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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 羅喆 (1863 ~ 1916)】 " 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 선생 "
《을사오적 처단의거》
1863년 12월 2일 전라남도 낙안군(樂安郡) 남상면(南上面) 금곡리(錦谷里, 현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에서 아버지 나용집(羅龍集)과 어머니 송씨(宋氏) 사이에서 3남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자는 문경(文卿), 호는 경전(耕田, 經田)·홍암(弘巖), 초명은 두영(斗永), 이명은 인영(寅永)이다. 대종교(大倧敎) 창시 후 나철(羅喆)로 개명하였다.
어려서는 한학을 수학하여 29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승정원(承政院) 가주서(假注書),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 등을 거쳐 1905년 징세서장(徵稅署長)으로 재직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제가 내정간섭을 하자, 1905년 5월 일제하 부패관리의 실상을 좌시할 수 없다며 관직을 사임하였다.
1904년 오기호(吳基鎬)·이기(李沂) 등 호남출신 청년지사들을 규합하여 비밀결사단체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였다. 또한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반대운동을 전개한 대한보안회(大韓保安會)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에 참여하여 지석영(池錫永)·김석항(金錫恒) 등과 함께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05년 6월 오기호·이기·홍필주(洪弼周) 등과 함께 국제여론을 파악하고 외교항쟁을 벌이기로 하였다. 당시는 가쓰라-태프트밀약과 포츠머스조약 체결을 앞두고 있는 시점으로 한국문제가 불리하게 전개될 것을 예상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국제여론에 호소하여 국권을 수호하고자 하였다. 외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을 찾아가 이 문제를 협의하여 대한제국의 정식대표로 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주선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하영이 반대하자 오기호와 함께 포츠머스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청원서를 외부에 제출하고 대미외교항쟁(對美外交抗爭)을 시도하였으나,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방해책동으로 무산되었다.
이에 이기·오기호 등과 함께 한국침략 당사국인 일본으로 직접 건너가 4차례에 걸친 대일외교를 전개하였다. 1905년 7월 26일 제1차 대일외교항쟁(1905. 7. 26~1906. 2)을 실행에 옮겨 동지들과 함께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일본에 도착한 일행들은 한국침략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臣)·모치즈키 류타로(望月龍太郞) 등을 차례로 만나 동양평화를 위해서는 한·중·일 삼국이 동맹하여야 하며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린(善隣)의 교의(交誼)로 독립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였다. 아울러 이토 히로부미와 일왕에게 격문을 보내 평화조약 준수를 강력하게 촉구하고 일본의 한국침략이 동양평화를 파괴하는 무익한 처사로 이를 지양하고 양국의 평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충고하였다.
일행들과 일본에서 대일외교항쟁을 전개하던 중 1905년 11월 18일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에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에게 “목이 잘리더라도 협약에 동의하지 말라”는 내용의 전문을 보내고 한국침략의 원흉인 일본특파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에게 항의 서한을 발송하였다. 아울러 일왕에게도 을사늑약 체결이 부당함을 주장하는 항의서한을 보내었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일본에서의 대일외교항쟁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1906년 1월 24일 일단 귀국하였다. 제2차 외교항쟁을 위한 도일은 1906년 7월 3일이나 귀국일은 명확하지 않다.
1906년 10월 20일 오기호·강기환(姜基煥)과 함께 일본 도쿄(東京)로 가서 제3차 대일외교항쟁(1906. 10. 20~12. 30)을 전개하였다. 국내에서보다는 한국침략정책을 수립하는 일본정계의 핵심인물인 마쓰무라 유노스케(松村雄之進)·도야마 미쓰루(頭山滿)·오키모노 류노스케(岡本柳之助) 등을 만나 ‘동양평화’와 ‘한국독립’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 수차례에 걸친 외교항쟁을 전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고 내정간섭을 노골화하여 한국을 반식민지화하려 하자 투쟁방략을 바꾸기로 하였다. 동지들과 ‘을사오적 처단의거’를 위해 일본에서 단도 2자루를 구입하고 1906년 12월 귀국하였다. 1905년 7월부터 1909년 1월 사이 4차에 걸친 대일외교항쟁을 위해 일본에 체류한 기간은 대략 1차 7개월, 2차 2개월, 3차 2개월 열흘, 4차 2개월 보름으로, 약 1년 2개월이다.
1907년 2월 3일 오기호 등과 함께 ‘을사오적 처단의거’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비밀결사단체인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였는데 200여 명에 달하였다. 동지 박대하(朴大夏)·이홍래(李鴻來)·김동필(金東弼)·이용채(李容彩) 등과 상의하여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고 ‘을사오적 처단의거’를 결의하였다.
거사에 필요한 무기와 자금조달을 위해 자기 부인들의 패물을 팔았고, 이광수(李光秀, 성균관 박사) 2만냥 어음, 이용태(李容泰, 전내부 궁내부대신) 1,700원, 정인국(鄭寅國, 전군수) 300원, 윤주찬(尹柱瓚, 농상공부 주사) 1,000원, 최익진(崔翼軫, 호위국원) 200원, 민형식(閔衡植, 학부협판) 1만 4천냥, 김연호(金然灝, 전참봉) 5천금(金)을 모금하였다.
모금된 자금으로 김동필이 인천에서 권총 50정을 구입하고 기일을 1907년 2월 13일로 정하였다. 대원 30인을 선발하여 직접 작성한 애국가(愛國歌), 동맹서(同盟書), 참간장(斬奸狀), 이기가 작성한 자신회취지서(自新會趣旨書)와 무기를 휴대하도록 하였다. 또한 윤주찬에게는 이광수와 함께 대한제국 정부에 올리는 글과 일제 통감부 및 군사령부 그리고 각국 영사관에 보내는 공문과 내외국인들에게 알리는 포고문을 작성하도록 하였다.
‘을사오적 처단의거’를 위한 결사대는 각 처단 대상자마다 대장 1명에 10명 내외의 대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오기호는 참정대신 박제순, 김동필은 내부대신 이지용, 이홍래는 군부대신 권중현, 박대하는 학부대신 이완용, 서태운은 법부대신 이재극, 이용채는 전 군부대신 이근택 등을 맡기로 하였다.
기일로 정한 2월 13일은 (음)1월 1일로 문무백관(文武百官)이 신년하례를 드리기 위해 입궐하는 날이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을사오적을 처단하려 했으나, 일본군의 경계강화로 지방에서 모집한 결사대원들이 서울로 집결하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이후 3월 18일, 3월 21일, 3월 25일 등 3회에 걸쳐 5개조로 나누어 다시 시도를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서창보(徐彰輔)가 체포되어 일제의 고문에 못 이겨 거사전말을 실토하면서 동지들이 차례로 붙잡혀 갔다. 그러자 자발적으로 일제 수사기관에 출두하여 평리원(平理院)에서 1907년 7월 3일 유형 10년을 받고,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12월 고종황제의 특사로 유배 4개월 만에 오기호·이기 등과 함께 석방되었다.
1908년 11월 12일 오기호·정훈모(鄭薰謨)·이건(李健)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제4차 대일외교항쟁(1908. 11. 12~1909. 1. 26)을 전개하였다. 일본 정계의 중요인사를 만나 한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보호 대책을 요청하였고, 자신은 지병인 당뇨병 치료를 위해 상당기간 병원에 입원하였다.
1909년 (음)1월 15일 오기호·이기 등과 함께 서울 재동(齋洞)에 모여 단군교(檀君敎)를 ‘중광(重光)’하였다. 중광은 본래는 새로이 창립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었던 교단을 중흥한다는 의미한다.
단군교 중광에 참여한 인사로는 강우(姜虞)·최전(崔顓)·김춘식(金春植)·유근(柳瑾)·김윤식(金允植)·정훈모·김인식 등 수십 명으로 함께 대일외교항쟁을 전개한 인사와 을사오적 처단의거에 참가했던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단군교 중광을 위해 모인 인사들은 취운정(翠雲亭) 아래 6칸 초옥(草屋) 북벽(北壁)에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단군교포명서」를 공포하고 단군교를 중광하였다. 여기서 교주인 도사교(都司敎)로 추대되었다. 다음해인 1910년 8월 5일 대종교로 교명을 바꾸고 초대 교주가 되었다.
일제의 종교탄압이 점점 심해지자 국외 포교로써 교단을 유지하고자 만주 북간도(北間島) 삼도구(三道溝)에 지사를 설치하였다. 1911년 1월 교리의 체계화에도 힘을 기울여 신리대전(神理大全)을 간행하였다. 만주에서 대종교 교주로서 교인들과 함께 수많은 독립운동단체를 후원·조직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중광단(重光團)을 효시로 정의단(正義團)·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신민부(新民府)·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을 들 수 있다. 1914년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중국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청파호(靑波湖)로 대종교총본사를 이전한 후 포교활동을 통한 항일운동을 지속하였다. 아울러 서간도(西間島) 일대에 시교당(施敎堂)을 설립하고, 박달학원(博達學院)·동창학교(東昌學校)·백산학교(白山學校)·대종학원(大倧學院) 등을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교단을 정비하고 서울로 돌아와 남도교구에서 교단조직과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15년 조선총독부가 대종교를 종교가 아닌 항일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남도본사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에 일제의 탄압과 만행을 보고 견딜 수가 없어서 서울에 있는 남도본사 천진전을 떠나, 1916년 (음)8월 15일 구월산(九月山) 삼성사(三聖祠)에서 유서를 남기고 생을 마감하였다. 2016년 11월 보성군 벌교읍에 홍암나철선생기념관이 건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나철 친필 문건 [판형1] |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앞에서 왼쪽 2번째)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