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5:1~8)
본문은 심판 때의 마지막 재앙을 묘사한다.
마지막에는 진노의 심판이
하나님을 향한 영광의 노래로 둘러싸여 있다.
하나님을 향한 노래가 이전에는
악한 이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빌미가 되었었다.
마지막에는 상황이 역전된다.
지난 주 목장 모임에서 윤석열을 두둔하였던,
그래서 내가 교제 중간에 나올 수밖에 없게 하였던
목자가 오늘 페북에서 어떤 목사의
윤석열의 계엄과 내란을 정당화하고 그를 찬양하는
설교를 올렸다.
그와의 페친을 끊었다.
다음은 오늘 묵상에세이 글 중 일부이다.
'세르비아계 사람들이
이스람교도와 크로아티아계 사람들에 대한
인종 청소를 자행했습니다.
그 외에도 코소보 사태, 캄보디아 킬링필드,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인 학살, 수단 내전, 르완다 내전,
미얀마의 로힝야족 학살 등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인간이, 같은 인간을 이처럼
대규모로 끔찍하게 해칠 수 있을까요?
이는 사탄이 권세를 잡고 있는 세상의 특징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헤롯이 2세 이하의 남자아이를 다 죽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이 헤롯의 머리 속에 넣어 준 잔인무도한 계략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어떤 계획을 실행하든,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상황은 반전됩니다.
에스더서에 보면 하만이 모든 유대인을 도륙하고 진멸하고자 했지만,
결국 그는 자신이 준비한 나무에 자기가 매달린 형국에 처합니다.
허늘을 찌를 듯했던 권력이 무상하게도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이기는 성도 / 이규현- 중에서
헌법을 대놓고 유린하면서
많은 대중이 살상 당할 수 있고
강제로 자유와 인권을 말살 당할 수 있는 일을 두둔할 수가 있는가?
우선 철저히 분리되고 죗가를 물어야 할 대상을
정반대로 찬양할 수 있는가?
거기에 조종 당하는 사람들,
특히 기독교라는 신앙으로 거룩함을 외적으로 장착한 이들이
실제로는 악을 추종하고 무고한 사람의 기본적인 생존과
인권의 외침을 역행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아픈 시절이다.
성질 같아서는 하나님의 마지막 재앙처럼
모든 것을 극명하게 드러내놓고 철저히 응징을 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싶지만,
존재에 대한 끝없는 존중.... 거기에 마음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다.
그들이 생을 마칠 때까지
그런 생각과 매임에서 벗어나길.
<오늘의 명언>
예수님의 최종 승리를 함께 누리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에게
주어지는 고귀한 특권이다. -이동원
"하나님! 너무 자명한 것에 너무 극명한 대치를 하게 되니
저 자신을 의심하게 됩니다. 저들이 사로잡힌 얼토당토한 모습이
혹시 저의 모습이 아닙니까? 물론 악에 대항하는 과도한 열정이
또 다른 악의 유혹이 될 수 있어 경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양심과 상식에 비추어
단 0.1도 이해되지 않는 이 상황에서
순수한 역정과 분을 표현하는 것이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인격이 아닙니까?
하나님! 사랑합니다. 이 모든 것을 선하게 해결해 주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저를 통제해 주십시오. 선량하게 통제해 주십시오.
오늘 하나님의 순리대로 윤석열을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해 주십시오.
존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을 허락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라면 한 그릇 빨리 먹고 여의도로 가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