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이 사관학교는 언제 개설되었을까? 이에 대한 조선정부의 공식문서는 확인된 것이 없으므로 외국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미국인 알렌은 1893년 3월 22일에 사관학교 설치령이 반포되었다고 기록하나 이는 착오에 의한 것으로 같은 날 주한 미국대리공사 어거스틴 허드가 국무장관에게 보낸 기밀보고서에서는 알렌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어거스틴 허드의 보고서를 일부 옮기면 다음과 같다.
----------------------------------------------------------------------------------------
극 비
문서번호 374 미국 공사관, 서울, 조선
1893년 3월 22일
국무장관 귀하
조선 해군국 창설과 관련하여 저의 372호 보고서를 우송한 뒤 어제 오후 힐리어씨 (주한 영국총영사)와 나눈 대화를 보고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힐리어는 모든 것이; 허황된 짓이라 단언하면서 조선은 돈이 없고, 해군을 만들려는 뜻도 없으며, 고용하고 있는 영어교사도 없다고 언급했습니다. 한 사람이 신청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자신의 조건을 내건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영국인 교장자격증 소지자 허치슨을 말함) 그러나 모든 짓이 웃음거리이고 영국정부가 해군장교를 이리로 보내는 것을 허가하지 않을 것이기에 힐리어는 해군장교가 올 것을 믿지 않고 있으며, 급료 또한 1~2년씩 기다려야 하고, 가끔씩 던져주는 약간의 엽전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많은 자금이 소요되는 국왕의 구상중 하나로 결국에 가서는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싫증을 내며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모든 계획이 불합리하다는 힐리어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몇주 전 저에게 지적하셨던 것처럼 그 이유를 보고하지 않았지만 칙령이 관보에 등재되고 외부대신 자신이 확신을 시켜줄 때는 다른 상황입니다.
저는 힐리어의 언급이 매우 솔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아직 국왕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 일을 전적으로 손에 넣으려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번 해군 관련 계약은 그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해관 총세무사는 영국인으로 그는 영국의 이익을 위해서 돈을 쓰는데 큰 문제는 없을 듯 합니다.
(이하 생략 : 조선에서 영국해군의 움직임에 관한 것으로 글의 주제와 관련이 없기 때문)
-----------------------------------------------------------------------------------------
미국공사관의 기밀보고서를 보면 1893년 3월 22일 반포된 것은 사관학교 설치령이 아닌 해군부 창설령으로서 해군부는 청주에 있던 통제영을 남양부로 이전하고 민응식을 도통제사에 임명하고 해군편제를 근대식으로 전환한 것을 말한다. 조선정부가 해군부를 남양만에 둔 것은 그 당시 황해도 해안에서 발호하던 밀수선을 단속하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 조선정부가 영국에 요청한 것은 영국정부의 입장을 전혀 고려치 않은 것이 한두가지 아니었다. 조선정부는 군함 제공, 해군장교 파견, 교육 지원 등을 아무런 사전준비 없이 요청하여 영국정부를 당황케 하였다. 그리고 위의 보고서로 미루어 볼 때 영국측은 조선정부의 해군창설을 황당무계한 것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영국정부는 조선에 군함을 제공할 생각은 없었고, 조선에서의 영향력 강화와 조선정부의 요구를 절충한 것이 바로 해군사관학교를 지원하는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더구나 이 해군창설 계획은 국왕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이라 무작정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영국정부는 조선의 해군창설과 군사교관 지원에 소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선정부로서는 군함보유는 오랜 숙원사업의 하나로, 의욕적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조선정부는 영국과의 협상이 진척되자 우선 교사신축을 시작했는데 1893년 5월 교보통상사무 협판 남연철은 조선해관 총세무사 모건에게 강화 해군사관학교 신축비용으로 6천원을 요청하여 이 중 1천원을 받아 교사 신축에 들어갔다. 또한 영국정부가 서울주재 총영사관을 통해 조선 외부에 군사교관단 고용계약의 최종안을 통보한 것이 1893년 7월이었으니 정식 개교는 그 이후로 추정된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영국 성공회 주교 Corfe의 기록을 보면 정식 개강은 93년 10월로 추정된다. 이 때에는 우선 의사소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어교육만이 실시되었다.
교사는 강화도 갑곶진에 설치되었는데 매일 많은 청년들이 신식 군사교육을 받기 위해 모여들었고, 영국인 군사교관을 위한 숙소와 구식 대포를 보관할 창고도 완성되었다.
강화도에 해군사관학교가 신설되어 생도를 모집한다는 소식은 조선의 상류사회에 금방 퍼졌다. 그들은 이 학교를 졸업하면 신식 장교가 되어 관직을 제수받을 것이라 믿었는데, 1891년 2월 육군사관학교 격인 육영공원 출신 수료생 9명에게 종 6품 관직이 제수된 전레가 잇었기 때문이었다.
-유용원군사세계 전사게시판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