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역과 살을 맞댄 민감한 흑해 상공에서 미국 무인기가 러시아 전투기와 대치하는 과정에서 추락했다. 미국은 자국 무인기가 러시아 전투기와 충돌하는 과정에서 추락했다고 밝혔지만, 러시아는 스스로 중심을 잃었다고 반박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직접 충돌을 피하고 있는 두 강대국의 ‘보이지 않는’ 처절한 힘겨루기가 수면 위로 드러난 모습이다.
미국 MQ-9 무인기. 미 공군 제공© 제공: 한겨레 제임스 해커 미 유럽·아프리카 공군 사령관은 14일(현지시각) 성명을 내어 “러시아 수호이(Su-27) 2대가 흑해의 국제공역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미군 무인 정찰기 엠큐(MQ)-9를 상대로 안전하지 않고 전문적이지 않은 가로막기에 나섰다. 중부유럽 시각으로 아침 7시3분께 이 가운데 1대가 엠큐-9의 프로펠러와 충돌해, 결국 이 무인기가 국제수역에 추락했다”고 밝혔다. 이어 “충돌이 일어나기 전에 수호이-27이 여러 차례 엠큐-9에 연료를 뿌리고, 무모하고 환경적으로 볼 때 부적절하며 전문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앞서 비행했다”고 비난했다. 존 커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전략소통조정관도 최근 몇주 동안 러시아 군용기의 유사한 “가로막기”들이 있었다면서, 러시아가 “불안하고 비전문적”이라고 비난했다. ‘리퍼’라 불리는 엠큐-9는 정찰뿐만 아니라 공격 임무도 수행하는 미군의 주력 무인기로, 동아시아엔 지난해 11월 일본 가고시마 가노야 항공기지에 배치됐다.
러시아 국방부도 이날 입장문을 내어 반박에 나섰다. 이들은 “러시아 방공 시스템이 미 무인기가 크림반도 주변의 흑해 해상에서 러시아의 영토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추적해냈다. 특별군사작전을 위해 설정된 임시적인 항공 규정상의 영역을 침범해 근무 중이던 전투기가 긴급발진을 했다. 모스크바 시각 오전 9시30분께(중부유럽 시각 오전 7시30분) 이뤄진 긴급기동의 결과 무인기가 고도를 잃고 바다에 충돌했다”고 밝혔다. 러시아 국방부는 또 “러시아 전투기는 장착된 무기를 사용하거나 무인기와 접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날 사건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직접 충돌을 피해온 미국과 러시아가 흑해에서 치열한 정보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확인됐다. 지난해 2월 말 전쟁이 시작된 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무기뿐 아니라 민감한 군사 정보를 제공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크라이나군이 지난해 4월 중순 러시아 흑해 함대의 기함인 모스크바함을 미사일로 격침할 수 있었던 것도 미군의 정보 제공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는 이날 엠큐-9가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드니프로강 서안의 도시와 마을을 폭격하자 이를 정찰하려고 출동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러시아군이 이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미 무인기가 추락한 셈이다. 우려되는 것은 미·러 군당국 사이에 서로의 오판을 막기 위한 ‘핫라인’이 가동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 국방부에 따르면, 이번 사태는 약 30~40분 동안 진행됐다. 패트릭 라이더 미 국방부 대변인은 이 시간 동안 양국 군 사이에 직접적인 의사소통은 없었다고 밝혔다. 해커 사령관은 한발 나아가 이날 사건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동맹국은 앞으로도 국제공역을 비행할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러시아가 이번과 같이 다시 거칠게 반응하면 충돌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양국은 일단 사태 확산을 막기 위해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하지만 지난 2월 초 중국 민간 기구(풍선) 사태처럼 미국이 과잉 대응하면 다시 한번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수 있다. 미 국무부는 일단 아나톨리 안토노프 주미 러시아 대사를 불러 항의했다. 안토노프 대사는 러시아는 이 사건을 “도발”로 보고 있다면서도 “미국과 대결”은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