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 없는 세상?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이 사람 혹 역모를 꾀하는 사람 아냐? 그래서 중죄인으로 이렇게 유배를 온 게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상을 꿈꿉니다.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그것은 이해할 수도 없고 또 이해해서도 안 되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이해할 필요도 없지요. 어차피 내가 바라는 세상과 당신이 바라는 세상은 다릅니다. 나도 세상에 나가 나의 꿈을 펼치고 싶습니다. 숨은 속내를 지적당했지만 꿈이라기보다 야망입니다. 출세하고 싶고 돈도 벌고 싶고 남들처럼 떵떵거리고 살고 싶습니다. 언제까지 섬 구석에 쳐 박혀 망망한 바다만 바라보다 인생 종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정말 기회가 된다면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습니다.
처음 기회를 만들어보려고 아버지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거부당합니다. 낙심하여 돌아오지만 분기탱천하여 더욱 공부에 열심을 냅니다. 좋다, 고 정도로 끝나지 않으리라. 어서 원하는 만큼 진도를 나가리라. 과연 그만한 발전을 하게 됩니다. 콧대 높은 양반과 겨루어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줍니다. 그 소문이 나지요. 아비가 찾아와서 아들로 받아주고 지역 관아 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합니다. 당당히 합격을 하지요. 잘 되면 곧 중앙정부의 과거에도 응시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일단 지역 관아의 진사로 관리가 됩니다. 섬에서 지내던 가족들 모두가 육지로 나오고 옷차림도 바뀝니다. 생활 자체가 바뀌는 것이지요.
스승님의 동생(정약용)이라 하는 분의 지은 책을 보았습니다. ‘목민심서’ 그 가르침이 마음에 닿습니다. 그래, 이렇게 백성을 다스려야지. 임금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임금을 잘 받드는 세상을 만드는 거야. 지금 스승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세상을 꿈꾸고 있지. 그냥 바다나 연구하며 섬에서 사는 것이 제격인지도 몰라. 제대로 배워서 제대로 세상에 적용하고 적응하면 그게 배우는 보람이고 목적 아니겠는가.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왔습니다. 아이들도 처음으로 섬 밖으로 나왔습니다. 모든 게 새롭고 신기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나 아내도 그다지 탐탁한 표정은 아닙니다. 좋기는 한데 좋은 것인지 아직 익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묻습니다. 새로운 것이 좋은 것인가, 익숙한 것이 좋은 것인가?
책으로 배우고 이상으로 담은 세상과 현실에서 맞대는 세상은 너무나 차이가 큽니다. 관리들이 대하는 백성은 내가 대하고자 하는 백성과 아주 다릅니다. 백성은 땅을 논과 밭으로 생각하는데 백성을 다스리는 양반은 백성을 논과 밭으로 여깁니다. 이게 아닌데 말이지요. 임금과 관아는 백성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보호가 아니라 착취의 대상일 뿐입니다. 닥치는 대로 거두어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임금에게 공세를 제 때에 제대로 올릴 수 있답니다. 문제는 임금을 빙자하여 중간 관리들과 양반들의 주머니까지 챙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임금과 정부가 그러라고 공세를 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때마다 벼슬에 맞는 급료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는 관리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군포’(軍布)를 살아있는 자에게서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미 죽은 자에게도 물리고 나아가 이제 막 태어난 아기에게도 물리는 일도 있습니다. 병역 의무자가 군복무를 대신하여 내는 세금인데 죽은 자나 아기가 어찌 군복무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라도 백성에게서 세금을 뜯어내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항의하러 온 백성을 함부로 학대합니다. 모른 척 내다보는 사또나 양반들은 그런 일은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이게 내가 살고자 하는 세상이고 내가 만들고자 하는 세상인가? 그러나 혼자서 발버둥 쳐보아야 혼자만 미친 사람이고 철이 덜 든 양반일 뿐입니다. 결국 여기가 아닌가벼? 생각하고 결심하고 돌아섭니다. 내가 살던 곳으로. 어쩌면 그 제야 스승의 꿈꾸던 세상이 이해가 됩니다.
동양의 성리학이든 서학이든 목적이 무엇인가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만드는 세상 아닙니까? 그러나 익숙하지도 않고, 처음 접하는 지식이고, 배우자니 귀찮고, 그래서 거부합니다. 문제는 거기에 종교적 가치가 어우러져 기존 가치관에 갈등을 일으키니 더욱 거칠게 거부하고 차단시키려 합니다. 그래서 처음 천주교가 들어와서 핍박을 심하게 당했습니다. 보다 넓은 세상을 접하고 보다 넓은 지식과 사상을 접하여 먼저 알고 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사실 세상은 그런 희생을 감수하며 발전해 왔습니다. 가족을 데리고 섬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길에 가까운 다른 섬으로 옮긴 스승을 뵙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승을 떠났습니다. 자기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책 한 권을 남기고. ‘자산어보’ ‘창대’가 바다에서 얻은 지식을 귀양 온 ‘정약전’이 글로 옮겨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이후 바다에서 사는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라고 만든 것이지요.
흑산도(黑山島)는 ‘검은 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배를 오면서 어감도 그렇고 그 이름이 매우 불길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뜻은 같지만 어감이라도 부드럽게 하고자 바꾸었을 것입니다. ‘흑산’을 자산(玆山)이라 했습니다. 그곳에서 어부생활을 하며 물길과 물고기의 길을 자상하게 알고 있는 청년 창대에게서 크게 감명을 받은 양반 정약전이 그의 지식을 글로 남깁니다. 그것이 ‘자산어보’입니다. 나라의 죄수라고 가까이 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의 지식은 얻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거래’를 합니다. 서로 자기 것을 주고받기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교제 중에 인생을 보고 세상을 보고 깨닫게 됩니다. 흑백 영상으로만 빚어지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영화 ‘자산어보’를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