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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박 黃璞 장군(1564 ~ 1592)】「웅치・이치전투 의병장 황박장군의 희생」
황박(1564년 ~ 1592년)은 조선 중기의 의병이다. 본관은 우주 황씨. 웅치 전투에서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등과 함께 분전했다. 이후, 웅치에서 패하자 황진, 이복남과 함께 안덕원 전투에서 적을 기습해 몰아냈다. 이후 이치 전투에서 부상당한 황진을 대신해 선봉에서 지휘했으나 왜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의병장 황박은 현재 익산시 왕궁면 장암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우주(紆州), 호는 죽봉(竹峰)으로 조선의 개국공신 문숙공 황거중(黃居中)의 후손이다. 족보를 비롯하여 여러 기록에서 황박 장군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기록들이 너무 간략하고 꼼꼼하지 못해 자세히는 알 수 없었는데 ‘김제향교지’ 충훈 편에서 한 줄 찾을 수 있었다. 김제향교지에는 ‘문숙공거중후임난순절이치증병사명정충(文肅公居中后壬亂殉節梨峙贈兵使命旌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뜻은 “황박은 문숙공 거중의 후예로 임진왜란 시 이치전투에서 순절했고 증직으로 병사를 받았으며 충신으로 정려를 받았다”이다. 황박의 선조인 문숙공 황거중은 우주황씨(紆州黃氏) 중시조로, 고려 말 우왕 때 이성계(李成桂, 1335~1408)가 남원 운봉 전투에서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무찌를 때 종사관으로 참전한 개국공신이다. 황거중의 묘는 비봉면 내월리에 있다.
의병장 황박은 무과 급제 후 전주 만호로 있었다. 1590년 부친상을 당했고 시묘살이 중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나라의 위기 앞에서 시묘살이를 청산하고 의병 500명을 모집하여 고향에 홀로되신 어머님과 부인, 어린 두 아들을 남겨두고 죽을 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났다. 그의 나이 28살이었고, 3대 독자였다.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보급로가 막힌 왜군은 물자가 풍부한 전라도를 차지하기 위해 전주를 공격하기 위해 물밀듯이 밀려왔다. 전주성의 수성 장군은 이정란이었고, 의병장 황박, 나주 판관 이복남, 해남 군수 변응정, 김제 군수 정담은 웅치에 배치되었다. 목책과 해자로 방어진을 구축한 웅치의 책임자는 김제 군수 정담이었다. 정담은 제3 방어진지에, 해남 군수 변응정과 나주 판관 이복남은 제2 방어진지에, 최전선인 제1 방어진지에는 의병장 황박이 있었다. 치열한 전투 끝에 김제군수 정담을 비롯한 김제 출신 장졸 500명과 진안 의병 김수· 김정 형제와 그의 식솔 100여명은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모두 웅치에서 순절하였다. 죽음으로 웅치를 지킨 이름 없는 백성들이 있었기에 전주성을 지킬 수 있었다.
웅치의 선봉장 황박과 주력부대를 이끌던 황진은 부하들을 이끌고 이치의 권율 장군 휘하에 배치를 받았다. 이치의 선봉장은 동복(현 화순) 현감 황진이었고 후군장은 의병장 황박이었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7월 1일 무오 2번째 기사에는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를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쏘는 대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병을 대파하였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草木)까지 피비린내가 났다. 이날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사기가 저하되자 권율이 장사들을 독려하여 계속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왜적들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 이치(梨峙)의 전투를 첫째로 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전북대 하태규 교수는 “선군장 황진 장군이 이마에 적탄을 맞고 졸도하여 쓰러지자 왜적들이 포위하여 좁혀 오자 황박 장군은 이를 뚫고 들어가서 대적하다 8월 28일 전사하였다”라고 이야기한다. 고향에 계신 어머님께는 9월에야 3대 독자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통곡하다 졸도하였고, 식음을 전폐하자 전라감사 김광혁이 선조에게 음식 하사를 건의하여 계사년(1593년)에 선조가 하사한 음식이 고향 집에 도착하였다.
아! 슬프도다. 벼슬을 내려놓고 부친 시묘중 사(私)를 버리고 충(忠)을 택함으로 의로운 목숨을 바쳤으니 효자가문에 반드시 충신난다는 말대로 최후의 순간까지 나라를 지킨 임진왜란의 숨은 영웅 의병장 황박 장군. 산 높고 물 맑은 이곳 전사지에 충혼비가 우뚝서게 되었으니 이것이 천세후에도 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을 것이니 장군의 호국정신 영원히 잊지않고 기억할 것이다.
<임진왜란 이치전투 의병장 황박장군 추모비에서>
황박(黃璞) 장군은 호는 죽봉(竹峯)이며 본관은 우주(紆州)이다. 1564년 전주부 우북면(현 왕궁면) 장암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으며 용모가 출중하고 골격이 우뚝했다. 1582년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비변랑을 거쳐 1590년 종4품 전주만호로 봉직하던중 부친상을 당해 3년간 시묘살이를 하다가 임진왜란을 당했다. “내가 비록 상중이나 어머님의 명을 받들어 자진하여 참전하여 힘을 다해 나라를 구할 것이다”는 각오로 500명의 의병을 모아 6월 금산전투에 이어 7월 웅치전투에서 선봉장으로 싸웠고 이어 이치전투에서 후군장을 맡아 싸웠다. 이치전투에서 선봉장 황진이 적탄을 맞고 쓰러지자 황박 장군이 적을 무찌르고 황진을 구한 후 기력이 다해 1592년 8월 28일 전사했다.
의병장 황박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하였고 고산면 어우리 샘골 우주황씨(紆州黃氏) 전주파 종산에 ‘황박(黃璞)’의 제단(祭壇)이 있으며 김제시 용지면에 충신 황박 정려가 있다. 충무공 이순신이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가 없었을 것이다(若無湖南是無國家)”라는 말을 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이치와 웅치에서 호남을 지킨 사람들은 이름 없이 죽어 간 전라도 의병들이다. 이 무명의 의병을 기념하는 비석이 이치에 있다. 이들의 희생을 기억할 때 국가의 정체성이 바로 설 것이다.
영화에서는 왜장 와키자카가 해전과 더불어 전라좌수영을 접수하기 위한 합동작전을 구상하고 육군을 투입하여 전주성 점령을 위해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앞서 사천해전에서 이순신장군에게 사로잡힌 왜군 중에 의를 위한 전쟁이라는 명분에 감복한 준사가 마침내 투항을 한다. 이중첩자로 명을 받고 웅치로 가 정보를 전하고 막 시작된 전투에서 함께 싸운다. 수많은 왜군이 몰려오자 황박의 의병과 정담의 관군이 힘껏 분전하지만 저지선이 무너질 즈음 나타난 조선군에 의해 웅치를 지키게 된다. 의병장 황박이 전사하며 항왜 준사에게 신분을 의심한데 대해 사과를 하며 술 한잔 거하게 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긴다. 영화의 스토리 전개상 황박의 죽음과 준사 이야기는 사실과는 다른 장면으로 각색하였을 것이다.
준사는 한산해전이후 안골포해전에서 사로 잡혔으므로 실제 웅치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 1만여의 항왜가 있었다 한다. 아마도 또 다른 준사가 있지 않았을까? 그들은 화약과 무기제조, 각종 정보제공, 검술지도, 전술, 전투참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약을 하였다. 명분 없는 싸움에 할 수 없이 참전을 했으나 주군을 따라 얼마든지 소속을 바꾸는 관행에 익숙하였을 것이고 더구나 굶주림과 힘든 군영생활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야가(김충선)같은 유명인 몇을 빼고 이들의 조선정착에 대한 후일담은 기록이 없다.
임진란이 발발하고 선조가 몽진을 하자 왜군은 장기전을 대비해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접수하기 위한 작전을 세운다. 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부하장수인 안코쿠지 에케이가 지휘하는 왜군을 맞아 부친의 시묘살이 중이던 전주만호 출신 황박이 의병을 모아 금산전투에 참가한다. 곽재우장군에게 일격을 당했음에도 금산을 점령한 왜군은 전열을 정비하여 전주성으로 향하였는데 두 곳 험난한 고개를 넘어야 했다.
완주군에 위치한 웅치(곰티재)는 진안에서 전주로 넘어가는 운장산 자락이며 금산에서 전주로 가는 또 다른 길 이치(배티재)는 대둔산 자락의 험한 지형으로 접근이 용이치 않다. 조선의 1천여 병력에 비해 10배나 많은 1만여 왜군이 전주성으로 진격한 날이 1592년 7월 8일(음)이다.
웅치로 물러난 황박은 1방어선을 구축하고 좁은 험지에 의존하였지만 중과부적으로 후퇴하며 2방어선을 지키던 나주 판관 이복남과 합류하였다. 그러나 활과 화살은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안타깝게 또 다시 물러나 3방어선을 지키던 김제군수 정담과 합류하였지만 끝까지 분전하던 정담을 비롯해 장졸 모두가 전사하였다. 만약을 위해 후퇴한 이복남과 황박은 남원에서 합류한 동복현감 황진과 함께 안덕원전투에서 승리한다.
왜군은 비록 적이지만 조선군의 용맹에 弔朝鮮國忠肝義膽(조선의 충성과 의로움에 조의를 표함)이라는 팻말을 세우고 후퇴한다. 고경명의 의병이 왜군의 주둔지인 금산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창건한 절 이름을 성으로 삼을 정도의 불승인 안코쿠지 에케이가 도망만 하던 조선군의 처음 대하는 모습에 감복하고 충의의 죽음에 대하여 예를 갖춰 조문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한산에서 큰 승리를 거둔 이순신장군도 후일 若無湖南是無國家(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도 없었을 것이다)라는 편지글을 남긴다.
8월 13일 이치에 출몰한 왜군은 권율장군 휘하의 선봉장 황진에게 막혔다. 문자는 알지 못했으나 무재가 출중했던 황진은 나무에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거의 백발백중이었다. 왜군의 집중사격으로 황진이 총상을 입고 쓰러지자 후위에 있던 황박이 구출하는 과정에서 정작 자신은 지키지 못하고 전사하였으니 오호! 통재라. 그의 나이 겨우 29세였다.
권율장군과 처영대사의 활약으로 조선군이 힘겹게 승리함으로서 전주성을 지켜 이후의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 갈수 있었다. 두 장군은 후일 행주에서도 승리한다. 이어 벌어진 금산탈환 작전에서는 의병장 조헌과 영규스님이 전사하였다. 이때의 승병에 대한 기록 또한 빈약하다. 호국불교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조사, 연구가 제대로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또한 바른 역사를 위한 여러 할일 중 위대함을 위한 작은 행보가 아니겠는가. 황진 또한 임지를 떠나 경남 진주성을 방어하는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안타깝게 전사하였다.
선조가 도망쳤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근왕병을 표방하던 관군이 도망치거나 의병을 파한 사례는 의외로 많다. 그럼에도 못난 지도자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내 처자를 지키기 위해 한목숨을 기꺼이 바친 이름 없는 영웅들에 의해 한민족은 세대를 이어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