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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조선 전선 | 일본 전선 |
선체 | 평저형 : 선회가 쉽고 회저반경이 작음 | 첨저형 : 속력은 빠르나 회전반경이 큼 |
승조원 | 안택선 : 120~200 거북선 : 150 | 안택선 : 200~300 관선 : 100 조선 : 40 |
속력 | 3노트 | 3노트 이상 |
돛 | 다범장 : 순풍과 역풍에도 운용 | 횡범 : 순풍에만 운용 |
목재 | 소나무, 참나무, | 삼나무, 전나무 |
못 | 나무 못 : 물에 불어 결합력 강해짐 | 쇠 못 : 물에 부식되어 결합력 떨어짐 |
주요 병기 | 천, 지, 현, 황 대형화포 : 사정거리 500m, 불화살 | 조총 : 사정거리 200m 창, 칼, 화살 |
공격술 | 총통발사 : 선체 파괴 불화살 공격 : 선체 불태움 화살 공격 : 인명살상 | 조총발사 : 인명살상 화살공격 : 인명살상 근접계류공격 (Grappling and Boarding) |
조선과 일본전선 비교
칠 년간의 전쟁기간 동안 휘하 장병들과 군사들을 관리하고 이끄는 일 또한 쉽지 않았다. 이순신의 부대에도 많은 군사 범죄와 기강 해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 범죄는 강도, 강간, 절도, 명령불복종, 군사물자횡령, 음주난동, 근무지 이탈, 탈영, 기밀 누설, 적전 도주, 징모부정, 간첩 행위, 유언비어 유포 등 다른 모든 군대들의 전시 범죄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부하들을 지옥 같은 삶의 현실과 조선 수군의 비참한 역경에 직면케 했고 회피할 명분이나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임을 부하들에게 인식시키고 스스로 실천했다. 어느 전투에서든 항상 앞에 서서 진두지휘 했으며 그로 인해 사천해전에서 어깨에 총탄을 맞기도 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언제나 죽음을 마주하며 싸웠던 장수, 이순신. 그는 마지막 전투에서 그의 생명을 바쳤다.
성웅 이순신 맺으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나라 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 난중일기, 을미년 1월 1일
군량이 부족해 배고픔을 견디며 훈련 받는 병사들을 보며 가슴 아파 눈물 흘리고, 자신을 헌신하며 부하와 백성들을 먼저 돌보았으며, 실질적으로 부하와 백성들을 사랑했던 이순신.
국가존망의 위기 속에서 지도층이 중심을 잃고 표류할 때, 흔들림 없는 애국심과 용기, 그리고 불굴의 신념으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원리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며 구습을 과감히 타파하고 철저한 준비와 개척정신으로 부하들을 이끌던 이순신.
흔들리지 않는 신념, 언제나 승리를 이끌어내는 전략전술, 사심 없는 자기희생으로 부하들에게 심어준 절대적 신뢰.
넬슨, 도오고 등과 같은 전통의 함대도 없었고 조국의 위풍도, 나라의 지원도 없었다. 그러나 하늘마저 감동시킨 그의 충혼은 23전 23승의 신화를 만들었다.
IX. 부록
이순신이 불패의 신화를 이룩할 수 있었던 전략과 전술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철저한 준비와 강도 놓은 군사훈련으로 정예의 수군부대를 양성했다.
이순신은 전쟁 발발 전 평화로운 분위기에서나 갑작스런 왜적의 침입으로 전쟁을 치르는 중, 그리고 강화협상을 위한 전쟁 소강상태에서도 언제나 부하들에게 활쏘기와 포사격을 반복적으로 연습시켜 명사수와 명포수를 양성하고, 강도 높은 해상훈련으로 사부들을 단련시켰다. 또한 무기 제조와 전선의 건조에도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 불과 13척의 전선뿐이던 명량해전 이후 다음 해전이 있기까지 약 1년간 70척의 배를 건조했다. 이는 평균 5일 마다 1척의 배를 건조한 셈이다.
2. 물길과 지형에 대한 정보를 중시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일본 수군 사이에 치열한 해전이 벌어졌던 한반도 남해안 일대는 해안선의 굴곡이 심하고 많은 섬들로 인해 지형이 복잡하며 물살이 빠르고 조석간만의 차이가 큰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순신은 날짜와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조류의 성질과 바람의 방향, 지형의 넓고 좁음, 깊고 얕음, 그리고 육지와 섬, 섬과 섬 사이의 해로를 면밀히 살피고 이를 최대한 활용했으며 진격을 위한 이동시 밤이나 새벽을 이용했다.
3. 여러 전법을 유연하게 구사했다.
이순신은 학익진 이외에도 각 상황에 따라 여러 전법을 구사했다. 임진왜란 최초의 해전인 옥포해전에서는 포구 안에 정박해 있던 일본 함대를 향해 일자진(횡렬 일자로 늘어선 진형)으로 좌우에 틈을 허용하지 않고 압박해 들어가 그 포위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면서 화력을 최대한 집중 시켰다. 부산포 해전에서는 장사진(긴 뱀 진형: 종렬 일자로 늘어선 진형)을 사용했다. 83척의 배로 480척의 대 함대를 상대하기 위해 이순신은 아군 함선의 폭을 좁고 길게 하여 적의 공격에 노출되는 면적을 최소화하는 장사진으로 공격했다. 이 해전에서 조선수군은 한 척의 전선 피해 없이 적선 480척 중 128척을 격침시켰다. 합포 해전에서는 합포 부근에 배회하던 일본 전선을 향해 합포만 깊은 곳까지 숨 쉴 틈 없이 몰아 붙여 섬멸해 버렸다. 이때는 특별한 대형 없이 각 전선이 가능한 빨리 달려가 적선을 격파하게 했다.
4. 적의 사기를 꺾고 아군의 사기를 높이는 전투를 했다.
이순신은 일본의 조총보다 사정거리와 화력인 우수한 조선의 화포를 각 해전에서 적극 활용했다. 전투 초반에 화포와 불화살로 “빗발치듯, 우박 퍼붓듯” 집중 공격하여 적의 대장선을 침몰시켜 적의 사기를 꺾었다. 또한 빈틈없는 공격과 전략으로 연전연승을 하며 조선수군은 “이순신과 함께 하면 언제나 이긴다.”는 강한 자신감으로 사기가 높았다.
5. 엄격한 원칙주의로 군의 기강을 확립했다.
불성실한 군관들은 곤장으로 다스렸다. 그 대상이 고위직이어도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탈영한 자, 탈영병을 잡으러 갔다가 부당한 재물을 받고 놓아준 자, 같은 범죄를 두 번 이상 저지른 자는 사형에 처했다. 명량해전에서 죽음이 두려워 뒤로 물러선 안위에게 “안위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물러서면 살 듯 싶으냐?” 라는 말로 안위를 앞으로 나가게 했고, 안위는 큰 전과를 올렸다. 엄격한 군법을 강조하여 군의 기강을 철저히 했기에 최고 지휘관부터 말단 수졸까지 전 수군이 한 몸이 되어 학익진, 어린 학익진, 일자진, 장사진, 곡진, 원진, 예진, 직진, 좌우찰진, 첨자찰진, 예진 등10가지가 넘는 해상진형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수많은 해전에서 승전할 수 있었다.
6. 동료와 부하들을 의리와 사랑으로 대했다.
일본에게 뇌물을 받는 등 전투에 오히려 방해가 되었던 명나라 장수 진린을 적의 포위에서 구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도록 권한 부하 안위가 위험에 빠지자 그를 구해냈다. 스스로에게 철저하고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동료와 부하들을 아끼는 의리를 통해 장병들의 자발적인 복종과 존경, 협력을 이끌어냈다.
7. 극한적인 악조건의 전투환경 속에서 탁월한 리더쉽을 발휘했다.
아군이 절대 불리한 해전마다 앞장서서 적을 공격하여 장병들에게 먼저 모범을 보였으며, 임금과 조정의 지원이 전무한 가운데 스스로 군량을 확보하고, 병사를 모으고 전선을 건조하고 무기를 만들었다. 13척의 배로 300척이 넘는 적을 맞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는 투철하고 엄숙한 무의 정신으로 부하들의 정신을 무장시켰다.
이런 전략과 전술을 실천하고 실현 해 낼 수 있었던 이순신의 저력 뒤에는 나라와 백성을 향한 사랑이 있었다. 이순신은 이것을 지키기 위해 어떤 시련과 아픔도 감내했다. 그리하여 한 번의 투옥, 두 번의 백의종군(白衣從軍), 세 번의 파직과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끝까지 바다에 남았다. 바다에 남아 적과 싸워 이기는 것만이 실제로 그가 사랑하는 국가와 백성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나라에 대한 사랑, 백성에 대한 사랑은 이순신의 가장 중요한 전략전술이었다.
※ 李舜臣 將軍 海戰 出戰表
칠 년간의 전쟁 기간 중 이순신 장군은 일본과 23번의 해전을 치렀고 모두 승전했다. 이순신 장군이 싸운 해전을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1차 출전 : 1592년 05월 04일 ~ 05월 10일
전적 | 해전명 | 조선수군출동병력 | 일본군 | 전과 | 비고 |
1승 | 옥포해전 | 이순신 : 85척 | 26여척 | 26척 | 등당고호(등당고호) |
2승 | 합포해전 | 위와 같음 | 5척 | 5척 | 협판안치(脇坂安治) |
3승 | 적진포해전(5. 8) | 위와 같음 | 13척 | 11척 | (2척 도주) |
★ 2차 출전 1592년 05월 29일 ~ 06월 10일
전적 | 해전명 | 조선수군출동병력 | 일본군 | 전과 | 비고 |
4승 | 사천해전 | 이순신 : 23척(판옥선) | 13척 | 13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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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승 | 당포해전 | 위와 같음 | 21척 | 21척 | 협판안치(脇坂安治) |
6승 | 당항포해전(6. 5) | 이순신 : 23척(판옥선21,거북함2) | 13척 | 26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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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승 | 율포해전 | 위와 같음 | 7척 | 7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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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출전 1592년 07월 05일 ~ 07월 13일
전적 | 해전명 | 조선수군출동병력 | 일본군 | 전과 | 비고 |
8승 | 한산도해전 | 이순신 : 24척(판옥선21 거북선3) | 73척 | 47척 | 협판안치(脇坂安治) |
9승 | 안골포해전 | 위와 같음 | 42척 | 42척격침 | 구귀가륭(九鬼嘉隆) |
★ 4차출전 1592년 08월 29일 ~ 09월 02일
전적 | 해전명 | 조선수군출동병력 | 일본군 | 전과 | 비고 |
10승 | 장림포해전 | 이순신, 이억기 : 166척(협선 92척 포함)(원균 : 7척) | 30명 6척 | 도주 | 6척 불태움 |
11승 | 화준구미해전(9. 1) | 위와 같음 | 5척 | 5척 격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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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승 | 다대포해전 | 위와 같음 | 8척 | 8척 격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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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승 | 서평포해전 | 위와 같음 | 9척 | 9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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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승 | 절영도해전 | 위와 같음 | 2척 | 2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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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승 | 부산포해전 | 위와 같음 | 470척 | 128척 | 전사 : 6명, 부상 : 25명 |
★ 5차 출전 1593년 02월 01일 ~ 03월 08일
전적 | 해전명 | 조선수군출동병력 | 일본군 | 전과 | 비고 |
16승 | 웅포해전 | 이순신 : 42척 | 40척 | 왜군100명 사살 | 통선 2척 전복 |
★ 6차 출전 1594년 03월 04일
전적 | 해전명 | 조선수군출동병력 | 일본군 | 전과 | 비고 |
17승 | 당항포해전 | 이순신, 이억기 : 110척 | 50여 척 | 31척 격침 | 아군 피해 없음 |
★ 7차 출전 1594년 09월 29일 ~ 10월 04일
전적 | 해전명 | 조선수군출동병력 | 일본군 | 전과 | 비고 |
18승 | 1차장무포해전(9. 29) | 삼도수군 : 50여척 | 117척 | 2척 격침 | 아군 피해 없음 |
19승 | 2차장문포해전(10. 4) | 위와 같음 |
| 일방 공격 | 아군 피해 없음 |
★ 8차 출전 1597년 08월 26일 ~ 09월 16일
전적 | 해전명 | 조선수군출동병력 | 일본군 | 전과 | 비고 |
20승 | 어란진전투 | 이순신, 김억추 : 12척 | 8척 | 도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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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승 | 벽파신전투(9. 4) | 위와 같음 | 13척 | 도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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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승 | 명랑해전 (9. 16) | 이순신, 김억추 : 13척 | 133척 | 31척 격침 | 전사 : 2명 부상 : 2명 |
수영을 공격한 사례와 조선 수영을 침입한 일본 전선을 격퇴시킨 일이 다섯 차례 있었다. 난중일기와 임진장초 등에 기록된 다섯 번의 교전을 포함하였다.
◉ 날짜는 모두 음력을 기준으로 했다.
◉ 이 표에 나타난 각 해전의 함선 수와 전과는 이순신 장군이 직접 작성한 난중일기, 임진장초와 조선 조정의 공식 역사기록물인 선조실록에서 발췌한 것이다.
◉ 각 해전에서 조선은 일본의 조총 공격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입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없었다. 이와 같이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 맞서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함선이 일본보다 더 튼튼한 구조와 목재로 만들어졌고, 조선 화포의 사정거리와 화력이 일본 조총보다 훨씬 앞섰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은 양국간 함선의 거리가 조총의 사정거리(200m) 안으로 좁혀지기 전에 대형화포로 적선을 집중 공격하여 격침시키는 전법을 구사했다. 즉 전선과 화포의 우수성에 기반한 이순신의 뛰어난 전략으로 조선수군은 해전사상 유례없는 전과를 이룩해 낼 수 있었다.
◉ 이순신이 싸운 23번의 해전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치열했던 전투는 본국으로 퇴각하는 전 병력을 실은 일본 함대 500척과 조선과 명의 연합함대 146 척간에 펼쳐진 마지막 노량해전이다. 자신의 명예와 더 많은 영토를 위한 한 인간의 헛된 욕망으로 시작된 칠 년 간의 전쟁은 수 없는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고 그들의 삶의 터전을 철저히 파괴시켰다. 이순신은 수군 진영의 모든 군량과 무기를 전선에 싣고 그의 국가와 민족을 위한 마지막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노량으로 향했다. 그는 이 최후의 해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를 하고 갑옷과 투구를 벗고, 몸소 활을 쏘고, 북을 올리며 적선의 한 가운데서 싸웠다. 그전에는 전장에서 갑옷과 투구를 벗은 적이 없었다. 아마 이 마지막 승전과 함께 어렵고 고달팠던 자신의 삶을 마칠 각오를 한지도 모르겠다. 이순신은 이 해전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지만 부하들과 중국 수군은 그가 죽은 줄도 모르고 적선을 침몰시키는데 열중했고 끝까지 분전하여 일본 함대 500척 중 450척을 격침시킨 대승을 거두었다. 이순신 장군의 생명과 맞바꾸어 거둔 조선 수군의 가장 영광스럽고 값진 승리였다.
그 순간 운명하면서 마지막 유언은 ‘내가 죽은 것을 알리지 말라.’ 그것은 적을 치는 일에 방해가 될까봐서다.
한국과 일본의 함선과 화포 비교
임진왜란 당시 한국의 전선은 판옥선과 거북선이었다. 이 중 판옥선이 주력 전선이었고, 거북선 1~3척이 돌격선으로 활용되었다. 일본의 군선은 대선인 안택선(아다케)과 중선인 관선(세키부네), 소선인 조선(고바야)으로 이루어졌다. 이 중 대선인 안택선은 주로 대장선과 지휘선으로 사용되고, 중선인 관선이 일본의 군선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다.
일본의 대장선인 아타케부네(安宅船)
한선(韓船)을 대표하는 판옥선(板屋船)의 기본구조
한국 판옥선의 가장 큰 특징은 갑판 위에 상갑판을 설치한 다층전함이라는 것이다. 즉 판옥선은 비전투원인 격군을 갑판과 상갑판 사이에 배치하여 보호하고, 전투원은 상갑판 위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일본의 경우 지휘선인 안택선은 다층 이였지만 대부분의 전선은 단층구조이다.
판옥선은 전통 한국 배의 구조를 따라 밑바닥이 평평하게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밀물과 썰물의 차가 심하고 평평하고 넓은 갯벌이 펼쳐져 있는 한반도 해안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배 밑이 평평해서 만조 때 해안이나 부두로 들어온 배가 그대로 갯벌 바닥에 편하게 앉을 수 있으며 옆으로 넘어지지 않았다. 이런 평저선은 물에 잠기는 흘수가 깊지 않고 뱃머리를 돌릴 때 선회반경이 작아 배의 움직임이 자유로운 것이 특징이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해전에서 학익진 전법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이와 같은 배의 구조 덕분이었다. 반면 일본의 전선은 바닥이 뾰족한 첨저선이다. 첨저선은 물의 저항을 적게 받아 속력이 빠르고 원거리 항해에는 유리하지만, 흘수가 깊어 회전반경이 크고 방향을 바꾸는 데 시간이 걸렸다.
조선 수군이 사용한 판옥선(板屋船)
조선과 일본의 함선은 모두 돛과 노를 이용해 달리는 배였다. 돛은 횡범과 종범으로 나뉘는데, 횡범은 순풍을 받아 항해하는데 유리한 반면 역풍시 진행이 어렵고, 종범은 역풍에 강하나 조종에 많은 인원이 소요된다. 서양의 경우, 횡범은 바이킹선이나 고대 그리스의 갤리선에 사용되었고, 종범은 후대 지중해선에 많이 쓰였다. 이후 15세기 지리탐험이 시작되면서 비로소 이 두 가지 종류의 돛을 다 갖춘 다범장 선박들이 등장한다. 한국의 경우는 서양보다 훨씬 이전인 8세기 경부터 다범장선을 사용했다. 조선의 판옥선과 거북선도 돛대를 두 개씩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각도와 위치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어 순풍과 역풍에서 자유롭게 운용될 수 있었다. 일본의 경우 대선인 안택선에는 두 개의 돛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전선은 횡범 하나뿐으로 순풍에서만 운용될 수 있었다.
양국 전선의 선체 강도를 비교해보면, 먼저 한국 전선은 비중이 높고 두꺼운 판재를 사용하여 배 전체가 튼튼했던 데 반해, 일본 전선은 비중이 낮고 얇은 판재를 사용하여 상대적으로 강도가 약했다. 특히 관선(세키부네)은 속력을 높이기 위해 되도록 가볍게 만들었기 때문에 더 약한 구조였다. 한국 전선은 두꺼운 목재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판재와 판재의 이가 서로 맞물리도록 하는 겹이음 구조로 제작되고 나무못을 사용하여, 물속에서 수분을 흡수한 판재가 팽창하면서 결합이 더욱 단단해지는 특성을 가졌다. 이에 반해 일본 전선은 물에서 녹이 슬기 쉬운 쇠못을 사용했기 때문에 부식으로 인해 시간이 지날수록 배의 결합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선박의 강도 차이는 배에 장착할 수 있는 포의 수와 연관되어 전투력의 차이로 이어졌다. 일본 함선은 포를 발사 할 때의 충격을 견딜만한 강도가 없어 대선인 안택선의 경우에도 겨우 1~3개의 포를 장착한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강도가 더 높은 한국 함선에는 장거리포를 여러 개 장착할 수 있었다. 또한 판옥선의 상장 위 넓은 갑판은 대포를 설치하기에도 좋으며 설치각도를 조절해 사정거리도 늘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전선에 화포를 거의 장착 할 수 없었던 일본은 사정거리가 100~200m인 조총을 주요 무기로 사용했다. 조선의 경우 천, 지, 현, 황 등의 대형 총통을 여러 문을 장착하였고 이들 총통에서 발사되는 대전(로켓 모양의 두껍고 긴 화살)은 500m, 철환(대포알)은 1km까지 날아갔으며, 박격포의 일종인 완구는 지름 20cm 정도의 돌덩이나 포탄을 발사했다.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 한국이 보유하고 있던 대형무기들은 임진왜란 때 갑자기 개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들 무기들의 등장은 임진왜란보다 무려 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 무관이자 과학자였던 최무선의 노력으로 화약의 제조와 화약무기의 개발이 시작되어 첫 실전으로 1380년 수백척의 일본 해적선을 상대로 화포를 사용해 큰 성과를 얻었다. 유럽에서 화포를 사용한 첫 해전은 이보다 2백 년 뒤인 레판토 해전(1571)이다.
15세기에는 과학자였던 세종대왕의 주도아래 화포의 성능이 급격히 향상되었다. 화포장을 궁 옆에 설치하고 실험과 개발을 거듭한 결과 화포의 사정거리를 300m에서 1800m까지 끌어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때 개발된 해전용 화포가 바로 이순신이 사용한 천, 지, 현, 황이다. 세종대왕 이후에도 화기 개발이 꾸준히 이루어져 수백 개의 철조각이 화약과 함께 터지는 시한폭탄 비격진천뢰, 여러 개의 화살을 한꺼번에 발사하는 다포기 등이 발명되었다.
당시 일본 수군의 주요 해상전법은 상대적함으로 넘어가 칼싸움을 하는 등선육박전이었다. 즉 일본 수군이 가지고 있던 해전의 개념은 전선간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선원끼리의 싸움이었고 이것은 16세기 유럽은 물론 전세계의 가장 흔한 해상전법이었다. 그러나 조선수군은 상대적으로 우수한 전선과 화력을 이용하여 적선을 소각, 침몰 지키는 보다 근대적인 해전술을 사용했다.
조선군이 사용한 대형 총통류(銃筒類)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기억과 한국이 미친 영향
존망이 위태로운 한 나라를 지켜낸 이순신 장군의 숭고한 정신은 400년이 지난 오늘 까지도 존경과 추모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그의 장렬한 전사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국인들의 이순신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가 한국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자.
1. 선조임금은 이순신 사후에 다음과 같은 제문으로 이순신에 대한 미안함을 표현하고 그의 넋을 위로했다.
나는 그대를 버렸건만
그대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
이승 저승 맺힌 원한 무슨 말로 다하리요.
1604년(선조 37년)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643년(인조 21년)에 충무공의 시호가 내려졌다.
1793년(정조 17년)에 영의정에 추증되다.
정조의 명령으로 1793년부터 3년간에 걸쳐 그의 모든 행적을 들추어내어 총 14권으로 이순신 장군의 유고전집 <이충무공전서>가 편찬되어 지금까지 역사문화재로 보관되어 전해지고 있다.
2. 아산 현충사를 포함 그를 추모하는 5개의 사당이 있으며 이순신의 각 해전지, 전라수영, 군사들을 훈련시키던 곳 등 남해 전역에 걸쳐 이순신장군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는 지금도 세인의 발걸음이 멈추지 않고 있다.
세계 최초의 공격용 철갑선인 거북선은 1980년 한국 해군에서 복원, 건조되어 해군사관학교, 아산 현충사, 전쟁기념관,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미국 워싱턴의 전쟁기념관, 영국 해사박물관을 비롯하여 중국, 독일, 프랑스, 캐나다 등 세계 각지의 역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顯忠祠 舊本殿 懸板
거북선을 창안한 이순신의 독창성과 과학정신은 오늘날 한국의 조선산업을 키운 정신적 원동력이다. 한국에서 생산한 선박이 세계의 30%를 차지하고, 선박기술도 세계 최고로 인정받고 있으며 선박수주에서 한국은 수년 전부터 일본을 앞질러 연속 1위를 이어가고 있다.
3. 이순신은 현재 한국 역사상 가장 존경 받는 위인으로 그에 관해 출판된 서적만 200권이 넘는다. 이 중 2004년, 2005년도에 출판된 책만 해도 74여권에 달한다. 이순신의 삶을 다룬 소설 <칼의 노래>는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대통령이 추천하는 권장도서로 꼽히기도 했다.
4. 21세기에 들어서 한국은 “이순신배우기” 열풍이 각 분야에서 한창이다. 그의 애국심과 청렴, 결백함, 성실성과 뛰어난 전략, 거북선을 제조한 창의성, 현장답사와 인맥을 이용한 정보 중시 등이 현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의 요건에 부응하기 때문이다. 경제, 경영분야에서 그의 전략과 리더십이 표본으로 연구되고 활용되고 있는 것도 이순신열풍의 한 단면이다. <경제전쟁시대 이순신을 만나다>의 저자 지용희 교수는 기업체, 학교, 정부, 시민단체에 “이순신 경영학”을 강의하고 있다. 이순신이야말로 ‘21세기 리더쉽의 표상’이며 그에게서 배워야 할 것으로 ‘기본에 충실하라’, ‘신뢰를 쌓아라’, ‘혁신을 위해 노력하라’, ‘정보를 소중히 하라’, ‘자만하지 말라’는 것 등을 꼽았다.
“이순신은 누구보다 자신에 철저했고, 끝까지 원칙을 지켜 주변에 신뢰감을 주었고 이것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투명경영을 한 것입니다. 도덕성이 바탕이 되니까 부하들이 그를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했습니다. 아울러 무척 겸손했죠. 겸손하니까, 늘 대비할 줄 알았습니다.” –지용희
5. 문화분야에서도 그는 21세기 한국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2004. 9. 4.부터 1년간 방영된 <불멸의 이순신>은 30%에 육박하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으며방송모니터위원회의 '2005년 올해의 좋은 방송'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미국에서도 영어자막이 들어간 드라마가 방송되어 외국인들에게 큰 인기를 모았다.
6. 이순신장군은 무엇보다 한국 해군에게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다. 한국해군사관학교, 대한민국 해군, 해군교육 사령부, 해병대에서 그의 전략과 리더십을 표본으로 많은 연구가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학익진(鶴翼陣) : 학날개진형. 거북선이 선두에서 공격하고 판옥선이 뒤를 따라오다가 적군의 배가 있는 곳에 이르면 따라오던 판옥선이 학의 날개모양으로 양쪽으로 넓게 퍼지며 적군을 포위하는 진형을 갖추어 공격하는 방법. 일본의 저명한 역사잡지인 <역사연구> 2002년 5월호에는 도고장군의 러시아 함대 격파 비밀은 정자진법에 있었는데 이것은 이순신의 학익진 전법의 응용이라고 밝힌바 있다.
한산해전에서 사망한 일본 수군의 숫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10000여 명의 병사 중 9000여 명이 전사한 것으로 보는데 무리가 없다. 일본 수군은 대선 35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잃었는데 전선의 정원은 각각 200, 100, 40 명이었다. 이를 토대로 계산해보면 8980명이 된다. 이순신의 보고서에도 그 사실을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 나온다. 일본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탈출한 제만춘은 보고서에서 일본의 군량조달문서에 와키사카 야스하루 이름이 적혀 있고 그 아래 “처음에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나갔다가 거의 다 패하고 지금은 1000여 명이 남았다.”고 적은 기록을 보았다고 전한다.
노트 : 한 시간에 한해리(약 1,852m)를 달리는 속도. 10노트는 시속 18km가 된다.
이순신은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비통한 심정을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일이 어디 있을 것이냐.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그 빛이 변했구나. 슬프고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기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앙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이 세상에 목숨을 부지한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함께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 없으니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내 마음은 이미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뿐이다. 하룻밤을 지내기가 길고 길어 1년 같구나.’ (난중일기, 정유년 10월 14일)
‘내일이 막내아들의 부음을 들은 지 꼭 4일째 되는 날인데, 마음 놓고 울지도 못했으므로 염한(소금 굽는 사람) 강막지의 집으로 가서 울었다.’ (정유년 10월 16일)
한국은 다범장선을 신라시대(BC 57∼AD 935)부터 운용했다. 일본에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백제의 배와 신라의 장보고가 사용한 무역선들이 모두 돛대를 두 개씩 장비한 다범장선이었다. 다범장을 갖춘 조선 선박의 우수성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중국의 고서인 <해방의 海防議>에는 “조선의 귀선은 돛대를 세우고 눕히기를 마음대로 하고 역풍이든 퇴조 때이든 마음대로 갈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국 전통 배의 주된 재목은 소나무이며, 강도보강 재료로 참나무 계통(상수리 나무, 졸참나무)을 부분적으로 사용했다. 한국의 소나무는 옹이가 있고 굽은 경우가 많은데 이런 목재를 얇게 가공하는 것은 위험하여 두껍게 가공하여 강도를 보강했다. 일본 전통 선박은 주로 삼나무나 전나무로 만들어졌다. 삼나무와 전나무는 소나무에 비해 가볍고 가공하기 쉬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일본 전통 배는 이런 목재의 특성을 살려 판자를 얇고 정밀하게 가공해서 사용했다. 그러나 강도면에서 삼나무와 전나무는 소나무보다 약하다는 약점이 있다. 결국 일본 배는 약한 재료를 얇게 가공한 셈이 되고, 조선 배는 강한 재료를 두껍게 가공한 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