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2부 31
궂은 날이었고, 오전 내내 비가 내렸다. 환자들은 우산을 든 채 회랑에 잔뜩 운집해 있었다.
키티는 엄마와 모스끄바 육군 대령과 함께 걷고 있었다. 새로 구입한 프랑크푸르트산(産) 프록코트를 입은 육군 대령은 유럽식으로 한껏 멋을 내고 신이 났는지 들든 모습이었다. 그들은 회랑의 한켠으로만 걸으며 반대편으로 걷고 있는 니꼴라이 레빈을 피하려 애섰다. 바렌까는 어두운색 드레스 차림에 챙이 넓은 검은색 모자를 쓰고서 눈이 먼 프랑스 여인과 함께 회랑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오가며 키티와 마주칠 때마다 다정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엄마, 저분과 얘기를 좀 해봐도 될까요?” 키티가 말했다. 미지의 친구를 주시하던 중 그녀가 샘터 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는 샘터에서 만나면 되겠다고 생각한 참이었다.
“그래, 정 원한다면 내가 먼저 저 여자에 대해 알아본 다음 얘길 걸어보마.” 엄마가 대답했다.
“대체 저 여자한테 뭐 그리 특별한 게 있다는 거냐? 틀림없이 그저 하녀에 지나지 않을 텐데. 그렇게 소원이라니 마담 슈탈과 얘기를 해보마. 그분의 bell-soeur(시누이)가 나랑 아는 사이니까.”
공작 부인이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세우며 덧붙였다.
마담 슈탈이 자신과 알고 지내기를 피하려 드는 눈치에 공작 부인의 자존심이 상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키티는 엄마에게 굳이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놀라워라, 어쩜 저렇게 사랑스러울까!” 그녀가 바렌까를 바라보며 말했다. 바렌까는 프랑스 여인에게 컵을 건네고 있었다.
“저것 좀 보세요. 모든 게 얼마나 소박하고 상냥한지 몰라요.”
“너의 engousement(열광)에 내가 아주 못살겠다.” 공작 부인이 대꾸했다.
“아니다, 도로 되돌아가는 게 낫겠어.”
니꼴라이 레빈과 그의 여자, 그리고 독일 의사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공작 부인이 덧붙였다. 니꼴라이와 의사는 서로에게 언성을 높이며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그들이 온 길로 되돌아가려고 몸을 돌렸을 때, 별안간 큰 소리를 넘어 아예 고함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니꼴라이 레빈이 멈춰 선 채 마구 호통을 치고 있었고 의사 역시 격분하여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들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공작 부인과 키티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지만, 육군 대령은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사람들 속으로 끼어들었다.
몇 분 뒤 육군 대령이 모녀를 뒤따라왔다.
“무슨 일이래요?” 공작 부인이 물었다.
“그야말로 수치스럽기 짝이 없군요.” 육군 대령이 대답했다.
“꼭 한 가지 피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바로 해외에서 저런 러시아인들과 마주치는 겁니다. 저 키 큰 사람이 의사더러 자신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는다며 온갖 상스러운 욕을 퍼붓고 지팡이를 휘두르기까지 했다지 뭡니까. 치욕스러울 따름이죠!”
“에구머니, 별 흉한 꼴을 다 보겠네!” 공작 부인이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끝이 났나요?”
“고맙게도 그…….저기, 그 버섯 모양 모자를 쓴 아가씨가 중재를 하더군요. 아마도 러시아 여자인가 봅니다.” 육군 대령이 말했다.
“마드무아젤 바렌까요?” 키티가 반색하여 물었다.
“네, 네. 그녀가 제일 먼저 나서서 저 신사의 팔짱을 끼고 데리고 가더라고요.”
“그것 보세요. 엄마. “ 키티가 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그런데도 내가 그녀를 보며 감탄한다고 이상하게 여기시니 말이에요.”
다음 날 키티는 온천장에서 미지의 친구를 관찰하다가, 그녀가 니꼴라이 레빈과 그의 여자를 자신의 다른 proteges(피보호자들)와 똑같이 대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대화를 나누었고, 외국어라고는 하나도 구사할 줄 모르는 그 여자를 위해서 통역사 노릇까지 해주었다.
키티는 이제 엄마에게 바렌까와 사귀는 걸 허락해 달라고 더욱더 졸라대기 시작했다. 공작 부인은 왠지 잘난 척을 하려 드는 마담 슈탈과 사귀고 싶어 먼저 나서는 것처럼 보일까 봐 내심 불쾌해하면서도, 바렌까에 관해 뒷조사를 해보았다. 그녀에 대해 상세히 알아낸 뒤 그녀는 좋을 건 별로 없지만 나쁠 것도 전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그녀는 바렌까와 인사를 나누기 위해 직접 접근하기로 했다.
딸아이가 샘터로 가고 바렌까는 빵집 건너편에 있는 틈을 타 공작 부인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우리 서로 알고 지내요.” 그녀가 특유의 품위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딸아이가 아가씨한테 흠뻑 빠졌지 뭐예요.”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누군지 모를 테죠. 나는……”
“저 역시 그렇다뿐이겠습니까, 공작 부인.” 바렌까가 황급히 대답했다.
“어제 우리의 불쌍한 동향인에게 너무나도 선량한 일을 베풀었더군요!” 공작 부인이 말했다.
바렌까의 얼굴이 빨개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걸요.”
“무슨 소리예요, 당신이 그 레빈이라는 사람을 곤경에서 구해 줬잖아요.”
“네, sa compagne(동행인)가 저를 부르시길래 그분을 진정시키려고 애써 보았어요. 그분은 병환이 심하신 데다 의사에게 불만이 많으셨죠. 저는 바로 그런 환자분들을 돌보는 데 익숙하거든요.”
“그렇군요. 듣기로는 숙모님과 망통에서 살고 있다면서요. 마담 슈탈이라는 분이죠, 아마? 나는 그분의 belle-soeur(시누이)와 잘 아는 사이랍니다.”
“아뇨, 그분은 저의 숙모님이 아니세요. 그분을 maman(엄마)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저는 그분의 혈육이 아니랍니다.” 바렌까가 또다시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하는 말이 참 소박하고 진솔한 얼굴 표정도 사랑스러운 게, 공작 부인은 키티가 왜 바렌까에게 반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 그 니꼴라이 레빈이란 사람은 좀 어떤가요?” 공작 부인이 물었다.
“그분은 곧 떠나실 거예요.” 바렌까가 대답했다.
바로 그때 키티가 샘터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엄마가 자신의 미지의 친구와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자 그녀의 얼굴은 기쁨으로 환하게 빛났다.
“자, 키티, 네가 그토록 열렬히 사귀고 싶어 했던 그 마드무아젤…….”
“바렌까입니다.” 바렌까가 미소 지으며 대신해서 말을 맺었다.
“모두들 저를 그렇게 부르죠.”
기쁨으로 얼굴이 발그레해진 키티는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새 친구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친구도 아무런 대꾸도 않은 채 그저 가만히 그녀의 손에 자기 손을 맡겼다. 키티의 악수에 호응은 하지 않았지만, 커다랗고 아름다운 이를 드러낸 마드무아젤 바렌가의 얼굴은 약간 슬픈 듯하면서도 조용하고 기쁨 어린 미소로 빛나고 있었다.
“저야말로 이렇게 되기를 오래전부터 원했답니다.”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너무 바쁘셔서……”
“아이, 아니에요, 바쁠 건 전혀 없는걸요.” 이렇게 대답했지만,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새로운 친구들을 남겨 두고 가봐야만 했다. 어느 환자의 두 딸인 러시아 꼬마 소녀들이 그녀에게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바렌까, 엄마가 불러요!” 아이들이 소리쳤다.
그러자 바렌까는 그들을 따라나섰다.