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태어나 경북중고교를 거쳐 영남대학교 상경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포항1대학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하기 시작하여 1979년부터 대구가톨릭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로 있으면서 학장, 경영대학원장 및 한국산업경영학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경일 약품(주) 이사로 재직하면서 한국의 기업가사에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모으며 강의 및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경주 최 부자의 가업 유지와 경영 이념에 관한 연구」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회계학 이론』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경영학 박사이자 30년 이상 대학에서 경영학을 가르친 저자가 10대에 걸친 300년의 세월 동안 부자의 대명사로 이름을 떨친 경주 최씨 집안의 비결과 숨겨진 노하우를 현대 경영학으로 풀었다. 경주 최 부잣집이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재산을 유지하고 관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들만의 독특한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 집안에는 정신적 기반이 된 가훈, 경영 철학의 역할을 한 가거십훈, 구체적 상황에 따른 대처법인 육연이 있었다. 그렇다면 최 부잣집이 300년에 걸쳐 모으고 지켜온 재산은 지금 어떻게 됐을까?
경주 최 부잣집 가문은 만석이라는 재산을 가졌던 부자였지만 그 당시에나 또는 현재와 비교해 볼 때 더 큰 부자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도덕적 가치를 지키며 부를 축적하였을 뿐 아니라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버릴 수 있었던 그 집안의 경영 이념과 철학을 보여 줌으로써 우리 사회의 부자들이 나아갈 길 그리고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 차 례
프롤로그 - 오늘에 다시 최 부자를 찾는 까닭
1. 집안을 일으키고 300년 부의 기반을 다지다
2. 원칙을 지키는 경영으로 300년 재산을 일구다
3. 사회적 윤리를 실천하며 300년 재산을 지키다
4. 가치 있는 일을 위해 300년 부를 버리다
에필로그 - 300년 만에 지는 노을
프롤로그 - 오늘에 다시 최 부자를 찾는 까닭
나는 대학 강단에서 30년 넘게 경영학을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우리나라에도 존경할 만한 부자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곤혹스러워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존경할 만한 부자의 모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이수락 선생으로부터 경주 최 부자의 독특한 가훈에 대한 짤막한 원고를 받고 눈이 번쩍 뜨였던 적이 있었다. 최 부자의 가훈이 300여 년 동안 이 집안을 만석꾼으로 지켜 오게 한 근원이었던 것이다. 경주 최씨 가암파 파조 최진립으로부터 마지막 최 부자 최준에 이르는 12대 사이의 행적은 가감할 필요도 없이 그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였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 부자는 여러 명 있었으나 다들 그리 오래 가지 못했고, 또 존경을 받는 부자는 참으로 드물었다. 최근에도 많은 재벌의 오너들이 정당한 방법으로 부를 형성하지 못하고 또 그 부를 행사함에 있어서도 사회적 윤리에 부합하지 않아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은 사실을 볼 때 최 부자 일가의 경영 철학을 다시 음미해 보고 그들의 행적을 더듬어 보는 것은 존경받는 부자의 표상을 확립한다는 의미에서도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1. 집안을 일으키고 300년 부의 기반을 다지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기초를 다진 최진립
경주 최씨는 신라의 전신인 진한의 6부촌 중 하나인 돌산 고허촌의 대인 소벌도리를 득성조로 하며, 신라 말 진성여왕 때의 고운 최치원을 시조로 11세손까지 크게 24파로 나뉘는데, 오늘날 영남 지방의 경주 최씨는 거의 사성공파와 광정공파에 속하며, 사성공파는 조선 초 성균관 사성을 지낸 최예를 파시조로 하여 그 후 6대손인 정무공 최진립 때 다시 갈라져 사성공파 중 가암파로 분파되었다.
정무공 최진립은 선조 원년(1568)에 경주부 부북 현곡촌 구미동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부남면 이조리로 이주해 살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주성이 왜군에게 함락되자 최진립은 동생과 함께 무명으로 종군했다. 또한 3년 후인 정유년 다시 왜군이 침입하자 수백의 군을 이끌고 미리 토굴을 만들어 적을 유인하여 무찌르는 등 많은 전투에 종군했다.
관직을 거듭 사양하는 것이 예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마량첨사에 임명되어서는 힘없고 병든 백성을 도우면서 일용의 물자를 절약하여 성과 못을 수리하고 기계와 장비를 고쳤다. 이때 못을 수리하고 보를 쌓는 기술을 익힌 것이 훗날 농업을 일으키는 데 크게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신유년에 별장으로 있을 때 모함을 받아 경남 울산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최진립은 억울했으나 참았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실책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힌 당파 사이의 권력 구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 최진립은 깨달았다.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치는 것은 옳은 일이나 관직에 있다는 것은 항상 대립되는 파벌과 함께 있어야 하므로 언제 모함에 빠지거나 숙청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을.
2년이 지나 계해년에 광해군이 퇴위하고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바뀌자 최진립은 귀양살이에서 풀려 외관직의 정7품인 가덕첨사가 되었으며 그 후에도 여러 관직을 맡아 군사와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힘썼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전선에서 적군과 싸우다가 순국하니 그의 나이 예순아홉이었다. 최진립은 이처럼 청렴하고 장렬하게 일생을 마쳤다. 그는 평소에도 관사에 첩을 두지 않았으며, 뇌물은 물론이고 선물이나 물건에도 마음을 두지 않았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첫 번째 비밀 - 부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지위만을 갖는다
최진립은 평소 자식들에게 당부한 유훈이 있었다. “사람이 태어나서 한평생을 사는 데는 하늘이 내린 각자의 할 바가 있다. 가문과 나라를 지키면서 부단히 학문하기에 힘써라. 그러나 벼슬을 목적으로 학문하지 마라. 뭇 사람들과의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원만하게 벼슬자리를 수행하기란 지극히 어렵다. 권세의 자리에 있음은 칼날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아 언제 자신의 칼에 베일지 모르니…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마라.” 조선 초기 양반 신분의 유지는 부의 유지에 필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반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최소한 진사나 생원에 급제해야 했던 것이다. 최진립의 유훈은 당시의 정치적 구조를 경험한 그의 뼈아픈 교훈으로, 놀라운 장기적 안목이라 할 수 있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두 번째 비밀 - 한국적 인간관계에 바탕을 둔 노사 관계를 실천한다
최씨 가문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최진립 장군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온갖 시중을 들다가 마지막에는 장군과 함께 죽은 충노 옥동과 기별에 대해서도 제사를 지내 주고, 충노를 위한 불망비까지 세워 주었으니 어느 가문에서 노비에게 이러한 대접을 하였던가. 이것은 훗날 경주 최 부자 가문이 부를 유지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경주 최 부잣집에서 볼 수 있는 주인과 노비가 서로 인간적으로 존중하는 정신이나 믿고 자제하며 양보하는 정신은 한국적 공동체 원리의 좋은 예가 된다고 하겠다.
가업의 이념을 정리한 최동량
최진립의 경우 이조리 밖에 멀리 떨어진 전답이 약간 있었다 하더라도 시골의 작은 부자임에는 틀림없으나 만석꾼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최진립이 죽고 그의 셋째 아들 최동량이 터전을 이루어 손자인 최국선에 이르면 엄청나게 재산이 불어난다. 최동량이 아버지의 묘 옆에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 집안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그는 우선 세월이 지나면 잊혀질까 두려워 당대의 저명한 선비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아버지의 행장과 묘비문, 실록을 만들어 기록을 남기는 일을 먼저 챙겼다. 이것은 경영학적인 의미로 본다면 ‘기업 이념의 정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동량은 훌륭한 아버지를 표본으로 보임으로써 후손들이 본받고 따를 모델을 구축했으며 최 부잣집이 오래 유지될 수 있는 기초를 놓았던 것이다.
그 후 그는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먼저 남아 있는 서른 명 정도의 노비와 함께 농사일에 전념했는데, 그동안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다니며 배운 여러 가지 농사 기술을 이용했다. 당시 나라에서는 식량 증산 정책을 펴고 있었고 땅을 개간하는 자에게 3년 동안 세금을 면해 주고 주인이 없는 밭이나 신전을 개간한 자에게는 소유권을 인정해 주는 권농책이 있었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세 번째 비밀 - 함께 일하고 일한 만큼 가져간다
인근의 들판을 면밀히 조사한 최동량은 이조리를 중심으로 형산강 상류의 물이 합쳐지는 곳에 땅을 개간했다. 최씨 가문은 충신 집안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최동량은 관의 협조를 얻기 수월했다. 이렇게 개간 작업을 추진하는 한편 노비나 마을 사람들에게 종래에는 드물게 적용하던 획기적인 제도인 병작제를 과감히 도입하여 노동력을 확보했다. 병작제를 통해 생산량의 반을 나누어 가지도록 한 방법은 농민들에게 생산 의욕을 북돋워 주는,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경작 방법이었다. 전쟁을 피해 이리저리 떠돌던 인근의 유랑민들은 이조리 최씨 집의 소문을 듣고 나날이 모여들었다.
최동량을 비롯한 최씨 집안의 사람들은 모두들 부지런했다. 최씨 가족들은 별이 지기 전 이른 새벽부터 모두 솔선해서 일터로 나갔기 때문에 노복들이나 소작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렇게 힘들게 일을 해도 최씨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신명이 났다. 개간한 논밭을 소작하면 수확의 반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은 일하는 사람 모두에게 희망을 주었다. 또한 최씨 집에서는 일을 하면 세 끼를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최동량이 하인을 부리는 기본적인 자세와 애정은 시집가는 딸에게 주는 다음과 같은 글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세상의 습속이 조그마한 일에도 꾸짖고 음식도 잘 아니 주고 의복도 잘 아니 입히고 크거나 작거나 죄과가 있으면 형벌과 매질을 지나치게 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해놓고서도 위엄 있고 행동 관습이 엄격하노라고 자랑을 한다만, 허나 하늘은 그 소행을 괘씸하게 여겨 그러한 사람의 자손이 온전히 남지 못하고 일꾼이 떠나가 버리니 옛 사람이 말하기를 일꾼도 또한 사람의 아들딸이니 잘 대접하라는 말씀이 어찌 옳지 않으리오. 부디 어여삐 여기고 때릴 일이 있어도 꾸중하여 지나치게 말라. 사람의 재주는 모두 각각 다르니 그 사람이 못할 일은 아예 시키지 말고, 이 일꾼에게 저 일꾼의 말을 하지 말고, 차별하지 말고, 꾸짖되 길게 꾸중하지 말고, 자주 나무라지 말고, 헛되이 칭찬하지 말고, 수고하는 날이거든 음식을 생각하여 주고, 어린 자식이라도 어여삐 여겨 주고, 병이 들거든 집에서 간호하여 주고 증세를 각별히 유의하여 고쳐 주고 위엄 있게 은혜를 베풀면 일꾼이 자연 진실하게 되느니라. 그렇게 하여도 마침내 속이고 사나워서 부릴 수가 없거든 시키지 말라.”
또한 최동량이 죽기 전 해 겨울에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해 지었다는 가거십훈은 구체적인 생활 지침을 제시함으로써 후손의 행동 방향을 제시했다. 이는 당시의 일반적인 유가의 풍습에 따른 것으로 최 부잣집만의 독특한 가훈으로 보기는 어려우나 아홉 번째 가훈인 농업과 잠업을 경학을 익히는 것보다 앞세워 강조한 부분은 눈에 띄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일곱 번째의 ‘여색을 멀리 하라.’는 것이나 여덟 번째의 ‘술에 취하지 말라.’는 교훈은 부자들이 흔히 저지르기 쉬운 오류를 구체적으로 경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치와 술과 여자는 한 나라의 왕조도 멸망시킬진대 한 개인이나 기업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최 부잣집에서는 10대에 걸쳐 여자 문제나 술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 일은 거의 없었다. 이것이 부를 지킨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다.
2부 원칙을 지키는 경영으로 300년 재산을 일구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네 번째 비밀 - 군림하지 않고 경영하는 중간 관리자를 세운다
최동량의 뒤를 이어 최씨 가문을 명실공히 부자의 반열에 올려놓은 사람은 바로 아들 최국선이다. 그는 본격적으로 재산을 일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최국선은 노동력이 되는 노비와 소작인들을 모으는 능력을 가졌다. 당시 주인을 대신한 마름들의 횡포는 참으로 견디기 어렵도록 무서운 것이었다. 그런데 최 부잣집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체 마름을 두지 않았다. 이것이 최 부자의 재산이 10대에 이르도록 지켜진 또 하나의 중요한 비결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중간 관리자들이 종업원에게 횡포를 부리는 조직에서는 능률이 오르지 않을 뿐 아니라 극심한 노사 간의 대립을 유발할 수 있다.
최씨 집에서는 그 마을에서 제일 먼저 농우 두 마리를 사서 써레와 쟁기로 농사를 했고 분뇨 거름을 만들어 땅에 뿌려 땅심을 돋우어 생산을 증대시켰다. 아버지가 읽던 여러 가지의 농사 서적, 특히 신숙이 지은 『농가집성』 등을 탐독하는 한편 다른 지방에서의 농사 기법도 탐색했다. 그때 그가 찾은 방법이 바로 벼의 이앙법 도입이다. 당시로서는 거의 혁명적인 농사법인 이앙법을 통해 이전에 김매기 작업에 투입되던 노비들의 노동력으로 더 넓은 논밭을 경작하는 광작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최씨 집안으로 유랑인들이 계속 모여들면서 농장은 더욱 확대될 수 있었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다섯 번째 비밀 - 양입위출(量入爲出), 들어올 것을 헤아려 나갈 것을 정한다
최국선은 이재(理財)의 기본 원리를 잘 알고 있었다. ‘들어올 것을 헤아려 나갈 것을 정함’은 오늘날의 예산 설정의 기본 정신이라 할 수 있으며, 현대 경영의 요체가 되는 탁월한 식견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최국선의 말에는 또한 철저한 절약정신을 엿볼 수 있다. 최 부자의 선조들이 자손들에게 남긴 교훈은 모두 행동에까지 이를 수 있는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교훈이 범하기 쉬운 막연한 포괄성을 피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해 볼 만하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여섯 번째 비밀 - 사회적 책임을 저버리지 않고 받은 만큼 사회에 환원한다
최국선은 검소와 절약을 특히 강조했으나 그 절약이 인색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애썼다. 현종 신해년, 삼남에 큰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허다했다. 그때 최국선은 과감히 곳간을 헐어 집 앞 바깥마당에 큰 솥을 걸고 굶주린 사람을 위해 연일 죽을 끓이도록 했다. 지금도 죽을 쑤어 나누어주던 그 자리가 활인당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이 가훈은 바로 그때 생긴 것이다.
3, 4년 정도에 한 번씩 찾아오는 흉년은 가난한 백성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수확량이 평년작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흉년이 들 때마다 최 부잣집에서는 소작료를 대폭 탕감하여 생산의 3할 남짓만 내게 했다. 흉년이 극심할 때는 소작료를 다시 낮춰 주었으므로 최 부잣집의 소작인들은 이러한 조처에 또다시 감복했다. 춘궁기나 보릿고개 때는 한 달에 100석의 쌀을 나누어주었으니 약 만 명 정도가 최 부잣집에서 쌀을 얻어 갔다는 계산이 나온다. 최 부잣집의 창고는 약 800석이 들어가는 것으로 지금도 남아 있는데 당시 그 창고가 거의 바닥이 나다시피 했다. 이와 같은 최 부잣집의 이웃 사랑 정신은 오늘날의 의미로 보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 특히 지역 사회에 대한 책임에 해당한다.
최 부잣집의 가주, 교동 법주
경상 감사가 최국선의 덕행을 조정에 품신하여 사옹원(궁중의 식사를 담당하는 곳) 참봉에 제수했으나 임금의 명이라 하는 수 없이 잠시 동안 관식을 수행하다가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벼슬을 사퇴하고 돌아왔다. 오늘날까지 경주 최 부잣집에서는 법주라는 독특한 가주를 만들어 오고 있는데, 이러한 법주의 제조 비법은 바로 최국선이 궁중의 양조 비법을 맏며느리에게 대대로 전수해 오늘에까지 이른 것이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일곱 번째 비밀 - 때를 가려 정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늘린다
흉년에는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마을의 대소사에서 힘든 일이 있으면 의논하며 금전이 부족하면 언제나 돈을 꿀 수 있었으므로 최 부잣집은 오늘날의 마을금고 역할까지 하면서 모든 경제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최 부잣집의 서궤에는 언제나 약속 문서가 가득 쌓여 있었는데, 최국선이 병으로 오래 누워 지낼 때 그는 맏아들을 불러 일렀다. “그 중에서 토지나 가옥의 문서는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고, 나머지 서약 문서나 돈을 빌려 준 장부는 모두 마당에 모아 불을 지르도록 하여라. 돈을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없더라도 갚을 것이요, 못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있어도 여전히 못 갚을 것이다. 돈을 못 갚을 형편인데 땅 문서까지 빼앗아 버리면 어떻게 돈을 갚겠느냐.”
최국선은 또한 가족들을 모아 놓고 사람이 물건을 팔고 사는 도리에 대해서도 말한 적이 있다. “사람의 마음이 살 때는 적게 주고 팔 때는 많이 받고자 한다. 남에게 속지는 않아야 하겠지만 너무 잇속을 챙기려 하지 말며, 남이 절박하여 물건을 헐값으로 내놓아도 값은 값대로 주고 사라. 너무 잇속을 생각하면 오래지 않아 잃어버리거나 깨지거나 자손이 도로 팔거나 하니라. 혹시 제값을 헤아리지 못하고 지나치게 주었어도 잘못이니 남에게 물어 공론대로 하면 나의 마음과 복에 해가 없느니라.” 최국선의 이러한 말은 남과의 거래에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자세를 자상히 일러 주고 있다. 남을 배려하며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너무 잇속만 차리지 말고’ 거래하라는 말은 현대적으로도 의미 깊은 생각이라 할 수 있다.
경주 최 부자의 가훈에 나타나는 중요한 정신은 재산의 축적 과정이 도덕적이고 정당성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최 부잣집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최국선으로부터 마지막 최준에 이르는 10대에 걸쳐 흉년이 들었을 때 수많은 기아민을 구제한 기록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심한 흉년이 들었을 때나 뜻밖의 재앙을 당했을 때는 싼값으로 땅을 팔려고 내놓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재산을 증식하기에 용이했다. 그러나 최 부자는 남의 약점을 이용해서 재산을 늘리지 않았다는 데서 이웃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사지 않았다. 이것은 오늘날 이익 추구를 위해 무차별적으로 인수, 합병하는 약육강식의 논리와 상반된다고 할 수 있다.
최국선은 숙종 임술년에 쉰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왕세자의 시위를 맡던 이광정이 쓴 그의 묘갈명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다. “사람들은 재물이 있으면 더 가지려고 하건만 공은 이를 끊었도다. 벼슬을 내렸으되 연연하지 않았으며 오직 남의 급함을 구제함에 힘썼도다. 물욕에 마음 빼앗기지 않았으며 잡은 문서 불태우니 마음 매우 넓었도다. 이같이 어진 이는 정무공의 손자로고 이 비석에 새긴 글월은 후손의 법이로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여덟 번째 비밀 - 지나치게 재산을 불리지 않는다
최국선의 뜻을 받든 세 아들들은 제각기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열심히 일했으나 세 형제 중에서 유독 둘째 아들인 최의기의 집이 날로 더 번창했다. 최 부자의 전체 소작료 수입은 1년에 만 석을 넘지 않도록 했기 때문에 최 부자의 토지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소작인 개인이 내야 하는 소작료는 줄어들었다. 이 때문에 농민들은 최 부자가 더욱더 땅을 많이 가지기를 원하여 땅을 판다는 소문만 들으면 최 부자에게 소개해 사도록 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최 부잣집은 극대 또는 최대보다는 적정 또는 차선을 선택함으로써 장기적인 안목에서 부의 극대화와 안정을 도모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이익의 최대화’란 일정한 회계 기간을 정해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말인데, 이때 ‘일정한 기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생각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최부잣집의 경우는 한 해의 이익을 ‘만 석’으로 한정지어 연간 만 석씩 300년 동안 300만 석의 수입을 올린 셈이다. 만약 욕심을 부렸다면 한 해에 2만 석을 얻을 수도 있었겠지만 3대를 넘지 못하고 망했다면 50년으로 쳐도 100만 석에 불과하다는 계산이 나와 결과적으로 소탐대실이 되고 만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의 경제 원리에서 보면 단기적인 극대 이윤의 추구보다는 적정 이윤의 추구가 오히려 종업원과 소비자들에게 먹혀들어 장기적인 이익을 누릴 수 있다는 것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 욕심을 절제하지 않고 무모하게 끝없이 추구하면 결국 단명하는 것이다.
3. 사회적 윤리를 실천하며 300년 재산을 지키다
재산은 늘었지만 벼슬은 하지 못한 최승렬
최의기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은 점점 더 늘어났으나 과거의 운이 따르지 않았다. 맏아들 최승렬은 가훈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지만 효도와 우애가 지극하고 친족 간에 화목하여 향리에서 늘 칭찬했다. 최의기 이후 4대 동안 아들이 귀해, 장남 승렬은 아들이 일찍 죽어 동생의 외아들을 양자로 입적했다. 그러나 양자로 들인 최종률도 딸만 셋을 두고 병약하여 대를 이을 아들을 얻지 못했다. 당시 양반가나 부잣집에서는 으레 첩실을 들이게 마련이어서 굳이 아들을 얻으려고 했다면 못 얻을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 부잣집에서는 “여색을 멀리하라.”는 가거십훈이 있었기에 이리저리 여색을 탐하여 아들 낳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아홉 번째 비밀 - 청백리 정신에 바탕을 둔 근검절약 정신을 실천한다
진사 시험에도 번번이 낙방하고 양자로 들어와서 자식마저 귀했던 최종률은 쉰 살의 나이로 진사 시험에 급제했으나 급제한 지 사흘 만에 역질에 걸려 객사에서 죽었다. 그의 행장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원래 공은 가정이 풍요로웠으나 천성이 근면하고 검소하여 명주옷을 거듭하지 아니하고 식사도 좋은 반찬을 적게 하였으며 사치하지 아니해서 청백한 가풍을 더럽히지 않았고, 처세에는 남의 허물을 듣고도 못 들은 척하며 어리석은 사람같이 하였다.”
최종률도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사종 형의 아들을 입양해 후사로 삼았다. 열여섯의 나이에 입양된 최언경은 서른한 살에 한양의 객사에서 죽은 아버지를 운구하여 상례에 따라 장사를 지내고 홀로 남은 모친을 30년 동안 정성껏 모셨다. 그러나 그도 과거 운이 없어 세 번이나 실패한 다음 포기한 후 고향에 남강 서당을 짓고 수백 권의 서책을 비치하여 향리의 교육에 전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두 대에 걸쳐 과거에 실패하고 자손이 귀하자 마을 사람들은 쑤군거리기도 했다. “하늘은 참 공평하기도 하지. 한 사람에게 모두를 주지 않으니. 재물을 주니 자식과 벼슬을 거두어 가 버리시네.”
최의기로부터 4대 동안 아들이 없거나 외동아들만 두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자손이 번창하지 못해 아쉬운 점이 있었겠지만 오히려 부를 더욱 축적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자식이 여럿이면 분가할 때마다 분재를 해야 하고, 여러 대에 걸쳐 분재를 계속하면 아무리 큰 부자라도 그 부를 지키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형제가 많으면 이해관계가 얽힐 수도 있고 다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구체적 상황 대처법, 육연
언제부터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경주 최 부잣집에는 선조 때부터 내려오는 또 하나의 유훈으로 수신을 위한 육연(六然)이 있다. 이 육연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인간이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의 구체적 행동 방법을 잘 나타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처초연 - 고요하게 혼자 있을 때는 초연하라. 초연함이란 어느 한 가지에 집착함이 없고 얽매임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대인애연 - 사람을 만날 때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만나라. 인간관계의 기본은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무사징연 - 큰일이 없을 때는 물이 맑듯 고요하고 투명해야 한다. 욕심을 버리고 불순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유사감연 - 결정을 해야 할 때는 과감하게 실행하라. 일단 일이 생기면 과감하게 추진한다는 것이다. 득의담연 - 뜻을 얻었어도 담담하게 처신하라. 성공을 거두었을 때 흥분하지 않고 담담하게 처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의태연 - 뜻을 잃었어도 태연하게 처신하라. 실패했더라도 태연한 모습으로 차분하게 실패의 원인을 찾아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게 대비하는 자세를 말한다.” 이것이 최 부잣집 사람들이 매사에 실수하지 않고 최선의 행동을 할 수 있게 한 또 하나의 가르침이었다.
가문의 새로운 중심지, 천하 명당 경주 교리
최언경의 외아들인 최기영은 최준의 고조부로 영조 때 태어난 풍류객이요, 낭만파로 자연의 산수를 좋아했다. 그는 경주 최씨의 시조인 최치원 선생을 남모르게 흠모했으며 명승대천을 두루 유람하면서 마음에 드는 곳이면 기약 없이 머물면서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다. 사실 넉넉한 재산에다가 학식으로도 누구에게 빠지지 않을 정도로 책을 읽었기에 굳이 진사 시험을 볼 필요가 없었으나 가문의 전통이었기에 뒤늦게 과거를 봐 급제했다. 수많은 하례객들이 찾아와 사랑채에는 몇 달 동안 손님이 끊이지 않고 잔치가 계속되었는데, 이조리의 집은 너무 협소하여 손님을 맞이하기에 불편했다. 어느 날 최기영은 친구 지관과 함께 새 집터를 물색하여 경주의 교리로 이사하기로 마음먹었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열 번째 비밀 - 이루기 힘든 일일수록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마음으로 행한다
최기영은 이튿날부터 그 땅의 임자가 누구인지 땅값은 얼마인지 알아보기 위해 은밀하게 매입 작전에 돌입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유림에서는 최 부자가 향교 바로 옆으로 이사 오는 것을 반대했다. 이 문제는 경주부를 순시하던 어사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유림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초지종의 전말을 들은 어사는 판결을 내렸다. “둘 다 잘못이 있으니 문제가 된 것이오. 세상을 움직이는 모든 법도가 유가의 법도에서 우러나오고 유가를 교육하고 공맹을 모시는 향교가 가장 존중되어야 함은 지극히 마땅하오. 향교와 최씨의 집이 어찌 감히 나란히 설 수 있겠소? 그러나 개인의 땅에 사가를 지을 수 없음도 또한 법도에 맞지 않는 일이니, 이 두 가지를 조화하기 위해 최씨는 집을 짓되 사가의 집 주춧돌과 기둥을 낮추어 용마루를 향교의 용마루보다 다섯 자 아래로 낮추어 짓도록 하시오.”
그 자리에 모인 유림들은 설마 용마루를 다섯 자나 낮추고도 그곳에 집을 지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기영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나리의 현명한 판단에 어김없이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소인 또한 명색이 유생인데 어찌 공자님 앞에 참람할 수 있겠습니까? 향교를 바로 이웃으로 하는 영광을 누리도록 허락하신다면 이에 대한 보답으로 약소하나마 미곡 천 석을 유림의 기금으로 희사하겠습니다.” 유림들은 “좋소이다. 어사의 평결도 훌륭하고 최 진사의 뜻도 갸륵하니 최진사의 이거를 수용함이 마땅하리라 생각되오.”하며 허락했다. 기영은 집 터의 기반을 낮추고 아흔아홉 칸에서 열 칸이 빠지는 여든아홉 칸으로 지어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유림의 비난을 피했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열한 번째 비밀 - 주변에 사람들이 끊이지 않게 하고 항상 후하게 대접한다
경주 최 부자 중에서도 가장 낭만적이며 풍류를 알고 학식이 풍부했던 최기영은 많은 시문과 여행기 등을 남겼다. 그의 집에는 항상 손님이 끊이지 않았고 그때 또 하나의 가훈이 정착되었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그런데 이 과객 중에는 풍류객이나 학문이 깊은 선비도 있었고 무인도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지식인들이었고 세상 물정이나 인심과 지방의 사정을 살피면서 이곳저곳으로 소식을 전해 주는 역할을 했다. 즉,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에 이들 과객은 정보 교환을 해 주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많을 때는 하루에 백 명의 손님을 치를 때도 있었는데, 매년 만석꾼 소득 중 10분의 1인 천 석 정도는 이렇게 접빈의 비용으로 쓰였다.
귀천이나 빈부는 결코 가리지 말고 대접할 것을 엄명했으나 손님의 부류를 전혀 구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일가친척이나 사돈, 명가집 인사는 상객으로 사랑채에 모시고, 양반집 사람은 중객으로 작은집이나 사촌들의 사랑채에 모시며, 잠자리나 식사를 해결하려고 들른 하객들은 하인들이 살고 있는 초가집으로 안내된다. 하객들이 작은 쌀통에서 쌀을 한 줌 집어 들고 하인 집으로 가면 하인들은 최 부잣집 손님으로 알고 밥을 지어 주고 잠자리를 내준다. 그런데 이 쌀통은 참으로 희한한 것으로 손님들이 욕심을 부려 두 손을 넣어 쌀을 많이 움켜쥐면 손이 빠지지 않아 할 수 없이 적당량을 집을 수밖에 없었다. 최 부잣집의 1년 소작료는 벼로 치면 만 석이 채 못되고 쌀로 치면 4,000석 남짓 되었다.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데 벼 1,000석을 쓰고, 손님 접대로 1,000석을 썼다고 하니 과객의 수를 짐작할 만하다. 또한 하룻밤을 묵고 떠나는 과객을 빈손으로 보내지 않았다. 그들이 하루를 지낼 양식과 약간의 노자까지 주어 보낸 것이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열두 번째 비밀 - 자신을 낮춰 상대가 경계하지 않도록 한다
최기영의 장남 최세린은 정종 신해년에 태어나 스물여섯 살 때 성균 생원에 급제했으나 조상의 뜻에 따라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초야에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했다. 최세린은 풍모가 의젓하며 재능이 뛰어나고 도량이 넓었으며 속되지 아니하여 향리에서 칭송을 받았다. 그의 아호인 ‘대우(大愚)’는 ‘크게 어리석어라’라는 뜻으로 스스로 어리석음을 자처함으로써 상대방의 경계심을 없애고자 한다는 것이다. 인품이 깔끔하고 여러 선비들과 사귀기를 즐겨하던 그는 조상의 정신을 묵묵히 지키며 살다가 아들을 얻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벼슬을 향한 허망한 꿈
최세린의 동생 최세구는 순조 때 태어나 서른두 살에 생원시에 급제했으나 마찬가지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지극히 따르던 형이 죽자 그는 애통함과 외로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가문이 쇠퇴함을 몹시 개탄했다고 한다. 이 형제와 교유하던 많은 사람들은 그의 인품과 학문을 아끼며 벼슬 길에 나가도록 권유했다. 그래서 그는 현종 무신년에 유지를 이루고자 한성에 올라갔으나 입경한 지 불과 이틀 만에 우연히 병을 얻어 갑자기 죽었으니 그의 나이 겨우 마흔이었다. 이것을 조상 대대로 받은 “진사는 하되, 벼슬은 하지 말라.”는 가훈을 잊고 벼슬에 욕심을 낸 탓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의 아들 만희는 최세린의 집에 양자로 들어갔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열세 번째 비밀 - 덕을 베풀고 몸으로 실천한다
최만희의 아들인 최현식은 철종 때 태어났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에 아버지를 여의고 젊은 나이에 집안 일을 맡았지만 홀로 된 어머니께 정성을 다했고, 과객들을 한결같이 너그러이 대했으며, 남의 급한 일을 구제하되 보답을 바라지 않았다. 고종 때 동생과 함께 진사시에 나란히 급제했고, 5년 뒤 경릉 참봉으로 직무를 수행하다 어버이를 섬길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핑계하고 사직하여 돌아왔다.
이듬해인 1894년에 동학 혁명이 일어나자 삼남 지방은 온통 난리에 휩싸이게 되었다. 경주 지방에서는 구물천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활빈당 두목이 되어 흥분한 농민들을 모아 이리저리 떼 지어 다니며 불을 지르고 약탈과 살인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재물을 빼앗아 일부는 사취하고 일부는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며 의적을 자처했다. 경주 영문을 단숨에 점령한 그들은 창고를 열고 쌀가마니를 헐어서 몰려온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고 군데군데 불을 질렀다. 그때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교리로 가자! 최 부잣집으로 가자!” 경주 관아를 점령하고 무기까지 손에 넣은 그들은 사기가 충천했다.
폭도들은 다짜고짜 사마소에 불을 당겼다. 사마소는 최 부자의 서고로 쓰이면서 이따금씩 인근의 선비들이 모여 시회를 여는 곳이었다. 이때 최 부잣집 소작인들과 하인들이 나서며 말했다. “도대체 이 댁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런 일을 벌이시오? 최 부자 덕분에 우리 모두 목숨을 부지하고 있소.” “썩 비키지 않으면 모조리 죽이겠소. 부자 치고 도둑놈 아닌 자가 어디 있겠소.” “여기서 사방 백 리 안에 사는 사람 치고 흉년에 최 부잣집에서 도움 받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시오.” 모여 있는 이들이 하나같이 이에 동조하자 폭도들은 다소 동요되는 듯했다. 그때 진사 최현식이 앞으로 나섰다. “죄가 있다면 사람에게 있지, 집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내게 죄가 있다면 나를 벌하고 집은 불태우지 마시오. 그렇지 않거든 조용히 물러가시오.”
최 부잣집 하인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80여 명의 불청객 손님들을 접대하기 위해 마당에 멍석을 깔고 상을 내오기 시작했다. 굶주린 농민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학 혁명이나 활빈당 등의 난리 와중에도 최 부잣집은 불타지 않고 온전히 재물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선대 때부터 아랫사람이나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어 온 덕 때문이라 할 것이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열네 번째 비밀 - 2등을 위해 1등만큼 노력한다
어느 날 최현식은 자식을 모두 불러 말했다. “경술년 이후 이제 국권이 완전히 상실되었으니 슬프기 그지없다. 나라가 없어진 판국에 사사로운 재물이 무슨 소용이며 그 재물인들 보전할 수 있겠느냐. 우리 가문에서는 일찍이 의를 존중해 왔다. 그러니 우리 가문이 나아갈 길은 그 첫째가 의니라. 그러므로 무엇이 의인지를 신중히 찾고 그 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할 것이니라. 일찍이 우리 가문의 선조가 진사는 하되 벼슬을 하지 말라고 한 것도 바로 욕심을 버리고 정쟁에 휘말리지 말라는 뜻이었느니라. 어느 정파이건 그 주장하는 바를 들으면 옳은 바가 있으나 반대 정파의 주장을 들으면 그 속에도 역시 일리가 있으니 완벽한 한 가지는 없느니라. 그러니 좌우에 치우침이 없이 바른 쪽으로만 가는 것이 정도이고 또한 그것이 중용의 도가 아니겠느냐. 중도의 길이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때로는 우유부단하고 줏대 없다는 말도 들을 것이고, 때로는 기회주의자라고 비웃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반의 체통을 세우며 오늘과 같은 재물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버리는 것도 있어야 한다. 오죽하면 조부의 호가 대우였고, 나의 호가 둔차(鈍次)이겠느냐.”
최현식의 호가 둔차(鈍次)라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등보다는 2등’,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고 버금감’은 하나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1등주의’가 팽배해 있다. 특히 국경 없는 글로벌 시대에는 ‘세계 1등’만이 시장을 선점하고 우뚝 설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1등이란 그야말로 하나뿐이다. 1등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을 불만 속에서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다. 또한 1등을 했더라도 만족은 잠시뿐 바로 그 순간부터 끝없는 도전에 시달리게 된다. 그에 비해 2등은 이러한 것들을 적게 받기에 유복하다. 그러나 2등도 결코 쉽지는 않다. 1등에 버금가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2등을 하라.’는 말은 ‘노력을 적당히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1등이 못되어도 만족하라.’는 의미다. 이것은 최씨 가문에서 추구하는 적정 만족의 원리와 상통한다. 스스로 만족하며 겸양할 때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생기고 함께 사는 정신도 생기는 것이다.
4. 가치 있는 일을 위해 300년 부를 버리다
마지막 부자, 최준
마지막 최 부자 최준은 19세기가 저물고 한 시대가 변화하는 큰 물결 속에서 태어나 변혁의 격랑에 휘말리게 된다. 최준에게 있어서 최익현을 비롯한 여러 유지들의 영향은 시대의 전환점에서는 오히려 역류하는 수구의 저항이 될 수도 있었다. 최준의 가문에서는 그때 이미 300년에 가까운 전통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세기가 바뀌고 한 왕조가 바뀌는 시대적 흐름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상황을 이끌고 가지 못했다.
전 재산을 바칠 필생의 사업을 찾은 마지막 최 부자
최준이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자형인 박상진이 찾아왔다. 최준이 불만을 토로하자 박상진이 말했다. “자네는 틈이 날 때마다 『중용』을 읽게. 『중용』에 보면 ‘하늘이 물(物)을 살아가게 함은 반드시 그 재질에 따라 돈독히 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온갖 생명체가 각기 어우러져 살아가며 조화를 이루는 것이지. 자네는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갖고 있지 않은가. 설사 이름이 숨겨지면 어떤가. 자신에게 떳떳하고 부모에 떳떳하고 나라에 부끄럼이 없으면 그것으로 할 일을 다한 것이네.” 그날 이후 최준의 서궤에는 언제나 『중용』이 놓여 있었다.
한일합방으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어느 날 안희제라는 젊은이가 최준을 찾아왔다. 최준은 그를 만나면서 그가 예사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했다. 안희제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행동으로 옮기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부산에서 제일 번창한 중앙동에 백산상회라는 상리 기관을 만들었다. 농산물이나 면포, 해산물 등을 수집하여 상업을 하면서 국내외로 여러 애국지사들과 연락할 수 있는 구심점을 만들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규모의 개인 상회였으므로 이내 한계를 느껴 영남 일원의 민족 자본가들을 규합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최준을 찾아왔던 것이다.
1915년 이들은 박상진을 중심으로 비밀 결사 조직인 광복회를 만들고 지하 투쟁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일본 헌병 경찰 조직에 의해 37명이 체포되었고 박상진은 끝내 순국했다. 최준이 의욕을 잃고 한숨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서울에서 또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인촌 김성수였다. 김성수는 박상진, 안희제와 더불어 최준의 인생 행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박상진이 혁명가이고 안희제가 창업가라면 김성수는 둘을 절묘하게 조화한 실천가라 할 수 있다. 김성수가 최준을 찾은 것은 경성 방직과 「동아일보」에 지방의 유력 인사를 참여하도록 권유하기 위함이었는데, 1년 후 계획대로 경방이 창립되었고 최준도 창립 발기인이 되었다. 당시 우국지사들의 공통된 생각은 해방을 위해 교육 사업과 물산 장려 사업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준이 교육 사업이야말로 필생의 사업이라 믿고 꾸준히 때를 기다리며 다짐을 하게 된 데는 안희제나 김성수와 교류하면서 함께 느낀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독립 운동의 경제적 기반, 백산상회
1919년 5월 백산상회는 자본금 100만 원의 주식회사로 개편하고 명칭도 백산 무역 주식회사로 개칭했다. 자본금 면에서 당시 최대의 규모였으며, 신용 면에서나 거래 면에서 일본 회사를 능가하는 위치에 있었다. 창립 후 활동 지역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이익금의 대부분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회사의 수지는 항상 결손을 면하지 못했다. 안희제는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더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사업을 찾아 떠났고, 또다시 다른 사업을 성사시켰다. 관리하고 수성하는 일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반면 사업을 지키는 것은 최준의 몫이었다. 안희제가 떠난 자리에는 언제나 최준이 있었다. 안희제는 과묵하고 신중한 최준을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있었다. 최준의 가문이 여러 대에 걸쳐 부를 유지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었다.
3.1 만세 운동이 있은 후 백성들은 너무나 들떠 있었다. 게다가 기미년에는 흉년이 들어 수확이 평년의 절반에도 못 미치자 전에 없던 도굴꾼들이 설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경주 지식인들의 권유로 최준은 도굴된 유물들을 사 모으는 일을 시작했으며, 1921년 겨울에는 대구의 종로통에 집을 한 채 사서 세간의 일부를 옮겨 이거했다. 이즈음 최준의 대구 집으로 네 명의 일본 헌병이 들이닥쳤다. 안희제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백산상회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 자주 조사 명목으로 불러 대자 자연히 사업은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공주 헌병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돌아온 후 최준은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최 부잣집이 망했다!”
마침내 백산 무역 주식회사는 창업 14년 만인 1927년에 해산되었고 담보를 넣은 최준은 110만 원이란 엄청난 부채를 떠안은 채 문을 닫게 되었다. ‘최 부자가 망했다.’는 소문은 어느덧 의친왕 이강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식산 은행 총재 아리가를 만난 의친왕은 걱정스럽게 말했다. “최씨 집안 하나가 망하는 거야 큰 문제가 아니겠지만 이 일로 총독부가 욕을 먹고 국민 총화에 금이 갈까 걱정됩니다. 다른 지주들 같으면 소작인들에게 소작료를 더 많이 부과하여 부채를 금방 갚겠지만, 그 집에서는 올해에도 흉년이 들자 관에서 못하는 기아자 구휼에 많은 재산을 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소.” 그 또한 한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300년 가문의 마지막 부자를 보며 동병상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최준의 논밭이나 집 등 부동산 문서는 물론이고 가구나 집기에도 몽땅 딱지가 붙은 지 열흘 후 식산 은행의 아리가로부터 즉시 그에게 찾아오라는 통지가 왔다. 아리가 미츠도요는 경제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가진 한편 문화적 소양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사이토 각하의 뜻에 따라 우리 은행에 진 최 선생의 부채가 모두 80만 원 중 40만 원을 탕감해 주겠습니다. 나머지 40만 원은 천천히 갚도록 하십시오.” 이것으로 최준의 부채는 일단락되었다. 최준은 아리가의 이러한 호의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훗날 해방이 된 후 손자 최염에게만 말했을 뿐이다.
‘이대도강’의 교훈
안희제는 경무청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죽고, 김성수가 새로운 교육사업 건으로 매년 경주의 최준을 방문하던 1933년 5월, 경주 교동 최준의 집에 아리가가 찾아왔다. 그는 함경도 회령에서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방방곡곡을 다니며 조선의 풍속과 문화를 체험하던 중이었다. 비록 최준이 일본 사람을 싫어하기는 했지만 아리가는 남달랐다. 그에게는 인간적인 따스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아리가에게 최준은 단순한 조선의 부자가 아니라 전통과 기품이 있고 철학이 있는 집안이며 이웃을 사랑하고 자족할 줄 아는 부자였다. 최준과 아리가는 어느새 서로 마음속 깊이 외경하는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다음 해 12월 아리가는 다시 한 번 최준의 집을 방문했다. 총독부에서 차기의 학무국장으로 최준을 적임자로 생각하고 추천하고자 한 것이다. 최준은 아리가로부터 받았던 특혜를 후회했다. 그는 철저하게 어리석고 둔한 듯 행동했다. 최준은 협상을 할 때 결코 먼저 결론을 짓지 않고 지루할 정도로 기다렸다. 이 참을성이야말로 최준의 장기 중의 하나였다. 참고 기다리면 상대편에서 자신의 답을 미리 말해 주기 때문이다. 아리가는 최준의 끈기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는 최준의 마음을 읽은 듯했다. 일본의 지배가 굳어져 가는 마당이라 일본에 붙어서 벼슬을 하고 싶어 하는 조선인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런 상황에서 굴러 들어온 벼슬을 냉정하게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음을 아리가는 잘 알고 있었기에 한편으로는 섭섭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존경하는 마음이 다시 일었다.
그러나 1년 후 아리가가 다시 찾아왔다. “내년부터 시작되는 제6대 중추원에 최 선생을 참의로 모시고자 합니다.” 최준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지 못했다. 최준이 동생 최윤과 머리를 짜낸 결론은 문중 회의를 열어보자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형님은 그 일을 맡을 수 없고, 그렇다고 총독부의 제안을 거듭 거절할 수도 없으니, 형님 대신 제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온 국민이 다 욕한다 해도 감내하겠습니다. 형님, 혹시 ‘이대도강(李代桃僵)’이란 말을 아시는지요? 복숭아나무 대신 자두나무가 쓰러진다는 뜻입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복숭아나무에 병충해가 심해서 그 옆에 자두나무를 자라게 하여 대신 쓰러지게 해서 복숭아나무를 보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생 최윤이 중추원 89명의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300년 동안 모은 재산으로 학교를 세우다
광복을 맞으면서 최준은 그토록 꿈꾸어 온 인생의 목표를 이루려 했다. 그것은 독립된 나라에서 대학을 설립하여 국가를 이끌고 갈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최준은 이제까지 품어 온 꿈을 실행하기 위해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이제 예순을 넘긴 최준은 매일같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학교 설립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 작업으로 숨 돌릴 여유조차 없었다.
어느 날 최준의 집에 한 청년이 방문하여 김구 선생이 만나고자 한다는 전갈을 전했다. 김구 선생은 암울하던 시기에 묵묵히 임시 정부에 자금을 보내준 숨은 애국자 최준을 찾았던 것이다. “최 선생, 귀국하면 가장 먼저 만나고 싶었습니다.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임시 정부에 독립 운동 자금을 보내 주신 공로야말로 우리 동포 모두가 우러러볼 것입니다. 이것을 좀 보십시오. 상해 임시 정부에서 자금을 조달해 준 사람들과 그 내역을 기록한 것입니다.” 최준은 그 장부를 조심스럽게 들춰보았다. 백산 무역 주식회사를 청산할 때까지 상해로 보낸 돈과 장부에 기록된 금액이 정확히 일치했다. 감회에 젖어 있을 때, 김구는 최준에게 정치를 할 마음이 있는지 물었다. “저는 오래 전부터 교육에 뜻이 있었기에 해방을 맞아 우리 지역에 종합대학교를 설립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앞으로 내가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도울 것입니다.”
1950년, 드디어 대구 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되었다. 그때 최준이 기부한 현금은 40만 원이었고 장서가 약 만 권 정도가 되었는데 그 중에서는 국보급의 귀중한 도서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 도서들은 현재 영남대학교 중앙 도서관에 그의 호를 따서 문파 문고로 보존되고 있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열다섯 번째 비밀 -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기쁘게 버린다
일제시대 때 중추원의 참의직을 맡았던 동생 최윤이 반민특위에 끌려가고 정치판에 뛰어들었던 막내 동생 최순은 반대파에게 저격당해 허망하게 목숨을 잃는 역경에서도 최준은 대학 설립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최준이 그의 전 재산을 교육 사업에 바친 것은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300년 만석꾼 집안도 자녀들을 철저하게 교육한 덕분에 그 많은 재산을 지킬 수 있었다. 학문을 게을리 했다면 무식한 부자가 몇 대를 버틸 수 있었겠는가. 최준이 대학에 쏟은 정성과 애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자 정치적 격변에 따라 대학도 양적, 질적으로 발전해야 할 때였다. 최준은 재력 있는 새 이사장을 물색하기 위해 삼성 그룹의 회장실을 찾았다. 이병철 회장은 안희제의 고향 후배로 최준과도 인사가 있었기에 학교를 맡아 줄 것을 요청했다. 이병철이 새로 이사장에 취임하자 학교 발전을 기대하고 있던 학생들은 물론 지역민들이 크게 반가워했다. 그러나 삼성의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세찬 여론의 비난에 못 이겨 이병철 회장은 모든 활동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대구의 양대 사립 대학이 존폐 위기에 처하자 대구 대학과 청구 대학을 박대통령이 직접 맡기로 했고, 그 후 통합되어 오늘날의 영남 대학교가 탄생했다. 최준의 나이는 이미 여든넷의 고령이었다. 그는 통합 후 잠시 이사직을 맡다가 이내 손을 뗐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끝났다.” 통합된 대학교가 발전하는 모습을 본 그는 이 한마디로 아무 미련 없이 손을 털었다.
에필로그 - 300년 만에 지는 노을
원고를 마쳤을 무렵, 나는 최준의 손자 최염 선생과 함께 경주 내남면 월산리에 있는 마지막 경주 최 부자인 최준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나는 비석에 적힌 비문을 찬찬히 읽어 갔다. “아! 공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났다. 충효는 가문의 전통이었으며 시와 예는 가정의 교훈을 받았도다. 마침 좋지 못한 때를 만났으니 인간이 어떠한 세상이었던가. 화려한 꽃방석이 나의 뜻에 즐거움이 아니었네. 곤궁한 데 은덕을 입혔으며 춥고 굶주림에 온정을 베풀었다. 인재를 가르치려고 학교를 설립했고 독립군을 도우려고 해외로 밀파했다. 저들이 무력으로 위협하면 나는 정의로 대항했다. 참된 마음 흰머리로 나라를 위하였고 공중 위함뿐이었다. 천명이 이미 회복되었으나 어두운 구름 아직 끼었으니 공의 넋은 비록 감췄으나 공의 눈은 오히려 보고 있으리. 평생 살펴보면 우러러보나 굽어보나 부끄러움이 없었도다. 여러 사람 입을 모아 대대로 전해 가며 정무공의 현명한 자손이라 다 같이 칭송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