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삼각산 금선사(金仙寺)를 찾아서 ① - 삼각산 금선사에 가다 - 1월 7일은 민주 정의 평화의 수행자라 불리는 정원(正願) 스님이 소신공양하신 지 1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1주기 하루 전인 6일(토), 광화문 부측광장에서는 오후 2시부터 1주기 추모제가 열렸습니다. 일이 있어 끝까지 동참할 수 없어 잠시 발걸음을 했다가 이내 돌려 아쉬웠지만 다음 날 금선사에서 1주기 추모법회가 있어 꼭 동참하고자 했습니다. 정원 스님(64)은 지난 2017년 1월 7일 밤 10시 30분경 서울 광화문 북측광장 인근 시민열린공원 소나무 숲에서 "나의 죽음이 어떤 집단의 이익이 아닌 민중의 승리가 되어야 한다."는 유지를 남기고 소신공양을 하셨습니다. 스님이 소신공양한 장소에서 "일체 민중들이 행복한 그날까지 나의 발원은 끝이 없사오며 세세생생 보살도를 떠나지 않게 하옵소서.", "불교는 민중을 진정으로 사랑하라! 민중, 중생을 사랑하지 않는 불교는 가짜다. 수행자는 민중 속에서 붓다를 실현하라!", "박근혜는 내란사범, 한일협정 매국질. 즉각 손떼고 물러나라!" 등이 적힌 메모가 발견된 바 있었습니다. 스님은 세월호 참사를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1000일을 기해서 촛불국민의 적폐청산 불교개혁의 길을 밝히기 위해서 소신공양을 했다고 합니다. 소신공양후 세상은 바뀌었고 새정부가 들어서는 등 많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스님의 1주기는 마땅히 조계사에서 범종단적인 추모법회가 있어야 하는데 종단이 부처님의 정법을 받들기는커녕 쌓인 폐단 위에 다시 폐단을 점점 더 높이 쌓아 올리는 적폐산(積弊山)을 건설 중이라 비승가적인 운영을 계속하고 있어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함을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이번 추모법회에는 불교재가단체인 바불재를 비롯하여 조계종적폐청산 시민연대 회원들이 동참한다고 했습니다. 법회가 10시부터 시작된다고 해서 미리 가서 금선사의 전각 등 이모저모를 사전에 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8시 50분 쯤에 나서서 걸어갔습니다. 집에서 금선사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면 충분한 거리입니다. 그래서 15정도 걸어서 중간지점 갔을 때 쯤 웬 트럭이 서서 보니, 이 법회를 적극적으로 주최하는 백도영 자평통 불교위원장이어서 반갑게 인사하고는 그 차를 타고 주차장까지 손 쉽게 갈 수 있었습니다. 여기는 구기동 탐방센터입니다. 금선사 가는 길, 나무계단 길 '민주, 정의 평화의 수행자 정원화상 소신공양 1주기 추모법회'란 현수막이 걸려 있네요. 금선사 지경인 목정굴(木精窟) 입구 앞에 하얀 옷을 입은 분이 백도영님입니다. 관음기도 성지 목정굴(木精窟)
안내판의 글을 옮겨 봅니다 「금선사는 여말선초(麗末鮮初)의 고승 자초무학(自超無學)스님(1327~1405)의 창건으로 전해지고 있다. 1791년 정조의 명(命)으로 중창(重創)되어 비로소 오늘의 기도(祈禱)명찰이 되었다. 여기에는 목정굴(木精窟)이라는 관음기도 성지와 농산(聾山)스님 그리고 정조대왕 사이에 얽힌 순조의 탄생비화(誕生秘話)가 서려 있다.
정조는 슬하에 세자가 없어 고심하던 중 한수 북녘에 계행을 엄히 지키며 수십년간 산문출입을 금하고 있던 농산(聾山)이란 고승을 알게 되어 마침내 그에게 세자탄강(世子誕降)을 위한 기도(祈禱)를 명하게 되었다. 농산은 바로 이곳 목정굴에서 100일간 관음기도를 올린 것이다. 이때 왕실에 발신을 알 수 없는 봉서(封書) 하나가 올라왔는데 '庚戌六月十八日 世子誕降(경술6월18일 세자탄강)이라 적혀 있었다. 과연 순조는 이날 태어났다.
이날 서북쪽으로부터 맑고 붉은 서기가 왕실에 닿아 산실(産室)을 휘감고 있었다. 사람을 놓아 그 진원을 추적하게 하니 그곳은 다름 아닌 바로 이곳 목정굴이었다. 굴안에는 좌탈입망(坐脫入亡)한 채로 앉아 있는 농산스님의 탈각신(脫殼身) 뿐이었으나 서기는 여전히 그의 정수리로부터 신실(産室)로 흘러 들고 있었다.
농산스님의 입적과 순조로의 환생을 목도한 정조는 내수사(內需司)에 명하여 목정굴 위에 절을 크게 중창하게 하였으니 곧 금선사이다.
그후 일제의 강점으로 금선사는 폐사가 되었으나 광복(光復)후 도공(道空)스님이 중건하였고, 현 주지 법안(法眼)스님이 목정굴을 복원(1996년 3월)하여 수월관음보살을 봉안하고 전통사찰로 등록한 것이 오늘의 금선사와 목정굴이다.
지금도 금선사는 순조의 탄신제(誕辰祭)를 모시고 있다.」
삼각산 금선사 안내도 ① 대적광전 ② 반야전과 해행당 ③ 미타전과 연화당 ④ 목정굴 ⑤ 삼성각 ⑥ 일주문 ⑦ 해탈문 ⑧ 무무문 ⑨ 200년 된 소나무 ⑩ 삼매부처님 ⑪ 홍예교 ⑫ 108계단 ⑬ 소대(燒臺) ⑭ 적묵당과 심검당 ⑮ 안심당 금선사 경내로 들어 가는 방법은 ⑥번 일주문(一柱門)으로 들어가는 방법과 ⑧ 무무문(無 無門)으로 가는 방법이 있는데, 무무문으로 해서 목정굴로 향했습니다.
여기 목정굴입구에서 경내로 들어가는 방법은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그냥 곧장 올라가 ⑥번 일주문(一柱門)으로 가는 방법과 ⑧번 무무문(無無門)으로 가는 방법입니다. 이 무무문을 통해 가는 길은 지름 길이라 바로 목정굴로 가게 됩니다. 무무문(無無門) 이 무무(無無)는 무(無)라고 하는 것도 없다 뜻입니다. 무(無)는 유(有)와 상대하여 성립하는 것으로 유(有)가 없으면 무(無)도 없습니다. 또 앞의 무(無)는 속(俗)이 없는 것이고 뒤의 무(無)는 진(眞)이 없는 것입니다. 이 뜻을 잘 새겨 보면서 들어갑시다. ^^
삼각산 금선사는 서울시 종로구 구기동 196-2번지(종로구 비봉길 137) 북한산 기슭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사찰입니다.
「여말선초(麗末鮮初)의 고승이며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이신 무학자초(無學自超. 1327~1405) 대사께서 조선왕조의 도읍을 정하고자 서울의 진산인 삼각산을 살피던 중 지금의 금선사터에 삼각산 정기가 서려 있음을 보고 절을 세웠다.
창건이래로 많은 선지식이 주석하였으며, 조선 후기 정조대왕의 원찰로써 수행자와 기도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찰이었으나 일제의 강점기에 소실되었던 것을 불기 2529년(1955) 도공(道空) 스님께서 중건하시고 지금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현 주지 법안(法眼) 스님이 목정굴을 복원한 이래 적묵당, 미타전, 연화당, 삼성각, 반야전, 홍예교, 일주문, 해우소 등을 중창하였다.
부처님이 상주하시는 기도처인 이곳에서 수행하시던 농산(聾山) 스님이 조선 정조대왕의 왕세자인 순조대왕으로 탄생(1790. 6.18)하신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등 정조대왕의 원찰인 기도도량으로 유명하다.」 -금선사 홈페이지-
하얗게 빛나는 부분이 목정굴입니다. 목(木)의 기운이 가득하다는 목정굴(木精窟) 이것은 폭포수인가 고드름인가? 굴법당 모습입니다. 이 굴에는 정조임금의 아들 순조임금 탄생 설화가 서려 있습니다. 앞에서 안내문을 숙지하였다면 이 굴이 바로 그 전설의 현장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안내문에는 언급이 없었지만 조선 불교의 처참한 현실을 뒤집기 위한 용파(龍波) 스님의 비원(悲願)이 정조(正祖)임금을 움직였고, 후사가 없는 정조임금의 후사를 이어주어 불교 탄압을 막고자 한 용파 스님은 이를 위한 기도 원력을 실현할 분으로 여기에서 수행하시던 농산(聾山) 스님을 지목하고 함께 각각 다른 장소 즉 용파스님은 수락산 내원암에서 농산 스님은 여기 목정굴에서 300일 기도를 마치고 농산 스님이 직접 정조의 빈 수빈 박씨에 입태(入胎)하여 정조의 아들로 환생한 이야기가 서려 있는 영험한 기도 도량입니다. 안내문에서는 100일 기도라하였지만 300일 기도라 하기도 합니다. 금선사 주법당인 반야전(般若殿)에는 목정굴에 얽힌 전설을 벽화로 그려 놓았습니다.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 보병(寶甁)을 쥔 수월관세음보살(水月觀世音菩薩) 관세음보살님 뒷편에는 약수가 있습니다. 예를 올리고 글을 통하여 올라갔습니다. 법당으로 향하려다가 일주문을 담고자 일주문으로 향했습니다.
삼각산금선사(三角山金僊寺) 일주문 삼각산 금선사(三角山 金僊寺) 편액. 학정 이돈흥(鶴亭 李敦興) 선생 글씨. 이 일주문 편액을 보면 삼각산 금선사(三角山 金仙寺)가 금선사(金僊寺)로 되어 있음을 봅니다. 이는 서예가의 운치인 것 같습니다. 금선(金仙)이란 부처님의 다른 이름입니다. 금선(金仙)과 같은 말로는 대선(大仙)과 금선(金僊)이 있습니다. 흔히 금선(金仙)과 금선(金僊)은 서로 통용하고 있습니다. 학정 이돈흥(鶴亭 李敦興) 선생은 1947년 전남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에서 수당 이승호(修堂 李勝鎬) 선생과 김삼순(金三順) 여사의 6남 2녀 가운데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966년 약관의 나이에 전남대학교 공과대학에 진학했으며, 선친의 권유로 평생의 스승이 되신 송곡 안규동(松谷 安圭東, 1907~87) 선생을 뵙고 서예에 입문했으며, 제2회 전라남도미술대전에 처음으로 입선했습니다. 선생은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 등 한국서예의 전통을 계승한 서예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독창적인 학정체(鶴亭體)를 이뤄내는 등 한국서단에 독보적인 위치를 지켜오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 동아미술제 심사위원,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 부 부이사장 등을 지냈으며, '광주시립미술전 초대', '학정 이돈흥 서예술 40년전'을 열었 습니다. 현재 학정서예연구원장, 조선대초빙교수를 역임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오니 일주문 옆에 새로운 전각이 하나 신축되었네요. 범종각(梵鐘閣) 불기 2555년(2011) 11월 30일 낙성. 범종각(梵鐘閣) 편액 -신묘년(2555년. 2011년)인강(仁江) 선생 글씨- 인강(仁江) 신은숙(申銀淑) 선생은 강원도 영월 주천면 용석리 출생으로 성균관대 일반대학원 박사과정 및 문학석사 출신으로 현재 인강서예문인화연구실 대표를 비롯 세명대학교 외래교수 및 평생교육원 서예, 문인화 강사로 활동 중이며 한국서가협회 초대작가 및 이사를 지내고 추사선생추모 전국서예백일장 장원, 신상임당 이율곡서예대전 대상 및 서예대전 5체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또 대한민국서예전람회 및 추사선생추모 전국서예백일장, 월간서예문인화대전 심사위원을 맡고 있으며 한국서예가초청전(인도네시아), 한국청년작가전, 국제미술협회전, 한국서예뉴밀레니엄전 등에 참여하는 등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범종각쪽에서 바라본 모습
금선사를 일으킨 대시주자들의 공덕비 석종형부도 1기와 금선사사적 및 토지불사공덕비 금선사사적 및 토지불사공덕비
민씨대원각영택공덕탑(閔氏大圓覺永澤功德塔) 대원각 민영택보살은 공덕비와 부도탑의 주인공으로 금선사를 크게 일으킨 주역이라고 합니다. 금선사의 주법당인 반야전 모습 옛 대웅전 자리에 불기 2551년(2007)에 2층으로 새로 지었다고 합니다. 1층은 해행당(解行堂)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데 각종 강의나 행사, 혹은 집무실 등으로 활용한다고 하며, 2층은 반야전(般若殿)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데 금선사의 주법당입니다. 여기서 각종 법회와 재(齋)가 베풀어집니다.
1층 해행당(解行堂) 편액 반야전(般若殿) 편액 법당엔 삼존불을 모셨습니다. 석가삼존불(釋迦三尊佛) 신중탱화(神衆幀畵) 화기를 보니 불기 2551(2007)년 4월14일 봉안하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반야전을 낙성하면서 새롭게 조성하여 봉안한 것입니다. 증명법사는 청화(靑和) 스님이고, 금어 만성 조기환(晩成 趙基煥) 박세황(朴世晃)이며, 주지는 법안(法眼) 스님입니다. 칠성탱화(七星幀畵) 불기 2509년(1965) 5월 24일 조성. 가운데 화기(畵記)를 보니 "佛紀 二九九二年 乙巳 五月二十四日 觀音宗 三角山 金仙菴 修道院 奉安"이라 되어 있네요. 이는 불기 2992년 을사년 5월 24일에 관음종 삼각산 금선암 수도원에 봉안했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불기 2992년은 지금의 불기로 환산하면 불기 2509년이며 서기로는 1965년입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금선사가 금선암이었고 관음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칠성탱화 봉안의 증명법사는 대은(大隱)스님이고 금어(金魚)는 인봉(印峯)스님이고 화주(化主)는 당시 주지 스님이었던 도공(道空)스님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단의 감로탱화(甘露幀畵) 화기는 신중탱화와 같습니다. 가운데 정원스님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10시가 되면 본격적인 1주기 재와 추모법회가 시작될 것입니다. 현재 시간은 9시 30분으로 아직 모이지 않은 상태입니다. 시작되기 전에 부지런히 전각을 담아보고자 했습니다.
반야전과 안심당 사이의 전경입니다. 최근에 신축된 건물인데 안심당(安心堂)이라고 합니다.
안심당(安心堂) 편액 대적광전으로 올라가는 해탈문(解脫門)입니다.
대적광전(大寂光殿)
대적광전은 불기 2549년(2005)에 증축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안에는 삼신불(三身佛) 사상에 따라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삼존불로 모셨습니다.
비로삼존불(毘盧三尊佛)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신중탱화(神衆幀畵) 이 신중탱화는 불기 2549년(2005)에 대적광전이 증축됨에 따라 주지 법안(法眼) 스님에 의해 조성 봉안되었는데 금어(金魚)는 조기환(趙基煥) 백인화(白仁花)라고 화기에 적혀 있습니다.
대적광전 옆에 있는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칠성(七星)과 독성(獨聖)인 나반존자(那畔尊者) 그리고 산신(山神)을 모셔 놓은 전각으로서, 2005년 증축 된 전통목조건물입니다. 이 세 분은 본래 별도의 건물에 모셔졌습니다. 산신은 산신각에, 칠성은 칠성각에, 독성은 독성각에 각각 모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세 분 성자를 한꺼번에 모시고 건물 이름도 삼성각이라고 부릅니다.
삼성각(三聖閣) 편액 낙관에 '乙巳年 四月 立夏 金道空'이라 했으니 불기 2509년(1965) 음 4월 당시의 주지 스님인 도공(道空) 스님이 쓴 글씨로 보여집니다.
칠성탱화(七星幀畵) 불기2548년(2004) 봉안 이 칠성탱화는 불기2548년(2004) 주지 법안 스님에 의해 조성되었는데 금어(金魚)는 박진명, 이수예입니다. 산신탱화(山神幀畵) 불기 2509년(1965) 봉안 화기에 '佛紀二九九二年 乙巳 五月二十四日 觀音宗 三角山 金仙菴修道院 奉安'이라 했으니, 당시 주지이신 도공(道空) 스님에 의해 불기 2992년(2509년. 1965)년 음 5. 24일에 당시 관음종 소속 사찰인 금선암수도원에 봉안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증명법사는 대은 태흡(大隱泰洽) 스님이고, 금어(金魚)는 인봉 성한(印峯盛漢) 스님입니다. 독성탱화(獨聖幀畵) 불기 2509년(1965) 봉안 이 독성탱화도 화기를 보니 신신탱화와 같은 시기에 조성되어 같은 날에 봉안되었습니다. 대적광전과 삼성각 홍예교(虹霓橋)가 어울어진 풍광. 미타전(彌陀殿)과 연화당(蓮華堂) 백도영님이 미타전 아래 연화당 왼쪽에 정원 스님의 납골을 모셨는데 불 밝혀 놓았으니 가보라고 해서 행사전에 미타전과 연화당에 들어 참배하였습니다. 식전에 금선사의 전각을 담아보려고 부지런히 돌아보았습니다. 추모법회가 시작되는 10시 가까이 되어 반야전으로 향했습니다. 미타전에 대해서는 다시 올려 보겠습니다. 다음은 정원 스님 소신공양 1주기 추모법회입니다. 감사합니다. 백우 _()_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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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16년도 7월에 제가 파계사를 다녀온 글에 보시면
이와 비슷한 전설이 있습니다.
어느게 맞는건지 오히려 파계사가 더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정원스님 1주기 추모법회에 참석할려고 했지만
도저히 시간을 뺄 수가 없어서 못갔습니다...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_()_
전통사찰총서에서 파계사 전설을 보니 금선사 전설과 대동소이한데 문제는의 사주에 자식이 없었으므로 농산 스님이 입적하여 환생한 이가 영조라 하니 농산 스님의 사실과 활동시기가 맞지 않습니다.에게는 희빈 장씨로부터 낳은 원자[경]가 있었지요. 불과 세 살에 세자에 책봉되고...
단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할 사안인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_()_ _(())_
숙
숙
용파 스님, 농산 스님의 활동시기는 정조 때인데 시기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파계사 전설이 신빙성이 없어 보입니다. ^^
대구에서 오시기란 지난한 일이이지요. 서울에 계신 분도 대부분 오지 않았습니다.
이 추모법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