자는 모습을 한번 더 쳐다 보았다. 자는 모습이 상당히 사
<br>
랑 스럽다. 저 누나가 내 곁에 오래 있어 주었음 하는 마음이 크다. 자자, 이제.
<br>
<br>
<br>
연하가 어때서 19회
<br>
은정이 누나가 내 방에서 세 번을 자고 갔다.
<br>
그 많던 눈은 다음날 오전 따스한 햇살 속에 가여븐 모습으로 죽어 갔다. 누나
<br>
는 내가 일어나기 전에 옷을 갈아 입었으며 아침도 먹지 않고 서울로 떠났다.
<br>
난 같이 가지 않았다. 그냥 자취방에 더 있고 싶었다. 누나는 또 잠옷을 가지고
<br>
가지 않았다. 고이 개어서, 다독거려 놓은 인형 옆에다 놓아 두고는 그냥 떠나
<br>
버렸다.
<br>
조금 전까지 은정이 누나가 잠 들었었던 침대에 홀로 누워 생각을 해 보았다.
<br>
은정이 누나는 일년 전만 해도 모르던 사람이다. 그 사람이 내 마음 속에 존재
<br>
의 영역을 넓혀 간다. 어린 시절 친누나처럼 생각했던 정희누나 만큼의 넓은 공
<br>
간을 차지했다.
<br>
난 정희 누나를 좋아했다. 그녀가 이사를 가버린 다음 난 슬퍼서 울었다. 어린
<br>
마음에 상처가 컸었다. 그것을 그 누나는 모를테지. 연상엔 관심이 없다고 말하
<br>
지만 난 정희 누나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그 관심을 그냥 우스개로 받아 넘
<br>
기는 정희 누나에게 남들은 모르는 상처를 받았다. 정희 누나와 함께 했던 시간
<br>
의 10분의 1도 안되는 시간을 은정이 누나와 보냈다. 그런 은정이 누나가 벌써
<br>
정희 누나를 가려 버리고 있다. 정희 누나는 곧 학교를 떠날 것이다. 그렇지만
<br>
예전 이사를 갔을 때보다 큰 아픔을 줄 것 같지는 않다. 나도 이제 컸다. 그리
<br>
고 정희 누나는 은정이 누나에게 많이 가려졌다. 누나를 가리는 사람이 하필이
<br>
면 또 누나다. 그것이 문제다.
<br>
은정이 누나는 정희 누나와는 다르게 연인이라는 말과, 사귀자는 말을 먼저 내
<br>
뱉고 있지만 역시 정희 누나만큼이나 장난스럽다. 마음 단단히 먹어야 겠다. 내
<br>
마음 뺏기지 않도록 말이다. 한 번 뺏기면 큰일 날 것 같다. 잘못하면 은정이 누
<br>
나에게 큰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은정이 누나 주위에는 잘 난 남자들이 기회
<br>
를 엿보고 있다. 나에게 버거운 상대들이다. 맘 뺏기지 말자.
<br>
누나가 잠시 하룻 밤 묵고 떠난 빈 방의 허전함이 이 시간 너무나 크다.
<br>
왜, 내가 좋아하는 여자는 다 연상인거냐. 사주를 한 번 봐야 겠다.
<br>
<br>
올해 크리스마스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집에서 홀로 보냈다. 그래도 덜 비참했
<br>
다. 만나자고 한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하, 올해는 할 수 없이 크리스마스
<br>
를 혼자 보낸 것이 아니고, 자의로 혼자였다.
<br>
내가 심심풀이 땅콩이여 뭐여. 진짜 연상들 너무한다. 그러니까 내가 연상은 관
<br>
심을 줄래야 줄 수가 없다. 나도 비싼 몸이여. 재미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
<br>
란 걸 가르쳐 주고 싶었다.
<br>
배짱 좋게 거절 했지만 졸라 심심했다. 나도 나이가 들었다고 티비 만화영화가
<br>
재미있지가 않았다. 그냥 만나자고 할때 쪼르르 달려 나갈 걸. 뒷일은 뒤에 생각
<br>
해야 되는데, 내가 너무 먼 훗날의 일을 생각했나 보다.
<br>
<br>
크리스 마스가 지나고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되었는데도 은정이 누나에게서 연락
<br>
이 없었다. 삐쳤나?
<br>
<br>
<br>
올해 크리스 마스는 내게 외로움을 주었지요. 캐롤송이 들리고 화려한 조명등
<br>
이 아름다운 청담동 이브의 밤 거리를 홀로 거닐다 왔습니다.
<br>
그냥 웃고 싶었어요. 고귀하신 분이 태어난 그 화려한 날에 아무 생각 없이 웃
<br>
고 싶었습니다. 근데 웃지 못하고 외로움을 탔습니다. 외로움은 누군가를 생각나
<br>
게 하지요.
<br>
나, 연락하면 만날 수 있는 사람들 많아요. 동아리 선배 오빠들도 있구요. 우
<br>
리 과에도 내가 만나자 하면 바로 달려 올 선배 오빠나 동기 녀석들 많아요. 그
<br>
렇지만 그들에겐 내가 관심을 두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만남 뒤에 오는 공허함
<br>
이 싫었습니다. 차라리 여자 친구들 만나는게 낫죠. 내가 잘못 된 것일까요? 나
<br>
남자들 오래 사귀지 못했습니다. 내가 만나던 남자들은 어느 시점에선가 어색해
<br>
지더군요. 하지만 내가 어색하게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색한 사람
<br>
은 만나기 싫었고, 관심없는 사람들은 만남 자체가 공허할 뿐이지요. 내가 진짜
<br>
좋아했다고 생각한 사람도 이제 어색해 졌습니다. 어색한 사람은 잊혀지지요.
<br>
크리스 마스 날은 그냥 홀로 집에 있었습니다. 핸드폰도 꺼놓고 전화도 받지 않
<br>
았습니다.
<br>
내가 나를 혼자 있게 만들었지만 자의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내게 생각나
<br>
는 사람들은 나를 찾지 않았습니다. 어색한 승주는 잊혀지는 중이고, 제일 친했
<br>
던 정희는 남자 친구와 학생시절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보내겠지요.
<br>
침대에 홀로 앉아 생각했습니다. 가볍게 사랑을 내 뱉은 사람들, 그 가벼운 사
<br>
람들에게 나를 지켜줄 수 없다고 생각 한 그 사람 모두를 잊겠다는 생각을 해 봅
<br>
니다. 내년엔 새로운 사람이 생기겠지요. 조급하지 않으며, 조금씩 서로를 공유
<br>
해 가는 소박한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내년엔 가랑비를 맞고 싶습니다. 언제 젖
<br>
었는지도 모르게 가는비를 맞으며 흠뻑 젖고 싶습니다. 최소한 승주 보다는 오래
<br>
토록 내 곁에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br>
이런 생각들을 하게 만든 놈이 밉습니다. 그 녀석을 만났다면 그냥 생각없이 웃
<br>
었을 텐데...
<br>
아무래도 올 해 크리스마스는 뭔가 다른 기분이 들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만나
<br>
면 생각없이 웃게 만드는 그 녀석과 함께 할 것이라고 한달 전부터 계획했었는
<br>
데, 녀석이 날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 여자 친구도 없는게 무슨 똥배짱이랍니까.
<br>
이브 날 아침부터 한 시간 간격으로 다섯 번이나 호출을 했습니다. 점심 때가
<br>
지나서야 전화가 왔더군요.
<br>
"0865로 호출 하신분이요?"
<br>
짜증도 났지만 반가운 목소리였지요.
<br>
"내가 오전부터 호출했는데, 왜 이제 전화하는거야? 너 늦잠 잤지?"
<br>
"일찍 일어 났습니다."
<br>
"저녁에 나와라. 누나가 맛있는 거 사줄게."
<br>
"나 바빠요."
<br>
"어쭈, 튕기네? 맛있는 거 사준다니까."
<br>
"우리집에도 먹을 거 많아요."
<br>
"나올 거면서 그렇게 튕기면 좋니?"
<br>
"누가 나간데요? 내가 부르면 항상 쪼르르 달려나가는 그런 사람인 줄 아세요?"
<br>
"너 오늘 만날 사람 없을 거 아냐."
<br>
"그렇긴 하지만, 나도 바쁠 수 있단 말입니다."
<br>
"교회나 성당 나갈거니?"
<br>
"아니요. 나를 왜 만나고 싶은데요?"
<br>
"그냥 심심하니까. 너 만나면 재밌잖아."
<br>
"우쒸, 나 바빠요. 전화 끊어요."
<br>
"야, 박철수."
<br>
"뚜우..."
<br>
녀석이 쌔게 나왔습니다. 집에다 전화를 했더니 아버님이 받으시더군요. 나보
<br>
고 처자라고 말씀하시는 아버님이 무서워 그냥 끊었습니다. 나 철수에게 삐쳤습
<br>
니다. 그래서 한 일주일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br>
연인 사이도 아닌데, 내가 삐치네요. 지금 내가 좋아했던 사람에게 차이고, 남
<br>
자 친구 만들지 않아 녀석한테 이런 수모를 당했지만 나중은 달라질거라 봅니
<br>
다.
<br>
일주일 째 철수도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강적이네요. 너그러운 누나가 용서
<br>
를 해야지요. 한 해의 마지막 날 울적하여 내가 먼저 철수에게 연락을 했습니
<br>
다.
<br>
오늘은 바로 연락이 왔습니다. 그리고 새벽까지 집에 들어 가지 않았습니다.
<br>
<br>
타종식 하는 것을 꼭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종각을 갔었습니다. 11시부터 사
<br>
람들 틈에 끼어 있었지요. 사람들 엄청 많았습니다. 바깥에 있으니 많이 추웠지
<br>
요. 그렇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찬 공기 속에 뿜어져 사라지는 입김처럼 한 해
<br>
가 떠나 갔습니다. 종각 앞에서 철수 녀석 손을 잡고 한 해를 떠나 보냈습니다.
<br>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폴짝 폴짝 뛰더군요. 사람들은 또한 카메라가 보이자 손
<br>
을 흔들기도 했습니다. 나도 죄다 따라 했습니다. 녀석이 그런 나를 어린애 쳐
<br>
다 보는 듯한 모습을 하며 비웃네요.
<br>
"누나 이제 24살 된 거 맞아요? 하는 짓 보니까 아닌 것 같애."
<br>
타종식이 끝나고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지요. 그래도 새벽 한
<br>
시를 넘길 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종각 주변에 모여 있었습니다. 철수가 자꾸 시
<br>
계를 쳐다 보길래 더 있고 싶었지만 자리를 떴습니다. 주차 시킬데가 없어서 종
<br>
각에서 아주 먼 곳에 차를 주차 시켜 놓았습니다. 종각에서 인사동을 거쳐 차 있
<br>
는 곳으로 걸었습니다. 인사동은 고운 빛을 하고 저녁 같은 모습이었지요. 따끈
<br>
한 새벽 녹차나 한 잔 했으면 했는데, 철수는 시계를 쳐다 보며 짙은 입김만 뿜
<br>
더군요. 그냥 지나쳤습니다. 새해 첫날이라 돌아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래
<br>
도 밤 거리가 신경이 쓰였지요. 차 주차 시켜 놓은 곳은 사람이 뜸한 곳이었거든
<br>
요. 철수가 쌈 잘한다고 했으니 괜찮겠지요.
<br>
<br>
"나 이제 집에 못 들어가요."
<br>
철수는 걸으면서 투덜 거렸습니다.
<br>
"왜?"
<br>
"나, 차라리 외박은 가능해도 열두시 넘겨 집에는 못 들어가요."
<br>
"열쇠 가지고 나왔어야지."
<br>
"나는 누나처럼 작정하고 나온 게 아니잖아요."
<br>
"그럼 찻 집에서 밤을 샐까?"
<br>
"잠 와요."
<br>
"그럼 우리 집 가서 잘래?"
<br>
"이 여자가 진짜! 새벽에 싸돌아 다니는 것도 모자라서 집에 남자를 끌어 들여
<br>
요? 부모님이 아시면 진짜 좋아하시겠다."
<br>
"싸돌아 다녀? 나 여기 간다고 얘기하고 나왔어. 당당히 허락 맞고 나온 거란
<br>
말이야."
<br>
"안 추워요?"
<br>
"조금 춥긴 하다."
<br>
"누나는 집에 가요."
<br>
"너 집에 못 들어간다며? 벌써 새벽 두시다. 나 가버리면 너는 갈 데 있니?"
<br>
"그런다고 마냥 이렇게 있을 수는 없잖아요. 나는 집에 아침 아홉시를 넘겨야
<br>
들어 갈 수 있단 말입니다."
<br>
"그래서? 집에 몰래 숨어 들어 갈거야?"
<br>
"나 집에는 못 가요. 유일한 출입구인 현관문 잠궈 놨을 거 분명하거든요. 그리
<br>
고 울 아버지 주무시다 깨시면 엄청 무서워요."
<br>
"그런데 너 어디 갈데 있냐구? 아까 찻집이나 가자니까."
<br>
"여관."
<br>
"뭐? 나도 따라 가야 되는거야?"
<br>
"그런 농담 하면 내가 재미있어 할 것 같아요? 웃지 말아요."
<br>
"호호, 이럴 때 보면 참 귀여운 데 말이야. 말투는 항상 톡톡 쏜다 말이야. 그
<br>
냥 우리 집 가자."
<br>
"에, 그 자꾸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구요. 누나는 집에 가요."
<br>
"우리 집 가자니까."
<br>
"누나 집은 그래요? 밤 늦게 남자 데리고 가도 괜찮은 그런 집이에요?"
<br>
"당연히 아니지. 그렇지만 우리 부모님은 지금 주무셔. 나는 집 열쇠를 가지고
<br>
나왔구."
<br>
"그래서요?"
<br>
"우리 집에 방 많아. 몰래 들어 가서 내일 아침에 밥 먹고 가면 되잖아."
<br>
"헛, 부모님은요?"
<br>
"우리 아빠, 엄마 아침 일찍 출근 하실거야."
<br>
"내일 노는 날이에요."
<br>
"그렇네. 그럼 다음에 재워 줄게."
<br>
"놀리는 거에요?"
<br>
"그럼 우리 집 근처 여관에서 자라. 우리 부모님 노는 날이라도 하루 종일 집
<br>
에 계시지는 않아. 오전 중으로 다 어디 가실거야. 아침은 우리 집에서 먹어. 내
<br>
가 차려 줄게."
<br>
"정말요?"
<br>
"응."
<br>
"누나 나따라 여관에서 자는 것은 아니죠?"
<br>
"왜? 진짜 따라 가 줄까?"
<br>
"자꾸 어린 애 취급 하지 말아요."
<br>
"그럼 니가 나보다 나이가 많니?"
<br>
"됐어요. 그럼 누나 동네로 갑시다. 나는 여관가서 잘테니까, 부모님 어디 가시
<br>
고 나면 꼭 밥 차려 줘요."
<br>
"알았어."
<br>
철수가 나를 자주 놀렸죠. 나도 그것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아 냈습니다.
<br>
<br>
<br>
나, 새해 첫 날부터 여관 신세를 지었다. 요즘들어 누나가 날 어린애 취급 하
<br>
는 게 못마땅하다. 예전보다 강도가 심해졌다. 저 여자에게 다시 한번 마음 단단
<br>
히 먹어야 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정희 누나는 저거 애인하고 깨지면 뭔가 나에
<br>
게 기댈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이 누나는 그게 아닌 것 같다. 진짜 동생으
<br>
로 밖에는 생각 하지 않는 것 같다.
<br>
여관 아줌마가 낮 열두시가 되니까 날 내 쫓았다. 그때까지 누나는 연락이 없었
<br>
다. 어떻게 된겨? 밥 차려 준다더니... 할 수 없이 집으로 갔다. 집에 다 도착하
<br>
니 삐삐가 울렸다.
<br>
전화를 했더니 내가 어딨냐고 묻는다. 아침 차려 주겠다던 여자가 낮 1시까지
<br>
자빠져 자? 누가 남편 될지 골치 아프겠다. 할 줄 아는 음식이나 있을려나?
<br>
<br>
"다녀왔습니다."
<br>
우리 아버지가 근엄하게 날 맞으셨다.
<br>
"타종식은 잘 보았느냐?"
<br>
"네."
<br>
"누구랑 갔었느냐?"
<br>
"어제 전화 드렸잖아요."
<br>
"널 자주 꼬시던 그 여자하고 있었느냐?"
<br>
"네."
<br>
"밤은 어디서 샜느냐?"
<br>
"여관이요."
<br>
"물론 너 혼자 잤겠지?"
<br>
"물론이지요. 이상한 생각하지 마십시오."
<br>
"안했다 녀석아. 음, 그 여자가 두 살 연상이라고 했느냐?"
<br>
"네."
<br>
"앞으로 그 아가씨 자주 만나지 마라."
<br>
"싫은데요."
<br>
"자식이 바로 싫다고 그러네. 나는 너네 엄마하고 동갑이지만 별로 좋은 대우
<br>
못 받았다. 여자를 사귈려면 나이를 좀 더 먹은 후에 한 여덟 살 어린 여자하고
<br>
사귀어라."
<br>
"전 그냥 선후배 사이로 만나는 거에요."
<br>
"지금은 그렇게 생각을 하겠지. 어제는 새해라 그러려니 했지만 여자하고 밤을
<br>
지새고 오는 그런 일은 삼가해라. 특히 연상의 여자하고는 말이다."
<br>
"네."
<br>
그 여자 내 방에서 세 번이나 자고 갔는데요. 그렇게 답을 해 버릴까 생각을
<br>
해 보았다. 그 말을 했다간 자취방 빼고 등,하교 여기서 하라고 할 것 같아서 참
<br>
았다. 그리고 들고 계시는 티비 리모콘도 맞으면 상당히 아플 것 같았다.
<br>
우리 아버지도 상당히 도둑님 심보시네요. 여덟살 차이? 나보고 중, 고등학생하
<br>
고 사귀란 말은 아닐테고 그러면 28살까지 여자 사귀지 말라는 말 아닌가. 너무
<br>
하십니다 아버지. 안 그래도 비참한 현실 속에 살고 있는데...
<br>
<br>
침대에 누워 어제 일을 떠올려 보았다.
<br>
은정이 누나와 손을 잡아 보았다. 추운 겨울 날씨였지만 장갑을 끼지 않은 채 오
<br>
랫동안 손을 잡고 있었다. 그 곳을 촬영 나온 리포터 한 명이 옆의 사람 손을 잡
<br>
고 흔들어 보라고 부탁을 했지만, 누나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의 손은 잡지 않았
<br>
다. 따뜻했는지 오랫동안 내 손을 놓지 않았었다. 나도 좋았다.
<br>
연상에 대해서 연구를 한 번 해 봐야 겠다.
<br>
<br>
겨울 방학 동안 누나를 자주 만났지만 늘 그런식이었다. 의식해서 받아 들이니
<br>
까 너무 표가 났다. 누나는 분명 나를 좋아하고 있고, 나를 편한 존재라고 생각
<br>
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예전보다 더 날 남자로 취급하지 않는 것 같다.
<br>
<br>
이월 달이 되고 정희 누나에게서 몇 번 연락이 왔었다. 정희 누나는 일월 달부
<br>
터 이미 학생이 아니었다. 출근을 했으니까. 강북 어느 종합 병원 약재부에서 어
<br>
엿한 약사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다. 졸업식 때 보자며 연락이 몇 번 왔었다.
<br>
방은 나 모르는 사이 이미 빼 버렸다고 한다. 야속한 사람... 병원에 자주 놀러
<br>
오라고 하지만, 학교에서 노원구까지면 졸라 먼데 가능한 일이냐.
<br>
이제 안 보이니까 조금씩 잊혀 질거라 생각하니 가심이 좀 시리다. 날 참 좋아
<br>
해 주던 그 누나가 이제 잊혀지겠구나. 그 누나에겐 연상이라도 고려해 볼 마음
<br>
이 있다고 말해 주었는데, 한 번도 진지하게 받아 준 적이 없어서 그냥 잊혀지
<br>
게 생겼다. 그런 내 마음을 모르고 은정이 누나는 날 가지고 놀았다. 마음이 허
<br>
한데 말이다.
<br>
<br>
"진짜 해 줘요?"
<br>
이월의 어느 날이었다. 저녁에 영화 한 편 같이 보고 날 집으로 데려다 준 누나
<br>
가 며칠 전 부터 놀리던 발언을 또 했다. 그래서 차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
<br>
다. 자뭇 심각한 표정으로 누나를 쏘아 보며 말했다.
<br>
<br>
날 집 앞에 데려다 주던 누나가 요즘 새로운 장난을 쳤다. 생글 생글 웃으며 말
<br>
이다.
<br>
"잘 들어 가."
<br>
"그래요.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br>
"작별 하는데 키스도 안해 주고 가?"
<br>
"뭐여?"
<br>
"영화에서 봤을 거 아냐? 키스 해주며 달아 나는 사람도 봤을거구, 그냥 분위
<br>
기 있게 키스 해 버리는 남자도 봤을테지? 하기야 거긴 대부분 남자가 운전을 했
<br>
었구나. 그럼 내가 해 주어야 되나?"
<br>
해 주지도 않을 거면서 저런 말 내뱉으면 잼있을까?
<br>
"무슨 말 하는거에요? 장난 치지 말고 조심해서 잘 가요."
<br>
내 표정을 보며 웃는 누나가 귀엽기도 했지만 얄밉기도 했다
<br>
<br>
한 일주일 그런 표정을 보니까 기분이 살 나빠지대요. 나도 남잔데...
<br>
그래서 그 날은 바로 떠나지 않았다. 영화를 봤기 때문에 뭔가 배운 것도 있었
<br>
다.
<br>
생글 웃는 누나에게 자뭇 진지하게 대답하고는 누나에게로 다가 갔다. 누나 어
<br>
깨를 잡고 얼굴을 디밀어 버렸다. 진짜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누나의 운전대를
<br>
잡고 있던 한 손마저 꽉 붙들고 제법 강하게 밀어 붙였다.
<br>
"야, 박철수. 너 뭐하는거야?"
<br>
"해 주라며?"
<br>
머리로 날 받아 버리는 누나 때문에 많이 슬펐다. 누나가 약간 당황한 표정을
<br>
짓더니 나를 씩씩되며 쳐다 본다. 진짜 슬프다. 그리고 억울하다. 난 진짜로 할
<br>
생각은 아니었단 말이다. 그냥 놀리길래 잘못하면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br>
고 했을 뿐인데, 이 여자가 머리로 날 받았다. 그럴 거면서 그런 얘기들은 왜 했
<br>
냐. 섧다. 연상에겐 진짜 맘주지 말아야지. 아프고 슬프다.
<br>
"이제 그런 장난 하지 말아요."
<br>
난 조금 어색하게 돌아섰다. 내가 했던 짓도 어색하고 날 받아 버린 누나도 어
<br>
색했다. 말이 조금 서툴게 나왔다. 한 동안 삐친 척 해야겠다. 손잡이를 잡은 손
<br>
이 다 떨렸다.
<br>
더 이상 안 놀릴 줄 알았는데, 누나는 문을 열고 나가려는 나를 잡았다. 그리
<br>
고 또 놀렸다.
<br>
"하고 싶으면 해 봐."
<br>
이 여자가 진짜. 또 받을려구 그러나? 잠시 어색했던 마음도 없어졌다. 누나는
<br>
웃음이 가신 얼굴로 말똥히 나만 쳐다 보고 있다.
<br>
"진짜로 해요?"
<br>
기분이 별로 안 좋다. 누나 표정이 얄밉다.
<br>
"해 봐."
<br>
"진짜로?"
<br>
"그래."
<br>
"뽀뽀 아니고 키스로 합니다?"
<br>
"그래. 키스할테면 해."
<br>
무슨 작정으로 저러는지 진짜 헛갈린다. 지 머리 단단한 걸 믿나 보다. 어쩌냐
<br>
이걸.
<br>
누나는 내가 못할 거라 알고 있었더군요. 잠시 그걸 생각했나 봐요. 내가 한참
<br>
동안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씩 웃더군요.
<br>
"넌 아직 어려."
<br>
두살차이 가지고 이 여자도 되게 잰다.
<br>
"누나는 뭐 많아요?"
<br>
"내가 올해는 진짜 좋은 애하나 소개 시켜 줄게."
<br>
"됐어요. 나는 소개팅 타입이 아니라며?"
<br>
"그렇긴 하더라. 정희 졸업식 때 나올거야?"
<br>
그냥 나가려 했을 때 보다는 맘이 편하다. 말을 돌리면 어떻냐 분위기가 다시
<br>
예전으로 돌아 왔는데.
<br>
"네."
<br>
"그때 보자."
<br>
"그러지요. 조심해서 들어가요."
<br>
"미안했어."
<br>
"뭐가요? 머리로 받은 거?"
<br>
"아니, 너에게 장난친 거."
<br>
"그러니까 앞으로 그런 말은 하지 마요."
<br>
"그래도 너 이건 알아라. 아까 같은 상황에서는 아무리 장난같이 해도 전혀 맘
<br>
이 없었으면 그런 말 못해. 훗, 너도 어찌 보면 그 사람을 좀 닮은 것 같다."
<br>
그 사람? 승주씨를 말하는 거야? 내가 더 잘생겼지.
<br>
"누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장난 많이 쳤죠? 그래 놓고 하려고 하면 머리로
<br>
다 받아 버렸죠?"
<br>
"훗! 너 알아서 생각 해."
<br>
진짜 해 버릴걸 그랬나? 그랬다면 어색했겠지? 저 여자가 어떤 맘을 먹고 있는
<br>
지 짐작이 안된다. 일편단심파일거 같은 느낌도 주고, 아무나 홀리는 불여우 같
<br>
기도 하고, 헛갈린다. 에이 모르겠다. 그냥 이렇게 친한 사이로 지내면 되지
<br>
뭐. 단순한 공대생이 복잡한 걸 생각하면 다치겠지? 암 그렇지. 잘가라 잘 난 여
<br>
자야.
<br>
<br>
내가 철수를 너무 많이 놀렸나 봐요. 너무 어린 애 취급을 했나요? 철수는 내
<br>
행동에 맘 상하지 않을 거라 믿었는데, 철수도 남자였다는 것을 잠시 잊었네요.
<br>
아무렇게나 대해서는 안되겠어요. 철수가 내 어깨와 한 손을 잡고 내게 키스하려
<br>
고 달려 들었을 때, 잠시 당황이 되었지요. 상대가 철수라는 생각을 잊고, 예전
<br>
누군가에게 내 입술을 빼앗겼을 때가 생각이 나더군요. 머리로 받아 버렸지요.
<br>
철수의 모습이 순간 슬퍼 보였습니다. 내가 잘 못한 것인데, 순진한 철수에게
<br>
내 기분따라 마음을 다치게 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 녀석 지금 표정
<br>
을 보니까 아까 진짜로 할 마음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네요. 억울하다는 표정이
<br>
에요. 지금 이대로 보내면 나도 그렇고 저 녀석도 그렇고 한 동안 어색하겠지
<br>
요. 그래 할테면 해 봐라.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아요. 키스 한 번 하면 어때
<br>
요. 그거 하고 나면 쟤가 남자로 보일까요?
<br>
훗! 그는 아직은 나에게 남자로 보이기를 꺼려 하는 것 같습니다. 흠, 할까 말
<br>
까 망설이다가 하지 말자라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표정이 승주를 닮았네요.
<br>
녀석과는 이런 식으로 오랫동안 지내고 싶어요. 지금 심정은 어색한 사이가 되
<br>
어 버릴지도 모르는 남,녀 사이가 아니라 지금처럼 계속 편하게 만날 수 있는 동
<br>
생과 누나 사이가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녀석은 내게 이미 잊혀지기 싫은 존재
<br>
가 되었습니다. 내년엔 정희도 곁에 없는데, 학교에서 녀석처럼 친근하고 맘 편
<br>
한 사람은 곁에 있기 힘들겠지요.
<br>
잘 가라 귀여운 녀석아.
<br>
<br>
<br>
<br>
연하가 어때서 20회
<br>
친한 친구는 나보다 먼저 학교를 떠나 갔습니다.
<br>
정희의 졸업식장에는 그녀의 부모님과 오빠와 그리고 철규씨, 그도 나왔더군
<br>
요. 아, 철수와 저도 있었어요. 철수는 그날 무시당했습니다. 철수의 표정이 약
<br>
간 슬퍼 보였던 것은 그것 때문이겠지요. 그의 말처럼 철수는 정희를 상당히 마
<br>
음에 두고 있었나 봐요. 철수는 철규씨를 그날 처음 봤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
<br>
기가 상상한 것보다 멋있지 않은 놈이라서 실망했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훨씬 낫
<br>
다고 말하더군요. 뭐,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면 살 때는 즐겁죠. 정희의 부모님에
<br>
게 철수는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살 때의 꼬마 모습으로만 기억되어 있었습니다.
<br>
부모님은 그냥 정희의 귀여운 동생 정도로만 배려해 주었지요. 확실히 철규씨와
<br>
는 차이를 두는 모습이었습니다. 정희도 마찬가지였어요. 철수는 무시당했습니
<br>
다. 철규씨는 철수에게 별다른 경쟁의식도 느끼지 않았고, 철수에게 별 시선도
<br>
두지 않았습니다. 철수는 나와 정희 사이에서 사진 한 장을 찍은 다음 그냥 집으
<br>
로 가버렸습니다. 가족들과, 그리고 정희와 단 둘이 사진을 찍는 철규씨의 모습
<br>
이 싫었나 보지요.
<br>
정희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 나도 자리를 떴습니다.
<br>
<br>
다음 날 나는 수원으로 내려 갔습니다. 철수가 수원에 있다고 전화가 왔더군
<br>
요. 내가 단지 그 녀석을 보러 학교를 간 것은 아닙니다.
<br>
학교에서 볼 일을 보고, 철수의 오피스텔을 찾아 갔지요. 철수가 자기 자취방
<br>
을 오피스텔로 불러 달라고 하더군요. 침대까지 있으니까 일반 자취방들과 다르
<br>
게 불러 달라고 했어요. 내가 철수네 방을 찾았을 때, 그는 침대 앞에서 상도 없
<br>
이 끓여 놓은 라면을 먹고 있더군요. 쫌 불쌍하네요.
<br>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기대하는 대답이 있는 것인지 의미 파악이
<br>
되지 않는 말을 꺼내었습니다.
<br>
"두고 보자 새끼."
<br>
"뭐?"
<br>
철수는 내가 뺏어 먹을까봐, 국물까지 후루룩 마신 다음 남비를 턱 놓더니 장엄
<br>
한 표정으로 말을 뱉었습니다.
<br>
"어제 그 새끼가 나보고 귀여운 녀석이라며 머리를 쓰다듬었어. 지가 나보다 나
<br>
이가 많으면 몇살이나 많다고."
<br>
코트를 옷걸이에 걸며 대답을 해 주었지요. 그리고 침대에 걸터 앉았습니다.
<br>
"아, 철규씨 얘기구나. 다섯 살."
<br>
"내가 올해 한 살을 더 먹었는데, 그래도 다섯살 차이래요?"
<br>
바보새끼.
<br>
"하여튼, 내가 정희누나를 알아도 10년은 먼저 알았을텐데, 애인이 되고 나서
<br>
도 내가 더 자주 만났는데 새끼가 날 아주 무시하는 투로 내려다 봤어. 사람들
<br>
만 없었어도 쌈 났다 진짜. 얼굴살은 쪘는데, 팔 다리는 가는 것 같았어. 목 선
<br>
을 보면 알지. 새끼 맨날 야한 상상만 하고 있을거야."
<br>
무슨 말을 저리 쉬지도 않고 한답니까.
<br>
"겨우 졸업식장에 남자 친구 한 번 나타난 걸로 그 정도면 결혼 식장에서는 진
<br>
짜 난리 나겠다. 결혼 식장에선 어디 정희가 네게 말 한마디 할 정신이 있겠니?
<br>
그리고 정희의 남편 되는 사람하고 나란히 있는 모습 보면 상당히 소외된 느낌
<br>
받을텐데."
<br>
"내가 먼저 가면 돼."
<br>
"니가 어떻게 먼저 가니? 같은 나이라도 여자가 먼저 가는데."
<br>
"정희 누나가 그 새끼하고 결혼 한대요?"
<br>
"모르지. 근데 철규씨가 니 친구야? 왜 새끼라고 그래? 너 예전에 승주 보고도
<br>
새끼라고 그랬니?"
<br>
"아니에요. 그 사람에게는 질투심을 별로 못 느꼈지. 그때 누나는 정희 누나에
<br>
게 상대가 안됐어. 누나가 누굴 사귀던 뭔 상관이야?"
<br>
이게 진짜 질투심 유발하는 발언을 심각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내 뱉네요. 승주
<br>
는 많이 잊혀졌나 봅니다. 이제 나에게 조연같은 느낌으로 이름이 거론 되어지네
<br>
요.
<br>
"너 기분 나쁘다아?"
<br>
"지금은 둘이 비슷비슷 해요. 에, 정희 누나가 자주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났기
<br>
때문에 곧 누나가 더 좋아 지겠지요. 하지만 배운게 있어서 정희 누나하고는 조
<br>
금 다를 거에요. 하하."
<br>
뭘 배웠는지는 대충 알지요. 자주 내 뱉던 말이니까요. 연상에게는 관심이 없
<br>
다. 그 뜻이겠지요. 그래라 뭐.
<br>
"후후, 나한테 잘 해라. 앞으로 학교에서만 3년을 더 봐야 하는데."
<br>
"알았어요. 라면 끓여 드릴까요?"
<br>
"옥수수는 없니?"
<br>
"그때 누나가 다 먹어 치웠잖아요."
<br>
"라면은 염분 많고, 칼로리 많아서 잘 안 먹는데..."
<br>
"벨 이상한 소릴 다하네. 라면 없으면 이 곳 율전에서만 1000명 이상이 굶어 죽
<br>
을 거에요. 자취생들 주식량인데. 자취생들은 그럼 맨날 염분 하고 칼로리 쌓아
<br>
두면서 살게요."
<br>
"그래, 하나 끓여줘."
<br>
짜식이 라면은 잘 끓이더군요. 라면 하나를 먹었지요. 배가 부르고 스팀이 모
<br>
락 모락 나는 실내는 따뜻하고 몸을 나른하게 만들더군요. 집에 갈때까지 여기
<br>
서 조금 자다 일어 날까?
<br>
<br>
"너 오늘 서울 안 갈거야?"
<br>
"곧 개강인데 왜 가요?"
<br>
"나 혼자 가면 심심한데. 너 당구장 안가니?"
<br>
"왜? 한 게임 할래요?"
<br>
"그게 아니고, 나 여기서 좀 자다 일어 나면 안될까?"
<br>
"날 무시하는 행동이다."
<br>
"널 믿는다는 행동이라곤 생각 못하지?"
<br>
"안돼요. 저기 삼층의 어떤 녀석이 동거한다는 소문 나가지고 주인 아줌마가 쫓
<br>
아 낼 생각만 하고 있단 말입니다. 나도 그런 소문 나면 쫓겨 난다 말입니다."
<br>
"그런 소문 두려운 녀석이 내가 여기 찾아 온 건 왜 말리지 않았니? 별 희한한
<br>
생각하고 있어."
<br>
"진짜 쫓겨 나는데..."
<br>
"나도 방 하나 얻을까? 이 오피스텔에 빈 방 있니?"
<br>
"이게 무슨 오피스텔이야?"
<br>
"그렇게 불러 달라며. 여기가 정희네 방보다 훨씬 크고 깨끗해."
<br>
"음, 그렇지요. 누나 진짜 자취하게요?"
<br>
"몰라. 이 번 학기까지는 다녀 보다 안되겠다 싶으면 방 하나 얻지 뭐. 얻으면
<br>
이 곳에다 얻어야지."
<br>
"에이쒸."
<br>
"내가 가까이 있는 게 싫어?"
<br>
"너무 가까워 지면 안되는데?"
<br>
"왜?"
<br>
"당신이 그리운 건 내게서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br>
"치, 너 간혹 시를 적던데, 그 대상이 누구야? 정희지?"
<br>
녀석이 또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리네요.
<br>
"내가 가지고 간 그 시도 그럼?"
<br>
"어떤 신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뭐 그립다, 못 잊겠다 그런 말 적어 놓았으면
<br>
맞을 거에요. 이제 끝이다. 신난다."
<br>
"뭐가?"
<br>
"아, 이제는 떠났으니까 정희 누나에 대해서는 안 쓰야지. 그 새끼하고 잘 살아
<br>
라 그래. 이제 누나를 대상으로 한 번 적어 볼까?"
<br>
"그래, 그래라."
<br>
"그러지요. 그래도 오늘 여기서 조금 자다 일어나는 것은 안돼요. 그냥 지금 서
<br>
울 갑시다."
<br>
"너는 여기 있고?"
<br>
"따라 가죠 뭐."
<br>
<br>
정희 누나는 졸업을 하고 학교를 떠났다. 허전하다. 이제 허전하고 생각나면 찾
<br>
아 가던 정희 누나의 방은 딴 사람이 들어 서 내가 가지 못하는 곳으로 변했다.
<br>
은정이 누나가 곁에 있지만 통학을 하기 때문에 앞으로 잠들기 전 밤이 외로우
<br>
면 찾아 갈 곳이 없다. 여자 친구를 사귀면 이런 느낌이 안들텐데, 내가 연상들
<br>
틈에서 이 무슨 꼴이냐.
<br>
은정이 누나가 자취를 할까 생각 중이다. 아주 환영하는 바이지만, 너무 티를
<br>
내면 은정이 누나가 거만해 질 것이기 때문에 관조적인 태도를 취했다.
<br>
당신이 그리운 건 내게서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헛소리 하지 말라고 그
<br>
래. 그리운 사람이라면 붙어 있는게 좋지 떨어져 있는게 좋냐. 붙어 있으면서도
<br>
충분히 그리울 수 있다.
<br>
당신이 그리운 건 내 곁에 있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정희 누나가 그랬는데...
<br>
<br>
아직 춥다. 주위의 색깔들도 아직은 겨울 색이다. 아침엔 입김이 안개처럼 퍼
<br>
져 나간다. 그래도 봄이랜다. 나, 삼학년 됐다. 삼학년이 되고 학교를 가 보니
<br>
까, 모르는 놈들 투성이다. 동기들 대부분이 군대로 사라져 갔다. 동기들은 자퇴
<br>
하지 않는다. 다만 군대로 징집되어 사라졌을 뿐이다.
<br>
90, 91학번 늙은이들과 같이 수업 들을려니 별로 신나지 않았다. 군대 갔다 오
<br>
더니 곱게 늙지 못하고, 모두들 이상하게 변한 것 같았다. 공부도 좀 해야 겠
<br>
다. 내가 그런대로 성적이 좋지만 군발이들을 상대하려면 조금 더 노력이 필요
<br>
할 것 같다.
<br>
당구장에서는 조금 낄낄 될 수 있었다. 군대 가서 당구 실력이 줄은 선배들 탓
<br>
에 난 승승장구 했다. 난 이제 120을 넘어 섰다. 150도 머지 않았다. 기다려라
<br>
홍은정, 그대를 따라 잡을 날도 멀지 않았소.
<br>
<br>
누나는 삼월 초에는 자주 보지 못했다. 그리고 삼월 말이 되면서도 자주 보지
<br>
못했다. 약대 내에서도 복학한 형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 사귀어라.
<br>
<br>
"아버지, 오늘은 잠실까지 갔다 오겠습니다."
<br>
"빨리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도록 노력해라. 그래야 내 심부름도 하고, 네 엄마
<br>
도 나 대신 모시고 다니지. 이건 오면서 배달하고 오너라."
<br>
"그러지요. 저걸 배달까지 하고 오는데, 오늘도 제가 기름을 넣어야 합니까?"
<br>
"당연한 것은 자주 묻는 것이 아니다."
<br>
<br>
젊은 놈이 타고 다니기에는 대형차라 바로 아버지 차 타고 나온게 티가 나지
<br>
만 그래도 기분 좋다. 산지 이년 가까이 됐는데, 계기판을 보면 이제 8천 키로
<br>
밖에 되지 않는다. 거의 새차구만. 우리 아버지 차도 오토매틱이다. 에이비에스
<br>
브래끼에다 에어백도 있다. 실내도 넓다. 의자도 전동식이다. 실내가 우드 그래
<br>
인으로 장식 되어 있다. 2500씨씨 6기통이다. 쉽게 말해서 고급차란 뜻이다. 신
<br>
형 그랜져다.
<br>
그렇지만 그 잘난 은정이 누나차가 더 비싼 차다. 내가 그런 것에 꼴리면 안되
<br>
는데, 요즘들어 내가 누나보다 잘난 게 뭐가 있는지 따지는 짓을 자주 한다. 마
<br>
음이 가고 있다는 뜻이겠지? 봄 색깔이 초록으로 물들고 있다. 여자는 봄에 약하
<br>
다더니, 이 여자가 봄 바람이 났나? 최근들어 누나를 자주 보지 못했다.
<br>
운전 연습을 하면서 누나 동네를 가 보았다. 누나가 사는 빌라 앞에서 차를 정
<br>
차 시켜 놓고 음악을 듣다 왔다. 집에 누나가 있을까? 요즘들어 삐삐도 쳐주지
<br>
않는 누나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진짜 봄바람 났나?
<br>
<br>
여자는 색조에 약하지요. 가슴 떨리게 하는 봄의 색조들은 많은 그리움을 떠 올
<br>
리게 하더군요. 봄이 되니까 승주 그 사람이 자주 생각이 났어요. 그립기 때문
<br>
에 잊혀지지 않는 것일까요. 잊혀지기 때문에 그리운 것일까요.
<br>
꽃이 하나 피어 날 때 그 사람 기억하나가 피어 나고, 꽃 잎 하나 떨어 질 때
<br>
설레이는 느낌 하나가 내 맘에 내려 앉았지요.
<br>
봄의 색깔은 점점 나를 유혹해 갔습니다. 그 유혹 따라 설레었지요. 군대 갔던
<br>
동기들이 돌아 왔어요. 어른 스러워 진 모습들이었지요. 그들과 어울렸습니다.
<br>
공허함을 지우기 위해서, 봄의 유혹에 못 이겨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괜
<br>
찮더군요. 철수와 아옹다옹하는 것도 좋았지만 내 또래와 내 위 사람들을 만나면
<br>
서 철수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그런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지요. 승주에게서 느꼈
<br>
던 그런 것들 말입니다. 나도 연하를 좋아하고 할 타입은 아닌가봐요.
<br>
동기 한 명과 사귈뻔 했지요. 내게 적극적인 녀석이 한 명 있었어요. 제법 남
<br>
자 다웠지요. 매너도 있었고, 여자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br>
도 서둘렀습니다. 그는 나를 너무 쉽게 봤나 봐요. 이제 호감이 가려는 시점에
<br>
서 그는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지요. 그의 서두름으로 과 내에서
<br>
이상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 소문은 나에게서 그를 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중
<br>
간 고사 기간에 그가 나에게 사랑한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과 내의 다른 시선
<br>
은 상관없이 그는 나를 원했지요. 편지는 시도 적혀있고 제법 애틋한 말들로 꾸
<br>
며져 있었지요. 그렇지만 난 어색함이 싫었습니다. 나는 그 편지를 무시했습니
<br>
다. 나를 어색하게 찾아 온 그에게 나는 또 쌀쌀함을 보였지요. 내 버릇일까요?
<br>
<br>
시험이 끝나고 과 동기들이 모인 어느 술좌석에서 술에 취한 그가 내게 서운했
<br>
던 것을 털어 놓더군요. 그리고 자기 분에 못이겨 나쁜 술버릇이 나왔습니다.
<br>
한 마디로 꼬장을 부린 거지요. 귀엽게 술주정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은 다
<br>
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가
<br>
서도 심한 언사를 내 뱉더군요. 나는 저런 게 싫어요. 술을 먹고 아무렇게나 말
<br>
하는 거. 취중진담? 추한 모습일 뿐입니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례를 범하
<br>
는 행동이 싫었습니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좋은 기억들도 그는 스스로 던져 버
<br>
렸습니다. 한 달 고작 친하게 지냈다고 내게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싫었습니
<br>
다. 내게 심한 말도 했지요. 무시했습니다.
<br>
다른 남자 동기들이 술에 취했으니 이해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 사람 편
<br>
을 들었어요. 같이 술에 취한 그의 친구가 심하게 그를 편들었습니다.
<br>
사람들이 다 똑같을 수는 없지요.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대쉬하는 남성을 좋아하
<br>
는 여자도 있지만, 적어도 난 그렇지 않아요. 술에 취한 그는 내가 너무 이상적
<br>
인 사랑을 꿈꾸고 있다고 하더군요. 뭐, 어때.
<br>
난 여자 후배들과 집에 가지도 못하고 그의 술주정을 들어 주어야 했습니다. 남
<br>
자 동기들은 그를 어디론가 데려 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나에게 달
<br>
려 왔어요.
<br>
나 그 사람 술버릇 때문에 한 대 맞았어요. 눈물이 나오고 사람이 싫어지더군
<br>
요. 너 이제 끝이야. 나, 그 남자에게 심하게 뺨을 맞았습니다. 주위에 있던 여
<br>
자 후배들은 놀란 듯 나를 둘러쌓았지요. 남자들에게 끌려간 그 남자는 여전히
<br>
씩씩되며 나를 노려 보았습니다.
<br>
그때 왜 그 녀석이 생각이 났을까요. 울면서 삐삐를 쳤습니다. 내게 다시 전화
<br>
가 올때까지 앉아서 울었습니다. 주위 후배들이 의아한 표정이더군요.
<br>
"0865로 호출하신 분이요?"
<br>
"나 장난칠 기분 아니야."
<br>
"오랜만이네요?"
<br>
"나 좀 데려가."
<br>
"누나가 어디있는 줄 어떻게 알아요. 나 지금 당구친다 말이에요."
<br>
"나 누구한테 맞았어. 심하게 뺨을 맞았단 말이야. 앙..."
<br>
"에? 거기 어딘데요?"
<br>
"여기? **호프집 뒷 골목이야."
<br>
<br>
녀석은 5분만에 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나를 데려 가려 했지요. 철수는 아무말
<br>
없이 주위 사정 살피지 않고 그냥 나를 데려 가려고 했습니다. 그 모습이 다른
<br>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나 봅니다. 술취한 그 남자가 달려와 철수의
<br>
머리를 때렸습니다. 아주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짓는 철수를 보았지요. 주위에
<br>
선 술 취했으니까 참아라 그러며 대신 사과하는 녀석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다
<br>
른 과의 모르는 남자가 와서 나를 데려가려 하자 못마땅해 하는 모습이었지요.
<br>
"누나, 얼굴이 빨갛거든요. 나보다 더 쌔게 맞았어요?"
<br>
"응."
<br>
<br>
그때부터 나는 무협 영화를 보았지요. 두 사람이 철수의 어깨를 잡고 늘어 졌으
<br>
며, 술취한 그 사람 말고 다른 한 명도 철수에게 맞았습니다. 그 사람을 포함해
<br>
우리 과에 다섯 명의 남자들이 있었는데 철수 혼자를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잡
<br>
고 있던 두명에 의해 나에게로 왔다가 잡고 있던게 풀리자 날 때린 그 사람에게
<br>
쫓아 가서 다시 날아차기 하는 철수를 보았습니다. 철수는 진짜 쌈을 잘했습니
<br>
다. 기분 좋았지요. 근데 문제가 될 것도 같아요.
<br>
술에 취한 그 사람은 철수에게 계속 시비를 걸었고, 철수는 날아차기 하려 했습
<br>
니다. 그리고 주변에선 철수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나보
<br>
고 누나,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버릇 없는 놈이라며 하나, 둘 날 때린
<br>
그 사람 편을 들기 시작했지요. 1대5였지요.
<br>
그래도 철수는 계속 날아차기 하려 했습니다. 다섯명이 험한 표정을 지으며 철
<br>
수를 위협했지만 철수는 하나도 기가 죽지 않더군요. 진짜 큰 싸움 날 뻔 했어
<br>
요. 그러자 여자 후배 중에 누가 신고를 했어요. 우리나라 경찰차 빨리 오더군
<br>
요. 경찰차 두대에 나를 포함해 철수, 그리고 우리 동기 남자들 다섯명 모두가
<br>
파출소로 끌려 갔더랬습니다.
<br>
<br>
"이 새끼가 날 다짜고짜 팼어요."
<br>
날 때린 녀석은 분함을 표시하며 큰 소리로 떠들었지만 철수는 조용하더군요.
<br>
다른 말은 안 했습니다.
<br>
"죄송합니다."
<br>
계속 그 말만 했습니다.
<br>
"얘는 나 때문에 그랬어요. 저 사람이 술 먹고 날 때렸단 말이에요."
<br>
제가 대신 변명을 해 주었지요. 동기들에게도 사실을 말하도록 잘 타일렀습니
<br>
다.
<br>
옥신 각신하며 동기들끼리 의견이 나누어져 쟤가 잘했니, 철수가 잘했니 말을
<br>
주고 받았습니다.
<br>
조서는 꾸미지 않더군요. 그냥 훈방 조취 되었지만 철수는 한 동안 고개를 들
<br>
지 않고 계속 죄송하다는 말만 내 뱉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철수는 별 다른 취조
<br>
를 당하지 않았어요. 날 때린 그 남자만 계속 깡을 부리다 출석부 같은 걸로 두
<br>
들겨 맞고 야단도 맞았지요. 한 때 저 남자에게 호감을 가졌던 게 다 원망스럽습
<br>
니다. 근데 철수는 왜 그 난리를 부렸던 것일까요? 내가 한 대 맞았던게 기분이
<br>
나빴을까요. 자기가 한 대 맞은 게 기분이 나빴을까요.
<br>
오늘 집에 가긴 걸렀습니다. 11시가 넘어 파출소로 끌려 갔었는데, 지금은 새
<br>
벽 한시가 다 되었습니다.
<br>
"야, 너 왜 그랬어?"
<br>
"저 새끼들 91학번이에요?"
<br>
"응."
<br>
"큰일났네. 우리 과 선배들에게 알리면 안되는데... 그리고 말입니다. 파출소
<br>
끌려 갔을 때는 고개를 숙이고 무조건 잘못했다고 비는게 가장 빨리 풀려나는 지
<br>
름길이거든요. 웬만하면 다 훈방 조취인데, 변명할 거 없어요. 죄를 뒤집어 쓰
<br>
지 않을 정도의 경범죄는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는 게 최고에요. 경험으로 배운
<br>
겁니다. 누나도 앞으로 파출소 끌려 가면 그러세요."
<br>
"뭐야? 나 오늘 너 아니었으면 파출소 가지 않았어. 앞으로 갈 일 없단 말이
<br>
다."
<br>
"누가 알아요 그걸. 그리고 누나 왜 그래요? 또 그 버릇 나온거야?"
<br>
"뭘? 남자 차는 거? 모르겠다. 조금 서글프네."
<br>
"오늘 누나 때문에 3년만에 파출소 구경했네. 집에 연락하면 어쩌나 졸라 떨었
<br>
잖아요."
<br>
"내가 맞은게 기분 나빴던 거니? 아니면 니가 맞아서 열 받은거니?"
<br>
"저 새끼가 내 머리 때렸을 때 졸라 아팠거든요. 누나 뺨은 더 세게 맞았다면서
<br>
요. 누나가 때릴 데가 어딨다고..."
<br>
"후후, 그 말 믿어도 돼?"
<br>
"그럼요."
<br>
"오늘 나 잘데 없는데?"
<br>
"오늘만 내 방에서 재워 준다."
<br>
"열쇠 줘. 나 먼저 몰래 들어가 있을 테니까, 넌 숙취제거제 하고 치솔하고,
<br>
뭐 내게 필요한 거 있으면 다 사가지고 와."
<br>
"돈을 줘야죠."
<br>
"그래. 만화책도 빌려 올래?"
<br>
"만화방이 지금까지 열었을래나?"
<br>
"후후, 한 번 가 봐. 그리고 너 진짜 쌈 잘하나 봐?"
<br>
"정의를 위해서만 사용하지요."
<br>
"푸후!"
<br>
나는 철수의 방에서 네 번째 밤을 맞이 했습니다. 모르겠어요 아직은. 연하가
<br>
뭐 어때? 이런 감정이 생길지도 모르겠네요.
<br>
철수는 내 잠옷을 따로 한 서랍에다 넣어 두었습니다. 자기 서랍에는 꾸깃 꾸
<br>
깃 여러 옷들을 겹쳐 넣어 놓았으면서 내 잠옷은 넓은 서랍의 공간에 홀로 넣어
<br>
두었더군요. 녀석이 오기 전에 옷을 갈아 입고 세수를 했지요. 그리고 녀석의 침
<br>
대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거울에 얼굴을 보니 말이 아니네요. 핏줄이 튀겼어요.
<br>
그 자식 내가 다시 보면 인간이 아니다.
<br>
철수가 열받을 만도 했겠어요. 호호. 철수 때문에 뺨을 맞았던 기분 나쁜 감정
<br>
을 지울 수 있었습니다.
<br>
내 곁에 있는 호랑이가 자세히 보니 철수를 닮았네요. 이런 인형을 왜 사다 놓
<br>
았을까? 한 마리 사줘야 겠군요. 내가 방에 들어 온지 30분이 훨씬 더 지났는데
<br>
도 녀석은 들어 오지 않았습니다. 푸우
<br>
<br>
"누나, 만화방 열었어요. 누나? 드래곤 볼 다 안봤죠? 38권까지 나왔더라구요.
<br>
이거 다시 봐도 잼있어요."
<br>
녀석은 드래곤 볼만 20권 가까이 빌려 왔더군요. 저것 때문에 늦었군요. 한 쪽
<br>
엔 만화책을 잔뜩 들고, 다른 한 쪽엔 먹을 것과 칫솔 하나가 든 비닐 봉지가 들
<br>
렸군요. 연하는 저렇군요.
<b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