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미, 한국의 복식문화 1, 2권, 도서출판 경춘사, 1996년
이 책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추천합니다.
이 책의 1권 부분에 고구려 과년 내용을 적고 있으므로, 참고하면 될 것입니다. 이 책을 읽은 후, 고구려 복식에 대해서는 고분벽화을 보면 자세하게 알 수 있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 고분벽화을 보고 자신의 견해를 정리해보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도서관에 가면 이와 관련된 도판들이 많이 있을테니까 그것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내가 정리해놓은 것을 올려보겠습니다.
"고구려의 발견" 바다출판사, 1998년에 나온 글입니다.
지금은 좀 더 자세한 깊이 들어갔지만, 98년에 정리한 글이므로 다소 미흡한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더욱이 출판사에 넘긴 초고입니다) 새로 복식에 대한 자료만 정리해놓았을 뿐, 정리된 글이 없으므로 이것을 우선 소개합니다.
- 이하 고구려의 발견 pp384-392
(2) 고구려인의 의(衣)생활
(가) 고구려 복식의 특징
고조선의 복식에 대해서는 편발(編髮-머리를 길게 땋아 엮은 머리)을 하거나, 추결(椎結-머리 윗부분에 방망이처럼 크게 동여맨 상투머리)을 하였고, 아래는 바지(袴), 위에는 저고리(襦)를 착용하였다고 하는데, 중국인들은 이를 만이복(蠻夷服)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특히 저고리를 왼쪽으로 동여매는 좌임(左衽)과 바지를 입는 풍습은 중국인의 우임(右衽)과 치마(裳)를 입는 것과 크게 다른 것이었다.
고구려인의 의생활도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남자들은 저고리와 바지, 여자들은 저고리와 바지 또는 치마를 입었다. 또한 두루마기도 입었다. 저고리와 두루마기는 단추가 없고, 허리띠로 옷을 고정시켰다. 허리띠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왼쪽에는 갈돌을 달고 오른쪽에는 오자도를 패용했었다. 또 신발도 목이 긴 신을 신은 모습도 보인다.
바지를 입고, 칼을 차고, 목이 긴 신을 신고, 그리고 저고리를 왼쪽으로 여미는 것은 모두 말 타고 사냥하는 풍습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옷의 활동성을 중시했던 것이다. 중국인들이 고구려 사람들이 달음질치듯 움직인다고 표현을 한 것은 이러한 복식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분벽화에서 보면 고구려의 옷들은 대단히 화려하면서도 다양한 색깔로 만들어졌다. 저고리와 바지의 색에는 흰색, 검정색은 물론이고, 노란색, 보라색, 붉은색, 녹색 등이 있다. 또한 장식문양으로 꽃무늬, 점무늬, 기하무늬, 십자무늬, 유색의 바탕무늬 등이 있다
고분벽화에는 매우 다양한 복식형태가 보여 하나의 유형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은 고구려 수백 년의 모습을 담은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신분에 따라 옷을 입는 것에 차별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왕실과 귀족 관리들의 옷은 [위서]〈고구려조〉에 “그들은 모임이 있을 때에 옷은 전부 비단옷을 입었고, 금과 은으로 장식했다”고 하였듯이 대단히 화려한 옷을 입었다. 반면 평민들의 옷은 색깔이 단조롭고 옷감도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며, 대부분이 베(布)나 짐승가죽 이었을 것이다.
(나) 고구려인의 의복 형태
벽화에 그려진 사람들은 왕, 귀족, 신선, 승려, 도사, 무사, 악공, 춤꾼 등 여러 다양한 사람들이 그려져 있지만, 의복형태는 크게 3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두루마기와 저고리, 둘째는 바지, 셋째는 치마이다.
고구려인의 두루마기와 저고리의 특징은 주로 왼쪽으로 여미며, 허리띠로 묶는다는 특징이 있다. 깃 모양은 대개 직선형태를 띄고 있으며, 소매는 좁고 긴 것이 많으나, 폭이 넓은 것도 있다. 소매 끝과 깃, 섶 등에는 선을 넣기도 했는데, 흑색, 홍색, 청색, 백색, 황색 등 여러 가지 색이 사용되었다. 저고리는 대개 엉덩이를 반 이상 덮을 정도로 긴 편이다. 겉옷 중에 무릎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옷들은 의식복장을 제외하면 주로 여성용이다. 이런 복장들은 대개 소매가 더 크고 넓다. 허리띠는 왕의 경우는 금테를 둘렀고, 대신들은 금테와 은테를 섞어 둘렀다고 한다.
바지는 저고리 아래로 입었는데,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입었다. 바지단은 신 속에 넣은 경우와 신 바깥으로 나온 경우가 있는데, 신 바깥으로 나온 경우에는 대개 끝에 다른 색의 선이 부착된 것이 특징이다. 바지의 폭은 고구려 후기에 갈수록 넓어지며, 길이는 대부분이 발목 길이이고, 종아리 길이의 옷도 있고, 역사(力士)들의 경우에는 무릎 길이의 반바지인 잠방이를 입기도 했다. 바지에는 붉은색, 주황색, 점토색, 흑색 등 색깔이 다양하며, 특히 꽃무늬와 같은 문양을 넣은 것도 많다.
치마의 경우는 스님이나 도사, 수문장, 신선 등을 제외하면 여자들의 복장이었다. 치마의 특징은 길고, 폭이 넓으며, 허리 아래서부터 잔주름이 잡혀 있다는 점이다. 때로 속바지가 보일 정도의 장딴지에 걸리는 치마도 있지만, 대개는 지면에 닿을 정도로 치마의 길이가 길었다. 가장 많은 종류의 치마는 주름치마로 고구려 치마의 대표라고 할 수 있겠다. 주름은 넓은 것도 있고, 간격이 좁은 것도 있지만, 좁은 것이 더 많다. 주름치마 외에도 수산리고분의 여주인처럼 색동치마를 입은 경우도 있고, 약수리고분의 여자는 치마에 꽃무늬가 있는 것도 있다.
귀부인의 경우 각종 무늬가 그려진 두루마기를 겉옷으로 입고 안에는 주름치마를 입어 주름치마 끝이 조금 보이는 경우가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시중을 드는 여인들도 이와 같은 복장을 하는 경우도 있고, 폭이 굉장히 넓으면서 각종 무늬가 그려진 바지와 저고리를 입는 경우도 있다.
그 밖에 신선이나 역사, 무사, 씨름꾼 등은 각기 특색에 맞는 옷을 입었는데 그 형태는 대단히 다양하다.
(다) 고구려인의 머리 모양
고구려 남자들의 머리모양을 고분벽화를 통해 살펴보면, 크게 3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상투(結髮)형으로 두발을 머리 꼭대기에 모아 방망이처럼 묶은 것이다. 각저총에 택견하는 인물들과 천왕지신총에 천왕신(天王神)의 머리모양이 이것이다. 당시 고구려 남자들의 대다수가 이런 모양을 하고 있었다.
둘째는 피발(披髮)형으로 자연 그대로 풀어 내린 머리다. 통구사신총에 보이는 불을 일으키는 신이 이러한 머리 모양이다.
셋째는 민둥머리형으로 쌍영총 벽화에서 보이는 스님인 듯한 사람이 머리를 짧게 깍아 민둥머리를 했다.
여성들의 경우는 훨씬 복잡해서 여러 가지 머리 모양을 했다.
첫째 얹은머리형으로 두발을 뒷머리부터 앞머리로 감아 돌려, 머리 위에 얹는 형태로 무용총 벽화에 시종의 머리에서 이와 같은 머리가 보인다.
둘째 빈하수라 하여 머리 꼭대기에 두발을 묶고서 애교머리 1~2 가닥을 빼어 내린 머리모양이다. 덕흥리 벽화에 하늘을 나는 선녀와 여자 시종의 머리 등, 가장 빈번한 형태이다.
셋째 채머리로 두발을 자연 그대로 뒤로 내린 머리 모양이다. 오회묘4호분의 달의 신의 머리모양이 이러하다.
넷째 가체머리라 하여 두발을 머리 꼭대기에 모아 묶은 후, 가발을 사용하여 타원형의 머리 태를 만들어 모양을 만든 형태로. 안악3호분의 여자 주인공의 머리가 대표적이다.
그 밖에도 뒤통수에서 모아 쪽 진다거나, 두발을 하나로 꼭대기에서 묶은 후 양쪽으로 벌려서 꾸미는 등 다양한 머리 형태가 있었다.
(라) 고구려인의 모자와 머리장식
고구려인들은 머리를 그냥 내보이기도 했지만, 각종 머리장식과 모자를 썼다. [구당서]에 고구려의 왕은 백라관(白羅冠)을 쓰고, 대신들은 청라관을 그 다음은 강라관을 쓰고, 평민들은 고깔(弁-절풍)을 쓴다고 하였다. 모자는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였다. 벽화에 나오는 몇 가지 모자들을 살펴보면, 먼저 남자의 모자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절풍(折風)으로 삼각형으로 된, 전후 평면의 마름모꼴 모자다. 대개는 서민들이 사용했으며, 일부 하급관리들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조우관(鳥羽冠)으로 절풍에다가 아름다운 새의 깃털이나 짐승의 꼬리털을 삽입하여 멋을 낸 모자다. 무용총의 사냥도에 나오는 말 타고 활 쏘는 무사들의 머리에 쓴 것이 바로 조우관이다. 조우관은 일반적으로 귀족들이 했던 것이라고 여겨진다.
셋째 책(幘)은 안학3호분의 시종들이 쓴 것처럼 앞부분이 모자의 테보다 한단 높고, 뒷부분은 앞부분보다 한층 더 높게 갈라지면서 앞으로 구부러진 형태를 띤 종류와, 약수리 고분 등의 인물들이 쓴 것처럼 모자에 둘레가 있고 뒤가 뾰족하게 솟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후한서]에 대가․주부는 책을 쓰고, 소가는 절풍을 썼다고 하니, 책이 절풍 보다는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쓴 것으로 보인다.
넷째 면류관(冕旒冠)은 모자에 주렁주렁 옥구슬 등이 아래로 내려 단 면류가 부착된 것으로 통구사신총 벽화의 신선들이 착용한 것으로 보아 국왕이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모자의 높이가 매우 높은 형태의 고고관이란 모자를 비롯해서 삼각형의 관을 비롯 소골, 농관, 복두 등 다양한 모자 양식이 있었다.
여자들의 경우에도 다양한 모자 양식이 있었다.
건귁(巾幗)은 삼실총과 각저총의 주인공 부인들이 착용한 것으로 수건인 듯한 것으로 머리를 둘러싸서 머리 위까지 다 씌운 것으로 일반인들이 가정에서 많이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건(巾)이라 하여 단지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기도 했는데, 쌍영총 널길 동벽의 부인들이 대표적이다. 고구려의 여인들은 건귁 또는 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외출도 하고, 집에서 손님도 맞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도 다양한 모자가 있다. 천왕지신총 널방 북벽에 그려진 여자는 구슬과 꽃무늬 비단댕기로 치장하여 양어깨로 내려 드리운 장식을 하기도 했다.
(마) 여성의 장신구
귀족 여성들은 장신구를 많이 사용하였다. 평강공주가 온달과의 살림밑천으로 사용한 것은 금팔찌였다. 안학3호분의 여주인공은 많은 비녀와 온갖 머리 꼬지를 꽂았고, 약수리고분의 여주인공은 황금 목걸이를 하고 있다. 고구려 무덤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는 것은 귀걸이로 주로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다. 이외에도 금과 은으로 만든 팔지, 비녀, 반지 등이 출토되기도 했다. 요패(腰佩)라 하여 각종 장신구들을 허리띠 아래로 내려 붙인 것들도 있다. 고구려의 발달한 금속가공기술이 아름다운 많은 장식물들을 만들어 냈고, 고구려 여성들도 오늘날과 같이 치장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사) 고구려인의 신발
신발은 복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복장과 계절 및 용도에 따라 각각 다른 신발을 신게 된다. 고분벽화에서 보여지는 신발은 크게 목이 긴 신인 화(靴)와 목이 짧은 신인 혜(鞋)로 구분된다. 무용총에 그려진 무용수들은 목이 없는 짧은 신발인 혜를 신은 사람과 발목을 감싸며 마치 방한화처럼 보이는 화를 신은 사람이 확연히 구분된다. 말 타고 사냥하는 사람들의 신발은 목이 긴 화를 신는데 비해, 행군하는 사람들의 신발은 혜나 발을 감싸는 정도의 신을 신고 있다.
통구4신총에 그려진 역사(力士)의 신발은 앞부분이 위로 올라간 특이한 형태로 하고 있고, 쌍영총에 그려진 스님으로 보이는 사람의 신발은 마치 끈으로 묶은 신발처럼 보인다. 유물로 남아있는 고구려 신발은 길이 34.9㎝~34.1㎝, 폭 11.1㎝~11.5㎝ 크기로 금동(金銅)으로 만든 것이 있는데, 이것은 죽은 자를 위해 제작된 것으로 실제로 사용된 것 같지는 않다.
[구당서]에 고구려 귀족들이 노란 가죽신을 신는다 것을 통해 볼 때 신발의 주재료는 가죽이었다. 신라의 경우는 가죽의 종류, 수(繡)를 놓은 정도 등에 따라 신발의 종류를 구분하여 신분별로 신을 수 있는 것을 제한하고 있는데, 고구려의 경우도 그와 같은 사례는 구체적인 사례는 찾아지지 않지만 신분에 따른 약간의 차별은 있었다고 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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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성신여대 의류학과 2학년인 이지혜라고 합니다.
전 지금 한국복식사라는 과목을 공부하고 있는데요
팀별로 발표하는게 있는데여
전 고구려 복식에 대해 발표를 해야합니다.
여자복식이나 남자복식 등등
혹시 자료가 있으시면 점 도와주세요
수욜날이 발표거든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