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광복군 활동 장철 선생 별세
광복군으로 항일 독립전선에서 활동한 애국지사 장철 선생이 23일 오전 7시30분 별세했다.
1922년 평북 의주 출신인 고인은 1940년 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에 배속돼 항일 투쟁을 벌였다. 한·미 연합 OSS훈련을 받고 국내 정진군에서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향년 86세. 광복회 이사, 사무국장, 광복회장 등을 역임했다. 정부는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최일(78)씨와 3남1녀가 있다. 발인은 25일 오전 8시,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 빈소는 삼성 서울병원.
[1991] 아르메니아 공화국 독립
소련 아르메니아공화국이 1991년 오늘 독립을 선언한다.
1922년 소비에트 연방에 강제로 합병된 지 69년 만이다.
이로써 아르메니아는 소련 소속 15개 공화국 가운데 12번째로 독립을 선언한 나라가 됐다.
아르메니아는 앞서 이틀 전인 9월 21일 미국,프랑스 등 15개국의 선거감시인단이 참관한 가운데 국민투표를 실시한 결과 압도적 지지로 독립을 결의했었다.
아르메니아는 같은 해 12월 독립국가연합에 가입한 뒤 급진적인 경제개혁을 추진한다.
한 때 아제르바이잔과 니고르노-카라바흐 자치구를 둘러싸고 분쟁이 있었다. 그로 인해 아제르바이잔과는 심지어 홈 어웨이 형식으로 이루어진(양국을 오가는) 유로 2008 예선 축구 경기조차 상호간 거부할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다.
[1973년] 페론,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당선, 18년 만의 재집권
1973년 9월 23일 실시된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에서 후안 페론이 득표율 61.3%로 당선돼 1955년 군사쿠데타에 의해 스페인으로 망명한 이래 18년 만에 대통령으로 돌아왔다. 동시에 페론 부인 이사벨도 라틴아메리카 역사상 최초의 여자부통령에 당선됐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에는 개표 종료전부터 ‘페론 부활’을 기뻐하는 퍼레이드가 진행됐다.
페론은 1946년부터 1955년까지의 대통령시절, 2번째 부인 에바와 함께 2차대전 중에 비축해 둔 풍부한 재정을, 사회보장제도와 노동자 주택정비에 투입하는 등 ‘페론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곧 독재와 재정파탄으로 실각하고 말았다. 이 선거에서의 페론 압승은 ‘페론-에바시대’의 재현을 갈망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반영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망명시절 페론은 좌익 성향의 페론주의자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고 가장 호전적인 노동조합 세력을 지원했다. 그러나 일단 집권하자 군부뿐만 아니라 전에는 적대적이었던 우익세력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74년 그가 죽자 뒤이어 대통령이 된 그의 아내는 아주 불안정한 정국을 물려받았다. 페론의 생존 시부터 조짐이 있었던 페론주의 운동 내부의 분열과 정부의 분열은 마침내 노골화되었다. 페론 부인은 그 어떤 정치집단의 지지도 얻지 못했다. 그리고 가장 충실한 지지세력이었던 노동조합도 등을 돌리고 말았다. 테러 행위와 정치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인플레이션이 연간 600%에 달했다. 1976년 3월 24일 군부가 집권하여 페론 부인을 대통령직에서 축출하고 혁명군사평의회를 세웠다.
[1973년] 서머힐 학교를 창립한 영국의 교육자 A.S.닐(Neill, Alexander Sutherland) 사망
1883. 10. 17 영국 스코틀랜드 포파셔 포파~1973. 9. 23 서퍽 올더버러.
서머힐 학교를 창립했고 아동교육에서 자유로운 자기개발 교육법을 주창했다.
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닐은 1912년 에든버러대학교를 문학석사로 졸업했다. 졸업 후 편집관련 업무와 함께 신문기자업무에도 종사했다. 그후 1914년 스코틀랜드에 있는 그레트나그린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그의 자전적 소설 〈교사일지 A Dominie's Log〉(1916)에서 교사로서의 최초의 경험을 기록했고 이후 이 책의 속편도 몇 권 썼다. 그 가운데 일부는 1975년에 〈A. S. 닐의 교사입문 The Dominie Books of A. S. Neill〉이라는 이름으로 재판되었다(dominie는 교사를 뜻하는 스코틀랜드어).
1921년 닐은 몇몇 사람들과 함께 독일 드레스덴 근처에 국제학교를 설립했다. 3년 후 이 학교는 오스트리아 손타그베르크로 이전했으나 혁신적인 교과과정과 교습방법이 지방당국의 반대에 부딪혔기 때문에 곧 폐교되었다. 1924년 닐은 학교를 영국에 있는 도싯의 라임리저스로 옮겼고 총면적의 1/4을 임차했던 건물의 이름을 따서 서머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27년 그는 서퍽에 있는 라이스튼으로 학교를 옮겼고 이곳은 서머힐학교의 영구적인 본거지가 되었다. 서머힐학교는 자율적인 학생·교사 단체와 학생자신의 학습동기를 강조하는 유연한 교과과정으로 국제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학문적 훈련에 지나치게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많은 비판을 초래했다.
〈서머힐:어린이 교육에 대한 근본적 접근 Summerhill:A Radical Approach to Child Rearing〉(1960)은 자신의 교육방법에 관한 닐의 주요저서로 전통적인 교육방법을 대신할 새로운 교육방법에 대한 논쟁을 야기시켰다. 이 저서는 영국에서보다 미국과 독일에서 더 영향력이 있었다. 또다른 저서로는 〈문제아동 The Problem Child〉(1926)·〈문제부모 The Problem Parent〉(1932)·〈문제가정 The Problem Family〉(1949)·〈자유로운 아동 The Free Child〉(1953) 등과 자서전인 〈닐! 닐! 오렌지 껍질! Neill! Neill! Orange Peel!〉(1972)이 있다.
[1960년] 민주당 신파 ‘민주당’으로 원내교섭단체 등록
← 1960년 8월19일 국무총리 인준을 받은 직후 신파의 장면 총리(오른쪽)가 경무대를 찾아 구파의 윤보선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1960년에도 신파ㆍ구파로 갈려 한지붕 두가족을 이룬 ‘민주당’이라는 정당이 있었다. ‘구파’는 주로 한민당ㆍ민국당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었고, ‘신파’는 원내자유당이나 자유당 탈당파에서 민주당으로 합류한 사람들이었다. 구파의 중심에는 신익희ㆍ조병옥이, 신파의 중심에는 장면이 있었다.
이들은 민주당으로 통합되기 전에도 소속당이 달랐지만 성향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구파는 우국지사적 기질에 보수적이며 배타적이었고, 신파는 관료ㆍ법관ㆍ금융인 등의 테크노크라트였다. 1955년 통합야당으로 출범할 때부터 민주당에 내홍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승만 독재에 맞선다는 대의가 늘 우선했던 터라 첨예한 갈등도 그럭저럭 헤쳐나갔다.
그러나 민주당을 야당에서 여당으로 탈바꿈시켜준 4ㆍ19가 문제였다. 자유당이 몰락한 공백을 선점하기 위한 밥그릇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곧 치러진 7ㆍ29총선 결과, 민주당은 예상대로 압승을 거둬 권력을 손에 쥐었지만 그 과정에서의 앙금이 너무 컸다. 내각제하에서 실권을 가진 총리 자리를 장악하려면 자파(自派) 의원을 한 명이라도 더 당선시켜야 했기 때문에 양측은 무리수도 마다하지 않았다. 윤보선(구파)과 장면(신파) 지역구에까지 같은 당 소속의 후보를 출마시킬 정도로 분열상이 극에 달했다. 우여곡절 끝에 장면이 총리가 되고 연립내각 구성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양측의 간극은 더욱 벌어졌다.
총리 자리를 빼앗긴 구파가 먼저 반격을 시도했다. 1960년 8월31일 ‘구파동지회’라는 이름으로 원내교섭단체를 등록한 것이다. 이것이 공식적인 별거의 시작이었다면 9월23일 신파가 ‘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원내교섭단체를 따로 등록한 것은 공식적인 이혼 선언이었다. 결국 민주당은 여당으로, 구파는 야당으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고, 2공화국의 불행은 여기서부터 싹텄다./조선
[1957년] 흑인학생의 등교보호를 위해 미국 리틀 록 백인 고등학교에 군부대 투입
←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등교하고 있는 흑인 학생들(가운데).
1957년 9월 23일 미국 남부 아칸소주(州) 리틀 록의 센트롤고등학교에 9명의 용감한 흑인 학생들이 미국 연방 공수부대의 보호 아래 최초로 백인학교에 등교했다. 그러나 이들의 등교를 반대한 2000명의 백인 학생들 거의 모두가 등교를 거부했고, 결국 흑인의 입학을 반대하는 무리와 이를 수호하려는 무리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 사상자를 내기에 이르렀다. 이는 1954년 미연방 대법원이 미국 공립학교에서 인종차별을 금한다는 판결을 내린 후 미국에서 발생한 첫 번째 흑백분쟁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1957년 리틀 록 시(市). 흑인 학생들이 백인학교에 입학원서를 낸 사실이 알려지자 리틀 록 시내에 불안한 기운이 맴돌았다. 새학기를 바로 앞둔 9월 2일, 풔보스 리틀 록 주지사는 흑인 학생의 등교를 저지하기 위해 주방위군 투입을 명령했다. 그러나 사태가 인종폭동으로까지 이어지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학원 내 인종차별을 철폐시키기 위해 리틀 록 고등학교 안으로 연방 낙하산 부대를 투입했고, 흑인 학생들이 정당하게 학교 정문을 통과할 수 있도록 101 공수부대도 투입했다.
익일 24일 밤 미국 백악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미 전역에 흑인 학생의 백인학교 입학 허가를 호소했다. 취임이래 가장 간절한 연설이었다. 25일, 350명의 공수부대가 감시하는 가운데 흑인 학생들이 드디어 등교하기 시작했다. /조선
[1952년] 마르시아노 세계챔피언에 올라
← 챔피언 조지 윌코트의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의 펀치를 날리고 있는 도전자 마르시아노(오른쪽)
1952년 9월23일, 데뷔이래 42전승(37KO승)의 연승가도를 달려온 로키 마르시아노가 챔피언 조지 월코트를 쓰러뜨려 세계 헤비급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1회에 다운되는 등 12회까지 열세를 면치 못했으나, 한때 ‘살인 청부업자’라는 별명을 들을만큼 타고난 펀치력과 강한 맷집의 소유자였던 마르시아노는 13회에서 한 방으로 전세를 뒤집었다.
그는 ‘갈색 폭격기’ 조 루이스에게도 1패를 안겨 천하무적임을 입증해보였다. 또 마르시아노는 복싱 시합이 TV에 중계된 뒤의 첫 챔피언이었기 때문에 국민적 인기까지 얻었다. 그래서 마르시아노와 같은 이탈리아계 가수 프랭크 시내트라는 “이제 우리들도 당당하게 이탈리아인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
이후 마르시아노는 6차례의 방어전을 모두 승리(5KO승)로 장식한 뒤 1956년 4월, 49전 전승(43KO승)의 기록을 남기고 타이틀을 자진반납했다. 더 이상의 적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사후, 무하마드 알리와 그와의 싸움을 시뮬레이션으로 시험한 결과 그가 알리를 13회에 KO승하는 것으로 드러날 만큼 그는 20세기 최고의 복서였다. 실베스타 스탤론이 주연한 영화 ‘로키’도 그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조선
[1939년]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프로이트(Freud, Sigmund) 사망
← 지그문트 프로이트
1856. 5. 6 오스트리아 모라비아 프라이베르크~1939. 9. 23 런던.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1939년 9월 23일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당대 최고의 지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정신 및 정신병 치료에 관한 이론인 동시에 문화와 사회를 해석하는 시각을 제공하는 이론이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부였던 모라비아의 프라이베르크에서 유태인 모직상 아들로 태어나 3살때 빈으로 이사, 80년 가까이 한 도시에서 산 프로이트는 괴테의 자연에 관한 수필을 읽고 감명 받아 전공을 의학으로 선택했다. 빈 대학을 졸업하고 인턴생활을 하던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사람은 프랑스 신경병학자 장 마르탱 샤르코였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는 새로운 정신세계를 발견하고, 무의식의 실체를 접근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정신분석’을 제창했다. 즉 정신병은 무의식에 존재하는 억압된(본능적) 욕구 때문이고, 따라서 이 무의식의 본능적 욕구를 ‘의식화’시키는 것이 정신분석 치료라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본능(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로 나누어진다. 프로이트는 1900년 발표한 ‘꿈의 해석’과 1905년에 발표한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라는 논문을 통해, 그는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갖가지 정신현상들을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논했다. /조선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왕국 성립
아라비아의 현대사는 오스만 통치에 대한 반감이 증대되고 18세기초에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나면서 시작되었다. 1745년 무하마드 이븐 아브드 알 와하브가 이슬람의 외적 형식주의와 근대주의를 탈피하고 〈코란〉에 밀착하는 교리 엄수주의를 제창하기 시작했다. 그는 디리야의 무하마드 이븐 사우드 왕의 지지를 받았고, 그결과 와하브주의 운동이 아라비아 반도에 널리 퍼져나갔다. 이들은 오스만 제국과 이집트의 저항으로 난관에 부딪혔으나 싸움은 19세기 내내 계속되었다. 1904년까지는 이븐 사우드(아브드 알 아지즈 2세) 왕에 의해 중앙 아라비아(나지드 지방)의 원래 사우디의 영토 모두를 되찾았다. 1915년 이후 사우디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가 1927년 헤자즈와 나지드 왕국의 독립과 주권을 인정받았다. 두 왕국은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의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을 지지하고 미국과 긴밀한 유대를 유지해오고 있으며, 석유수출국기구(OPEC)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1981년 사우디아라비아는 페르시아 만 연안의 여러 나라를 포함하는 하나의 지역 경제·방위 협정인 페르시아 만 협력회의(Gulf Cooperation Council/GCC)의 중심지가 되었다.
[1929년] 영화감독 김수용(金洙容) 출생
1929. 9. 23 경기 안성~.
안성공립농업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전신인 서울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청소년 시절 문학에 관심을 가져 습작 소설을 쓰기도 했고, 자작 희곡을 무대에 올려 연출과 주연을 겸하는 등 연극에도 자질을 보였다.
서울사범학교 연극부에서 활동하다가 한국 전쟁 중인 1951년에 학생 신분으로 입대하여 대한민국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 배속이 되면서 처음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정훈국에서는 작가 선우휘의 지휘 아래 군인 교육용 영화를 약 30여 편 만들었다.
당시 문관으로 근무하던 영화감독 양주남의 주선으로 그의 조감독이 되면서 <배뱅이굿>(1957) 촬영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영화 작업에 뛰어들게 되었고, 이듬해 코미디 영화인 <공처가>로 영화감독이 되었. 초기에는 <공처가>와 같은 계열의 희극 영화를 촬영했으나, 1963년 김승호와 황정순 주연의 <굴비>를 전환점으로 좀 더 진지한 영화로 전환했다.
1963년 <혈맥 血脈>으로 주목받을 때까지 그 시대의 대부분의 감독들과 같이 다양한 장르의 상업영화를 연출했다. <혈맥>은 1960년대에 유행처럼 각광받았던 소위 문예영화의 대표작으로 소설가 김영수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의 갈등을 그린 이 영화는 해방촌을 무대로 하여 서민의 생활을 긍정적으로 그렸다. 그 뒤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갯마을>(1965)·<사격장의 아이들>(1967)을 연이어 연출하면서 대중성과 예술성을 무리없이 조화시키는 감독으로 인정받았다.
1977년 발표한 <야행 夜行>과 <화려한 외출>(1977)·〈웃음소리〉(1978) 등은 상업적인 한국영화의 일반적인 기준을 뛰어넘는 매우 실험적인 작품들이다. 특히 김승옥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야행>은 1970년대의 새로운 여인상을 보여주었고 우회적이나마 월남전쟁을 진지하게 다룬 최초의 영화로서 평가받았다. 김수용의 왕성한 창작열은 1980년대에도 이어져 1981년에는 버스 여차장들의 어려운 삶을 그린 〈도시로 간 처녀〉, 〈만추 晩秋〉(1981)·〈삐에로와 극단〉(1982) 등을 연출했다. 기행 승려인 중광을 다룬 <허튼소리>(1986)는 불교계의 반발로 사회적인 논란 거리가 되기도 했다. 총 연출 작품 수가 100편이 넘는 다작 연출가이지만 대중성과 흥행성이 조화를 이루며 질적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평을 받고 있다.
청주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를 역임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며, 영화감독으로는 최초로 예술원 회장에 오르기도 했다.
[1926년] 미국의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작곡가, 밴드 리더 콜트레인 John (William) Coltrane 출생
← 콜트레인(1966경)
1926년 9월 23일 태어남 / 1967년 7월 17일 죽음
"만일 완벽한 사람이 존재한다면, 바로 존 콜트레인이 그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완벽함이란 이 지구상에는 없는, 어떤 위대한 힘으로부터 온 것임에 틀림없다." - 엘빈 존스
콜트레인은 1960~70년대 재즈 음악에 공헌한 미국의 재즈 색소폰 연주자이자 작곡가이다. 필라델피아에서 성장했으며 1955~60년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내놓은 음반과 1957년 셀로니어스 멍크와 작업한 음반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고음역에서도 명료하고 풍부한 감정을 담은, 크고 어두운 음색의 테너 색소폰 연주를 들려주었다. 그의 연주는 특히 무아지경에 빠진 듯한 힘찬 독주로 유명하다. 1960년대초에는 선법에 근거한 즉흥연주에 몰두했는데, 반복되는 반주음악 위에서 이루어지는 독주악기의 즉흥연주는 당시 음반에 잘 나타나 있다. 1960~65년 드럼에 엘빈 존스, 피아노에 매코이 타이너, 베이스에 지미 게리슨과 함께 4중주단을 결성해 함께 연주활동을 했다. 콜트레인은 이 밴드를 1960년대 최고의 영향력 있는 캄보('작은 편성'이라는 뜻으로 1935년경 베니 굿맨이 관현악단과 병행해서 3·4중주를 조직해 춤이 아닌 감상을 위한 재즈 연주를 한 것에서부터 유행하게 되었으며 오늘날에는 대개 소규모의 기악합주단을 가리킴)로 키워냈다. 그는 인도와 아프리카의 민속음악에 대해 연구한 뒤 이를 자신의 음악으로 표현하기도 했다./브리태니커
[1903년] 안창호, 이대위 등 샌프란시스코에서 친목회 조직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는 1899년 고향 강서에 한국 최초로 남녀공학의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는 한편 황무지 개척사업을 벌였고, 앞으로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을 더욱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고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을 하면서 초등과정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 이듬해에는 교포들의 권익보호와 생활향상을 위해 한인공동협회(韓人共同協會)를 만들어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간하였다.
이대위(李大爲, 1879.6.12~1928)는 평안남도 강서(江西) 출신으로, 1879년(고종 16)에 태어나 평양 숭실중학교를 마친 뒤 미국으로 이주해 오리건주(州) 포틀랜드 아카데미를 거쳐 버클리대학과 샌 앤젤로 태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03년 안창호(安昌浩)·장경(張景) 등과 한인 친목회를 결성한 뒤, 1905년 미주 최초의 민족운동 기관인 공립협회(公立協會)를 조직하고, 이듬해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를 창립하는 등 한인 사회의 생활개선과 항일운동, 민족교육, 동포들의 직업알선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897년]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델보(Delvaux, Paul, 1897~1994.7.20) 출생
Paul Delvaux
리에주 안타이트 출생. 특이한 초현실주의 화가로 지목된다. 처음에는 건축을 지망하였으나 화가로 전환하였다. 1920∼1924년 브뤼셀의 미술학교에서 배웠고, 초기의 M.블라맹크를 닮은 포브적(fauve 的:野獸派的)인 풍경·인물은 벨기에의 표현파 화가 안소르와 페르메크의 영향을 받았다. 얼마 뒤 형이상회화(形而上繪畵)의 화가 G.키리코에게 자극을 받아 독자적인 꿈과 향수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초현실주의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1935년 이후 초현실주의전(展)에 출품하였다.
그의 꿈은 반복을 노리는 것으로 명쾌한 원근법(遠近法) 속에 반복해서 나형(裸形)과 건물이 부상한다. 배경에는 그리스 신전이 자주 쓰이지만, 이것도 순결 그대로의 나부(裸婦)와 마찬가지로 정신의 증표이다. 그리하여 고전적인 스타일을 활용하여 달빛이 쏟아지는 황량한 풍경 속을 몽유병 환자처럼 방황하는 나부를 주제로 그린다. 대표작에 《불안한 거리》(1941) 《메아리》(1943) 등이 있다. /naver
[1871년] 체코 태생의 프랑스 화가 쿠프카(Kupka, Frantisek 1871.9.23~1957.6.24) 출생
← 쿠프카가 그린 유화 〈Portrait of the Artist with His Wife〉(1908)
1871년 보헤미아 지방의 오포슈노에서 태어났다.
간판을 그리는 페인트공으로 일하면서 미술을 공부하였고 프라하, 빈 등지에서 미술공부를 하였다. 1895년 파리로 건너가 1908~11년에 그는 입체파 양식과 점묘 화법을 실험했는데, 특히 프랑스의 화가 조르주 쇠라가 고안한 점묘 화법의 색채대비 이론에서 영감을 얻어 색채의 미학적 특성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는 〈뉴턴의 원반 Disks of Newton〉(1912,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이라는 자신의 그림과 로베르 들로네의 그와 비슷한 〈원반 Disks〉(1912)이라는 그림을 통해 곡선으로 이루어진 순수 추상화를 제창한 최초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시인이자 미술 평론가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1912년 이 미술에 오르피슴('음악적인' 색채 서정주의)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는 〈빨강과 파랑의 푸가 Fugue in Red and Blue〉(1912, 체크 프라하 국립미술관)라는 제목으로 추상화를 그려, 음악과 마찬가지로 추상적 색채도 그 자체로서 심오한 정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1913∼1928년에 제작된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도식> 시리즈는 곡선의 유희에 바탕을 두고 음악이나 건축의 질서를 넘어선 우주적 질서와 에너지의 분출에 대한 이념을 암시하는 작품이다.
탄생 75주년에 즈음하여 체코에서 대회고전이 열리고 쿠프카미술관이 설립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철학적 건축>(1913), <건축적 연구3>(1925) 등이 있다.
[1870년] 프랑스의 소설가 메리메(Mérimée, Prosper, 1803~1870) 사망
파리 출생. 법률을 배워 관리가 되었으나 예술가들과도 자주 교제했으며, 특히 스탕달과는 깊이 사귀었다. 22세 때 에스파냐 여배우의 이름을 빌려 《클라라 가줄 희곡집》(1825)을 발간,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의 특질은 단편소설에서 발휘되었는데, 1829~1830년에 걸쳐 《마테오 팔코네》 《타망고》 《에트루리아의 항아리》 등을 발표하였다. 이 단편들은 훗날 단편집 《모자이크》(1883)에 수록되었다. 1834년 문화재 시찰관에 임명된 것을 계기로, 프랑스 국내와 코르시카 ·이탈리아 ·그리스 ·에스파냐 각지를 순방하였는데, 대표적인 걸작 《콜롱바》(1840) 《카르멘》(1845) 등은 그 때의 견문(見聞)에 힘입은 바 적지 않다.
1844년 프랑스 아카데미회원, 1853년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어, 나폴레옹 3세의 궁정에 출입하게 되었다. 그는 직업적인 소설가라기보다 호사가(好事家)의 입장에서 소설을 썼다. 평범한 일상생할을 싫어하고 색다른 이국정서(異國情緖)나 야성적인 정열을 좋아한 데에서는 낭만주의의 영향을 엿볼 수 있지만, 독특하고 간결하며 착실한 문체로 작품의 예술적 완성을 꾀한 점에서는 오히려 고전적(古典的)인 새로운 사실주의 문학을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 /naver
[1865년] 프랑스의 화가 발라동(Valadon, Suzanne, 1865~1938.4.19) 출생
← 발라동이 그린 유화 〈The Blue Room〉(1923)
강렬하고 힘찬 인물묘사와 대담한 색채로 된 작품으로 유명하며 화가 모리스 위트릴로의 어머니이다.
세탁부의 사생아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도움없이 살아야 했다. 여급과 서커스 곡예사 등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다가 1880년대초에 미술 모델이 되어 피에르 퓌비 드 샤반과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같은 미술가들을 위해 일했다. 그들의 작품을 틈틈이 관찰하면서 배운 솜씨로 파스텔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1890년경 에드가 드가는 그녀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여 작품을 직접 구입하기도 했으며 친구처럼 지내곤 했다. 1892년경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1894년경 이후에는 판화도 제작했다. 1896년 사업가와 결혼한 뒤에도 계속하여 작품을 제작·발표했다. 1909년 이혼했으며 그 무렵 성숙한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제는 누드와 정물, 초상, 풍경 등이었으며, 대담한 선 및 문양과 더불어 섬세한 관찰로 많은 찬사를 받았다. 자주 전시회를 가졌으며 1920~30년대에는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1863년] 페스트균을 발견한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세균학자 예르생(Yersin, Alexandre, 1863~1943.3.1) 출생
간균인 페스트균(Pasteurella pestis)을 발견했다. 마르부르크의 로잔대학교와 파리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파리에서는 E. 루와, 베를린에서는 R. 코흐와 함께 세균학을 공부했다. 1889년에 루의 도움으로 파리의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미생물학 교육과정을 준비하고 강의했다. 1890년에 인도차이나 연안을 운항하는 증기선단의 내과의사가 되어 유럽을 떠나, 4년 동안 인도차이나 반도의 중심부를 탐사했다. 동나이 강의 수원을 발견했고, 랑비안 고원을 탐사하여 그곳에 도시를 건설하도록 권고했는데 후에 이곳에 다라트가 건설되었다. 1894년 식민지 공공의료시설에서 일했고, 홍콩으로 갔는데 이곳에서 그와 기타사토 사바사부로[北里柴三郞]는 각자 중국에서 발병한 페스트를 연구하는 동안 독자적으로 페스트균을 발견했다. 다음해 나트랑에 연구소를 설립하여 그곳에서 인간과 가축에 발생하는 페스트에 대한 혈청을 만들고 가축의 질병·파상풍·콜레라·우두를 연구했다. 이 연구소는 재정적 지원을 받기 위해 1903년 나트랑의 파스퇴르 연구소라고 명명되었다. 옥수수·쌀·커피를 재배했으며, 인도차이나에 고무 나무인 헤비아 브라실리엔시스(Hevea brasiliensis)를 도입했다. 1903~04년 하노이에 의과대학을 설립한 뒤, 나트랑으로 되돌아가 1920~23년에 키니네의 원료인 킨코나 레드게리아나(Cinchona ledgeriana)를 도입했다. 1933년 파리 파스퇴르 연구소의 명예소장이 되었다./브리태니커
[1846년]영국의 챌리스, 해왕성 발견 발표
← 보이저 2호가 찍은 해왕성 대기의 구름 : 왼쪽 중앙에 비스듬히 보이는 것이 대흑점과 메탄 얼음 구름이고, 왼쪽 아래에 있는 것은 작은 흑점이고, 작은 흑점 정북쪽에 있는 것은 밝은 스쿠터이다.
1846년 9월 23일 영국의 천문학자인 제임스 챌리스가 베를린 천문대에서 해왕성 발견을 발표했다. 챌리스는 1826년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로 뽑혔으며, 1830년에는 목사가 되었다. 1836년에는 케임브리지 천문대의 플럼좌(座) 천문학교수 및 대장이 되었다. 천왕성의 궤도섭동(軌道攝動)을 계산한 천문학자 존 쿠치 애덤스가 1845년 9월 특정한 위치에서 새로운 행성을 찾아볼 것을 요청해 1846년 7월부터 관측을 시작했다. 마침내 챌리스는 애덤스의 계산으로 예측된 위치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해왕성을 발견했다. 그러나 자신의 관측에 대해 조사하던 챌리스는 이미 8월의 어느 날 밤 자신이 이 행성을 발견·관측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날 밤의 관측을 그 전날 밤의 관측과 비교하는 데 실패해 발견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챌리스는 225편의 수학·물리학·천문학 관련 논문들을 과학 저널에 기고했으며, 주된 연구결과를 정리해 <케임브리지 천문대에서의 천체관측 Astronomical Observations Made at the Observatory of Cambridge>(12권, 1832∼64)을 출판했다./브리태니커
[1779년] 미국의 존스, 영국 해군 격파
1779년 9월 23일 미국의 해군 지휘관 존 P. 존스가 영국 동부해안에서 영국 군함을 크게 무찔렀다. 12세 때부터 견습선원으로 일을 시작한 존스는 미국독립전쟁이 터지자 필라델피아로 가서 신설된 대륙 해군의 대위로 임명되었다. 그는 '앨프레드호'에 배속되어 바하마에서 활약했으며, 귀환 중 벌어진 영국 군함 '글래스고호'와의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776년 이후 여러 군함들의 지휘를 맡아 뛰어난 항해술과 지휘력을 인정받게 되자 1777년 6월 미국 의회는 그에게 새로 건조한 '레인저호'의 지휘를 맡기기도 했다. 1779년 8월 '본옴 리처드호'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소함대를 이끌었는데, 영국 근해를 항해하던 중인 9월 영국 군함 '세라피스호'와 '카운티스 오브 스카버러호'의 호위를 받는 발틱 상선단을 만나 항행을 저지했다. 이 일로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해전이 된 전투가 일어났으며, 이 전투에서 존스는 대승을 거두었다. 전투에서 손상을 입은 본옴 리처드호가 침몰 직전에 놓이자 존스는 세라피스호에 승선해 나포한 카운티스 오브 스카버러호를 이끌고 네덜란드로 항진했다. 이 승리로 그는 미국 해군의 영웅이 되었다./브리태니커
그 밖에
1994년 인도 봄베이 서부의 항구도시 수라트, 페스트 번져 200여명 사망
1992년 레둑 안, 베트남 새 대통령에 선출
1991년 유엔 핵무기 사찰단 44명 바그다드서 피억류
1990년 소련최고회의, 공산주의 경제 청산하고 자유시장경제로 전환
1982년 한국-미국 농산물차관회담 개막
1981년 홍콩지, 중국이 백두산에 인공위성관측소 설치 보고
1977년 중국, 모잠비크 및 적도기니와 경제기술협력협정 조인
1974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대표 함석헌, 김재준, 천관우) 유신규탄성명
1972년 필리핀에 계엄령. 유력상원의원, 기자 등 체포
1969년 극동 최초로 팬텀기 전투부대 창설
1967년 강변 1로 개통 (한강변 유료도로)
1963년 박정희후보 사상논쟁을 유발
1958년 레바논대통령에 슈하브장군 취임
1958년 영국, 크리스마스섬에서 핵폭발실험 성공
1954년 新 형사소송법 23일 0시를 기해 발효
1952년 제주도 포로수용소서 포로들 데모
1950년 미국 반공법안 성립
1947년 유엔총회서 한국문제 토의를 41대 6으로 가결
1945년 소련군 위원단 서울에 도착
1943년 이탈리아 파시스트공화국정부 성립
1940년 일본군 인도차이나반도에 침공
1922년 영국-프랑스, 이스탄불의 터키 반환 결정
1919년 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회, 한일관계사료집 4권 발행
1900년 제2인터내셔널 파리대회 개최(-9.27)
1890년 보불전쟁에서 프로샤군에 포위된 파리에서 기구로 사람과 우편물 운반. 최초의 항공우편
1885년 독일 화가 슈피츠베크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