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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스님들은 나름대로 출가 동기가 있지만, 나는 특별한 출가의 동기를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있다면 전생에나 있었을까?
금생에는 전생의 인연을 따라 자연스럽게 중이 된 것으로 나는 믿고 있습니다.
하는 스님이 찾아 왔습니다.
좋았던지 하루 종일 뒤를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스님은 나를 기특하게 여겨 엿을 듬뿍 사주었는데, 그 엿을 주머니 여기저기에 넣고 우두둑 씹으면서 죽자고 따라다니며 '원왕생(願往生) 원왕생‥‥‥‥을 외웠습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그날 밤 나는 잠을 자면서도 천수경을 외웠다고 합니다.
몇 가지 경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외우고 있었습니다.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때 앞으로 나가 춤을 추면서 천수다라니를 외웠습니다.
배꼽이 떨어져라 웃었고, 그 때 이후 내 별명은 '중'이 되었습니다.
국민학교를 마친 14살 때 외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통도사에 계시는 고경(古鏡)스님을 뵙고 출가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정녕 전생의 깊은 인연이 없었다면 나의 출가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
나의 가족은 친가와 외가를 모두 합하여 모두 41명이 승려가 되었습니다.
이 41명의 출가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일족의 출가 이후 가장 많은 숫자로
기 록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41명의 출가는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인가?
아 닙니다. 나의 외증조할머니인 이평등월(李平等月) 보살의 기도와 입적(入寂),
그리고 방광의 이적(異蹟)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안성이씨(安城李氏)
평등월 보살은 일찍이 우리나라 제일의 양반으로 치던 광산김씨(光山金氏)
집안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그녀는 남편 김영인(金永仁)의 아낌없는 사랑 속에서 삼형제를 낳아 기르며,
학식 있는 양반집 안방마님으로 부족함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이 60이 조금 지났을 때 갑자기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남편이 남의
빚보증을 섰다가 대부분의 재산을 날려 버렸고, 연이어 시름시름 앓던 남편은
끝내 저 세상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평등월 보살이 실의(失意)에 잠겨 헤어나지 못하고 있자. 이미 장성하여 가정을
꾸리고 있던 만수(萬洙), 완수(完洙), 은수(恩洙) 세 아들은 머리를 맞대고
상의했습니다.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우리가 양반이라고 마냥 이렇게 살 것이 아니다.
노력하여 돈을 벌어야 한다."
이렇게 결의한 세 아들은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조금도 염려 마십시오. 이제부터 저희들이 집안을 꾸려
어머니를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그리고는 남은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목화를 솜으로 만드는 솜틀기계
한 대 를 일본에서 구입하였습니다.
기계를 발로 밟으면서 목화를 집어 넣으면 껍질 은 껍질대로,
씨는 씨대로 나오고 솜은 잘 타져서 이불짝처럼 빠져 나오는
당 시로서는 최신식 기계였습니다.
이렇게 공주 시내 한복판의 시장에다 솜틀공장을 차린 삼형제는
작업복을 입고 하루 여덟 시간씩 3교대로 직접 솜틀기계를 돌렸습니다.
기계는 24시간 멈출 때가 없었습니다. 공주 사람들은 그 솜틀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공 주도 이제 개명을 하는구나." 하면서
'공주개명(公州開明)! 공주개명!'을 외쳤습니다.
마침내 공주 주변에서 생산되는 목화는 모두 이 공장으로 들어왔고,
산더미 같이 쌓인 목화가 솜이 되어 나오는 양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집안에는 돈이 쌓여 갔습니다.
월말이 되면 삼형제는 한 달 번 돈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세 몫이 아니라
네 몫으로 나누었습니다.
남는 한 몫은 누구의 것이겠습니까? 바로 어머니 평등월 보살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돈을 어머니께 직접 드리지는 않았습니다. 어머니께서 한 달 동안
'삼형제 중 누구 집에 며칠을 계셨느냐'에 따라 그 집에 직접 분배를 하는 것입니다.
막내아들 집에 열흘을 계셨으면 3분의 1을 막내아들 집에 주었습니 다.
이렇게 하니 며느리들은 서로 시어머니를 잘 모시기 위해 갖은 정성을 다
기울였습니다. 집집마다 어머니 방을 따로 마련하여 항상 깨끗하게 꾸며
놓았 고, 좋은 옷에 맛있는 음식으로 최고의 호강을 시켜 드렸습니다.
때때로 절에 가신다고 하면 서로 시주할 돈을 마련해 주는 것은 물론이었습니다.
마침내 이 집안은 공주 제일의 효자 집안으로 소문이 났고, 벌어들인 돈으로는
논 백 마지기를 다시 사들이기까지 하였습니다.
평등월 보살은 신이 났 습니다.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매일매일을 평안함과 기쁨 속에서 지내던 할머니가 막내아들 집에
가 있던 어느 날, 한 비구니 스님이 탁발을 하러 왔습니다.
그 스님을 보자 할머니는 눈앞이 밝아지는 듯했습니다.
"아! 어쩌면 저렇게도 잘생겼을까? 마치 관세음보살님 같구나."
크게 반한 할머니는 집안에서 가장 큰 바구니에다 쌀을 가득 퍼서
스님의 걸망에 부어 드렸습니다. 그때까지 비구니 스님은 할머니를
조용히 보고만 있다가 불쑥 말을 걸었습니다.
"할머니! 요즘 세상 사는 재미가 아주 좋은신가 보지요?"
"아, 좋다마다요. 우리 아들 삼형제가 모두 효자라서 얼마나 잘해 주는지.......
스님. 제 말 좀 들어 보실래요?"
할머니는 신이 나서 아들 자랑을 시작했고, 며느리 자랑, 손자 자랑까지
일사천리로 늘어놓았습니다.
마침내 할머니의 자랑은 끝내 이르렀고, 장시간 묵묵히 듣고만 있던
스님은 힘주어 말했습니다.
"할머니,. 그렇게 세상일에 애착을 많이 가지면 죽어서 업(業)이 됩니다."
"업?"
충청도 사람들은 '죽어서 업이 된다'고 하면 구렁이가 된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죽어서 큰 구렁이가 되어 고방(庫房) 안의 쌀독을 칭칭 감고 있는 업!
할머니는 그 '업'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구 스님! 어떻게 하면 업이 되지 않겠습니까?"
"벌써 업이 다 되어 가는데 뭐.......... 지금 와서 나에게 물은들 뭐하겠소?"
스님은 벼랑을 짊어지고 돌아서서 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업만은 면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5리, 10리 길을 쫓아가면서
스님께 사정을 했습니다.
"스님, 제발 하룻밤만 저희 집에 머무르시면서 업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스님, 제발 저 좀 살려 주십시오."
간청에 못 이겨 다시 집으로 온 스님은 할머니가 이끄는 대로 방으로
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윗목에서 벽을 향해앉아 말 한마디 없이 밤을 새웠고,
할머니 역시 스님의 등뒤에 앉아 속으로만 기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발 업이 되지 않는 방법을 일러주십시오. 제발....."
마침내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자 스님은 할머니 쪽으로 돌아 앉았습니다.
"정말 업이 되기 싫소?"
"아이구. 제가 업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스님. 절대로 안됩니다.
인도환생(人道還生) 하든지 극락세계에 가도록 해주십시오."
"정말 업이 되기 싫고 극락에 가기를 원하면 오늘부터 행실을 바꾸어야 하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부터 발은 절대로 이 집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고, 입으로는
'나무아미타불'만 부르고, 일심으로 아미타불을 친견하여 극락에 가기만을 기원하시오."
스님의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말씀은 몸 단속을 하라는 것이고,
'나무아미타불을 불러라'는 것은 입 단속. '일심으로 극락왕생할 것을
기원하라'는 것 은 생각 단속입니다.
곧 몸[身]과 입[口]과 생각[意]의 삼업(三業)이 하나가 되게 염불할
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스님. 다시 한번 자세히 일러주십시오."
"보살님 나이가 70이 다 되었는데,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소?
돌아가실 날까지 '나무아미타불'을 열심히 부르면 업 같은 것은
십만 팔천 리 밖으로 도 망가 버리고, 극락세계에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오늘부터는 첫째나 둘째 아들 집에도 가지 말고, 이웃집에도
놀러가지 마십시오. 찾아오는 사람에게 집안 자랑 하지도 말고.
오직 이 집에서 이 방을 차지하고 앉아 죽을 주면 죽을먹고 밥을 주면 밥을
먹으면서 '나무아미타불'만 외우십시오. 그리고 생각으로는 극락 가기를
발원하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까?"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할머니는 다짐을 하면서 큰절을 올렸고, 스님은 옆에 놓아 두었던 삿갓을
들고 일어서서 벽에다 건 다음 슬며시 방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걸망도 그대 로 둔 채.....
'변소에 가시나 보다.' 그러나 한번 나간 스님은 영영 돌아올 줄 몰랐습니다.
사람을 풀어 온 동네 를 찾아보게 하였으나 '보았다'는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아! 그분은 문수보살님이 틀림없다.
문수보살님께서 나를 발심시키기 위해 오신 것이 분명하다.
'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더욱 발심(發心)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방의 가장 좋은 위치에 스님의 삿갓과 걸망을 걸어 놓고,
아침에 눈만 뜨면 몇 차례 절 을 올린 다음 '나무아미타불'만 불렀습니다.
어느덧 할머니는 앞일을 내다보는 신통력(神通力)이 생겼습니다.
"어멈아! 오늘 손님이 다섯 온다. 밥 다섯 그릇 더 준비해라."
과연 끼니 때가 되자 손님 다섯 사람이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루는 막내아들을 불러 각별히 당부하였습니다.
"얘야. 너희들 공장에 화기(火氣)가 미치고 있다. 오늘은 기계를 돌리지 말고
물을 많이 준비해 놓아라. 위험하다."
그 말씀대로 세 아들은 아침부터 솜틀기계를 멈추고 물통준비와 인화물질
제거에 신경을 썼습니다. 그런데 오후가 되자 바로 옆집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둘러 옆집 불을 껐습니다.
만약 목화솜에 불이 옮겨 붙었다면 솜틀공장은 삽시간에 잿더미로 변하였을
것입니다. 다행히 할머니의 예언으로 조금도 손상을 입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웃 집의 피해까지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도 외증조할머니의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손녀인 어머니가 결혼 적령기가 되었을 때, 외증조할머니는 큰아들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30리 가량 가면 구름내[雲川]라는 마을이 있다.
그 마을 김창석 씨네 둘째 아들과 네 딸 상남(上男)이와는 인연이 있으니,
찾아가서 혼사(婚事)를 이야기해 보아라."
이렇게 외증조할머니는 가 보지도 않고 신통력으로 나의 부모님을
결혼시켰습니다.
마침내 주위에서는 외증조할머니를 일컬어 '생불(生佛)'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어느 날부터인가 외증조할머니가 '나무아 미타불'을 부르지 않고
'문수보살'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갑작스런 변화를 걱정 한 아들 삼형제는 인근 마곡사의 태허(太虛: 鏡虛대선사의 사형)
스님을 찾아 가 상의했습니다.
"문수보살을 부르는 것도 좋지만, 10년 동안이나 아미타불을 불렀으면
끝까 지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 좋다. 그리고 앞일을 자꾸 예언하다 보면
자칫 마 섭(魔攝)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이라는 글을 써 줄테 니 벽에 붙여 놓고
'나무아미타불'을 항상 부르도록 말씀드려라.
" 常放大光明! 언제나 대광명을 뿜어낸다는 이 글을 보면서 할머니는
다시 '나무아미타불'을 열심히 불렀습니다.
그리고 앞일에 대한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부지런히 염불기도를 하다가 할머니는 88세의
나이로 입적(入寂)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야말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7일장(七日葬)을 지내는 동안 매일 같이 방광(放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낮에는 햇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으 나, 밤만 되면 그 빛을 본 사람들이
'불이 났다'며 물통을 들고 달려오기를 매 일같이 하였습니다.
그리고 문상객으로 붐비는 집안 역시 불을 켜지 않아도 대낮같이
밝았습니다.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 그야말로 외증조할머니는 염불기도를 통하여
상방대광명을 이루었고, 그 기적을 직접 체험한 가족들은 그뒤 차례로
출가하여, 우리 집안 친가*외가 41인 모두는 승려가 되었습니다.
몸과 말과 뜻을 하나로 모아 염불하고 기도하는 공덕. 그 공덕을 어찌
작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부처님의 불가사의가 어찌 없다고 하겠습니까?
외증조할머니의 염불기도는 우리 집안을 불심(佛心)으로 가득 채웠고,
41명 모두를 '중노릇 충실히 하는 승려'로 바꾸어 놓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출처: 일타큰스님의 기도성취영험담모음 기도(祈禱) 도서출판 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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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정성을 모으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기도는 지극한 마음(至心)으로 시작하여 지극한 마음으로
끝맺음을 해야 합니다.
부처님 앞에서 기도를 올릴 때뿐만이 아니라 기도 전 의 마음가짐부터
지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예로서 나의 부모님께서 생남불공(生男佛供) 을 드리러 다니던
때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불심이 매우 깊었던 우리 부모님은 자식들을 낳기 위해 절을 찾아다니며
정성을 다해 기 도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 기도를 올릴 때만 정성을
기울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수확한 첫 쌀을 부처님께 가장 먼저 바쳐야 하는 것으로 여겼던 부모님들은
농사를 지을 때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공양미를 수확하는 논밭에는 대변을 주지 않고, '관세음보살'과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부르면서 고운 풀만 베어다가
거름으로 사용했습니다.
또 벼가 다 익으면 낫으 로 베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직접 벼를 훑어 방아를
찧었습니다 .
이렇게 수확을 하고 나면 아버지 법진(法眞) 거사는 손수 만드신 무명베 자루에
쌀을 한 말 담습니다. 그리고 깨끗한 무명옷으로 갈아입으신 다음, 그 쌀을
지게에 얹어 마곡사 대원 암까지 짊어지고 가서 불공을 드렸습니다.
집에서 절까지는 80리 길인데, 그 먼 길을 생남기 도를 위해 다니셨던 것입니다.
한번은 평소와 같이 쌀을 짊어지고 마곡사 대원암으로 향하였는데, 그날따라
마침 배가 사르르 아픈 것이 자꾸만 방귀가 나오려는 것이었습니다.
억지로 참고 또 참으며 가다가, 대 원암을 10리 남겨 놓은 지점에서 시냇물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를 건너뛰다 그만 방귀를 뀌 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러 가다가 방귀를 뀌다니! 가벼운 방귀 기운이 이미
위로 솟아 쌀로 올라갔을 것이 아닌가?'
방귀 기운이 섞인 쌀로는 공양을 올릴 수 없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그 쌀을 도로
짊어지 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다른 벼를 손으로 훑어 방아를 찧은 다음,
그 쌀을 새 자루 에 넣어 다시 80리 길을 걸어서 불공을 드리러 가셨다고 합니다.
기도하기 전의 정성이 이러했거늘 기도할 때의 정성은 어떠했겠습니까?
또 이렇게 정성 을 다한 기도 끝에 저를 낳았으니, 부모님의 은혜를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분명 알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하러 가는 마음가짐을 이렇게만
가진다면 그 기도는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도는 정성입니다. 내 정성을 내가 기울이면서 불보살님께 기원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내 정성 내가 들이고, 내 불공 내가 드리고, 내 기도는 내가 하고, 내 축원은 내가 해야
참 불공이요 참 기도입니다. 남이나 스님네가 대신 해주는 것은 모두가 반쪽이기
때문에 결실 또한 늦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의 시작부터 끝까지 제 정성을 제가 남김없이 바칠 때 부처님의 자비 광명이
환히 비쳐 오게 되어 무명업장(無明業障)이 소멸되고, 기도성취는 저절로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지극히 모아 내 기도를 내가 하는 불자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부처님 께서는 틀림없이 우리를 기특히 여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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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법을 따르면 행복이 찾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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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뵙고 싶은 큰스님/일타 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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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타 스님은 1929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1942년 양산 통도사에서 고경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1946년 송광사 삼일선원의 효봉 스님 회상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를 시작으로 참선 정진하는 한편 1949년 통도사 강원 대교과를 졸업, 1951년 천화율원에서 율학을 수업, 정통 율맥을 이었다. 1954년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열두 마디 손가락을 연비 정진, 일대사를 해결할 것을 발원하였고, 홀로 태백산 도솔암에서 6년 동안 용맹 정진하였다. 1962년부터 조계종중앙종회의원, 역경위원, 교육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정법(正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71년부터 해인총림 선원장, 율원장, 율주, 금강계단 교수아사리가 돼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인도, 태국, 미국 등 여러 나라를 돌면서 한국불교를 전파했다. 해인사 주지, 은해사 주지를 역임하였으며, 조계종 원로위원, 전계대화상으로 한국불교의 율맥을 이으셨다. 스님은 20여 년 동안 해인사 지족암에 주석하면서 중생의 안목을 열어주셨다. 스님은 출가 50주년이 되던 해인 1992년 평생을 닦은 도력(道力)을 30권 한 질의 <일타총서>로 간행했다. 이중 5권 분량의 `『범망경보살계』는 스님이 보살계 산림법회에서 강설한 무애변(無碍辯)을 담은 법문집으로 청정한 수행과 생활에 큰 가르침이 되었다. 이 외에도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법공양문』, 『불자의 마음가짐과 수행법』, 『자기를 돌아보는 마음』, 『시작도 끝도 없는 길』, 『영원으로 향하는 마음』, 『생활 속의 기도법』, 『집착을 버리면 행복이 보인다』 등 수십 종이 있다. 육성법문집으로 <감로법문>, <보살의 길> 등이 있다.
* 자료를 제공해주신 효림출판사 김현준 사장님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주
복 중에 가장 큰 복이 인연작복(因緣作福)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무릎을 친 적이 있다. 실로 좋은 인연을 짓는 복만큼 큰 복이 어디 있으랴. 그러고 보면 선(禪)·교(敎)·율(律)을 두루 회통하신 일타 스님처럼 큰 복을 지은 분도 드문 것 같다. 스님의 친가, 외가 식구 41명이 모두 출가하여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로 가장 많은 숫자가 출가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는 스님의 외증조모이신 평등월 보살이 평소 염불 공덕으로 돌아가실 때 일주일 동안 방광한 이적에서 연유하였으니, 그러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만으로도 보통 인연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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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타스님글은 언제나 읽어도 귀감이됩니다 좋은글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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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
깊은 곳에서 눈물이 흐릅니다...... ()
<마음을 지극히 모아 내 기도를 내가 하는 불자가 되도록 노력합시다>일타스님가족에 대한 깊은 감동이 두눈에서 흘러내려 몇번 멈추고 봤습니다........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 ()()()........................
좋은글 감사히 모셔갑니다.. 고마워요~~^^
나무관세음보살.().
감사히 잘 읽고갑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이런 숨은 공덕과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한국불교가 유지되고 있다고 봅니다...그리고 일타스님의 가족이 이렇게 '바보스러울 정도로' 불교에 헌신한것은 스님이나 절에 적선한다는 마음에서라기보다는 오로지 거룩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고자하는 고귀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실을 보건대 여러모로 많은 반성이 되는군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 보살 _()_
...()()()...
이런일도 있군요...좋은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_()_
내 기도 내가하고 내 축원 내가 하도록 열심히 기도 정진 하는 진정한 불자가 돠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